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1006.gif                하느님과의 일치를 찾아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사랑과 하느님 사랑

 

 

                                                                       1994 삶의 의미를 찾아서 (대구 이문출판사 1994) (133-153)

 

 I. 진리에 대한 사랑

 

    "참다운 철학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8.1)에 나오는 명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사상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진리를 '뜨겁게 사랑한' 철학자가 또 있었을까 하는 것이 필자가 이 교부(敎父)의 저작들을 읽을 적마다 품는 경탄이지만[1] 아우구스티누스 대중적인 소설체 전기에 <구원(久遠)에의 불꽃>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도 수긍이 간다.[2] 정말 아프리카 태양의 정열이 그 혈관에 흐르는 이 철학자의 삶을 한 마디로 간추린다면, 그것은 "진리를 향해 쉴새없이 타오르는 불꽃" 또는 진리에 대한 열애(熱愛)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규정하여 본질적으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삼위일체론 15.8.14)[3]고 단언하고, 자기 생애의 체험을 돌이켜 보면서, "아, 진리, 진리여! 당신을 그들이 허구헌 책들에 한 소리로 자주,또 가지가지로 내게 속삭여줄 때, 내 영혼의 골수가 얼마나 사무치게 당신을 그려 애타하더이까?"(고백록 3.6)라고 외친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pondus meum amor meus),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나이다"(고백록 13.9)라는 본인의 고백처럼 인간 본성이 진리에 대한 사랑에 끌려가고 있음을 그는 당대의 거의 모든 철학사조를 거쳐간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거치면서 뼈저리게 느꼈고, 또 물체들이 중력에 이끌려가는 목표, 지성이 사랑으로 도달코자 지향하는 그 목표, 그것이 무엇인가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것이나 유쾌한 것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법인데, 영혼에게 진리처럼 저항할 수 없으리만큼 매혹적인 것이 또 무엇인가? 인간 영혼만큼이나 게걸스러운 목구멍을 가진 것이 또 있을까? 인간 내면의 이 미각이 입맛을 얼마나 쩝쩝 다시는지 모른다. 이 미각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며, 진리를 먹고 마신다!"(요한복음 강해 16.5). 정녕 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고 마시는 음식이었으며, 그는 직업적으로 철학을 개진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살았고, 진리를 추론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戀人)이었다!
    

    현대인에게 5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을 새로이 소개하려는 전기작가가 그 부제를 <이성과 신앙(La ragione e la fede)> [4]이라고 붙였듯이, 그의 사상 전체를 떠받치는 두 기둥을 든다면 그것은 대상으로는 '인간과 신', 그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으로는 '이성과 신앙', 양자가 교제하는 통로로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 등으로 이름붙일 수 있다. 후대의 서구철학과 신학은 이 양자를 거의 언제나 반명제처럼 정립해 왔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반명제가 결코 아니었다.  매사를 하나로 통합하는 로마인 특유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것들은 상호보완하는 이중명사에 가까웠다. 그는 신을 향하여, "당신은 저에게 무엇입니까? 저 자신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고백록 1.5)라고 물어 사상적 자서전 <고백록>을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보다 10여년전에 행한 <독백>에서도 토로한 그의 철학함의 원리이기도 했다.


    "그대는 무엇을 알고 싶은가?" "신과 내 영혼을 알고 싶소."
    "다른 것은 없는가?" "전혀 없소." (독백 1.2.7)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한 참된 관념(진리)에서만 인간에 대한 참된 관념(진리)이 온다는 확신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신을 만나뵙지 못한다는 역설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것이 무엇이었던가는 쉽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진리였다. 그에게 인생의 목적은 극히 분명하였다.


"인간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한 완성을 볼 수 없읍니다. 그 목적이란 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읍니다."(아카데마아 학파 논박 1.3.9). 그리고 그 진리를 일컬어 '님' 이라 부르게 되면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잡하지 않습나이다"(고백록 1.1)고 고백한다. 진리에 정착하고 진리를 향유함(frui veritati)이야말로 인생이 도달할 목표였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인간을 신에게 이르게 하는 바, 그 이유는, 플라톤학파의 기세가 드높던 당시의 사상계의 풍조대로, 궁극의 진리는 곧 신이요 신은 곧 진리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초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알기 전부터 진리를 자기의 신이라 부르고 섬겼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고백록7.10).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게서 그 진리의 얼굴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독백 1.1.5)라고 선언하였고 남은 여생을 신에게 봉직하는 수도자로, 주교로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는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먼저였고 그가 찾던 진리가 하느님과 외연과 정체를 같이함을 발견하면서 종교적 예배로 바뀌었음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신을 규정하여 모든 존재가 창조를 통해서 무에서 생겨나게 하는 '존재'요, 진리를 알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진리'이며, 모든 참된 사랑의 원천이며 목표가 되는 '사랑'이라고 정의하고서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신은 "창조된 온 우주의 원인이며 인식될 수 있는 진리의 빛이며 행복을 마실 수 있는 샘"(신국론 8.10.2)이다. 철학적인 용어로를 쓴다면, 인간은 "신에게서 존재의 원인, 인식의 근거, 삶의 규범(et causa subsistendi et ratio intellegendi et ordo vivendi)을 발견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는 어떤 능력을 사용하여, 만유를 초월하는 무엇을 획득하도록, 다시 말해서 하나이며 진리이며 최고로 선하신 신을 향유하도록 창조받은 것이다"(신국론 8.4).

