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그리스도인’에 이른 가톨릭교회의 타종교관

                              심상태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이해를 위한 안내

 

                            성염, 이태하, 최성수 공저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와 종교적 관용』

                                                                        (민지사 2001) 195-229면

 

                                                                                  성 염 (서강대 철학과)

 

I. 서론

 

(1) ‘익명의 그리스도인’과 ‘성사론’

 

로마 가톨릭의 타종교관 내지 소위 ‘종교적 관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앞의 논문에 나온, 아시아교회가 내놓는 상호성사론(相互聖事論) 곧 그리스도교가 불자(佛子)들과 이슬람들과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 성스러운 인간이 되도록 돕는 성사이듯이, 타종교들도 그리스도교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종의 성사(聖事)라는 선각적인 이론까지 소개하였다. 현실적으로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타종교관은 소위 ‘완성론(完成論)’ 곧 아시아의 제종교들은 하느님의 영(靈)이 그들 안에 역사(役事)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길을 준비하는 전(前)그리스도(pre-Christian) 종교들로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福音)을 받아들일 준비역할을 한다고 보며, 그 창시자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내지 예언자로 간주되는 이론이다.

 

그런데 아시아교회의 상호성사론에 앞서, 지난 세기 중반기부터 비그리스도인들을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라고 일컬으면서 그리스도교는 그들을 위한 일종의 성사(聖事)로 보는 이론을 확립한 인물이 20세기 가톨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원의 활동을 하고 계시며, 따라서 교회는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교를 밝히 드러내고 제종교가 발견하여 쌓아올린 가치들을 그곳에서 신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성사론(聖事論), 적어도 일방적(一方的) 성사론이 그의 논지이며, 가톨릭 지성인들과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이론이다.

 

라너는 20세기 전반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칸트의 종합을 시도한 마레샬(Joseph Mareschal: 1878-1944)의 초월론적 토미즘을 계승하였고 자기 시대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4)의 사상과의 대화를 다시 한번 시도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이 20세기와의 사상적 대화를 갖도록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의 철학적 성격을 띤 주저들은 우리말로 번역소개되지 않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수원가톨릭대학교 심상태 신부가 학위논문을 위시하여 라너 사상을 우리 학자들에게 꾸준히 소개하고 저술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라너의 철학과 신학을 참으로 쉽게 소화하여 학계에 소개한 학자의 저서도 근자에 나왔다.

 

본고는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참으로 체계적으로 개진한 심상태 교수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를 간추림으로써, 소위 로마 가톨릭의 타종교관을 ‘성사론’의 차원으로 이끌어간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의 철학적 토대를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라너 이론의 전제인 서두의 ‘순종적가능태((順從的可能態 potentia oboedientialis)’ 이론을 제외하고는 본고의 내용 전부가 심상태 교수의 저서를 간추린 것이며 칼 라너의 인용 역시 그 저작에서 간접인용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2) 라너의 기본입장

 

칼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으로 목적하는 바는 인간의 역사적 실존(實存)이 원천적으로 초자연적(超自然的)이라는 점을 현대인들에게 제시하려는 것이다. 신(神)을 전제하지 않고 세계를 해설하고 종교가 없이도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으며 그런 삶이 계몽주의 이래로 자유인(自由人)이요 지성인의 표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세속주의 문명에 라너는 정반대의 답변을 내놓았다. 인간은 존재의 가장 밑바탕에서부터 신을 향하는 절대초월(絶對超越)을 본질로 하고 있으며, 가장 인간다운 활동인 인식(認識)과 의지(意志)에서 자기자신을 유한자(有限者)로서 의식한다는 사실부터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지평(絶對地平)을 배경으로 사유하고 그 지평을 배경으로 욕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하는 인식과 사랑에서 우러난 모든 행위에서 사실상 인간은 신을 공지(共知 Mit-wissen)하고 신에 대한 종교적 투신을 선취(先取 혹은 先把握, Vorgriff)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칼 라너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려면,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라는 것과 “구원받으려면 그리스도와 결속되어야 한다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더 좁게는 그리스도교회에 가시적으로 소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명제 사이에 합리적 균형을 견지해야 한다. 실존자세가 올바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는 타종교신봉자들과 비종교인, 심지어 무신론자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선언하고, 따라서 그 모든 삶의 자세들을 하느님이 원하신 ‘익명의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려면 비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 또는 종교에 비록 함축적이고 익명적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그리스도적임을 논증하여야 한다.

 

전통 스콜라신학의 구원론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 인간의 구원은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하느님 자신)을 소유하는 일이다.

◇ 초자연적 신앙 없이 구원에 이르는 통로는 불가능하다.

◇ 신앙(信仰)이란 하느님 계시를 명시적으로 수용함이다.

◇ 그런데 신앙 자체는 하느님의 계시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 명제들을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이 정돈한다.

○ 인간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다. 하느님의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을 입은 상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 지복직관의 전제라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란 하느님의 자기전달이다.

○ 그런데 인간측에서도 이 지복직관이 가능한 조건을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이 가능성은인간 본성 외부에서 주입되는 무엇이 아니고, 어떻게든 인간적 본성에서 유래되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곧 은총이라면 인간편에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받아들이는 가능성(potentia oboedientialis)이 인정되어야 한다.

