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신체의 형상이면서 실체일 수 있는가?

 

 

                                                                           [신학전망 141(2003), 97-116]

 

 

1. 서론

2. 영혼은 신체의 형상(anima est forma corporis)

3. “인간은 정신적이자 물체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4. 이성혼의 자립성

 

1. 서 론 

 

1.1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면서 인류는 세계와 인생 전체를 관조하는 시선을 얻고자 애썼다. 특히 인간의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지식, 유한하고 불완전한 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로움과 최고선(最高善)으로만 충족되는 인간의 근본욕구(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에 스스로 놀라워하면서 그 근거와 동기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인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양상에 각별한 호기심을 가졌고, “작용은 존재에 의거한다(agere sequitur esse)”는 공리 아래 주변의 물체들을 직관적이고 개체적으로 감각하는 능력과 더불어, 같은 대상을 보편적으로 추상해내는 능력이 자기 안에 별도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즉 인류는 지성(知性, intellectus)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면서 이런 능력을 발휘하는 자기 영혼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인류가 도달한 인간관 하나는 이렇게 간추려진다) ‘인간은 무생물과 동식물의 온갖 능력과 속성을 자신 안에 수렴하고 있는 영육의 합성체(compositum animae et corporis)’라는 하나의 인간관을 도출해낸다. (한편 인간은 경험을 통하여) 존재계에서 물질계와 정신계에 양편으로 결속된 중간지역으로서 신체를 지녔지만 동물은 아니며, 이성혼(理性魂)을 지녔지만 천사는 아니다. 만약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 기본관념을 간과하게 된다면, 정신과 신체 어느 한 편에 치우쳐 절반의 인간을 만들고 말 것이다.

 

1.2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개념을 빌어 자기 고유한 인간학을 정립하였다.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에서 모호한 측면을 정리하여 중세 이래 그리스도교 세계에 전문용어로 정착된 ‘영혼(anima)’, 즉 구원의 일차적 대상처럼 파악되고 인간의 불사불멸하는 측면이자 신의 모상이 드러나는 영혼이라는 것을 ‘신체의 실체적 형상(anima, forma substantialis corporis)’으로 간결하게 정의한 것이다. 아울러 이성혼의 고유한 능력인 지성을 관찰하여, 그 능력의 원리인 이성혼 자체의 자립성(subsistentia)을, 나아가 자신의 신앙을 배경으로 사후 이성혼의 자립적 존속까지 추론한다.

 

1.3 본고에서는 토마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주해」, 「신학대전」, 「철학대전」, 토마스가 자신의 독자적인 영혼론으로 집필한 「영혼에 관한 정규문제 토론」, 「지성의 단일성론」 등에서 인간에게 고유한 이성혼의 자립성(自立性)을 토마스가 어느 선까지 언급하였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그 방법으로는 토마스의 저술을 읽고 해설하는 문헌학적 방법론을 따르고자 한다.

 

2. 영혼은 신체의 형상(anima est forma corporis)

 

2.1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라는 패러다임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양면성을 해설하는 최선의 선택이자 철학사에서 인간을 두고 내리는 유물론과 이원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유일한 착상일지 모른다. 인간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해설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을 채택했던 토마스는 고대 플라톤의 이중실체론(二重實體論)이나 데모크리투스 이래의 물리주의(物理主義), 자기 당대에 마주쳐야 했던 아베로에스 사상이나 동시대인 시제루스의 단일지성론(單一知性論) 등과 토론하는 가운데, 영혼을 운동(運動), 조화(調和), 수리(數理)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데, 그러한 시도들은 결국 영육의 일치를 존재상의 일치에서 보지 않고 작용상의 일치로 봄으로써 영육의 합일을 본질적이 아니고 우유적인 것으로 만들게 된다. 토마스에게는 영혼이 인간의 형상인(形相因, causa formalis)이라는 설명 외의 어느 것도 인간의 단일성을 보존하지 못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명제는 해명이 필요하다. 일상으로 ‘나의 몸’, ‘그대의 영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신체에 영혼이 합쳐진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서 형상화된, 살아있는 신체 (corpus vivens anima informatum)’가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형상은 질료에 대해서, 질료의 현실태로서 존재한다. 만일 질료가 실제로, 곧 현실태로 존재한다면 이미 형상에 의해서 형상화한 질료(materia informata)일 것이다. 영혼은 신체에 대해서 실체적 형상이며, 실체적 형상은 그 사물을 그 사물이 되게 하는 원리이다.

