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여인 중에 복되시다뇨?



“어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내게는 타격이 컸습니다.... 당시에 바바라 선생님 학급 같은 학급이 있어서 나도 슬픔을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나 역시 그 학급에 들어가고 싶었을 겁니다. 왜냐면...”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왜냐면 난 너무도 외로웠으니까요...”
“모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70년이나 지났잖습니까? 한데 아직도 그 고통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코펠이 물었다.
“그럼요.” 모리 선생님이 속삭였다.

내가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교양과목에서 즐겨 학생들에게 읽히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미치 엘봄)이라는 책자의 한 장면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나는 모리 선생과 깊이 공감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45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여서 지금도 노모가 살아계신 친구들을 보면 한없는 부러움을 느낀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정신적 외상이 오죽 깊었으면, 예순이 넘어가면서도 아내가 곁에 없으면 일이 헛잡힐 지경이다. 사람은 여인의 태중에서 가슴으로, 품에서 발치로, 발치에서 모친의 시선밖으로 떠나가지만 생명의 탯줄은 연줄처럼 끝없이 풀리더라도 결코 끊기지는 않나 보다.


두 여자의 서러움

  목화밭 청무우 시린 다복솔
  옥양목 달에 젖은 부신 저고리
  시오리 가리맛길 잠든 산마을
  시루봉 머리 위에 걸린 달무리 

               (임보 시집 「겨울, 하늘소의 춤」에서)

임보(강홍기) 시인이 당신 모친의 초상화로 그려낸 “달밤”이라는 짤막한 시다. 내 어렸을 적에도 어머니 이부자리가 비어 홀연히 눈이 떠져 창밖을 내다보면 어머니는 뜰에 나가 계셨다. 방림동 길갓집에 달빛이 유난히 아스라하던 밤이면 뜰에 우두커니 서서 신작로를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옥색 저고리가 눈부시게 서러웠다. 젊은 여자를 만나 처자식을 버리고 줄행낭 놓은 남편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눈길이었을까? 나어린 자식들만 아니면 당신도 저 구불거리는 한길을 따라 처연히 떠나버리고 싶던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2천년을 상거하여 저 팔레스티나 유다 산골마을 아인카림에서도 처녀 하나가 나날이 불러오는 배를 안고서 “속으로 타서 익는 까만 꽃씨”(이해인의 시 “해바라기 연가”에서)마냥 애를 태우고 있었다. 단봇짐을 들고 어머니에게 쫓겨나다시피 나자렛을 떠나온 것이 벌써 여섯 달 전이었다. 동네 사람들한테 낯부끄러우니 사촌 언니에게 가서 산후 수발이나 하고 있으라는 말씀이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시중드는 틈틈이 울타리 밖으로 예리고 쪽에서 올라오는 한길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나자렛에서 삯심부름꾼이라도 오지 않나, 만에 하나라도 요셉이 찾아오지 않나 해서였다.

“기뻐하소서, 은총을 입은 이여!”하던 천사의 모습이 허깨비가 아니었을까? 엉겹결에 내뱉은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하던 말을 곤백번 후회하며 곤백번 되씹어 보지만, 입덧에, 태기에 요새는 태동까지 느껴지는 몸살은 헛것이 분명 아니었다. 그간에 어머니가 요셉을 만나서 속사정을 얘기하였을까? “천사, 높으신 분의 아들, 성령이 감싸 주시고...” 누가 이런 말을 믿어 줄거나? 그 착하디 착한 요셉이 설령 거두어 준다고 할지라도 무슨 낯으로 그를 보며 아이를 바라볼 적마다 굳어질 그의 얼굴을 어떻게 견뎌낸단 말인가?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축복받았으며...”

성모송은 참 좋다. 주의 기도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말씀 같고 성모송은 어머니에게 드리는 말씀 같아서인지 삶이 고달플수록 우리 입술에서 절로 흘러나오기는 “아베 마리아!”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닭 울적마다 삶은 노엽고 원통했던”(이승훈의 시 “지난 날”에서) 어머니의 손가락 틈새로도 묵주알은 쉼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성모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던 경험은 1979년 추석날 한밤중이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당시 서울 밤거리에 그토록 많고 그토록 삼엄한 검문소가 있다는 것도 처음 보았지만, 자정이 넘어 무슨 간첩처럼 검은 세단에 쑤셔박힌 채로 중앙정보부 남산분실로 끌려가는 길목에 성모님의 마음이 왜 그리 아리게 전해 왔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골고타 십자가 형장에도 나와 계셨던 것으로 미루어 성모님은 최후만찬 자리에도 계셨을 법하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아드님이 강도처럼 묶여서 끌려가는 장면도 목도하셨음직하다는 생각이 미치자, “성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하례하나이다!”라는 첫구절부터 목이 메었다. 철들자 홀연히 집을 나가버린 아들, 풍문에 들리기로는 가는 데마다 예루살렘 어른들과 좌충우돌한다는 불길한 소문에 가슴 조이던 여자에게 “기뻐하소서!”라니! 기어이 온 성민의 증오의 표적이 되어 처형당하는 아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어머니, 싸늘하게 식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에게 “여인 중에 복되시도다!”라니!

“한국 땅에서 여자로 태어난다는 사실만으로 구원받기에 족하다.” 이 말은 농민운동으로 평생을 보낸 이병철 선생이 우리 농촌 여성들의 곤핍한 삶을 지켜본 끝에 내린 신학적 결론이다. 팔레스티나든 한반도든 어머니 된다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이 겪는 모든 인고를 어림잡게 되면서부터 우리네 모든 누이와 아내와 어머니의 얼굴에서 성모님의 모습이 얼비치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다.

[ 경향잡지 2002년 5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