○ 이 두 개념을 종합한다면, 모든 인간은 ‘초자연적 실존’ 상태에 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인간의 이같은 ‘기본처지’(Grundbefindlichkeit)에서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도출하고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실존적 ‘그리스도적’ 상황을 도출한다.

 

라너의 의도대로 만약 계시(啓示)가, 하느님의 자기전달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은총(恩寵)과 동일시된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의해서 하느님은 항상 인류에게 자기를 전달하고 계시다면, 즉 하느님이 언제나 계시를 내리고 계시며 따라서 항상 은총을 베풀고 계시다면, 그리고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자기전달(곧 계시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청취하는(Hoerer des Wortes) 곧 ‘순종적 가능태’라면, 인간이 항상 초자연적 은총에 에워싸여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원천적으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받고 있는 인간은 (그 은총이 유효한 것이려면) 순종적 가능태로서나마 이미 근본신앙을 수용한 상태에 있다. 인간이 이처럼 은총에 에워싸인 자기 실존을 수락함으로써 근본신앙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곧 구원에 필요한 초자연적 신앙이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서도 발견된다.

 

II.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위한 철학적 논거

 

I.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의 토대: ‘순종적가능태’(順從的可能態)

 

‘순종적 가능태(potentia oboedientialis)'라는 용어는 토마스에게서 나오는데 "창조주인 하느님의 처분과 행위를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피조물의 능력”을 가리킨다. 다만 비록 그 규정이 피조물의 능력이라고 하더라도 피조물에게 당연한 권리처럼 주어져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은총의 초자연적 성격을 전제하여 자연본성(natura)과 은총(gratia)의 관계를 정의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즉 하느님의 자기전달(self-communication)에 해당하는 초자연적 은총이라는 것이 피조물에게 당연한 무엇이 아니고 자연본성측에서는 그 은총에 대해서 가능태(potentia), 은총을 순순히 받아들이는(oboedientialis) 가능태에 있을 뿐임을 천명한다. 그러면서도 그 능력은 어디까지나 그 피조물의 가능태이므로, 은총이 그 피조물의 본질 혹은 자연본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님을 보장한다.

 

따라서 이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하느님이 자기전달에 의해서 인간이라는 영적인 피조물을 충만히 실현한다는 점에서만 이해되는 개념이다. 비록 피조물은 가능태로서 저러한 실현을 향해서 열려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본성적인 권리처럼 여기지 않고 선물로 주어지는 은총으로 여겨 받아들일 따름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이 순종적 가능태는 인간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국부적인 성격의 개별 가능성일 수는 없고 전인(全人)을 대상으로 한다. 하느님의 자기소통으로서의 은총은 한 인간 전체를 좌우하는 성격을 띠는 까닭이다(가톨릭은 ‘의화’(義化)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순종적 가능태는 처음부터 은총에 의해서 현실화하도록 질서지워져 있고 은총에 의해서 현실화하지 않으면 무위로 그치므로, 만약 하느님의 자기전달에 의해서 항상 주어지는 은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순종적’(oboedientialis)이라는 말도 할 수 없다.

 

하느님의 자기전달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은 ‘순종적(順從的)’ 가능태이지만, 인식과 자유에 있어서 무제한적으로 초월하여 나아가는 자연본성은, 순종적 ‘가능태(可能態)’라는 점에서 인간이 인격적인 존재이자 자유의 역사를 전개할만한 조건을 마련한다. 토마스 이래의 스콜라 학자들이나 칼 라너가 이 용어를 구사함은, 순종적 가능태가 “외부에서” 인간의 존재에 주입(注入)되는 무엇은 아니라는 것, 인간의 자연본성이 은총을 위한 순전한 가능태, 소극적으로 은총 앞에서 저항하지 않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 곧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희구하는 ‘자연적 열망’(desiderium naturale)이 갖는 적극성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의 타고난 자연본성이 충만을 이루고, 그 충만을 하느님이 무상으로 선사해주는 일은 영적인 존재인간에게 상치되는 개념이 아님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인간의 정신적 기능(지성과 의지)은 인간 본성의 무제한적 초월에 참여하고 초월을 달성한다는 점에서, 이런 기능들 자체가 (초자연적 은총을 희구하고 받아들이는) 순종적 가능태[= 능력]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능력들이 수동적 측면 못지 않게 능동적 측면을 띠고 있어서, 능동적 순종적 가능태(potentia oboedientialis activa)라는 표현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인간 행위는 은총에 의한 이 고양을 인간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로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라너는 초월적 인간학을 개진하는데 이 용어를 기조개념으로 활용하고,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도 이 개념에 바탕을 둔다.

 

2. ‘초월적-인간학적 신학’을 위한 ‘초월철학’의 작업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초월적-인간학적 신학’(Transzendental-anthropo- logische Theologie)이라고 통칭한다. 현대지성인과 대화하는 라너의 인간학은, 하느님의 계시(啓示)든 인간의 신앙(信仰)이든 그 속에서 ‘인간학적 소인(素因)’을 관찰하고, 인간 본성의 가장 심원한 근저에서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absolute Transzendenz auf Gott) 내지 ‘하느님 지향의 절대의존’(Verwiessenheit auf Gott)을 간파하는 인간학이다.

