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NEIS에 나타난 詩的 正義感

 

 

 

                                    1993 서양고전학연구 7 (233-259)

 

서   론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표상되는 인류사의 가장 절묘한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T.S.엘리어트) 아울러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인 위대한 길잡이(단테 알레기에리)로 지적되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70-19)가 로마라는 위대한 역사적 현상(res pulcherrima: G  2.534 sic rerum facta est pulcherrima Roma)을 관찰하면서 아이네아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배경으로 하여 한 국가의 세계사적 의미를 종교적인 안목으로 전개한 서사시가 <아이네이스 Aeneis>이다. 이 작품은  B.C.26-19 년에 걸쳐 작업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로마의 역사와 문학을 모두 섭렵하고 있으며 12권12,913행으로 된 방대한 로마 서사시(epicum Romanum)이다. <아이네이스>가 한 인간의 정치적 사명과 한 국가 사회의 세계사적인 역할을 주제로 삼는 사관(史觀)이라던가, 한 세기에 긍한 내란을 종결하고 평화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를 보고서 라티움에 전설적으로 노래불려온 황금시대(黃金時代)의 도래가 임박한 징표로 삼은 해석으로 보아서 이미 체계화된 역사철학서라고 평가받는다.


   시인이 이 서사시에 로마 제국의 역사에 대한 계산된 모호성을 깔아 두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베르길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의 제국주의를 노래한 궁중시인으로 격하시키는가 하면 혹자는 서양 문화의 어버이로까지 그를 높이 칭송 할만큼 평가도 상이하다. 이 서사시의 해석학적 열쇠가 제 6권이 나오는 주인공의 명계 순례(冥界巡禮)에 있음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작품이 워낙 큰만큼 거기서 읽어내는 해석도 다채로울 수밖에 없는데, 필자는 그중의 한 가닥을 잡아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에서 자연적 초자연적 차원의 정의(正義)를 어떻게 요구하고 있는가를 개괄하고자 한다. 문학 작품이 구원(久遠)의 예술성을 띠려면 선악의 문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고 선과 악을 가름하는 준거는 통상 정의라는 지중해 고유의 정신가치에 있는 까닭이다.


   당대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제국의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이상 <아이네이스>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활약하고 사라진다. 그렇지만 자세히 판독하면 영웅적인 인간상(Arma virumque)의 비중은 의외로 피상적임을 알 수 있으며 장중한 서사적 영웅행적은 단지 이 시의 재료에 불과함을 보게 된다. 호메로스의 대작에 묘사되는, 유혈이 낭자한 전투며 거기서 얻어지는 승리의 도취 따위는 베르길리우스의 시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과 배역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애욕이나 지배욕으로, 우주적 차원에서는 운명의 거창한 경륜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부숴지는 인간들에게 시인은 한없는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바로 여기에 베르길리우스 시예술의 탁월함, 근대적 감각 및 보편성이 존재한다.


   시인은 그 등장 인물들에게 구제의 길을 넌지시 일러준다. 영웅들에게는 운명의 법도를 묵묵히 인종하는 경건(敬虔 pietas)을 가르치고, 영웅이 가는 길에서 애정과 명예욕에 시달리는 배역과 엑스트라들에게는 당사자가 부딪치는 그 욕망의 격정(4.412: amor improbus) 속에 숨겨진 해독(害毒)을 일러준다. 그렇지만 정작 인간이 그 정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희생되어 버릴 적에도 시인이 보이는 것은 가차없는 단죄와 비난이 아니라 다함없이 애잔한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다. 바로 이 연민이 <아이네이스>의 선률, 아니 주선률을 이루는데 이것을 필자는 베르길리우스의 시적 정의(詩的正義)라고 일컫고 싶다.


   본고에서는 베르길리우스의 이 시적 정의를 간추리되 그 방법론은 문헌학적 방법을 따르기로 한다. 고전적인 문헌학적 방법을 따르면 시인이 일정한 어휘나 표현(우리의 경우는 ius, iustus, iustitia 같은 용어)을 사용하는 것이 우발적인 붓놀림에 기인하기보다는 의도적인 어휘 선정과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하였으라고 추정한다.