 

2.2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 제2권에서 ‘영혼은 신체의 현실태’라는 정의와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라는 정의를 병용하다가 “영혼은 어떤 것으로 실현될 가능태를 지닌 것의 일종의 현실태 또는 형상”이라고 종합한다. 또 현실태와 형상을 종합하는 도식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實體)’를 매개념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영혼은 실체이다”, “그런데 실체는 현실태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현실태이다”라는 논법을 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과 현실태를 병합하기 위하여 밀초와 밀초에 새겨진 인장이 하나인가라는 물음이 무의미하다고 말했듯이, 토마스는 인간은 정신적이자 육체적인 단일 존재라는 점을 해명하는 데 ‘형태(形態)’라는 직유를 사용한다. “형태(figura)는 현실태이지만 현실태로 형태를 갖고 있는 물체(corpus figuratum)의 현실태는 아니다. 그런 물체는 (이미) 형태와 물체의 합성체(compositum ex figura et corpore)이다. 형태는, 형태를 받아들일 주체인 물체의 현실태이며 그 (물체는) 형태에 대해서 가능태가 현실태에 갖는 관계를 갖는다.” 인간이라는 생명체(corpus animatum)의 질료는, 생명에 대해서 가능태가 현실태에 대해서 갖는 관계와 같은 관계를 갖는데 이 “현실태는 영혼이고 영혼에 힘입어서 물체가 살아 있다.”

 

3. “인간은 정신적이자 물체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3.1 영혼을 신체의 형상, 그것도 실체적 형상으로 규정하면, 존재자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따르는 이상, 영혼은 영혼이 형상화하는 질료 곧 신체가 없이는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사망 후 영혼의 존속, 즉 그리스도교 육신 부활신앙에 입각하여 인간이 죽은 다음 육체 부활이 있기까지 잠정적 상태에서의 영혼의 존속을 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오는 의문에 답변해야 했다. 즉 이성혼이 신체의 형상이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자립하고 존속할 수 있냐는 의문이다.

토마스에게서는 이 주제가 「영혼론 주해」 제1권 전체에서 “영혼은 작용인가, 아니면 실체적인 무엇인가?”라는 토론에 집중되고 「신학대전」에서는 “영혼은 물체[신체]인가?” 혹은 “영혼은 자립하는 무엇인가?” 그리고 “영혼의 본질은 곧 영혼의 능력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된다. 또 「영혼에 관한 정규문제 토론」에서는 “인간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자 (실체적 개체 곧) ‘바로 이것’인가?”라는 아주 분명한 질문으로 나타난다.

 

3.2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토마스는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다(anima est forma corporis)”라는 명제와 “영혼은 자립하는 무엇이다(anima est aliquid per se subsistens)”라는 두 명제를 공존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성혼을 ‘지성적 작용의 원리(principium intellectualis operationis)’라고 명명함으로써 지성(intellectus)을 매개념으로 삼고 “작용은 존재에 의거한다”는 공리를 이용하여 이성혼의 독자적 작용과 독자적 존재를 도출코자 한다. 지성이 이성혼의 지성적 원리이기 때문에 환유법(換喩法, denominatio)을 구사하여 ‘인간 영혼, 또는 지성이라고 부르는 영혼’이라는 표현이 무리하지 않다면서, 신체에 절대적으로는 의존하지 않는 지성의 작용이 관찰되므로 지성이라는 능력의 원리인 이성혼이 자립한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이보다 이성혼을 더 직설적으로 지칭하여 그 자립성을 언명하기도 한다. “신체와 영혼은 현실태로 존재하는 두 실체가 아니고 그 둘에 의해서 현실태로 존재하는 단일한 실체가 된다.” 그렇지만 생명체의 영혼들 가운데 이성혼은 특수한 위치를 갖는다. “이성혼은 존재에 있어서 신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용에 있어서도 신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3.3 「신학대전」에서 “인간 영혼은 자립하는 무엇인가?”라는 문항의 본문에 이 이론의 개요가 드러난다.

