[야곱의 사다리]

 

빵기네집 이야기

 


“우린 하느님께 좋은 아이들을 배급받았어요”

  엄마, 난 어디서 왔어? 엄만 어디서 날 데려온거야?” 

   아기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울음 반 웃음 반으로 아기를 가슴에 꼬옥 안으며

   대답했습니다.

  아가야, 너는 내 가슴 속에 동경처럼 숨어 있었단다.
   너는 내 어릴 적 장난감 인형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진흙으로 아침마다 신의 모습을 빚을 적에 너를

   빚었다 부셨다 하였단다.
  너는 우리집 수호신과 함께 모셨고 그 신을 모신 데서

   내 너를 모셨단다.
  온갖 내 희망과 사랑 속에, 내 생명과 내 어머니 생명 속에

  네가 살아왔다. 

  처녀가 되어 내 가슴이 꽃잎을 열 때에 너는 그 주위에

  향기와도 같이 떠돌아다녔다.
  너의 다정한 아치가 내 젊은 사지에서 꽃피었고...
  너는 누리의 생명의 흐름 밑에 떠 있다가 마침내는

  내 가슴의 암초에 걸린 것이었다.
       (타골의 「초승달」에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타골의 이 시를 앞질러, 우리 모두가 ‘아담의 몸 속에’ 씨앗처럼 숨어 있었다는 아름다운 신학적 풀이를 내놓았다. 나에게 지금 있는 아이가 내 몸에서 태어날 확률을 누군가 10의 -28승으로 계산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한반도에서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맺어질 확률, 사랑을 나눌 확률, 사정된 정자가 난자를 수정시킬 확률, 그리고 유산을 피해서 출산될 확률을 합산하였다나? 위대한 교부 오리게네스의 부친 레오니다스는 셉티무스 황제 박해 때에 순교한 분인데 어린아기 오리게네스 가슴에 입을 맞추며 그 가슴에 계시는 성령께 흠숭의 예를 올리곤 하였다고 한다.

성령으로 감싸여 그리스도를 잉태하시던 마리아의 황홀한 신비경이 어머니가 된 모든 여인들에게도 영혼의 무의식층에 신성한 체험으로 나타나리라는 것이 내 신념이고, 그 체험이 태몽으로 기억된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큰애는 커다란 잉어로 엄마 품에 안겨왔고 작은애를 가질 적에는 끝없이 피어있던 들꽃을 보았으므로 장모님은 아내에게 둘 다 딸일 것이라고 풀이해주셨다.

내가 어려서 못된짓을 할 적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시던 어머니의 원망을 들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하느님이 좋은 아이들을 배급해주셨다. 모래내 반지하셋방에서 살 적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온 가족이 죽을 뻔하다 빵기가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일이 두 번이나 있어 친척들이 아이한테 ‘가스 경보기’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부모 자식간에 서로 목숨을 신세진 셈이다.


“사랑의 오각형”

우리집 문패에는 「성염, 전순란, 빵기, 빵고」 넷이 나란히 적혀 있어 “왜 이름이 빵기예요?”라는 물음을 자주 받는다. 두 아이는 「빵과 포도주의 말세리노」의 주제곡을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다. 큰애 세례명이 마르첼리노인데 어렷을 적에 살레시오 신부님들이 스페인어로 붙여주시던 ‘빵과 포도주’(pan y vino)를 아이가 ‘빵기’라고 따라한데서 유래하지만 우린 그냥 “애가 빵을 좋아해서요”라고 대답한다. 아우는 돌림자로 ‘빵고’가 되었고 딸아기가 태어나면 ‘빵끗’이라고 붙여주기로 했지만 여식이 귀한 집안이라 태어나지 않았다.

다섯 살 터울의 형제는 강아지들마냥 서로 부등켜안고 딩굴며 자랐다. 형은 ‘이쁜 내 새끼’라며 아우에게 귀찮게 뽀뽀를 해대는 ‘뽀뽀귀신’이었고 통통한 아우는 형에게 ‘포도’로 불리웠는데 요즘은 말라서 스물 네 살짜리 ‘건포도’가 되었다.