I. 땅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체험

 

   베르길리우스는 자기가 지은 묘비명에서 자신의 생애를 간추려 "전원과 들녘과 호걸을 노래하였느니라(cecini pascua rura duces)."고 읊었거니와, 땅에 대한 그의 사랑은 arvum(개간한 땅, 경작지)이라는 어휘를 자기 작품들에서 무려 90회나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당대의 시인들과는 달리 유난히 사회정의라는 측면에 눈떴고 작품 전체에 시적 정의감을 깔아놓은 것은 두번째 삼두정치에 의해서 조상전래의 토지를 몰수당하고 유랑민의 신세가 된 체험 덕택이었다. 당시의 심경을 그는 목가 제 1편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E 1.1-4).

 

   티티루스, 자네 널다란 너도밤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누워
   가느다란 피리로 숲의 노래나 짓고 있는데,
   우리는 고향의 지경을, 사랑하는 전답을 버리고 가누나.
   우린 고향땅을 떠난다네.

 

이 목가에서는 그 첫련부터 비록 소작인의 처지로나마 고향에 남아서 전답을 가꾸게 된 티티루스와, 소농이지만 자유인 신분이었으므로 그런 사정마저 허락되지 않아 "사랑하는 전답을 버리고(dulcia linquimus arva)" 멀리 아프리카로 이민가는 멜리보이우스를 대조시켜 땅을 잃은 평민의 서러움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아울러 목가의 주인공은 유랑민 신세를 한탄하면서 조상전래의 땅을 부치면서 평화롭게 살던 농민들에게 닥쳐온 불행과 폭력에 항의하며, 청천벼락같이 농민들을 덮친 비극과  그들의 비명 소리를 들려주고자 한다. 일찌기 카이사르가 그토록 아끼고 옹호했고, 카이사르를 그만큼 경애하였던, 알프스 이남의 주민(Cisalpini)들에게 삼두정치관들의 칙령에 의해서 내려진 토지 몰수는 그만큼 고통스럽고 분개할 것이었다(E 1.67-72).

 

   이 다음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조상의 땅을 다시 보고
   가난한 초가집, 저 잡초가 우거진 지붕이나마 바라보며
   내 나라를 보면서 곡식밭 두고 탄복하리요?
   그런데 기껏 일쿠어 놓은 전답을 불측한 군인놈이 차지하며
   오랑캐가 저 수확을 차지한다? 도대체 저 전쟁의 불화가 어디로 가련한
   백성들을 몰아갔단 말인가! 저자들 좋으라고 밭에 씨를 뿌렸단 말인가!

 

   "가난한 초가집, 저 잡초가 우거진 지붕"(pauperis et tuguri congestum caespite culmen)으로 표현되어 있듯이 자기 농토에서 노동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평범한 행복을 구가하던 전형적이고도 평온한 삶을 "불측한 군인놈"(impius miles)에게 박탈당한 멜리보이우스의 아픔을 시인은 <아이네이스> 10권의 대접전 중에 쓰러져가는 한 용사의 죽음에 다시 옮겨 놓는다. 일찌기 헤라클레스의 모험에 동반했다는 안토르(Antor), 에반드루스에게 식객이 되어 이탈리아에 자리잡아 평안히 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이네아스를 돕고자 에반드루스의 군대와 함께 싸움터에 나갔다가 적장 메젠티우스가 아이네아스에게 던진 창에 맞아(alieno volnere) 억울하게 쓰러지는데, 시인은 이상적인 아르카디아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더군다나 전장에서 숨져가야 했던 한 농민의 눈망울에서 전쟁에 대한 비난과 땅에 대한 사랑을 더할나위없이 아름답게 서술한다(A 10.779-782).

 

                                    아르고스에서 파견 나온 안토르,
   에반드로스에게 얹혀서 이딸리아 도성에 자리잡았던 그는
   불운하게도 남이 입었어야 할 상처로 쓰러져 하늘을 우러르면서
   사랑하는 땅 아르고스를 회상하면서 숨져간다.