 

    본고는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탐구가 궁극진리인 신에 대한 탐색이요 사랑이었음을 부각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 논법으로서 진리를 지성의 '빛'으로 보는(플로티누스에게서 유래한 관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유의 진리 개념을 소개하고, 지성을 비추는 그 빛이 존재론상으로 결국 신 자체라는 그의 관념을 근거로 하여, 그의 철학함(philosophia)은 곧 신을 사랑함(philotheia)이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철학사가 이 그리스도교 철학자의 인식론과 진리관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후대에 영향력이 큰 사상으로 평가하는 조명설(照明說)을 다루게 되는데, 본고에서는 조명설 자체를 인식론상으로 본격 논구하지는 않고 진리 탐구의 매개개념으로 소개하는 데서 그치겠다. 조명설이 인식론상으로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념들에 대한 상기설(想起說)로부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오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학설이라는 전제하에, 그것이 이성의 인식 능력보다는 판단 능력과 관련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는 범위에서, 다시말해서, 조명설이 선천적 이념의 내재를 가리키기보다는, 인간 지성을 구속하는 일종의 규범적 범주나 형식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범위내에서 멈춘다는 말이다.
    

    이러한 소재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철학저서 <독백 Soliloquia>, <교사론 De Magistro>,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 <요한복음 강해 In Ioannis Evangelium>,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신국론 De civitate Dei>, 그리고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가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연구자들도 문전을 뒤져 이삭줍기식으로 전거를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본 고에서는 우리말로 번역이 나온 <참된 종교>[5]에서 주로 전거를 댈 것이다.


 

II. 진리는 지성의 빛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redire intus). 인간 내면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초월할 적에  그대는 추론하는 영혼을 초월하고 있음을! 그러니 이성의 원초적 광명이 밝혀져 있는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라! 제대로 추론을 하는 모든 이는 진리말고 어디에 도달하겠는가?" (참된 종교 39.72)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을 거론할 때에 반드시 인용되는 이 대목에서 "인간 내면[내적 인간]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는 명제로 표현되는 진리의 내면주의(interiorism)와 "이성의 광명 자체"(ipsum lumen rationis)라는 소위 조명설(illuminationism) 이론은, 인간이 진리를 매개로 신에게로 승화하는 바탕이 되어 준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 인간은 "육안으로가 아니라 순수 지성으로 진리를 본다." 그런데 원죄를 타고나는 실존적 인간 조건에서는 "정신이 정화되어야만 사물의 불변하는 형상을 직관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지성이 직관한다는 불변의 형상 또는 이념은 "참으로 또 최고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cum ipsa vere summeque sit)"(참된 종교 3.3).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참된 것(verum)은 곧 가지적인 것(intellegibile)이다. (근대 이후의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인식의 확실성은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 명석하고 판명한 주관적 토대에 있는데 비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인식의 확실성은 그 대상성에 있었다. 감관으로 감지하는 감각적 물체가 아니라 지성으로 파악하는 가지적 사물이야말로 '확실한' 인식의 대상이고, 또 그런 대상만이 인간 지성을 영원하고 불변하고 필연적인 진리와 접하게 해 준다. 인간의 이성은 존재하는 사물들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 기반이 되는 것은 사물들의 존재(esse)이며,  무엇이 '참되다'(verum esse)는 것은 '참으로 있음'(vere esse)을 가리키고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할 적에 우리는 그것이 항속하는(manere) 한에서 그렇게 말한다."(서간집 18.2).

 

