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하느님, 진지잡수세요


 

“참 멋진 기도”

박영환교수(한남대)가 대전주보에 실었던 토막글들을 모은 「하늘 사다리」(가톨릭출판사 2002)에 다섯살짜리 어린이가 식사전에 “하느님, 진지잡수세요”라고 말씀드렸다는 ‘참 멋진 기도’가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어른이 숫갈을 들기 전에는 밥을 먹지 않는 것이 우리네 밥상머리의 예의이지만, 미사중의 내 시선은 오롯이 제대위의 황금색 성작과 하이얀 빵에만 집중돼 있어서 어느 어른, 어느 교우가 몸이 불편하여 성찬의 밥상에 앉았는지 못 앉았는지는 안중에 없다. 내 장궤틀 바로 곁의 교우 얼굴에 드러나 있을 심란함이나 어려운 사정도 도통 관심이 없다. 영화관에서처럼 나는 제대와 사제의 손끝만 쳐다보지 옆사람은 도무지 바라보지 않도록 길들여 있는 까닭이리라.

이런 생각에 소스라쳐 놀라 「가톨릭성가」에 실린 성체성가(151-198장)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48편의 성가 가운데 성찬중에 내 옆사람 생각케 하는 대목이라곤 “이웃을 네 몸같이 서로 사랑하여라 간절히 이르신 사랑의 계명”(169.4)이라는 구절과 “몸과 피 주시는 만찬을 베풀어 형제모으셔”(181.3) 라는 구절 딱 두 군데였다. 그나마 신식성가(496-508장)에는 「주의 빵을 서로 나누세」(502장)를 비롯해 계도적 구절이 두 세 군데 보였다. 목청을 합쳐 성가를 부르는데 우리 눈에는 주님만 계시고 형제는 없는 셈이다.

그런데 바울로 사도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성찬식, 오로지 영혼의 “보약”을 먹으면서 “내 맘의 천주”께 “천국문”과 “영원한 생명”을 빌 따름인 성찬식에 저주를 내리고 있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토 11,29) 사도가 경고한 바는,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먹지 못한 채 성체만 영하는 일, 곧 이웃 사랑 없는 주님 사랑이 ‘모령성체’()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각자가 가져온 것을 먼적 먹어 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 생기니 말입니다”(1고린토 11,20-21). 지금은 주일미사가 고작이지만 내 젊은시절 20년을 두고 매일 참례하던 미사가 그랬다니....

하기사 사도의 지엄한 이 가르침(1고린토 11,17-34)마저도 우리는 엉뚱하게 풀이하여, 영성체는 “영세한 가톨릭신자만”(공지사항),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만”하는 ‘의인들만의 잔치’로 둔갑시켜 놓았다! ”많은 이들의 죄사함을 위하여“ 세운 성찬이 어쩌다 비신자와 영세자,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표로 전락한 것일까? 만인이 하느님 앞에 죄인이고 모든 성사가 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성사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우리가 이 성사만은 하느님과 교우들 앞에 자신이 떳떳한 의인임을 과시하는 성사로 변질시켜 놓았을까?

그래함 그린의 소설 「사물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을 보면 경찰관 스코비가 아내의 장기휴가중에 바람을 피운 뒤 아내(“난 소문일랑 안 믿어요. 내일 미사에 당신이 영성체하면 그걸로 당신의 결백을 믿겠어요.”)를 안심시키려고 소위 모령성체를 하고나서(“그는 혓바닥에 그의 영원한 처벌을 선고하는 성체의 희미하고 종잇장과 같은 맛을 의식하였다“) 권총으로 자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사물의 핵심”

이태리 오르비에또에 가면 성당 정면 모자이크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이 지어진 것은 중세에 볼세나에서 발생한 성체기적의 유물로 전해오는 성체포 한 장을 안치하기 위해서였다. 빵 조각이 글자 그대로 예수의 살이라는 교리가 믿기지 않았던 어느 사제의 손에서 면병이 돌연 피가 뚝뚝 흐르는 살코기로 변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이와 어섯비슷한 성체기적을 설명하면서 “그 살점을 의사들이 분석해본 결과 사람의 심장조직이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라는 강론을 듣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주 율리아”로 알려진 교우가 교황님 경당에서 미사를 마치고는 피가 흥근한 입을 벌리고는 성체가 살코기로 변했노라고 설명하는 엽기적인 사진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런 설명대로라면, 면병이 부족하여 사제가 면병을 쪼개서 영해줄 적에 우리는 예수님 어느 토막을 먹는다는 말인가? 미소한 면병조각에도 그리스도의 현존이 온전하다는 교리는 어디 갔는가?

필자는 그래함 그린의 소설 제목에서 성체를 둘러싼 어려운 교리를 소화할 비결을 보았다. 말씀이 육화하신 신비에서 보면 성체의 신비가 엿보인다. 영원하신 성자께서 마리아의 자궁을 거쳐 사람이 되실 수 있었다면, 신앙인들의 공동체 전체가 사제와 더불어 기도하는 염력으로, 왜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로 물화하지 못하며, 그렇게 ‘사물의 핵심’까지 왜 못들어 가신다는 말인가? 또 나자렛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로 거두어지셨다면 인간이 땅을 가꾸어 얻었고 서로 나누어먹는 빵과 포도주가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승화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성자의 육화를 그리스도인들이 알아듣는데 8백년이 넘게 걸렸듯이, 성찬의 신비도 오랜 세월이 걸려야 알아들을 것 같다. 다음의 예가 그런 면을 내게 깨우쳐 주었다.


“이 예를 하여라!”와 “이것을 하여라|!”

루카복음 22장 19절 뒷절이 공동번역본에서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고 번역되었고, 그 의역이 그대로 미사통상문에 채택된 데 대해서 필자는 오랫동안 탄식을 금치 못했었다. 그리스어본이나 라틴어본이나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하여라.”라고 되어 있다. 두 말 마디가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저 한 구절 때문에 나의 성찬생활이 완전히 비뚜로 갔다고 푸념하는 바이다. 서울세계성체대회 준비세미나에서 외국에서 온 성서학자가 이 구절의 오역을 지적했지만, 미사통상문에서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하여라!”로 바로잡히기까지는 그로부터 무려 15년이 걸렸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로 알아듣기로 마음 먹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부담이 전혀 없다. 주님이야 우리를 위하여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리시지만, 우리는 미사참예하고 영성체하면 제자된 도리를 다한 것처럼 홀가분해진다. 그 대신 성서 원문대로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하여라!”로 알아듣는다면, 영성체하기가 무척 겁난다. “그리스도의 몸!”하면서 내미는 성체를 “아멘!”하고 넙죽 받아 먹는 순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리스도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분이 사셨던 ‘야훼의 종’의 모습을 닮아야 하고, 바울로가 내린 가르침대로 손에 쥔 것을 나눠 먹어야 하고, 남들을 위하여 몸을 내어 주고 남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내 성찬 내 영성체는 모령성체다!

최후심판에 관한 주님의 귀뜸(마태 25,31-46)이 맞다면,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가 식탁에 앉지 못하는 한 주님도 식탁에 앉지 않으실 것 같다. 그래서 “주님, 진지잡수세요”라는 어린이의 기도는 나의 성찬생활에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 경향잡지 2002년 8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