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사다리]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 주셨으니"



두 수사님의 단식 투쟁

“형, 버스 못 타면 우린 광주까지 걸어가야 해?”
“아냐, 걸어선 못 가.”
“차비가 없어서 어떡해?”
“그럼 우리,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께 기도드리자꾸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우 찬성이와 고향을 찾아갔다. 장성 삼서는 광주에서 어림잡아 80리는 되는 성싶다. 아우에게는 처음 가는 고향길이었다. 이튿날 윤기 당숙이 주시는 용돈도 점잖게 사양하고서 십리길을 걸어 신작로에 나와보니 아뿔사 용돈은커녕 차비도 없었다!

아우의 작은 손을 내 손으로 포개고서 형제는 주모경과 영광송 그리고는 “그리스당의 도움이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하고는 성호경을 그었다. 그리고 몇 걸음 못 가서 사레지오 고등학교 모자를 쓴 후배가 보였다. 우리 고향 마을 소룡리에 산다고 했다. 생전 처음보는 낯선 후배에게서 차비를 꾸어 버스에 오르면서 아우에게 말했다. “거봐, 성모님이 봐주시쟎아?”

이 아우는 초등학교 3학년 때에 고아원을 나가더니 한 해 동안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리고는 이듬해 기숙사에 있는 나에게로 찾아왔다. 팔도강산을 떠돌다 어느 섬에 가서 “깔땀살이”(꼴머슴살이)를 했노라는 자초지종이었다. 돌아온 까닭은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둘이서는 학교 성당으로 들어가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가 없으니 성모님이 보살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형제가 눈물바람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던지 명수사, 도수사(도요한 신부님) 두 분이 원장 마신부님께 가엾은 아이니까 기숙사에 받자고 청했단다. 원장신부님이 아이가 중학교라도 들어가면 받아들이자고 거절하자 두 분 미국인 수사님은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단식 사흘만에 마신부님이 손을 들었단다. 뒤에 들은 얘기다.

그리고나서 기숙사 자습실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초등학생이 중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함께 사는데 「마르셀리노」치고는 지독한 말광량이에다 떼쟁이였다. 소신학교를 겸하는 기숙사였으니 몇 십번 퇴사당할 말썽꾸러기였지만 쫓아내도 갈 곳이 없는 고아여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9년을 묵었다.


막내가 배운 ‘희망’이라는 단어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중학교 기숙사에 있던 나만 빼고 나머지 3형제는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막내 훈이가 세 살 적이었던가? 소심하고 체소하고 순하기만 한 이 막내는 형들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고아원 아이들은 아주 하찮은 설사나 감기로도 곧잘 죽는다.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까닭에, 살아야 할 명분도 의욕도 없어서일게다. 교회에서 보육사업이나 복지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말과 하느님이 생명이시라는 말은 똑같음을 체득하고 있다.

몇 해 후 어떤 경위였는지 모르지만 막내만 형들에게서 떨어져 목포의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부랴부랴 아우를 찾아간 나는 병든 병아리처럼 기운빠진 아이를 보고서 끌어안고 기도하는 길밖에 해 줄 일이 없었다. “성모님이 안 키워 주시면 누가 키워 주십니까, 우린 어머니도 없는데?”

몇 달 뒤 사레지오 학교 기수현 교장신부님이 목포 골롬반 병원에 치료하시러 가는 길에 미사 복사로 따라갔다. 기신부님은 아우가 그곳의 고아원에 있다는 내 얘기를 들으시고는 당장 찾아가 보자고 말씀하셨다. 신부님은 그 고아에게 “너 중학교 가면 사레지오 학교에 오너라! 기숙사에 넣어주마!”라는 말씀으로 북돋아 주셨다. 훗날 아우는 그 순간 난생 처음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배웠노라고 글에 썼다.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주셨으니”

동해바다 넓다란 얼굴에는 태평양 상공이며 아침해가 눈부시게 빛난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에는 강변북로와 아파트들 그리고 남산까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리고 한길과 공터에 생긴 손바닥만한 물웅덩이에도 뭉게구름과 지나가는 햇살이 잠시 비껴가곤 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역사와 출애굽이라는 거청한 사건을 거치면서 자기네 구세사의 서막을 기록하였다. 배달겨레는, 20세기에만도 일제강점과 태평양전쟁, 6.25사변과 군부독재라는 엄청난 비극 속에 해방과 경제개발을 이루면서 민족의 구원사를 나름대로 체험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대로, 우리 각자가 교회이듯이(sumus nos Ecclesia), 각자의 덧없는 인생 역시 미니-구원사의 흔적을 간직하는 법이다. 부모잃은 네 명의 사내아이가 굶어죽을 뻔하다 연명했고 가르침받았고 자라났고 가톨릭 신앙을 배워 기도와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왔듯이 말이다.

시편은 천의 얼굴을 가진 기도서다. 사람마다 자기가 체득한 구원의 찬가를 이 성서에서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시편 116편이 특히 좋다. 애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선한 분들의 손길로만 살아온 사람이라면 절로 입술에서 흘러나올 기도문이다.

  주님께선 너그러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 하느님께선 자비를 베푸시는 분.
  주님께선 소박한 이들을 지켜주시는 분,
  가엾던 나를 구해 주셨네
. (시편 116.5-6)

남편에게서 버림받고서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넷을 먹이느라 몸부림치던 한 여자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면서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하지만 살아 생전에 자식들을 건사하기에 힘이 부치셨던 어머니가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를 넉근히 키우셨다는 게 피부로 겪어서 배운 사랑이다. 지금은 어지신 주님의 시선으로 아들, 며느리, 손주 열 여섯 생명을 굽어보실 어머니의 기도도 이 시편에 나와서 좋다.

  내 영혼아, 너의 평온으로 돌아가라,
  주님께서 너에게 잘 해주셨으니.
(시편 116.7)

[ 경향잡지 2002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