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친구 예찬

 


아름다운 바보, 그를 믿습니다”

이 제목은 지난 2월 28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이색적인 대형광고의 제목이다. 민주당 노무현 경선주자를 지지한다는 김수복씨의 개인 광고였는데, 그것이 소리없이 광주의 여론주도층을 움직여 민주당의 국민경선은 대세론자였던 이인제씨를 제압하고 노무현씨의 돌풍을 일으켜 주었다. 내가 알기로 김수복의 숨은 역할은 1986년에도 있었다. 난데없이 그가 나의 아우 찬성이와 더불어 서울에 나타나 동아투위 등의 자유언론인들을 만나 설득하고 다녔다. 조중동이라는 군사독재의 나팔수들이 판치는 세상에 국민들의 투자로 만들어진 국민의 신문이 필요하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일년후 한겨레신문이 준비호를 내기 시작하더니 88년 5월에는 정식으로 간행됨을 내 눈으로 목격하였다. 「노동자 신문」이 창간될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수만 물려주라!” “안 돼!” “난 아까 물러주었잖아!” “안 돼!” 1958년 여름이었다. 수복이네 집에서 한 여름방학을 먹고 자면서도 소갈머리없던 나는 갓 배우던 장기판을 놓고 곧잘 그와 티격태격하였다. 전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나는 방학이면 학교기숙사를 떠나 돌아갈 집이 없었다. 살레시오중학교 신부님들은 그 학교와 여러 교회건물들을 건축하는 수복이 아버님(김흥섭 바드리시오)께 얘기하여 그 해 여름방학 동안 수복이더러 친구 하나를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재우게 자상히 배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서 우리의 모든 동창생들은 여태까지 염이의 친구는 수복이, 수복이 친구는 염이로 알고 있다.

말이 어눌하고 우직하고 조용하기 이를데없어 어린 시절의 꿈대로 신부가 되었더라면 수복이는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에 나오는 치셤신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허름한 잠바차림에 자가용도 없는 사장님이라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를 거의 기인으로 보는 듯하다. 70년대에 건축업으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도통 억척같이 돈버는 알과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로 수배당한 사람들의 생계를 돕다가 매출액이 수억밖에 안되는 지방의 소기업이 두 차례나 국세청의 특별조사를 받고 터무니없는 과징금을 물어야 했다.

교회 인사들은 김수복의 번역서를 참 많이 읽어왔다. 그는 광주에서 「일과 놀이」라는 출판사를 열어 자기의 성과 열을 쏟고 있다. 80년대부터 해방신학 계통의 남미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출판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참여에 이바지하였다. 성서도 역사적 현실의 눈으로 읽혀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공동번역본에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주해를 곁들여 출판하는 용기를 보였다. 「해설판 공동번역성서」로 통하는 이 성서는 공동번역 판권자 대한성서공회에 인세를 지불하고 로마의 가톨릭 국제성서공회가 간행한 공인된 주석이요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의 감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교회인사들의 시비를 받아왔다. 김수복은 91년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교리서 시리즈도 집필 간행하였다. 항간에 「김수복 교리서」로도 불리운 이 책들이 널리 보급되자 종교신앙과 사회생활을 철저히 분할하자는 신도들에게서 격렬한 반발을 샀고, 엄익채씨와 주변 인물들이 이 교리서를 두고 주교회의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렇지만 주교회의 교리위원회는 문제의 서적을 조사하고서 문제삼지 않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역할이 대수롭지 않은 김수복 같은 친구를 둔 것이 나는 자랑스럽다.


송기인신부와 윤선규신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소중한 우정들을 꼽으라면 끝이 없지만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두 인물이다. 어느 핸가 진보언론 「말」지가 한국을 움직이는 100인의 민주지도자를 꼽았는데 가톨릭 성직자로는 서울의 함세웅신부와 부산의 송기인신부가 뽑혀 있었다. 영남의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여겨지는 송신부의 보스 기질은 그와 함께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아는 바이며, 부당하다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올곧은 성격은 교구에서도 작은 본당으로만 이동하던 형편으로 드러났다. 그는 부마항쟁을 기념하는 민주공원을 부산에 기어이 실현하였다.