“인간 지성의 본성은 비물체적(非物體的)일 뿐더러 또한 실체(實體) 즉 자립(自立)하는 무엇이다.” 지성적 작용의 원리(우리는 그것을 인간 영혼이라고 일컫는다)가 되는 것은 비물체적이고도 자립하는 원리여야 한다. 인간은 지성(知性)을 통해서 모든 물체들의 본성들을 인식함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른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는 자는 자기 본성에 자기의 [고유한 형상(形相)을] 일체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지성적 원리가 어떤 물체의 본성 [즉 형상]을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면, 모든 물체들을 인식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물체는 한정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성적 원리는 물체일 수 없다.…

그러므로 지성적 원리, 혹은 정신 또는 지성이라고 부르는 이 원리는 육체가 [본질적으로는] 참여하지 않는, 자기 고유한 작용을 한다. 그런데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작용하지 못한다. 현실태로 존재하는 자만이 작용하므로, 어느 사물의 작용 방식은 그것의 존재 방식에 따른다.… 그리하여 인간 영혼, 지성 또는 정신이라고 부르는 영혼은 비물체적이면서도 자립하는 무엇이라는 결론이 남는다.

이 본문은 “인식은 무엇을 행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인식하는 대상이 되는 존재론적 사건이다(cognoscere est esse)”라는 공리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의 형상인 이성혼 또는 지성은 다른 사물들의 형상들을 무제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물론 가능태로서만). 말을 바꾸면 지성은 인식하는 가운데 무슨 사물이든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성이 이미 어느 한정된 물질적 형상에 의해서 형상화되어 있다면 무슨 사물이든지 된다는 일이 불가능해진다는 요지이다.

다른 데서는 지성이 신체에 의존하지 않고서 작용한다는 증거를 지성의 완전한 자기회귀(conversio completa ad seipsum intellectus)를 논거로 들기도 한다. 자기 본질을 인식하려면 자기 본질로 완전회귀를 통해서만 인식하는데 생명체라는 유기체에서는 이런 작업이 불가능하므로, 자기를 인식하는 지성은 신체로부터 독립하여 작용하는 영적인 무엇이라는 논거이다.

 

3.4 방금 인용한 본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을 앞세우면서 토마스는 우리 논제의 정답을 “인간 지성의 본성은 비물체적일 뿐더러 또한 실체, 즉 자립하는 무엇이다(non solum est incorporea, sed etiam substantia, scilicet aliquid subsistens)” 라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 지성’ 혹은 ‘지성적 작용의 원리’(우리는 그것을 인간 영혼이라고 일컫는다)를 연계시키고 그 다음 ‘지성적 원리 또는 지성’으로 환치시켰다가 ‘인간 영혼 또는 지성이라고 부르는 영혼’으로 통합 복창하는 환유법이 눈에 띈다. 지성은 단지 영혼의 일부분인데 어떻게 동치되느냐는 반문이 있을 터이므로 토마스의 이러한 논리적 전략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영혼의 본질 자체가 곧 영혼의 능력인가?”라는 문항에 토마스는 “영혼의 본질이 곧 영혼의 능력(potentia animae)일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지성 자체는 실체적 형상인 이성혼으로부터 파생한 일개 능력, 곧 우유적 형상이므로 결코 자립할 수 없다. 작용이나 능력이 곧 실체인 경우는 신뿐이고, 영혼이 생명체를 현실화하느라 늘 현실태에 있다면 작용원리인 지성도 늘 현실태에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사유를 중단하는 순간도 많다는 경험적 사실을 논거로 내세운다. 과연 능력이라는 것은 사물의 작용원리일 따름이고 영혼의 지적 작용의 원리는 어디까지나 지성적 능력, 곧 지성일 뿐이다.