    물론 경험 세계의 물체적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감각적 표상으로부터 출발함은 아우구스티누스도 인정하였을 뿐더러 "육이 알려주지 않는 사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바로 육적인 형상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참된 종교 24.45)고까지 하였다. 그가 '육적인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의 감관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대상들 전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감각적 인식 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심을 기울이는 '오성적 인식'(cognitio intellectualis)[6]은 동물과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 내지 넘을 수 없는 거리를 보여 주는데, 우선 지성이 사물에서 감관을 통해서 얻는  "표상(表象)이라는 것은 기실 물체의 물체적 형상으로부터 감관을 통해서 추출(抽出)해낸 영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감관으로) 받아들여진 그대로 기억(記憶)에 전달되는 것으로서, 우리 사유를 통해서 마음대로 분해하고 증폭시키며, 단축시키고 확대하며, 재조립하고 혼합시키고 변형시킬 수 있다"(참된 종교 10.18).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지성이 감각적 대상과 감각 작용 자체를 두고 어떤 판단을 내리는 활동에 착안하고서 빛의 굴절현상을 예로 들어 육안의 시각과 지성의 판단의 상하관계를 논거한다. "이성적 생명은 감각적 사물들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감관 자체에 대해서까지 판단을 한다. 물에 잠긴 노가 똑바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꺾여 보이는가? 왜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가? 눈의 시각은 (보이는) 그것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판단은 전혀 내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감각을 하는 생명이 물체보다 월등하듯이, 이성적인 생명은 그 둘보다 분명히 월등하다."(참된 종교 29.53)지성이 물체적 사물에 대한 감각을 자료로 하여 이성이 판단을 내려 확립한 바,그러니까 이 예의 경우, 노가 물 속에서 꺾여 보이는 것으로 시각이 전달하지만 노가 물속에서도 사실은 반듯하며 빛의 굴절로 그렇게 보인다고 수정 판단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식(scientia)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 현상에 관한 판단 말고, 그에게 인식론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의 진선미(眞善美)에 관한 지성의 판단인데 이것에는 인식(cognitio)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감관에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는 모든 것은...지성을 통해서, 감관의 중개를 거쳐서 물체들의 아름다움이 파악되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답다고 보이는 사물이 갖춘) 저 균등과 통일성은 공간 안에 분산되거나 시간 안에 변천되거나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일하고 불변하는 균등(均等)의 척도에 의해서 판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각형의 광장(廣場)이든 사각의 돌이든 사각형 책상이나 조그만 사각의 보석이든 그 밖의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것이 사각형인 한, 우리는 사각형의 법칙에 준해서 판단을 한다.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개미의 걸음 폭을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하듯이 점잖게 걸어가는 코끼리의 걸음 폭도 우리는 동일한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법칙,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이 법칙은 불변하는 것이다. 다만 그 법칙을 직관하도록 허용된 인간 지성은 오류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척도가 되는 이) 법칙은 우리지성을 초월하는 것임이 분명하며, 이 법칙을 일컬어 진리(眞理)라고 한다" (참된 종교 30.56).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측면, 즉 그것이 오성이 관찰하는 직접적 대상 아니고 '그것에 의거해서'(qua, secundum quam) 사물들을 판단하는 '법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념이나 규준을 '지성으로 본다'(mente videre)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생득적 이데아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본유설)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우리가 다양한 부분과 지체로 구성된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하나'라고 판단할 때에 "당신은 어떤 단일성에 의거해서 물체를 판단하고 있는데, 그 단일성이라는 것을 어디서 알아내는가? 당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 단일성을 관조하고 있지 않다면) 어느 물체가 그 단일성에 결코 도달 못하리라는 판단도 내리지 못할텐데 말이다. 그리고 만약 육안으로 그(단일성을)본다고 한다면, 어느 물체가 비록 (단일성의)자취를 띠고는 있지만 그(완벽한 단일성으로부터는) 요원하게 떨어져 있다고 하는 말도 거짓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안으로 보는 것은 육체적 사물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성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어디에 보이는가? 우리 육체가 자리잡는 공간에 그것이 자리잡고 있다면, 저 동방에서 물체들에 관해서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단일성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간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항상 거기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공간을 통해서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통해서는 없는 곳이 없다(nusquam est per spatia locorum et per potentiam nusquam non est)"(참된 종교 32.60). 육안으로 보느냐, 심안으로 보느냐는 물음으로 일단 이념들의 구상성(具象性)을 피해나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곧 이어서 그것이 공간성을 갖지 않고 '가능성을 통해서'(per potentiam) 지성과 연관된다는 표현으로 이념들의 대상성(對象性)마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명설을 규범론으로 해석하는 이 견해는 다음 전거에서 다시 확인된다. "온당하게 사리를 파악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물이 왜 우리 마음에 드는지, 그리고 어떤 사물이 더 좋다고 보이면 왜 그것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지도, 감히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와 이성적 영혼들 전부가 진리에 의거해서 (우리보다) 하위에 있는 사물들을 올바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성(一性)을 추구하는 모든 사물은 이 (진리를) 규준 또는 형식 또는 범례로  삼는다" (참된 종교 31.58).


    다시 간추리자면, 인간이 물체적 사물들을 두고 지식에 해당하는 판단이든 인식에 해당하는 판단이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지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지성까지도 모르다가 배워 아는가 하면 기억하다 잊고는 하므로 그 자체 가변적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에서 나오는 지식이 그 자체로 불변하는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지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초월할 적에  그대는 추론하는 영혼을 초월하고 있음을!"(참된 종교 39.72)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따라서 이성이 내리는 판단이 참일 수 있다면, 이성의 한 부분 또는 기능이라고 할 오성(intellectus)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직관'하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관한다는 말은, 오성이 영혼의 눈(oculus animae) 또는 지성의 정곡(apex mentis)으로서, 비물체적이고 영원한 이념들, 불변하는 규준들, 즉 신적인 진리들과 '어떤 상관을 갖는다'는 뜻이다.