 

이 작업을 위해 라너는 인간 현존재의 두 가지 기본구조 곧 “세계내재성(世界內在性)”과 아울러 인간의 “세계초월성(世界超越性)”을 동시에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선다. 인식론상으로 인간이 자연사물들에 대한 취득하는 인식[취득인식]을 형이상학적으로 분석하면, “세계내 정신”(Geist in Welt)으로서의 인간이 드러나고, 역사 안에서 말씀을 수령하고 알아들을만한 존재가 될만한 순종적 가능태로서의 인간의 본질규정에서는 인간의 “세계초월성”이 확보된다. 그는 인간의 가장 고유한 활동인 인식(認識)의 본질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초월적 인간학을 성립시키는 작업을 한다. 즉 전통 철학의 분야인 인식론(認識論)은 원용하여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절대초월의 존재”임을 논증한다.

 

(1) 인식의 분석을 통한 초월적 존재이해

 

그러면 그가 초월철학(超越哲學)을 어떻게 개진함으로써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관한 초월신학으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가 살펴본다. 그가 말하는 “초월철학”이라는 것은 칸트와 토미즘을 병합하면서 “인식의 선험적 조건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과의 쌍방적 관계”를 규명하는 인식론이다.

 

“존재는 인식이다.”라는 명제는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인식할 수 있는 정도가 그 존재자의 존재의 강도(强度)를 나타내는 계수가 되고 자기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기귀존(自己歸存)의 정도에 따라서 존재위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입장을 조성해 왔다.

 

만약 라너가 인간을 “세계내정신” 혹은 “육화한 정신”으로 정의한다면, 인간은 인식하는만큼 존재하고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서 존재의 등급이 매겨지며 인식하는 그만큼 투명한 존재로 자기를 성취하는 존재자가 되므로, 그 “존재자의 존재는 인식가능성에 있다.” 앎 혹은 인식을 존재자의 한 가지 기능이나 작용(actio 라는 우유범주)으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내정신”으로서의 인간 본질에 해당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사실상 모든 존재자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인식에로 정향(定向)되어 있다는 선험적이고도 필연적인 명제가 성립한다. 또 이 명제가 가능하려면 앞서 말한 “존재와 인식의 원천적인 단일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토마스에게는 인식이라는 것이 어떤 사물과의 접촉(接觸)이 아니고,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동화(同化)이다. 그렇다면 인식주체와 대상의 동일성 혹은 동화를 보장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의 형상(形像 species)이다. 인식대상의 형상(形相 forma)이 인식론적 형상(形像 species)을 매개로 하여 인간 지성을 형상화(形相化)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과 인식행위가 단일하다“(idem intellectus et intellectum et intelleigere)는 토마스의 명제가 성립한다. 이 형상(形像)이 인식과 인식된 것의 동일성을 보장한다.형상(形像)은 주체와 객체 사이를 매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식하는 존재자의 정신의 존재적 완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식론이 의문삼아야 할 것은 (거의 모든 인식론이 이것을 문제삼는 것처럼) 주체와 인식대상의 간격이 어떻게 극복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인식자와 동일한 인식된 것이 어떻게 인식자와는 다른 것처럼 대치해서 드러나느냐는 문제이다.

 

즉 질문에서 인간이 자신을 세계와 자기로부터 분리시켜서 생각하고 자신을 의문에 붙이는 것이다. 만약 질문자가 감각적으로 체험된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대치(對峙)하는 가운데, 질문자의 의식은 (대상과 마주선) 주체 자신에게로 귀환(歸還)하는 작용을 하는 셈인데, 이것을 인식 주체의 자기귀존(自己歸存) 혹은 자기내존립(自己內存立: reditio completa in seipsum)이라고 부른다. 거의 모든 인식론자들은 바로 여기서 인간의 정신성을 본다. 자기를 판단하고 자기를 대상화함으로써 인식자를 엄밀한 의미로 하나의 인식주체(認識主體)로 만드는 인간 인식의 능력을 지성(知性 intellectus)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인식은 존재의 자기귀존이며 이 자기귀존이, 라너가 볼 때에,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을 인식하든지 그 인식행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의문에 붙이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의 본질에 의문에 붙여진다는 뜻이다. “한 인식 대상에 대한 질문은 인식하는 주체인 본질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고” “인식은 인식된 것뿐만 아니라 인식자마저 문제에 끌어들여 인식은 대상의 특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구조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하나의 사물을 묻고 파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는 점에서 만사를 의문에 붙이고 있다. 즉 인간은 존재일반(存在一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다. 하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것, 전적으로 미지적(未知的)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끝없는 질문에는 함축적으로 내포된 ‘전반적 지식’이 반드시 깔려 있다고 추정할 만하다. 다시 말해서 “함축적으로 알려진 것”만이 “명시적으로 질문된다.” 인간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내놓는다는 사실로부터 존재일반에 대해서 원천적 질문을 행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음이 증명되고, 이 원천적 질문 가능성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일반에 대한 잠정적 지식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인식을 분석하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존재 일반에 대해서 질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질문이 가능하려면 인간이 본래부터 존재일반에 대한 선행적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말을 달리 하자면, 인간에게서 질문받는 그 존재는 인간에게 의문을 띤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항상 이미 알려진 것이다.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요 세계내존재자(世界內存在者)이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인간은 존재일반(存在一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존재 질문 제기의 가능성이 어디서 오느냐는 물음을 내세워 그 근거를 규명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조건은, 비록 주제적(主題的)이고 명시적(明示的)인 지식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간의 모든 인식과 물음 속에, 존재에 대한 비주제적이며 함축적인 지식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준다.