 

첫째 목가 3행에 나온 "사랑하는 전답(dulcia arva)"이나 안토르의 고향 "사랑하는 땅 아르고스(dulcis Argos)"는  같은 목가 70행에 나오는 "불측한 군인 놈(impius miles)" 혹은 보다 추상화하여, 이탈리아의 평화롭게 사는 주민들에게 전쟁의 온갖 참화와 더불어 토지몰수까지 당하게 함으로써 자기 땅으로부터 유배당하는 불행을 초래한 "불측한 병갑"(A 6.613 impia arma)과 율격상의 대칭을 이루기도 한다.


   만토바의 땅을 빼앗기고서 로마와 나폴리, 칼라브리아와 아테네로  평생을 독신으로 유랑하면서 인생고와 그 희생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닦아가던 베르길리우스는, 카르타고 해안에 난파당하여 밀려온 트로이아사람들에게 행한 여왕 디도의 입을 빌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1.462, 630).

 

    sunt lacrimae rerum et mentem mortalia tangunt
    눈물겨운 사건들이며 사멸할 인생들의 비운은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니....

    non ignara mali miseris succurrere disco
    내 일찌기 불행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가엾은 이들을 돕는 법은 배웠소이다.

 

   그리고 서사시 <아이네이스>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으나 베르길리우스의 시문에는 고래의 전승(Hesiodus, Aratus, Lucretius)에 입각하여 정의의 여신(virgo Iustitia)을 동경하고, 전원 혹은 농촌이야말로 정의의 여신이 마지막까지 머물다 간 곳, 온갖 불신과 폭력과 불의가 난무하는 도회지를 버리고 와서 최후까지 지상에 머물다 간 곳으로 술회하는 싯귀들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전원생활의 이탈은 곧 정의의 상실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도식이 그에게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겠다. 아울러 시인이 그토록 땅을 사랑하는 까닭은 "사람들의 수고에 충실하게 먹을 것을 돌려주는" 땅이야말로 참으로 정의로운 대지(G 2.460:iustissima tellus)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정의의 여신이 전원마저 버리고 떠날 때에는 세상에 더 이상 의리와 공평이 지켜지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하리라는 경고와 절망이 시인에게는 한데 어우러져 나타나기도 했다.



 

II. <아이네이스>에 나타나는 IUSTUS, IUSTITIA 용례(用例)

 

   어느 나라 문학에서나 중요한 것은 시상(詩想)과 구도(構圖)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과 어휘는 저절로 따라나온다는 지론(rem tene, verba sequentur)과 더불어, 아무래도 문장가의 어휘 선정은 그의 의식을 반영한다(sermo animi est imago)라는 지론이 공존한다. 필자는 후자의 지론에 따라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정의를 표상하는 기조어들 예컨데 '정의롭다'는 형용사 iustus와 '정의'를 뜻하는 추상명사 iustitia를 어떻게 구사하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전사(戰士)들의 호칭으로서 IUSTISSIMUS UNUS

 

   먼저 <아이네이스>에서는 두 사람의 전사의 죽음을 기리면서 이 어휘를 구사하는데 흡사 전사의 비문에 새기는 송덕문의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cadit et Rhipeus, iustissimus unus
   qui fuit in Teucris et servatissimus aequi
   (dis aliter visum).             (2.426-28)
                       리페우스 또한 쓰러졌으니
   테우크리아인들 중에서도 지극히 의로운 사나이
   공정을 지키는데 몹시도 투철한 사람이었거늘
   (신들은 필시 달리 보았을진저)

 

                                          seniorque Galaeus
   dum paci medium se offert, iustissimus unus
   qui fuit Ausoniisque olim ditissimus arvis. (7.535-37)
                                                     노장 갈라이우스마저
   평화의 중재로 나섰다가 (쓰러지는데)  의롭기 그지없었고
   아우소니아땅에서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더니라

 

두 인물다 극중에서 정의라는 덕성에서 탁월한 행적으로 기억될 만한 지면상의 여유를 갖는 중요 배역도 아니었고 그 대목에 불쑥 등장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므로 이 문장들은 어디까지나 비문(碑文 epithapum)에 해당한다. 다만 양편이 전쟁광에 휩싸여 있을 적에 양편을 중재시키려다가 쓰러진 사람들인만큼 이러한 칭호가 지나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리페우스에게는 iustissimus unus 외에도 servatissimus aequi (공정을 지키는데 몹시도 투철한 사람)이라는 수식까지 있어서 고대 로마의 관용어 ius ac aequom 혹은 iustus et aequus를 상기시킨다.