 

    아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은 우리 인식 능력에 의하여 어떻게 추상적 보편 개념이 형성되고 존재하느냐는 문제를 해명하는 이론은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문제와 부딪친 바 없었다). 다만 인간 이성이 감각적 사물을 두고 내리는 판단, 그리고 오성이 내리는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판단의 진리성의 토대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 판단 준거가 되는 이념들, 원리들, 규준들이 어떤 양상으로인가 "인간에게 존재한다", 혹은 "인간 지성이 그것을 관조한다", 또는 그 규준들이 '가능성을 통해서' "인간 지성과 어떤 상관을 갖는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우리 지성과 진리 자체 사이에는 어떠한 피조물도 간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는 우리 지성과, 우리가 그것을 인식케 만드는 내면의 빛인 진리 사이에는 여하한 피조물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이다"(참된 종교 55.113).

 

    그렇다면 인간 지성이 사물을 판단하는데 준거하는 진리의 정체가 무엇인가는 토론을 요한다. 제일 먼저 지적할 바는, 인간 사유는 진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발견되는 진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사유보다 선재한다. 인간의 "추론이 이 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발견할 따름이다(non enim ratiocinatio talia facit, sed invenit). 그러므로 발견되기 전에도 스스로 존재하고, 발견될 때에는 우리를 쇄신할 뿐이다"(참된 종교 39.73).


    그러면 오성은 어디에서 진리를 발견하는가? 진리는 인간 내부(homo interior)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외부나 상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인간 안에 있다. 그러나 진리의 내면성은 진리의 보편성과 상치되지 않는데 그 연고는, 진리가 지성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고 발견되다는 주장이 전제되는 연고다. 만약 인간들이 진리를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지성이 주관적 원리가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지

성이 곧 진리가 될 것이다.


    물론 위에 말한 것처럼 진리를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 또는 지성의 상위 부분인 오성으로 한다. 그런데 오성은 가변적이고 규준은 불변한다고 하면 인간의 어디에 그 규준이 새겨져 있길래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임을 아는가? 이념들, 혹은 원천적인 진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 '내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우리 내부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진리라고 부르는 빛의 책에 새겨져 있다.  (진리라는 것이 인간 지성에 대상적으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에) 인각(印刻)되어서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도장의 사상(寫像)이 밀랍에 인각되면서도 도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음과 비슷하다"(삼위일체론14.15.21).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인간 지성(혹은 그 정곡이 되는 오성)을 가리켜 '진리의 책', 또는 '빛의 책'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그리고 밀랍과 도장의 비유에 따른다면 진리의 책에 씌여져 있다는 이념들, 지성이 물체적 사물을 판단하거나 인간이 무엇을 인식할 때에 구사하는 규준들은 원천적 진리(Veritas)의 모상이요 인각된 관념(notio impressa)이다. 지성에 인각된, 혹은 지성이 보는 이념들은 진리 자체는 아니고 원초적 진리의 반사물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이 지성의 빛이 되어 인간 오성을 조명하며, 인간 이성이 참다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상황을 가리켜, 우리 내면에서 진리를 불러주는 (dictare) 스승이 현존하고 인간 지성은 그에게 문의를 하는(consulere) 것처럼 형용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보편자들(universa: 보편개념)에 대해서는, (문의를 하게 되어 있겠지만) 우리는 밖에서 소리를 내는 어느 화자(話者)에게 하듯이 문의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에서 정신 자체를 주관하는 진리에게 문의하는 것이다. (그 진리가 곧) 문의를 받고 가르친다.... 모든 이성적 영혼은 그에게 문의를 한다.... 우리는 가시적 사물들에 관하여 이 빛에 문의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빛은) 우리가 얼만큼인 식별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가시적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교사론 11.38).
    

    이리하려 육안이 햇빛을 통해서 물체적 사물을 보게 되듯이, 지성이 진리의 빛을 통해서 가지적 사물 또는 이념들을 보게 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게 '빛'에 관한 이야기로 집중된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보인다면, 거기에는 빛이 있는 것이다. 공간의 간격도, 시간의 간격도, 그러한 간격의 표상도 없이 나타나는 빛 말이다"(참된 종교 39.73). 무슨 빛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진리가 지성을 비추는 내면의 빛이요 만물의 형상이 되어 현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천적인 빛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으로 연결된다. "우리 지성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또 진리로, 곧 내면의 빛으로 인식하는데, 바로 그 빛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만유의 형상이시니, 그 모든 존재들이 그에게서 창조되었고 그에게로 향하는 것이다(참된 종교 55.113). 이 구절에서 하느님이 진리요 내면의 빛(patrem et veritatem, id est lucem interiorem)이라고 단언되어 있음을 본다.