식구들이 물활론자들이어서 헌 학용품, 헌 가구, 헌 전자제품, 헌 자전거가 골목에 버려져 영영 쓰레기장으로 가는 게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주워다 고치거나 A/S받아 사용하는 게 몸에 배어선지 아이들도 남이 쓰던 헌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빵기네에요? 여기 뭐가 버려져 있는데 쓰실 데 없어요?” 집에 간간이 걸려오는 동네 전화여서 방방이 놓인 가구나 도구는 제각기 성이 다르다. 아주 어렷을 적 빵기의 꿈은 ‘씨통아저씨’(넝마주이)가 되는 것이었다.

골목에서 얻어맏고 울고 오는 아이에게 “너도 때려주지 그랬니?”라는 엄마의 꾸중에 "때리면 걔도 아프쟎아요?“라는 대꾸는 부모를 가르친다. 딸기 사오라는 심부름을 갖다오는 아이에게 꼬마 깡패가 모래를 봉지에 넣고서 딸기를 주물러 놓았다가 ‘빵기 아줌마’한테 붙잡혀 단단히 경을 친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아이의 기도는 이랬다. “하느님, (깡패)형이 울엄마한테 매맞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착한 형 되게 해주셔요.” 그리고 외할머니가 “부디 이 어린 생명들이 닭머리는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시는 기도에서 뭣이 거슬렸던지 두 아이는 “할머니, 그럼 꼬리는 누가 해요?”라고 묻기도 하였다. 그 뒤로 외할머니는 기도의 메뉴를 바꾸셨다. “엄마, 그 반찬 좀 많이 싸 주세요. 애들이 엄마 솜씨 최고래요.”라는 말에서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얘기가 정말로 들린다.

집에 불려와 음식을 얻어먹고서 자기 침대에서 곤히 자는 ‘거지 아저씨’를 보내고서 모자 사이에는 이런 말이 오간다. “네 침대 시트 갈아줄까?” “아저씨 정말 행복하게 자고 가셨쟎아요? 놔 두세요. 나도 아저씨처럼 곤히 잘거에요.” 가난하게 살며 재수를 하던 뒷집 누나들이 연탄불을 방안에 들여놓고서 죽어버렸다. 엄마가 누나들을 병원으로 실어가고 장례를 치르러 뛰어다니던 모습을 아이들은 기억한다. “이 책상 기분 나쁘지 않니? 죽은 누나가 쓰던 거라서?” “아냐요, 그 누나들이 못한 공부 내가 마저 할 게요.”

교황님이 가정을 ‘운명공동체’(Familiaris consortio: 요한 바오로 2세의 1981년 가정생활에 관한 회칙 이름)라고 하셨지만, 부모와 자식간에 주고받는 가치관은 영원한 운명까지 이어지는 게 틀림없다. 영원한 운명을 누릴 두 생명을 우리 품에 보내시면서 한없는 행복을 지참금처럼 얹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다 보면 ‘사랑하는 마음’, ‘주는 마음’이 자식들에게 건네진다는 가르침이다.

하느님, 부부 그리고 두 아들로 이루어진 사랑의 오각형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득한 은총을 누려왔는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최근에 읽은 마사 베크의 『아담을 기다리며』(녹색평론사 2002)라는 글에서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성경 다음으로 자주 읽는 타골의 시집(「초승달」 '축복'에서)에 잔잔한 공감을 느낀다.

 

  어린이를 당신 가슴에 안고 축복하여 주시오.
  그는 수많은 네거리가 있는 이 나라에 왔습니다.

  어린이가 어떻게 수많은 무리 속에서 당신을 골라 당신의

  집에 와서 손을 잡고      

  제 갈 길을 물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는 웃으며, 말도 하며, 당신을 따라가겠지요.

  마음 속에 의심하는 빛도 없이.

  그를 잘 맡아 지켜 주소서. 그를 곧장 인도하고 축복하소서....

[ 경향잡지 2002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