 

3.5 그렇지만 지성과 이성혼의 환유가 가능하다는 논거는 여러 가지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상위의 능력은 하위의 능력을 내포하고” 인간은 단일한 영혼 곧 이성혼 하나를 갖고서 식물의 섭생과 동물의 감각 및 인간의 사고작용을 아울러 수행하고 있는데 지성이 이성혼의 최고능력인 이상, “지성혼은 지성의 명칭으로 이름이 불리울 적마다, 실은 그 주된 기능에 의해서 불린다”면서 이성혼이 그것의 최고능력인 지성에 의해 명명될(nominari)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영혼은 우리가 생명의 제반 활동을 작용시키는 제일(원리)이다. 영혼을 … 제일(원리)로 삼아 우리가 인식을 행한다. 우리가 제일(원리)로 삼아 인식을 행하는 이 원리는 지성이라고도 하고 이성혼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육체의 형상이 된다.”

 

3.6 이어서, 작용의 관점에서 “부분의 작용이 전체의 작용으로 귀속한다”는 설명도 있다. 더구나 영혼은 생명체의 생명활동들의 궁극 원천이므로 작용의 원리들인 능력들과 구분되는 영혼 역시 궁극적으로 작용의 원리라고 불릴 수 있다. 실체적 형상 덕분에 우유적 형상이 작용원리가 되는 까닭이다. 다만 영혼이라는 “실체적 형상은 작용의 제일원리이다. 그러나 직접 원리는 아니다(primum principium, sed non proximum).” 즉 지성이라는 능력은 작용의 직접적 원리이고 영혼은 작용의 제일원리이므로 양자에게 ‘작용의 원리’라는 표현이 가능하므로 ‘지성’이 이성혼을 가리키는 대안적 표현으로 가능하다는 논변이다.

 

3.7 세 번째로, 단일지성론을 주장하여 인간에게 깃든 것은 감각혼에 불과하므로 개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는 단일한 지성이 인간 영혼에 속한 능력이 될 수 없다는 아베로에스의 주장에 대해서 토마스도 지성이 신체의 현실태가 아니고 영혼이 신체의 현실태임은 인정한다. 그렇더라도 지성이 영혼에 속할 뿐더러 지성은 다의적(多義的)으로 영혼이라 불리울 수 있음은 양보하지 않는다. “주해자와 그의 추종자들이 왜곡하여 가르친 것처럼, 지성은 다의적으로 영혼이라 불릴(intellectus equivoce dicatur anima) 수 없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4. 이성혼의 자립성

 

4.1 이상의 환유법을 거치면 지성의 고유한 작용을 관찰하고서 이성혼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추론하는 논리가 수긍된다. 토마스의 기본 논지는 다음과 같다.

 

M  “지성적 원리, 혹은 정신 또는 지성이라고 부르는 이 원리는 신체가 (본질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기 고유한 작용을 한다.”

m  “그런데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작용하지 못한다. 어느 사물의 작용 방식은 그것의 존재 방식에 따르는 까닭이다(eo modo aliquid operatur quo est).”

c  “그리하여 인간 영혼, 지성 또는 정신이라고 부르는 영혼은 비물체적이면서도 자립하는 무엇이라는(esse aliquid incorporeum et subsistens) 결론이 남는다.”

 

4.2 지금 인용하고 있는 「신학대전」 텍스트에서 “지성적 원리, 혹은 지성이라고 부르는 이 원리는 육체가 (본질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자기 고유한 작용을 한다”는 선언에 뒤이어 즉시 위의 논증을 개진하면서 토마스는 독자적 작용이 독자적 존재, 곧 자립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표명하고서 소전제는 대전제를 방증하는 공리처럼 제시하고 있다. 사실 작용과 존재의 상관성은 “작용은 존재에 의거한다(agere sequitur esse)”는 명제와 더불어 “작용이 사물을 존재하게 만든다(est res quod operatur)”는 명제로서 성립된다.