유신시대 「사제단」의 기도회가 서울 명동에서 열릴 무렵이면 지방교구 신부들에게는 공안당국의 사전조처가 실시되어 호텔이나 안기부로 ‘모셔진 채’ 하루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삼랑진본당신부이던 그가 한번은 나와 함께 승용차로 용케 삼랑진을 빠져나와 서울에 갈 요량으로 자욱한 낙동강 안개 속에 지방도로로 숨어 들었다. 하지만 사제 하나 잡으러 밀양군 민방위부대가 비상동원되어 시골길마저 목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발각되어 도로가 차단되고 건장한 경찰들에게 양팔이 끼워진 채로 끌려갔다. 그러나 수십년간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송신부가 누구를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언사를 쓰는 적을 본 적이 없어 나는 그를 「사제단」의 좋은 본보기 성직자라고 여긴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민중교육론)」의 번역(성찬성)과 출판(필자는 지학순 주교님의 요청으로 메리놀회에서 출판비를 얻어 그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도 송신부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활약한 선교사들 가운데 필자가 자랑하고 싶은 벗은 살레시오회 벨지움인 선교사 윤선규(Luc van Looy)신부이다. “여보세요? 아, 너 유철이구나!” 이것은 로마 살레시오 수도회 총본부로 걸려온 한국말 전화를 받고 윤신부가 대꾸하는 전형적인 첫마디이다. 10여년전 한두번 만나본 사람의 음성과 이름과 신상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로마로 늦깎이 유학을 온 김유철(청주교구)신부를 탄복케 하였다지만, 윤신부를 아는 모두가 자기는 윤신부와 가장 친하다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 정도로 사람에 대한 배려는 자상하기 이를데없다.

윤신부는 루뱅대학을 마친 후 60년대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우리말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선교사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는 외국인 한국어 웅변대회에 특상을 받은 기회로 초빙을 받아 경희대학교에서 음악대학을 수학하였을 정도였고 그의 아코디온 연주는 어디 가나 청소년들을 열광시켰다. 한국에서 관구장을 역임하다 84년 살레시오 수도회 최고평의원으로 발탁되어 갔고, 지금은 부총장을 두 번째 연임하고 있지만 만명이 넘는 살레시안들의 이름을 얼굴과 맞추어 기억할만큼 놀라운 특은을 받은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위에 말한 「페다고지」 출판건으로 필자가 79년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고생할 적에 윤신부는 노동화수사를 심부름시켜, 성염-성찬성 형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지학순, 김재덕, 윤공희, 박정일, 김남수 다섯 분 주교님들의 진정서를 받아내었고 그것으로 김재규 중정부장의 마음을 움직여 10월 26일 새벽 형제는 한 달만에 남산에서 풀려났다. 81년 필자가 마흔 나이에 가족을 거느리고 로마로 유학 갔을 적이었다. 독일 미씨오의 장학금을 받으려면 교구장의 추천이 필요했는데 윤신부가 손수 김수환추기경님께 추천의 편지를 들고 가서 사인을 받아냈다. 평신도에게 그러한 기회가 좀처럼 허락되지 않던 터였지만 추기경님은 윤신부의 체면을 보고 서명해 주셨다고 전해 들었다.

우정은 인생의 최고 재산이고 사람은 나이먹은 숫자만큼 친우가 있어야 한다는데 세상살이와 학계와 사회활동 영역에서 그만큼 많은 벗들을 주신 은혜가 고맙기만 하다. 지면관계로 미처 예찬하지 못한 그 모든 벗들이 ‘또 하나의 나’(amicus, alter ego)이기 때문이다.

[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