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

나는 조상들이 입혀 준 옷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입고 있다. 그리고 그 옷이 몸에 맞고 마냥 좋기만 하다. 집안의 신앙은 할아버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에 관해서는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이 없다.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예수교 장로회 장로로서 사촌되시는 할아버지와 1920년대에 장성군 삼서면에 소룡리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모셔오셨다고 한다. 또 두 분은 그 벽촌 마을에 공중목욕탕을 만드셨고 삼서에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전주에서 선생님들을 모셔와 태청중학교를 개교시키셨다고 들었다. 소룡간이학교(삼서공립보통학교 부설)를 개교시키는데도 앞장선 분으로 마을 어른들이 얘기해 주었다.

6.25가 터지기 얼마전 아버지는 식구를 거느리고 광주로 이사오셨는데 이현필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동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다. “맨발의 성자”라고 알려진 이현필 선생의 고행과 수도생활은 지금도 「동광원」이라는 개신교 수도회로 맥을 잇고 있지만, 검정 고무신에 삭발을 하고 지내시던 그분은 간간이 나를 무릎에 앉히고서 내가 못 알아들을 성스러운 얘기를 들려주시곤 하였다. 내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과 당신 숫갈로 먹여주시던, 시금치 통조림 같은 입에 선 음식맛이다.

그 뒤 어머니가 광주 남동 성당에 다니시다 1957년 박문규신부님께 임종세례를 받고 돌아가시면서 나의 신앙은 구교로 옮겨와서 오늘에 이른다. 살레시오 학교의 기숙사와 수도원, 혜화동과 로마로 살 집이 옮겨지면서 교회 품안에서 신앙을 공기마냥 숨쉬고 살아온 행운아지만 아마도 내 신앙은 늘 물에 잠겨 있는 수성식물처럼 뿌리가 연약해서 마른 땅에 옮겨심으면 당장 말라죽을지도 모르겠다.


“나자렛 사람” 예수

산이 클수록 사람마다 좋아하는 등산로가 따로 있는 법이다. 내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칭호는 그분이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던 “나자렛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내 머리를 감도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4천년을 기다렸다는 구세주가 왔는데, 날마다 성경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성직자들(대제관), 오로지 하느님 계명대로 살아가려 애쓰는 평신도 지도자들(바리사이파), 당대의 최고지성인들(율법학자)이 어째서 앞장서서 예수를 처형하고 말았을까? 그리고 뜻밖에도 그 의문의 답은 예수께서 나자렛 사람, 곧 갈리래아 출신이라는 데에 있었다! 하느님의 뜻을 알만한 사람들이 그분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거기 있었다.

하기사 나자렛은 갈릴래아에서도 별볼일없었다. 그 점은 갈릴래아출신들로서 최초로 예수의 제자가 된 필립보와 친구 바르톨로메오가 나누는 대화(“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에서 비친다. 전라도에서도 장성, 곡성, 보성 사람은 대접을 못받고 내가 장성에서 태어났으므로 바르톨로메오의 말뜻을 나는 알아듣는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무슨 곡절을 겪어도, 교회 잡지에 무슨 글을 써도 나를 못마땅해 하는 분들은 한결같이 “전라도사람이라서!”라는 딱지를 내게 붙여왔다, 수도자와 성직자들마저도.

예루살렘 지도층에서 예수가 누군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적에(“이분이야말로 참으로 그 예언자이시다... 이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를 옹호하려는 여론을 눌러버린 것은 예수의 출신지였다("갈릴래아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오밤중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당정회의의 예수 처형 결정에 항의하자(“우리의 율법에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소?”) 한 마디로 묵살해버린 발언도 그랬다(“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란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역감정은 우리처럼 이조 5백년이나 군사정권 40년의 소산이 아니고 성서를 샅샅이 연구한 신학적 성찰의 결과였다! 의아스럽거든 요한복음 7.40-52을 읽어 보시라.

사람들은 십자가 꼭대기에 못질해 둔 죄명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네 마디 중에 두 번째 단어를 의아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스인들은 사람 이름 옆에 흔히 출신지를 썼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니싸의 그레고리오”라고 부른다. 그대신 로마인들은 누구의 이름에 출신지를 표기하는 예가 없었다. 총독관저에 몰려든 유대인들이야 누구의 선동을 받았든 “죽여라, 죽여라, 십자가에 매달아라!”고 고함을 질러댔었다. 그렇지만 파스카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방금 올라오는 길목에서 소문에 익히 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폭동마저 일어날지 모른다. 무죄한 사람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면서 군중 앞에서 손을 씻어 보이던 약은 정치인답게 빌라도는 예수 이름 옆에 “나자렛사람”이라는 단어를 첨가함으로써 “그렇지, 그쪽 사람들은 씨를 말려야 해.”하는 지역감정으로 군중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 최후의 유혹

나자렛사람이 요르단강에서 자기가 누군지 깨달은 다음에 당했다는 유혹사화는 나로 하여금 흔쾌히 그분을 구세주로 모시게 한다. 과연 예수께서 지구상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고자 사하라사막의 모래를 모조리 밀곡식으로 바꾸어놓는다고 해도 미국의 메이저곡물상들은 그곳에 탱크를 진주시키고 지뢰를 묻고 철조망을 친 다음 “접근금지. 무단접근시 발포!”라는 팻말을 붙여 놓을 것이다. 그래서 나자렛사람은 ‘정책’을 바꾸어 ‘있는 사람들’의 맨꼴찌에 섰고 ‘없는 사람들’의 맨앞장에 섰다.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먹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분에게서 영감을 받아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한다”는 원리를 실천해 보인 사람들을 나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온갖 관제 ‘간첩단’과 ‘정부전복음모단’, ‘인혁당’, ‘남민전’, ‘민청학련‘, ‘‘전교조’, ‘가노’, ‘가농’, ‘가청’, ‘사제단’, 오늘의 ‘한총련’까지 한반도 갈바리아에 세워진 십자가들의 저 기나긴 행렬들! 교회에서도 그들은 문둥이들처럼 외따로 떠돌다 사라져갔다. 나는 그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신앙 덕분에 그들 곁에 있었음이 자랑스럽다. 민족사의 진흙탕 속으로 거의 다 묻혀버리고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탄에게, 마몬에게, 권력자에게 절하지 않았다.

광야에서 3전3패한 악마가 물러간 것은 “다음 기회까지”였다고 한다. 정말 십자가상에서는 그분이 뭔가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나자렛사람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이라면. 이제라도 천사 열 두 군단이 진군하여 악당들을 모조리 도륙할성싶었다. 제관, 군인, 함께 처형당하는 죄수도 가세하여 조롱했다. “남들을 구했으니 자기도 구해 보라지.” 최후의 유혹은 끈질겼다(루가 23,33-43). 그래도 그분은 거기 버티고 계셨다. “죽어도 안 내려간다! 지금 내려가 버리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내 정책이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

백인대장과 더불어 내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까닭은 아마도 “엘로이, 엘로이”하는 비명 속에 나자렛사람이 끝끝내 십자가에서 숨지셨기 때문이리라.

[ 경향잡지 2002년 6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