 

모든 존재에 관한 인식가능성을 적어도 가능태로, 혹은 함축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 존재의 본질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 질문 속에 포함된, 존재 일반에 대한 잠정적 지식이 모든 존재의 ‘근본적 인식가능성’이 되어 주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세계의 모든 존재자가 인간의 인식에로 정향(定向)되어 있다는 선험적이고도 필연적인 명제가 성립한다. 한 마디로, 인간은 그 인식활동 전반에서 초월적 존재이해를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초월철학적 인간 규정

 

질문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데, 무엇을 인식하고 파악하면서도 자기가 여전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질문된 존재로부터, 존재일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의문의 여지없이 전체적으로 존재를 소유하고 있다면 더 이상 질문할 필요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자는 그 엄청난 범위의 존재일반 앞에서 자기를 유한자(有限者)로 규정하게 된다. 자기의 가장 내밀한 존재기반이 취약함을 함축적으로 의식하고 인정하게 된다. 자신만 아니고 인식하는 모든 대상들을 유한자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특수한 개별자를 특수한 개별자로 파악하는 능력, 즉 감각을 통하여 개별대상의 하성(何性 quidditas)을 파악하는 능력, 곧 어느 사물에 하성을 부여하는, 한계성 인식에도 해당된다. 그것을 “다른 것 아닌 바로 그것”으로 파악하고 규정하는 행위는 다른 것들을 이미 의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해서 개별사물을 파악하는 행위는 이 개별사물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많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존재에 대한 질문(質問)을 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충만한 존재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이 근원적으로 묻고 있는 존재일반 혹은 존재지평(存在地平)에 비추어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은 물론 인간이 파악하는 모든 개별실재들이 인식 주체에 의하여 “유한한 무엇”으로 파악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식론상으로 어떠한 것의 한계(限界)는 이 한계를 넘어섰을 때에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다. 일체의 인식은 일종의 규정(規定 determinatio)이며, 모든 규정은 한계(限界 termini)를 설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주체가 그 한계를 넘어섰을 때에만 그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

 

이처럼 감각에서 구체적 파악되는 바를 제한된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추상하는 가능성도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나 지평(地平)에 대한 전취(前取 Vorgriff)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 전취 속에서 지성의 본질이 있다. 이 전취가 지향하는 지점은 다른 개별대상들과 같은 유형의 대상일 수는 없고, 인식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의 절대폭(絶對幅 Absolute Weite)이다. 개별대상은 이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채우지 못한다는 점에서 제한된 것으로, 유한한 사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행위에서 관찰되는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일반은 바로 절대존재(esse absolutum)는 아니다. 여기서 뜻하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존재일반(esse commune)으로서 소극적인 비제한성만을 가리킨다. “존재의 부정적 비제한성”이라는 말은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존재가 무제한하다는 뜻뿐이다. 그러면 전취가 지향하는 존재일반과 우리가 하느님으로 추정하는 절대존재 사이의 연계점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 의식이 지향하는 일반존재는 사실상 유한자들의 집합이다. 이 존재자도 저 존재자도 유한자이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유한자의 총화(總和)인 존재일반 역시 유한하기는 마찬가지다. 유한한 존재자들의 숫자가 무한히(in infinitum) 늘어날 수는 있지만 그 총화가 존재지평의 절대폭을 남김없이 채우지는 못함을 가리켜 방금 “존재의 부정적 비제한성”이라고 하였다. 라너는 존재의 이 “부정적 비제한성”은 절대적 비제한성을 전제한다고 본다. 인간의 지성은 절대지평을 향하여 나아가는데 감각적 존재인 인간이 만나는 것은 한사코 물체적 사물들이요 그것들은 다수이고 조건지워지고 유한한 것들이다. 그것들의 총화라고 할 존재일반 역시 다수들의 통일, 조건들의 총화, 유한자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지성이 존재일반을 다수적이고 조건적이고 유한한 무엇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절대 유일하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 의미에서 무한한 존재 자체를 전제하는 의식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절대존재를 경험 자체의 근거로 전제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라너는 존재일반을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절대존재인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되고 있다고 답변한다. 절대존재로서 하느님의 실재가 전취의 폭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함께 긍정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취는 하느님을 지향한다. 절대지평에 놓고서 볼 때만 사물이 유한한 것으로 규정되며, 모든 사물이 존재일반으로서 그 지향점이 되는데, 그러한 가운데 그 절대지평을 실제로 남김없이 채우는 것은 절대존재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한성(有限性) 파악은 절대성(絶對性)에 대한 함축적 의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결국 인식 주체의 모든 인식행위 속에는 절대존재인 하느님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는 결론을 향한다. 인간정신의 지향점으로서 절대존재가 인간 정신의 본질인 전취(前娶)의 폭(幅)을 남김없이 채운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이 인식 주체의 행위 성취 속에 함께 긍정된다는 말이다. 그 논거는 다음과 같다. “한 존재자의 현실적 유한성의 긍정은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절대존재의 실존의 긍정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 긍정은 유한한 존재자의 제한성을 인식케 하는 존재에로의 전취 속에서 생기고 있다.“ 이리하여 원래부터 인간은 하느님 지향의 초월이라는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라너의 목적은 여기서 달성된다.