 

III. 진리의 빛, 하느님의 빛

 

    그러면 지성이 받는 조명은 감각적 사물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만 쓰이는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적 관심사, 특히 조명설이 의도하는 목표는 인간 지성이 감각적 표상에서 출발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서 추상적인 보편 개념으로 나아가느냐는 상승적 방향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감각적인 인간이 초감각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준거에 따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기능을 갖느냐는 하행적 방향이다. 그렇지만 그 계기가 되는 것은 인간이 잠시적인 사물에서 영원한 가치로 소급하는 작업이며, 이 작업을 일컬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학적 혁신'(in novum hominem reformatio)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신이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육체가 감지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하고 훌륭한 것만을 인식하는 것일까?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대상에서 자극을 받아서 우리는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며, 예술의 작품에서부터 예술의 법칙으로 소급하게 된다... 이것이 잠시적인 사물들로부터 영원한 사물에로의 소급(遡及)이며 묵은 인간으로부터 새 인간에로의 혁신(革新)이다"(참된 종교 52.101).

 

    다시 말해서 보편적 진리가 개별 영혼 혹은 지성에 내밀하게 존재한다고 할 때에 지성이 그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지성 자체를 통해서이며(per semetipsam colligit), 그 진리에 비추임받아 단순히 물체적 사물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비물체적 사물들을 인식하는 데에 의의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대상은 물체적 사물도 아니고 우리 지성도 아니고 우리 지성과 사물을 초월하는 것으로, 그 진리 덕분에 우리 자신과 사물과 가지적인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것들의 원천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게서 모든 것이 기원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며, 그에게로 모든 것이 지향하는(ex quo omnia, per quem omnia, in quo omnia)" 존재, 곧 하느님으로 간주한다(창세기 축자 해석 12.24.50). 여기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단수로 채택하는 '진리'라는 단어는 거의 언제나 '하느님'과 동의어가 된다. 결국 그의 폭넓은 존재론적 사고의 틀에서 볼 때에, 진리가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이며,진리로부터 오는 조명이 있을 때만 우리 지성에, 상위적인 인식인 이해(intelligentia)라는 것이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개념을 매개로 하여 하느님 앞에 현존하는 인간 지성이, 지성을 비추어 주는 빛으로서 인간 지성에 현존하는 신에게 건너가는 것으로 보았다. 각 사람에게 진리가 현존하고, "진리는 밖으로부터는 권유하고 안으로부터는 가르친다 (foris admonet, intus docet)"(자유의지 2.14.38).

 

    그 비추임의 성격을 인식론상으로 구명할 때에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조명설이 신비신학의 차원으로 변함을 직감하게 된다. 그 발상은 플라톤 <공화국>(7권에 나오는 '선의 이데아')과 신플라톤주의임은 모두에게 알려진 바이지만, 성서적 전거도 없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36.10)의 한 구절,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in lumine tuo videmus lumen)를 이 문맥에서 빈번히 인용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지성은 신(제일 진리)에게서 비추임을 받아야 본다고 할 때에, 그 말은, 사물이 비추임을 받아야 한다는 뜻인가? (육안도, 사물이 빛에 비추어져야 그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성이 비추임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태양이 물체적 빛의 원천이어서 모든 사물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래서 육안에 감지되게 만들듯이, 신은 당신 진리의 빛으로 진리들을 가지적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 지성에 의해서 파악되게 만든다(독백  1.6.12). 신은 인간이 진리를 이해하는 빛(lumen intelligentiae veritatis)이자 동시에 "가지적 빛이신 하느님,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통해서 가지적으로 빛을 발하는 모든 사물이 가지적으로 빛을 발한다"(독백). 가지적 사물은 진리인 신에게서 가지적 존재를 받았으므로 인간 지성을 향하여 가지적 빛을 발하고, 인간 지성은 같은 진리에게서 존재를 받고 그 현존하에서 부단히 비추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가지적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이 물음은 해답을 얻는다. 또 진리인 신과 인간 지성 사이의 관계를 태양과 거울로 비유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울은 고유한 빛은 갖고 있지 않으며, 태양으로부터 빛을 반사할 따름이듯이, 인간 지성은 신의 빛 외에 자기 고유한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표현까지 한다(삼위일체론 15.8.15 참조). 진리 자체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고, 인간 지성 안에 깃들어 있어서 인간지성이 관조한다는 진리들은 태양에서 빛을 받는 달이나 별처럼 빛을 발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 지성이 달빛이나 별빛으로 사물을 분별한다고 하더라도 기실 태양빛으로 분별하는 셈이다.

 

    또 현세의 인간 조건에서 인간 지성이 신적 진리에 참여하는 일은 거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우리 지성이 곧 (진리 자체의) 거울이라는 점이다. 인간 지성은 진리 자체의 영상임과 동시에 그것으로 모든 사물을 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햇빛이 거울에 반사되듯이 신적 지성이 인간 지성에 반사되어 그 빛으로 인간 지성은 사물과 이념들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삼위일체론 15.8.14). 그래서 신은 '우리 조명의 아버지'(우리를 조명하는 아버지  Pater illuminationis nostrae)라고까지 불린다.