먼저, 고유한 작용을 하려면 고유한 존재를 지녀야 한다. 첫째 명제를 “사물은 존재하는 방식대로 작용한다(eo modo aliquid operatur quo est)”는 형태로 제시하고서 고유한 작용을 한다는 것은 고유한 자립성을 갖추었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은 존재와 작용을 유사하게 갖는다”는 명제마저 얻어낸다. 이 명제를 달리 확인하는 뜻에서 토마스는 “사물은 그 작용을 보고서 존재한다(res sunt propter suas operationes)”고 말하고 있으며, “제일현실태가 제이현실태를 보고서 존재하듯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나 역으로, “그 사물이 하는 작용을 한다는 바로 그것이 (그 사물이) 그 사물로 존재하게 하며, 사람이 사람인 것은 사람이 하는 작용을 하는 까닭이다.” 이 명제를 방증하여, 작용이 고유한 존재(‘그렇게 있음’, essentia)를 만들어낸다고, “무엇이 인식자에 의해서 인식될 때에, 인식 대상은 어느 면에서 인식자에게 존재한다”고 덧붙인다. 나아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살아있는 것에게 존재는 다름 아닌 살아있음이다”라는 명제에 “살아있음은 생명의 작용이다”라는 자기 특유의 명제를 덧붙이기도 한다.

 

4.3 자립성의 정확한 의미를 밝히기 위하여 토마스는 우선 「신학대전」 29문 2항에서 자립성(subsistentia)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개념정리를 해 놓은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 실체를 두 가지 양태로 말한다. 그 하나의 양태는 실체는 사물의 하성(何性, quidditas rei)이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실체를 우시아(usia)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것을 본질(essentia)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양태로는 실체(實體) 혹은 자주체(自主體 suppositum)라고 불리는데 이런 자주체는 실체의 유(類) 안에 자립하는 것이다.…

사물을 표시하는 명칭들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 이것은 실체를 세 가지로 고찰하는 데 기인한다. 즉 그 자체로 존재하고 다른 것 안에 존재하지 않는 데(per se existit non in alio) 따라서는 자립체라고 불리운다. 사실 우리는 다른 것 안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립한다고 부른다(illa enim subsistere dicimus quae non in alio, sed in se existunt). 또한 그것이 어떤 자연물을 공통적으로 기초지어 주고 있다는 데에 본성의 사물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이 사람’ … 또한 그것이 우유들을 밑받침하고 있는 데 따라서는 자주체 혹은 실체라고 부른다.

먼저 알아둘 점은 이 텍스트를 보더라도 토마스의 인간론에서 확립하려는 대상은 이성혼의 자립성(subsistentia)이지 엄밀한 의미의 실체성(substantialitas)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급적 ‘실체’를 영혼의 술어(anima est substantia)나 동격어(anima, substantia corporis)로 쓰지 않으며 방법론상으로는 ‘자립체’와 ‘실체’를 구분하여 이성혼의 자립성을 도출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토마스가 말하는 자립성의 정확한 의미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같은 사물이 그 자체로 존립한다는 점에서는 자립체라 하고, 우유들의 밑받침이 된다는 뜻에서는 실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사실 우리는 다른 것 안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자립한다고 부른다.” “받쳐주는 외부적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체 안에 받쳐지고 있는 것을 자립한다”고 표현하여 이 조건만을 채우면 어떤 실체의 자립성이 성립하는 여지를 마련한다. 실제로 토마스는 「영혼론 주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따르면서 자기도 영혼을 실체라고 명명하는 의도를 세부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영혼을 가리켜 먼저 그리스어 οὐσία의 라틴어 번역어 essentia와 동일한 의미, 즉 존재자(ens)라는 뜻으로, 그리고 그 ‘존재자’를 10개 범주로 분류하였을 적에 우유(偶有)들과 대칭되는 의미의 실체(實體)로, 그리고 끝으로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로 거론한다. 그러나 그런 표현 끝에는 가급적 ‘바로 이것(hoc aliquid)’ 내지 ‘자립하는 무엇(aliquid subsistens) 그 이상의 함의가 없음을 첨언한다.