 

(3) ‘세계내정신’(Geist in Welt)으로서의 인간의 절대초월

 

말을 되풀이하자면, 토마스의 실재론에 입각하여 본다면 인간은 생득적인식(生得的認識)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시공간에서 자기를 현시하는 대상을 파악함으로써만 인식자가 될 수 있다. 즉 인간의 인식은 취득적 인식이요, 따라서 감각적 인식이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자기로부터 덜어져 있는 세계에로, 타자를 향해서 투기(投棄)되어 있다.

 

앞서 말한, 존재와 인식의 본원적 단일성에 입각하여 본다면, 원리상으로 인식이란 존재의 자기한테 있음(Bei-Sich-Sein)이요, 인간에게 일차적으로 인식된 것(das Ersterkannte; intellectum)은 인식자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시공간에서 행하는 취득인식에서 일차적으로 인식된 것은 인식자인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감관 앞에 자기를 현시하는 타자(他者)가 된다. 취득인식자로서의 인간은 존재상 ‘타자’의 존재라는 말이다.

 

다만 인식자의 [존재론적] 구조는 인식된 것의 [존재론적] 구조로부터 알아낸다는 선험적 방법을 채택한 이상, 인간이 얻는 취득인식의 대상, 곧 감각의 대상은 질료적 존재, 물질적 존재임이 확인된다. 그래서 인간의 인식은 “자기한테 있음”(Bei-Sich-Sein)이자 “타자에게 있음”(Beim-Anderen-Sein)이라는 양면성을 띤다. 즉 감각적 대상이 인식자에게 자기를 열어보여야 인식이 발생하고, 그 때 발생하는 작용은 인식대상 자체의 실재가 된다. 그렇지만 인식대상의 그 작용이 감각적 인식자의 형상(形相 forma)이 되고 인식자의 실재, 인식주체의 규정(Bestimmung)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규정 곧 형상(形像 species)은 동시에 인식대상이 자체를 자체의 작용을 통해서 보여주는, 인식대상측의 규정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러한 양면성이 발생하는가?

 

그런데 존재일반을 향한 인간 정신의 초월, 그야말로 절대초월이 결국은 절대존재를 지향하기는 하지만 절대존재는 자신을 인간인식의 직접대상(直接對象)으로 제시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전취(前取)의 폭(幅)으로서, 지평(地平)으로서 제시할 뿐이다. 방금 말한대로 전취 속에서 절대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기는 하지만 무한한 절대존재로 나아가는 통로는 유한한 타자들을 어디까지나 유한자로 부정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즉 시공간 속에서의 역사적 처신으로만 절대존재를 긍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시공간 속에서의 역사적 처신으로만 절대존재를 긍정하게 된다는 인간의 기본처지를 라너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존재일반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야만 하는 인간의 필연성은 인간이 자신을 “유한한 현존재”로 의식하고, 아울러 자기가 존재세계에 던져져 있은 필연적 처지 곧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의 필연성”을 의식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에 의해서 지금 여기에 “놓여있음”(positum)을, 현존재의 피투성(被投性)을 필연적으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현존재의 피투성(被投性)을 필연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현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자기 현존재의 절대적긍정(絶對的肯定)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우유적 존재임을 긍정함이 인간에게는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므로 인간 현존재의 우유성(偶有性) 속에서 절대성이 현시된다. 왜 인간이 자기 존재를 우유적인 것으로 의식하느냐 하면 어떤 필연성 혹은 절대성을 선취(先取)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거에서다.

 

자기존재의 우유성 혹은 유한성의 긍정은 단지 인식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또한 의지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기의 우유성을 정립하는 근거는 우연한 인식이 아니고 자기를 우연적인 존재로 긍정하는(= 정립하는) 의지적 행위이다. 그것이 의지적 긍정이므로 절대적 존재의 수용이 전인적(全人的)이다. 의지야말로 “자유로운 정립의 추성취(追成就 der gesetze Nachvollzug einer freien Setzung)" 쉽게 말해서 세계에 이미 던져져 있는 자기 처지를 의도적으로 긍정하고 수용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피투성(被投性)을 필연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더구나 의지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자기를 그 자리에 “던져 놓은” 혹은 “앉혀 놓은” 타자에 대한 긍정이 함의되는 까닭에, 인간이 취하는, 자신에 대한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처신은 자유로운 창조주를 긍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적 정립(positum)이라고 의식하고 긍정하는 결단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의지로 유한한 존재자인 자기를 지탱하여 준다는 사실을 수긍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 의시적 수긍, 혹은 자기 우유성 혹은 한계성의 인정은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초월(超越)의 시작이기도 하므로, 인간이 자신의 피투성을 자유로이 즉 자기 의지로 긍정하는 순간, 인간은 절대적 초월, 그러나 아직 궁극적으로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은(물론 결코 충만하게 채워지지는 않는다) 초월을 이미 감행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는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선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자기를 상대로 자유로이 행동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드리며,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자기전달 혹은 계시 앞에 선다는 뜻이다.