    방금 인용한 <독백>의 전후 문맥에서 드러나지만, 하느님은 빛이며 그 안에서,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가지적인 것들이 가지적인 것이 된다. 신은 빛의 아버지로서 우리 지성을 비춘다. 그러니까 신이 곧 진리이다. 참된 모든 것이 그를 통해서 참이 된다. 다만 신이 곧 진리(Veritas)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교리에 의거하여 로고스 또는 그리스도에게 돌려진다. 이 형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를 전거로 대는데 요한 복음서 서론(1.9)에 나오듯이, 태초부터 신에게 있는 로고스는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quod illuminat omnem hominem venientem in mundum)이 되는 것이다.

 

    다시 거울의 비유로 돌아가서, 거울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거울에서는 사물의 영상(映像)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이 영상이라면, 우리는 우리 지성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에게서 만들어졌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론이다. 깨달음 혹은 지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거울만을 보고, 지금 거울을 통해서 보아야 할 그 분은 거울에서 보지 못한다. 거울이 어디까지나 거울이라는 것도, (본체가 아닌) 영상이라는 것도 보지 못한다. 인간 지성이 신의 거울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또 이 거울을 통해서 바로 그 신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삼위일체론 15.24.44).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 철학하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직접 보지 못하고 그분의 영상, (곧 우리 영혼이 갖는 기억, 오성, 사랑으로 표현되는) 우리 자신만을 보게 되어 있다. 그러나 거울을 통해서, 거울에서 희미하게 보더라도 (참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지성을 거울로 간주하여, 거울을 들여다 봄으로써 거기 보이는 그 영상(인간 자신)을 통해서, (자기가 그것의 영상이 되는 그 존재를) 투시하는 사람들이다. '거울을 본다'하지 않고 '거울을 통해서 본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삼위일체론 15.23.44).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인간에게 본질적 문제는 오직 하나, 구원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을 받으려는, 진리 자체를 관조하고 향유하려는 욕구와 자세는 인간에게 달려 있지만 나머지는 오로지 모든 것을 비추는 진리 그분에게 달려 있다. 신은 마음이 순결한 사람만 진리를 알게 하였으며, 진리를 올바로 찾는다는 것은 궁극의 진리 곧 신을 찾고 사랑하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추구만이 참다운 진리 추구이며, 그것이 인간 지성에 대한 해방과 정화의 과정이 된다.


    감관에 들어오는 물체적 사물들이든 오성에 직관되는 이념들이든 간에 한결같이 자체의 존재론적 원천인 창조주의 인각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참답게 보려는 시선만 있다면 인간 지성은 어느 모로든지 창조주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다. "우리는 참된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통하여 본다" 거나  "모든 진리가 참인 것은 그것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상적인 표현으로 미루어,  인간이 감각과 인식에서 조우하게 되는 모든 진리는 그 하나 하나가 신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하느님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하느님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나이다. 하느님 밑에 모든 것이 있고 하느님 안에 모든 것이 있으며 하느님과 함께 모든 것이 존재하나이다.(Deus supra quem nihil, extra quem nihil, sine quo nihil est. Deus sub quo totum est, in quo totum est, cum quo totum est)"(독백 1.1.4).

 

    그러나 그 사물들이 보여주는 모상을 창조주는 무한히 초월한다. 다시 말해서 이념들과 사물들이 신이 아니고 신의 존재나 속성에 관한 증거일 따름이다. 진리들을 올바로 인식함이란, 이성이 발견해가는 '이' 진리 혹은 '저' 진리가 원초적 진리가 아님을 알고, 오직 그 원초적 진리의 표지 혹은 자취임을 깨달음이다. 구체적으로 만나는 이 진리 혹은 저 진리가 참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통해서 인식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이요, 단편적인 진리들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원천, 그 진리들이 참되게 만드는 원천을 갈망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바로 그런 뜻에서 인간은 신적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들을 본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는 단편적인 진리들을 그 자체로만 본다거나 단편적인 진리들을 절대화하면 그 단편적인 진리들마저 사라져 버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철학함을 호기심(curiositas)이라고 격하시킨다. 호기심 이상의 올바른 지성일 때에 오성 안에서 진리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신에게 연관시킬 줄 알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성 자체를 신에게로 끌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 보는 진리들이 신 자체가 아니고 그 진리들만 가지고서는 신을 전적으로 알 수도 없어서, 그 단편적인 진리들이 갈수록 이성을 자극하고 충동하여 신께로 떠밀고 가는 까닭이다. 인간의 인식활동에서 발견하는 모든 진리를 의식적으로 진리 자체와 결부시켜 나아가고, 그 이상의 진리에로 부단히 상승해 갈 때에, 그 인식자는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 인식에서 인간 지성은 자신을 알게 된다. 이성은 사물을 인식하는 행동 중에서만 부단히 조명을 받기 때문이고, 그 순간 함유하게 되는 빛은 곧 이성 자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끊임없이 오성의 빛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성에게는 이념들, 제일 원리들, 제일 진리들(신적 진리가 우리에게 반사되어 있는 모습들)을 직관하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상황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해 원초적 진리의 조명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이성은 제일 진리를 통하여, 그 진리와 함께, 그 진리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진리가 지성과 함께 있고 지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적 이념들과의 존재론적인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신적 조명을 받는다 하더라도, 인간 지성 혹은 이성은 경험적 진리에 이르는 단순한 매개체로 만족하여 안주하지 못하며, 부분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획득할 때마다 진리 자체를 향하는 그 열망이 더욱 강렬해진다. 더 높은 것을 보려고, 진리 자체 안에서 보려고 하는 열망이 더 커진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나이다" (고백록 10.27).