 

4.4 첫째로, ‘영혼의 부분 혹은 기능’과 대조하여 그러면 “영혼 자체는 무엇인가(quid)?”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토마스가 심각한 의미를 싣지 않고서 뜻 없이 영혼을 ‘실체’라고 할 경우에는 존재자(ens)를 분류하는 범주적 표현으로 우유(偶有)들에 대칭하는 용어였다.

범주 중의 하나로서 ‘실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분화 작업을 거치면서 물체(↔ 비물체), 자연물(↔ 인공물), 생물(↔ 무생물)로 나아가는데 이성혼은 그 중의 어느 실체도 아님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 감각적 존재인 인간의 인식능력에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실체는 물체(substantiae corporeae)이다. 설령 비물체적 실체가 있다 하더라도 감각적 지각에서 멀기 때문에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선 이성혼은 물체, 곧 물체적 실체가 아니다. 이어서 자연물(corpora physica)이 드러나는데 특히 “자연물은 질료의 부분에서만 실체가 아니고 형상의 부분에서도 실체이다.” 이 표현은 「신학대전」의 “인간은 정신적이자 물체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문장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이성혼은 자연물인 실체가 아니요, 형상으로서(ex parte formae) 자연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 따름이다. 자연물 가운데 생명을 갖고 있는 생물(corpus physicum vitam habens)에서 “영혼은 살아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일 따름이며, 그렇다면 이성혼은 생물인 실체도 아니다. 다만 분리된 실체라는 것이 있다면, 섭생과 성장 운동이 없어도 지성과 의지를 갖고 있으리라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생명체(substantia vivens)임을 언급함으로써 토마스는 이성혼의 자립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설정한다.

 

4.5 둘째로, 이성혼을 실체라고 명명하는 존재자의 수렴 중에 사물의 종적 형상(species)을 구성하는 유(類, genus)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럴 경우에 실체라는 것은 질료로서의 실체, 형상으로서의 실체, 합성체로서의 실체를 거론할 수 있으며, 합성체인 생명체(corpus vivens)만 엄밀히 말해서 실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도 넓은 의미로는 실체, ‘형상으로서의 실체’라고 부를 만하다고 범위를 정한다. “우리는 존재자들 가운데 하나의 종()을 실체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있다. 하나는 질료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인데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이것(τόδε τί)이 아닌 것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형체(μορφή) 또는 형상(εἶδος)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이며, 사물은 그것 때문에 어떤 이것이라고 말해진다. 셋째로는 그것들로 구성된 것을 실체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그 개념들을 더 명료하게 규정한다. “질료는 그 자체로 ‘바로 이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태로서만 ‘바로 이것’으로서 존재한다(in potentia tantum ut sit hoc aliquid).” 그리고 “합성 실체야말로 ‘바로 이것(quae est hoc aliquid)’이라는 개체이다.” 따라서 우리가 논하는 “형상은 형상으로 인해서 현실태로 ‘바로 이것’이 되는 어떤 개체가 이미 존재하는 그런 (원리)(secundum quam iam est hoc aliquid in actu)이다.”

토마스가 강조하려는 바는 엄밀한 의미의 실체, 즉 ‘바로 이것’은 합성체인 인간뿐이요(hoc convenit soli substantiae compositae in rebus materialibus), 인간이야말로 “존재에 있어서나 종적 형상에 있어서나 완결된 사물(completum in esse et specie)”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실체는 질료와 형상으로 분리된다(substantia dividitur in materiam et formam)”는 부연설명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다.

 

4.6 셋째로, 「신학대전」에서 영혼은 형상에 불과하므로 ‘바로 이것(hoc aliquid)’이라는, 좁은 의미의 실체일 수 없다는 제론(提論)에 답변하면서 다시 그 의미를 상세히 규정한다.