 

(4) 인간의 역사성

 

이렇게 인간의 초월하는 지향점 내지 과녁이 절대지평이므로 “인간은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이다.”라는 명제가 나올 법하다. 누차 강조한대로, 하느님은 구체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지평의 최종지향점으로서, 인간 의지의 작용에서 본다면, 하느님은 유한한 가치를 가치로 파악할 가능성의 조건으로서만 나타난다.

 

라너의 인간학에서 인간은 자유행위를 할 적에 자기 행동이나 사상을 놓고 결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에 대해서 결단한다. 개개의 모든 행위에서 자기의 전체 행동과 삶의 법칙을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함[= doing]은 곧 그의 존재정립[= being]이다. 인간이 선하게 행동하거나 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행위를 통해서 인간자신이 선하게 되거나 악하게 된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역사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된다.

 

인간의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이 오로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처신 속에서만 성취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개별대상 앞에서 취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결국 인간의 자기규정(自己規定)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많은 개별적인 결단 속에서 자신에게 대한 결단을 내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과 하느님께 대해 처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규정 혹은 자기긍정이 엄밀한 의미의 신신앙(神信仰)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종교적 성격을 띤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라면서 라너는 역사의 형이상학적 차원을 제시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인간의 역사성(歷史性)이라는 것은 시공간(時空間)을 형성하는 인간의 육체성(Leiblichkeit)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질인 자유(自由)의 유일회성과 비예견성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자유행위는 역사적(歷史的)인 것이다. 이처럼 역사성이 인간 현존재의 본질적 고유함이므로 인간의 역사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자기전달 곧 하느님의 계시가 발생가능한 장소가 된다.

 

라너는 초월적 연역방법으로 인간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정신”임을 분석해내고서, 계시의 장(場)은 다름 아닌 “인간의 역사”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계시는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역사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이 계시를 파악하려면 자기 역사의 특정한 시점을 향해야 한다.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의 전체 역사의 범위내에서 시공간적으로 고정된 사건으로 기대할 수 있다. 개별적인 인간은 전인류의 지체(肢體)인 한, 역사적 존재로서 이 인류의 역사를 향하고 서 있어야 한다.“인간정신은 본질적으로 역사에 정향되어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로써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청취하여야 한다. 그리고 청취자 없이는 계시가 무의미하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계시의 청취자, 말씀의 청취자여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가능한 자유로운 계시를 위한 순종적 가능태”라고 다시 정의된다.

 

III. ‘익명의 그리스도인’ 신학 개략

 

이상의 철학이론 내지 초월적 인간학을 토대로 하여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정립하는 신학이론이 뒤따른다. 신학부분은 대략만 소개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수립하기 위하여 라너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도달코자 한다.

 

○ 인간은 만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일반적(보편적) 구원의지(救援意志)의 대상이다.

○ 하느님은 이 구원의지를 통해서 애당초부터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 혹은 계시가 곧 하느님의 은총이다.

○ 인간 역사는 단일한 인류사로서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서 관통되어 있다.

○ 그러므로 인간은 원래부터 하느님의 은총에 에워싸여 형성되는 존재이고

존재론적으로 은총에 의해 이미 들어 높여져 있으며

그의 모든 인식과 의지작용 역시 ‘초자연적’이다.

○ 따라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가능하다.

 

고전적으로 그리스도교, 적어도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救援論)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지상생활 중에)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소유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 창조되지 않은 은총은 인간이 천상영광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을 누리는 존재론적 전제이다. 그런데 은총의 본질이 “하느님의 자기 전달 (Selbstmitteilung Gottes)"이고 신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이 ”지복직관을 향하는 자연적[타고난] 열망(desiderium naturale in visionem beatificam)"에 있다면, 하느님의 자기전달과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자기초월 사이에는 선험적인 초자연적 관계가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의 본질이 하느님 지향의 초월이라면 인간은 애당초부터 실존론적으로 은총을 입고 있다, 즉 신화(神化)되어 있다는 말이다. 라너가 일평생 강조하고 반복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란 모든 인간이 실재로 또 존재론적으로 은총을 입고 있는 처지를 가리키고, 그리고 은총을 입고 있는 이 처지는 구원에 필요하다는 ‘초월적’ 신신앙(神信仰)을 전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한편으로는 의화(義化)와 은총의 상태 속에서 생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복음의 명시적 설교와 접촉하지 않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 이라고 정의되는만큼, 만약 위에 말한 조건들이 초역사적이고 역사적으로 충족되어 있음을 논증한다면, 인간은 실존적 입장표명을 하기에 앞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초자연적 실존 덕분에 세례받지 않은 사람 역시 구원에 필요한 초자연적 신앙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산다, 다시 말해서 세례받은 그리스도인과 세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응 결론에 무리없이 도달하게 된다.