 

    진리를 찾아내는 일 자체는 어디까지나 지성의 역할이다. 진리의 발견은 인간 지성이 이룩하는 하나의 정복이다. 빛은 육안이 사물을 보게 만들 따름이지 사물을 눈 대신 보아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구현되는 힘든 작업이다. 단순한 감각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념들에 대한 (참여를 통하여) 관조에 이르는 과정은 오래 고도 힘든 여정이다. 지성의 주의력을 그 방향으로 유지시키려는 의지의 부단한 노력, 육체적인 것에서부터 가지적인 것에로 고양되려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바, 이성의 노력과 의지의 긴장은 진리를 보고자 의욕하거나 진리를 사랑하는 상호보완작용을 하며, 진리의 빛 속에서 무엇인가 보려는 태세(dispositio)를 갖추어 준다.
    그러므로 이성은 피동적 기능이 아니라 정신 전체의 역동적 활동이다. 빛을 향하여 정신의 모든 활동들을 수렴하는 운동이다. 그 빛이 하는 역할은 참을 찾아고 발견하는 길로 이성을 인도하고 정향(定向)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함은 지성의 기쁨요 행복이 된다. "진리여, 어딘들 나와 함께 아니 가셨더이까? 되도록이면 내 속을 보여드리고, 높으신 뜻을 묻자왔을 제, 진리여, 당신께서 할 것, 삼갈 것을 친히 가르쳐 주지 않으셨나이까? 나는 힘 닿는 데까지 바깥 우주를 감각으로 두루살피고, 내 육체를 살리는 생명, 그리고 그 감각자체를 익히 보았읍니다. 거기서 내 기억의 그윽한 속으로 들어와서는 넓으나 넓은 구석구석이 묘하게도 무한량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자 나는 깜짝 놀랐읍니다....당신이야말로 항상되신 빛! 내가 온갖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지, 그 어떤 것인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물을 때마다 가르치시고 분부하시는 소리를 들은 까닭입니다."  (고백록 10.40)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에서 요점 하나는, 인간 지성이 그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리라는 확신과 희망은 지성 안에 선취(Vorgriff)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을 결코 사랑할 수 없으므로 자기가 추구하는 바, 즉 아직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자 추구하는 바에 대한 사랑을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영혼은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향유하고 싶어한다. 영혼이 아름다움 전반에 관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새로운 지식의 경우에, 보통으로 그것을 이미 알고 좋다고 찬양하는 이들의 권위가 상당히 작용하겠지만, 정신에 대강으로나마 그것의 인식이 전혀 인각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파악하여 배우려는 열망에 불타는 일도 없을 것이다(nisi breviter impressam cuiusque doctrinae haberemus in animo notionem, nullo ad eam discendam studio flagraremus)" (삼위일체론 10.1.1).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이 바탕을 두는 원리는, 인간 지성이 참을 안다는 것, 그러나 진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할 따름이라는 사상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고 신이 곧 그 진리이다. 존재함이 곧 진리이다.