‘바로 이것’은 두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나는 어떻게든 자립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어떤 종(種)의 자연 본성(自然本性) 안에서 완료되어 자립하는 무엇을 가리킨다. 첫 번째 경우는 우유(偶有)나 질료적(質料的) 형상(形相)으로서 첨부됨을 배제한다. 두 번째 경우는 (그밖에도) 부분의 미완성을 배제한다.

토마스가 실체를 조심스럽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자립하는 무엇(aliquid subsistens)’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로는 사람의 손처럼, 자립하는 인간의 한 부분이더라도 나름대로 자립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과,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처럼 ‘인간’이라는 종적 형상(種的 形像)을 온전히 갖춘 사물(completum speciei)로서 자립하는 경우를 구분하는 설명을 한다. 이성혼 자체는 “어떤 종()의 자연 본성 안에서 완료되어 자립하는 사물”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넓은 의미의 자립성 개념으로는 사후에 신체를 떠나 존속할 수 있으리라는 추정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려면 그 자체로 자립적이든가(per se subsistere) 실체로서의 완전한 종류를 확보하든가(aliquid completum aliqua specie et genere substantiae) 둘 중의 하나인데 이성혼은 후자를 충족시키는 온전한 자립체는 아니지만 전자를 충족시키므로 ‘바로 이것’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성혼이 현실로 자립적은 아닐지라도 만약 자립적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로는 타자 안에 존재하며 자체로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언제인가 그 자체로 존재할 가능성만 있으면 ‘자립하는 무엇(aliquid subsistens)’으로 간주될 만하므로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체의 형상이라는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4.7 이처럼 조심스러운 세분화를 거친 다음 토마스는 ‘이성혼의 자립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밝힌다. “이성혼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로 이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혼만으로는 인간이라는) 완결된 종(種, species: 종적 형상)을 갖지 않으며 (이성혼이 인간이라는) 종의 한 부분이므로 개체가 되기에 전적으로 적합하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생명체를 논하여 영혼을 정의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실체이다. 생명을 가능태로 가지는 자연적 실체의 형상이라는 의미에서 실체이다”라는 단서를 붙였고, 토마스 역시 “영혼은 실체이다. 저런 물체, 곧 가능태로서 생명을 갖는 자연물의 형상(形相, forma) 혹은 형상(形像, species)으로서 역할을 하는 실체이다.”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성혼이 실체는 실체이되, 합성체를 구성하는 형이상학적 구성소인 형상으로서의 실체일 따름이라는 토마스의 설명이다.

 

4.8 영혼은 신체의 ‘형상(forma)’일 뿐인데 비록 실체라는 명사가 부여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자립하느냐는 반론이 예상된다. 그의 답변은 형상을 구분함으로써 얻어진다. 질료를 형상화하여 일정한 사물이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실체적 형상인데 이 실체적 형상이 형상화하는 바로 그 질료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경우 이 실체적 형상을 ‘질료적 형상(forma materialis)’이라고 일컫고 그 질료 없이도 존속이 가능한 경우를 ‘자립적 형상(forma subsistens)’이라고 일컫는다. 이성혼은 “어떻게든 자립하는 무엇을 가리키고 … 질료적(質料的) 형상(形相)으로서 (질료에) 첨부됨을 배제한다.”

그리고 질료적 형상의 소멸성을 질료의 내포성(comprehensio)에서 보면서 이성혼은 “신체적 질료에 함몰된 형상이 아니고 (신체적 질료에) 전적으로 내포된 형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영혼 자체의 완전성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이 비록 자체의 본질에 따라 신체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영혼의 어떤 기능이 신체의 작용(현실태)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도 토마스는 “이 형상의 품위가 질료의 수용력(capacitas materiae)보다 더 크기 때문에 인간 영혼은 자체의 존재를 따라 존재하며, 영혼에 질료가 한결같이 소통하더라도 영혼을 전적으로 내포할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영혼이 질료가 해당하지 않는 작용이나 능력을 가지는 것을 무엇도 막지 못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신체에 깃드는 실체적 형상들 가운데 인간의 이성혼이라는 “지성적 본성(사물들)은 자립하는 형상들이다. 그래서 비록 질료 속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의 존재가 질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만큼은 아니다.” 이성혼은 자기 고유의 존재에 근거하여(secundum suum esse) 존재하면서도 그 존재를 신체와 공유하는, 자립적 형상(forma per se subsistens)이다. 신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도 사후에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속할 수 있는 비물질적 형상이고, 현세에서도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작용하는 비물질적 지성을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지성의 단일성(De unitate intellectus)」에서 다시 한 번 명기된다.