 

(1)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

 

라너의 신학적 인간학 출발점은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이며, 다른 모든 공리들은 이 공리에로 소급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느님이 ‘참으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신다면 그분의 구원의지는 애당초부터 전인류를 포괄하고 있어야 하고, 전인류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와 “구원받으려면 그리스도 신앙이 필요하다”는 두 명제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 라너는 인류가 단일한 역사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육화(肉化)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이미 축성된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전인류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선험적으로 정향되어 있다(ordinantur: Vat.II)는 답변을 하면서, 다만 교회에 소속해야 하는 필요성이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에의 함축적(含蓄的) 소속(所屬)으로 대치될 수 있다는 단서를 붙인다. 실상 200만년에 걸친 인류사에서 기성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겨우 2천년의 짧은 역사에 매우 소수에 불과한 사람만을 신자로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2) 은총의 지속적 제공

 

라너의 초월신학적 통찰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 현존재를 지탱하는 근거이면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가깝게 당신 자신을 전달하신다. 그가 말하는 “은총은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사물적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정신적 주체의 규정이다.” 우리가 종교를 “인간 자신의 본질 기반, 실존기반 그리고 의미근거에 대한 인간의 관계”라고 정의한다면, 개별인간의 모든 언행, 곧 그의 전적이고 실존적인 투신이 이 관계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인간의 모든 언행은 이미 종교적이요 종교는 인간의 내적 본질에 속한다. 인간이 자기가 처한 역사적 시점에서 자기가 신봉하는 자기의 종교를 통하여 은총의 수혜자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라너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을 어떻게 인간의 본성과 결부시켜 설명할 수 있는지, 인식론적 표상을 빌려 설명한다. 자연(natura)과 은총(gratia)이 이질적인 두 요소의 길항적(拮抗的) 관계처럼 이해하는 현대인에게 설득력있는 해설이라고 본다.

 

앞의 인식론에서 라너는 “인식함”과 “인식되어 있는 것”의 원천적 단일성을 주장하면서 인식 매개인 형상(形像 species)이 단지 인식대상으로부터 오는 지향적 존재에서 그치지 않고 인식자라는 존재자를 존재론적 규정한다고 하였다. 인간 지성은 인식대상의 형상(形相 forma)에 의해서 형상화(形相化)한다는 스콜라철학의 명제대로다.

 

그러면 인간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에 대한 지복직관(은총의 소유는 지복직관의 핵이자 발단이다.)에서 인간의 자연본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라너는 ‘지복직관’의 경지에서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 저 형상(形像 species)의 역할을 한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하느님은 인식자인 인간에 의해서 일차적으로 인식된 실재가 된다. 이 말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실재에 의해서 규정되고 하느님의 실재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지복직관의 존재론적 전제는 유한한 정신의 실재가 무한한 “하느님의 실재가 됨”에 있다.

 

이처럼 하느님이 자기전달[= 은총] 속에서 순전히 하나의 창조된 선물(gratia creata)을 전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피조물에게 전달하여 당신 자신이 인간의 내적 존재론적 실재가 되며 목표가 된다면, 세례받지 않은 인간들 역시 하느님의 이러한 일반적 구원의지에 입각하여 이 처지로부터 제외되어 있지 않고 애당초부터 이 은총에 관통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화된 인간 속에 있는 은총이 인간의 궁극목표인 지복직관의 존재론적 전제라고 할 때에, 하느님의 자기전달로서의 이 은총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의화된 인간에게 비록 시작단계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주어져 있다. 이 은총은 인간이 현실적으로 하느님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이 세계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은총을 의미하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란 창조되지 않은 당신의 신적 실재 속에서 피조물의 실제적인 규정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반적인 구원의지에 입각하여 볼 때에 사실상의 창조(創造)는 그 자체가 하느님 자기 전달의 내적 소인, 즉 가능성의 전제조건이며, 여기서 수취자의 상황은 하느님이 도착하는 데 선험적인 장애가 되지 않아야만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전달이 가능해질 터이므로, 모든 인간에게 그 은총 혹은 자기전달을 받아들일 내재가능성 곧 ‘순종적 가능태’(potentia oboedientialis)가 원래부터 있다.