 

(2) 영웅의 덕목(德目)으로서 IUSTITIA ET VIRTUS

 

   문헌학자들의 일반적 의견에 의하면 ius, iustus, iustitia 같은 어휘들이 전통적인 법제적 개념(e.g., ius ac aequom, in ius ire, iustum atque aequum)과 종교적 개념(e.g., iusta facere)에서 비롯하여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개념(e.g., iura qui et leges tenent; summum ius summast malitia)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덕목을 논할 때에 과거에는 법정의와 무력을 대립시킴이 관례였다(e.g., non vi sed iure, iure potiusquam armis, non magis imperio quam iustitia). 그런데 루비콘강을 건너 군사혁명을 시도한 카이사르의 글에서부터는 정의(正義)라는 덕목과 무공(武功)이라는 덕목을 한 영웅의 미덕에 통합시키는 문학사조가 시작한다(summam iustitiae et bellicae laudis opinionem; audacia in bello, in pace aequitate; labor atque iustitia).


   <아이네이스> 후반부에 라티나인들과 트로이아인들 사이의 격전이 한바탕 벌어지고 나서 양편의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하여 휴전을 청하러 투르누스 편에서 사자(Drances)가 온다. 그는 외교상의 수사적 형식으로나마 다음과 같은 찬사를 아이네아스에게 올리고서 협상을 시작한다(11.124-126).

 

                 o fama ingens, ingentior armis,
   vir Troiane, quibus caelo te laudibus aequam?
   iustitiaene prius mirer belline laborum?
              오, 명성이 위대하고 군사로 더욱 위대한 이여!
   트로이아 영웅이여, 무슨 찬사를 바쳐 그대를 천계에서 견주리요?
   정의를 두고 먼저 탄복할 것인가, 아니면 전쟁 무공을 칭송할 것인가?

 

한 인물이 혈통과 덕성에 의하여 명성이 뛰어 나지만 그의 군사로는 더욱 명성이 크다고 칭송을 받는데, 사람들이 그 인물을 두고 정의의 덕(iustitia)이 앞서는지 전쟁의 무공(belli labores)이 앞서는지 구분을 못하겠노라는 말이다.

 

(3) 통치개념으로서의 정치적 정의: IUSTITIA FRENARE

 

   베르길리우스는 서사시에서 먼저 한 국가의 대내적 통치개념에 형용사 iustus를 구사한다. 아이네아스가 신묘한 구름에 띄워져 카르타고성을 내려다 보니 디도 여왕이 통치하는 모습이 보였다(1.507-508).

 

   iura dabat legesque viris, operum laborem
   partibus aequabat iustis aut sorte trahebat
    [여왕은] 사람들에게 법률을 폈고, 공사 노동을 의로운
    당사자들에게 공정하게 배분하며, 제비를 뽑아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용어 iura dare legesque, opera aequare partibus iustis, sorte trahere [iudicia] 등은 고대 왕국의 전형적인 통치개념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네이스>에 나타나는 정치적 정의는 국제정치라는 배경의 소위 제국주의 논리를 깔고 있음이 곧 드러난다. 카르타고 앞바다에서 파선한 트로이아인들이 일리오네우스의 입을 빌어 디도 여왕에게 드리는 청원에 그러한 표현이 있다(1.522-525).

 

   o regina, novam cui condere Iuppiter urbem
   iustitiaque dedit gentis frenare superbas
   Troes te miseri...
   유피터께서 새 도읍을 창건케 하신 여왕이시여,
   오만한 백성들을 정의로 제압하게 하신 여왕이시여,
   우리 가련한 트로이아인들을 거두어 주시도록 청원하는 바이올시다.