    그러나 인간 지성은 진리에 참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인식함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영원한 신적 지성 안에, 신적 생명과 본질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우리 지성에도 현존하며, 단지 신적 지성에서는 신의 본질과 동일한데 인간 지성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으므로 존재하는 양상이 다르다. 만일 인간 지성이 진리에 참여하는데 그것이 결국신(홀로 진리이다)에게 참여하는 것이라면, 진리가 이성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고 이성에게 주어져 있다는 말은 조명이라는 뜻을 이미 함축하는 셈이다. 이성이 진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서 받는다면, 지성은 신에게서 빛을 받는 셈이다. 진리는 모든 지성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이다(veritas lux).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지성이 더욱 상위의 빛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각별한 빛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빛으로는 신에 대한 직접적인 직관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바로 그 경지가 지성의 완성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의 이해(intelligentia)이며,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조명 혹은 지혜의 경지이다. "거기서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리 자체를 보게 될 것이요 지극히 명확하고 지극히 확실하게 진리를 향유케 될 것이다. 거기서는 지성으로 추론하여 무엇을 탐구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직관하여 의식하게 될 것이다(nec aliquid quaeremus mente ratiocinante, sed contemplante cernemus)"(삼위일체 15.24.45).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최종적인 조명이다. 은총의 작용으로 제일 진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성의 해방이요 안돈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여유의 안식을 찾는 것"(신국론 19.19)이기에 <고백록>을 닫으면서 그는 "주 하느님이시여,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었으니 평화도 주시옵소서. 정묵의 평화, 안식의 평화, 저녁없는 평화를(pacem sine vespera) 주시옵소서"(13.35)라고 기도한다. 그날은 보다 큰 진리를 향하여, 궁극의 진리를 향하여 타오르는 영혼의 그 쉴새없는 갈구(elan vital)가 멈추는 경지이다. "일곱째 시대는 우리 안식일이 되리니 그 안식일은 해넘이가 없을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날이 될 것이다... 그때는 (진리를) 쉬면서 보게 되리라. 보면서 사랑하게 되리라. 사랑하면서 찬미하게 되리라.... 끝이 없는 마지막! 우리의 마지막이란 끝없는 (진리의) 나라에 도달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신국론 22.30.5). 종교의 본질인 사랑(caritas)을 정의하여 "우리가 진리를 고수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하는 참 사랑"(삼위일체론 8.7.10)이라고 한다. 같은 대목에 나오는 그의 유명한, "사랑이 진리를 깨닫는다" (caritas novit veritatem)는 명제도 여기서 유래한다.


    온 젊음을 다바쳐 방황하고 탐색하고 갈구하던 그 진리를 그의 나이 설흔에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얼굴에서 발견하였을 적의 감회가 얼마나 컸던가는 <고백록>에 구구절절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을 보여 주는 구절로는, 그의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이던 저 탄식, 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하는 사랑의 고백이 있다. 오, 진리여,"늦게야 님을 사랑했읍니다(sero te amavi).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읍니다!"(고백록 10.27).[7]

 


각주


1)  필자는 다른 졸고("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진리에 바치는 사랑의 고백", 철학과 현실 1990 가을, 338-344면)에서 같은 심경을 기술한 바 있다.

2)  Luis de Wohl, The Restless Flame: 조철웅 역, <久遠에의 불꽃> (가톨릭출판사, 1965).

3) 국내 중세관계 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저서의 우리말 제목을 통일해 쓰기로 합의하여 그 목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집이라고 할, C.크레모나 (성염역),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명상록> (성바오로출판사 1991), 311-315면에 실려 있음을 알리고 싶다.

4)  Cf., Carlo Cremona, Agostino d'Ippona: La ragione e la fede (Milano 1986). 성바오로출판사 간행 예정으로 필자가 번역하는 중이다.

5)  성염 역주, <참된 종교> (라틴어-우리말 대조번역본) (분도출판사 1989: 교부문헌총서 3권) 참조.

6) '지성', '이성', '오성' 등의 용어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서는 혼용이 없지 않으나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지성(mens): 영혼의 상위 부분 또는 이성혼의 가장 고양된 활동을 가리키며,  이성과 오성이 깃드는 부위이다(De civ. Dei 11.2: mens, cui ratio et intelligentia naturaliter inest).
② 이성(ratio): "지성의 한 운동으로, 그것으로 지성이 인식을 상호 분석하고 종합할 수 있는 운동"(De ordine 2.11.30: ratio est mentis motio, ea quae discuntur distinguendi et connectendi potens). 자체보다 하위인 감관에, 그리고 감각적 사물에 작용하는 기능이고 감각적 사물을 판단하기 위한 능력이다.
이성의 올바른 구사가 곧 지식 (scientia)을 구성하며 또한 오성과 인식에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다(ratio ad intellectum cognitionemque perducit: De vera religione 24.45).
③ 오성(intellectus): 인간이 가진 가장 숭고한 능력이고 신의 비추임을 받는 곳이 이곳이다. 오성은 이해의 원리(eo solo posse comprehendi)이자 영혼의 눈 또는 내적인 눈으로서, 이것이 있어서 사유는 신적 광명이 밝혀 주는 진리를 파악한다. 이성과는 달리, 오성은 가지적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지식에 응용되는 것이고(cognitio), 궁극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지혜(sapientia)이다.

7)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과, 진리 탐구를 거쳐 신 사랑에 도달하는 그의 여정에 관하여나 그의 조명설에 관해서 보다 깊은 연구를 바라는 이들은 다음 저술을 참조하기 바람: B.Bubacz, St.Augustine's Theory of Knowledge. A Contemporary Analysis(New York 1981); J.Burnaby, Amor Dei (London 1947); R.Jolivet,  Deiu soleil des esprits ou la doctrine augustinienne de l'illumination (Paris 1934); R.Nash, The Light of the Mind. St.Augustine's theory of Knowledge (Kentu
cky 1969); R.D.Polman, the Word of God According to St.Augustine (Grand Rapids, Mich. 1961); M.F.Sciacca, Sant'Agostino. La vita e l'opera. L'itinerario della mente(Brescia 1949); A.C.Vega, Saint Augustine. His Philosophy (Philadelphia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