자체의 질료에 결합되지 않은 채로(absque communicatione materiae) 그것 자체의 능력혹은 힘에 의거한 작용을 갖는 형상은 (형상) 그 자체가 존재를 갖는다. 다른 형상들처럼 합성체의 존재를 통해서만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합성체가 그 (형상의) 존재를 통해서 존재한다.

 

5. 결  론

 

5.1 철학사에서 토마스가 정립한 인간관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고대와 중세의 이중실체론에 대항하여 인간 신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적 구성요소임을 재확립한 것이다. 인간이 된다 함은 신체적 동물이 된다 함이다. 다른 하나는, 원자론 이래의 물리주의에 대항하여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지성과 의지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주장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육체적 생존이 끝난 다음에도 존속하는 측면이 있다!

이 논문의 주안점은 이성혼이 비록 한정된 의미에서라도 ‘바로 이것(hoc aliquid)’ 곧 ‘자립하는 무엇(aliquid subsistens)’인가 하는 토론이었다. 지성은 이성혼의 한 부분 내지 능력이며 이성혼을 곧 지성이라고 일컫는 관습은 영혼의 최상위 능력을 갖고서 그 영혼을 지칭하는 환유(換喩)의 문제였다. 토마스에게 이성혼 자체만으로는 완결된 실체는 결코 아니고, 불완전하지만 ‘자립하는 무엇(aliquid subsistens)’, 기껏해야 ‘일종의 실체(genus substantiae)’일 따름이다. 이성혼으로서 그 존재를 신체에 전적으로는 의존하지 않지만, 온전한 실체이려면 엄연히 그 존재를 신체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시각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발생하는 시점보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거하여, 신체가 사멸한 뒤에 이성혼이 비록 불완전하지만 잠정적으로 독자적 존속이 가능하냐에 향해 있다. 그래서 이성혼이 발생하는 시작은 일반 영혼과 동일하지만 사후의 후차적 존속의 문제는 특수하다는 입장이다.

 

5.2 그렇더라도 인간이 죽으면 이성혼은 존속할지 모르나 인간은 존속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이려면 신체가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신체여야 한다. 이성혼만으로는 인격체가 아니다. 이성혼은 인격체의 한 구성요소, 이성혼을 통해서 인간에게 존재가 부여되는 그러한 요소에 불과하다. 죽는다는 것은 실체적 형상, 그 사물을 그 사물로 만드는 형상을 잃어버림이다. 그런데 만일 그 실체적 형상이 자립하는 무엇이라면, 그 형상이 사멸하는 물체가 아닐 터이므로 소멸하지 않고 존속하리라는 것이다.

토마스가 지성을 각별하게 논의하면서 마치 인간 사후 이성혼의 분리실재(anima separata)마저 가정하는 배경은 사물을 인식하는 지성의 능력에 스스로 놀라는 경탄(敬歎)이다. 그리고 존재계에서 이성혼이 차지하는 위계가 물체적 형상들의 질서에서는 최상위이자 분리된 실체들의 질서에서는 최하위라는 존재론적 설명이 그 놀라움에 대한 마지막 답변일지도 모른다.

만일 인간 영혼이 형상으로서 육체에 결합하고 있으면서도, 신체를 초월하고, 신체에 (절대적으로는) 의존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물체적 사물들과 분리된 실체들의 경계선(confinium)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