 

(3) 그리스도 사건과 객관적 구원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가 세계사와 인류사를 맨처음부터 포괄하고 있다면 성화(聖化)하는 은총이 전인류사 안에서 발생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므로 특정한 역사적 사건은 그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여 역사 전체에 파급되어야 마땅하다. 또 세계는 참으로 하나의 단일성이자 하나의 역사를 갖는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이의 상호예속성 하느님의 원천적 창조의지로부터 유래한다. 그리스도 사건은 실재들의 이 존재론적 단일성에 입각하여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란 모든 인간의 인성과 본질상 동일하고 우리에게서와 그에게서 전제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본다면,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자 하느님의 자기 외현(外顯)이다. 절대자는 스스로 타자적인 것[= 그리스도의 인성], 유한한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인간편에서도 인간의 본성(本性)이 과연 무엇인지는 로고스의 자기외현(自己外顯)에 의해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육화야말로 인간의 절대지고의 충만이다. 그렇게 볼 적에 “인간이란 하느님의 자기외현화의 가능한 타자이고 그리스도의 가능한 형제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사와 인류사의 절대절정이므로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이 그리스도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다. 또 로고스의 육화는 하느님의 지고한 창조행위이므로, 세계의 모든 실재들은 육화의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에게 제공된 은총을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규정할 수 있고, 육화 이후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질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적”이다. 그러므로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적’으로 규정된 초자연적 질서에 의하여 관통되어 있다. 본인이 이를 원하거나 원치 않거나 상관없이,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 현존재의 성취가 애당초부터 이 그리스도 사건의 초자연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태초의 창조(創造)와 역사적 한 시점에서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한 세계와 인류의 구속”은 외부를 향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 자기 전달의 단일한 역사(役事)이며, 말씀의 육화는 창조계획의 절정에 해당한다. 초월적 그리스도론에 입각한다면, 인류가 로고스의 육화 이래 전체적으로 축성되었고 구속되었다. 즉 육화를 통한 인류의 구속은 육화 이후 성취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을 위해 종말론적 궁극성을 지니는 기본으로 소여되어 있다.

 

(4)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의 기본처지

 

라너는 “인간 실존”을 “하나의 인격적 행위보다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면서 이를[= 인격적 행위를] 가능케 하고 규정하는, 유한한 정신 인격의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구조성”으로 간주한다. 만약 ‘초자연적 실존’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자기 전달 곧 은총으로 변화된 존재를 가리키고, 아예 창조부터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요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자기전달[계시이자 은총]의 수취자로 창조받았다면, 인간은 자기자신을 전달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실천적인 ‘능력’(potentia oboedientialis)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상 인간은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이 ‘능력’은 인간 현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것, 본연의것, 중심이며 연원이어야 한다. “그는 이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인간의 중추적이며 지속적인 실존’이고, 그리고 이 지속적인 실존은 곧 “초자연적 실존”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실존하는 인간이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할 것이 아니고) 자유스러운 선물이자 예기치 않았던 기적으로 수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비록 그 초자연적 실존이 당초부터 지속하더라도 그의 실존 자체는 비채무적인 것으로, 즉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곧 은총으로 나타난다.

 

애당초부터 인간들에게 제공된 은총 내지 객관적 구속을 논할라치면 으레히 인간의 기본처지를 지적하면서 본성(natura)과 은총(gratia)의 관계를 따지게 된다. 순수한 자연본성과 초자연적인 은총을 대당시키는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런데 창조와 구속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에 ‘순수 본성’이란 것은 라너에게 하나의 가상물(假想物)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자기전달 없이, 따라서 인간의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실존을 제외하고서 가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남는, 일종의 ‘잔여개념’(殘餘槪念 Restbegriff)일 뿐이다. 실제로 ‘순수한 자연본성’이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이며 본연의 본질로서의 지복직관에의 본성적인 열망, 즉 하느님께로의 정향은, 인간이 비채무적 은총의 수취자이되 절대존재에로 정향되어 있는 그의 인간임이 마치 하느님 자기전달의 자유로운 선물없이도 가능하고 의미 있으리라고 상상할 적에 ‘가정되는’ 인간 본성이다. 인간 본성의 창조 역시 애당초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omnia quae facta sunt per Verbum facta sunt)이루어진 것이므로 ‘순수본성’은 보조개념에 불과하다.

 

사실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인간의 현존재는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의 지평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고, 또한 그의 현존재가 항상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늘상 생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종일관 하느님의 초자연적 구원의지의 지평 속에서 살아간다. 결국 인간의 실존은 항상 초자연적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존재론적 기본처지는 항상 초자연적 실존이다.

 

인간은 엄연히 초자연적 실존 곧 객관적으로 구속된 초자연적 실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행업에 입각하여 인간은 주관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기 이전에 이미 단순한 피조물이나 단순한 죄인과는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실존적 입장표명을 하기에 앞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초자연적 실존 덕분에 세례받지 않은 사람 역시 구원에 필요한 초자연적 신앙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산다.

 

하느님으로부터 미리 소여되어 있는 이 실존적 상황이 실존적 입장표명을 통하여 아직 수용되지 않았거나 거부되지 않는 한, 범주적으로만 아니고 선험적으로, 초월적으로 거부되지 않는 한 그러하다. 비록 비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통한 그의 실재-존재론적 규정성을 개념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이를 시인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하다. 세례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일반적 구원의지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들처럼 초자연적 구원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비그리스도인은 이 처지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실존적 처지성은 그의 시작과 목표와 함께 주어져 있으며, 한 인간의 시작과 목표는 그의 구체적 삶을 부각시키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초자연적 실존과 함께 그에게는 신앙행위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 이미 놓여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