 

여왕 디도가 티루스에서 오라버니의 음모를 피하여 카르타고로 도망와서 인근 백성들을 어떻게 정벌하여 도시국가를 세웠는가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전설에 맡긴다는 투로 상세한 설명을 않고, 시인은 곧바로 iustitia gentis frenare superbas("오만한 백성들을 정의로 제압하다")라는 문구만으로 국가 건설의 기틀을 제시하는데서 그친다. 제국주의에 입각한 그러한 정의는 장차 아이네아스가  명계 (冥界)에서 부친 안키세스에게서 들을 사명이기도 하다(6.851-853).

 

   tu regere imperio populos, Romane, memento
   (hae tibi erunt artes), pacique imponere morem,
   parcere subiectis et debellare superbos.
   로마인이여, 기억하라. 그대는 뭇 백성들을 주권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평화로 법도를 부여하는 일, 이것이 그대의 예술이어라.
   속민에게는 관용하고 오만한 자들은 정벌하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패권주의를 추구한 모든 세력이 언제나 표방해온 도덕적 명분들이 여기 요약되어 있다. 정복자들은 먼저, 피정복 민족들이 오만불손하여 이를 정의에 입각하여 제압하거나(debellare superbos), 상대방 민족들이 미개하므로 그들을 정복하여 평화스럽게 계몽하며(pacique imponere morem), 그래도 자기들은 정복자치고는 피지배자에게 관용한 셈이고(parcere subiectis), 어디까지나 전세계를 법치(法治)로 순화하는 사명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고(4.231: totum sub leges mitteret orbem), 대부분의 종족들은 자원하여 자기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G 4.561-562: victor volentis/ per populos dat iura)는 명분이다. 여하튼 제국의 사명은 '세계 정신'으로부터 로마 민족에게 부여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편다(tu, regere imperio populos, Romane, memento!).

 

(4)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정의와 신적 정의(神的正義)

 

   <아이네이스>에는 신에 의거한 상선벌악의 정의를 논하는 구절도 없지는 않다. 아이네아스가 디도에게 자기 부하들을 거두어 준 데 대한 사례의 말에는 통상적인 응보의 원리가 명기되고 있다(1.603-05).

 

   di tibi, si qua pios respectant numina, si quid
   usquam iustitiae est et mens sibi conscia recti
   praemia digna ferant.
   신들이 만일 경건한 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 대체 정의라는 것이 있고 바른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정신이 있다면
   신께서 그대에게 합당한 상급을 베푸셔지이다.

 

통상적인 상선벌악의 개념에서 신적인 정의(pios respectare numina)와 인간의 개인적 정의감(mens sibi conscia recti)을 표명함으로써 시인에게는 묵시문학적 관념만 아니라 정확하고 상식적인 정의 개념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왕 디도는 사랑하는 아이네아스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려는 심지가 굳어지자 연인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노라면서 신들에게 사랑의 신의를 저버리는 불의한 자를 벌주라고 저주하는데 그 정경을 시인은 핀잔섞인 어투로 기술한다(4.520-521).

 

         tum si quod non aequo foedere amantis
   curae numen habet iustumque memorque, precatur.
                                         떳떳치 못한 연분으로 맺어진 연인들을
   의로운 신성이 흡사 보살피고 기억해 주기라도 하듯이 저주하였다.

 

아이네아스가 디도의 사랑에 굴한다면 제국을 창건하고 역사를 주도하는 운명을 저버리는 셈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련(邪戀)을 나누는 연인들(non aequo foedere amantes)이라는 것이 시인의 시각이요, 또한 주인공 아이네아스는 둘의 관계를 법적인 관점(iustum matrimonium, iusta uxor)에서 검토하여 책임을 면하려는 입장임에 비해서, 여왕 디도는 "떳떳치 못한 연분으로 맺어진(amor non aequo foedere)" 사랑을 곧 "한 편만이 성실을 다한 불공정한 사랑(amor iniquus)"라고 달리 정의한다. 애정에 임하는 남녀의 현격한 시각 차이를 베르길리우스는 섬세하게 암시하고 있다

III. AENEAS IUSTUS PIETATE

   

로마인들이 사랑하는 iustitia라는 덕목은 아이네아스의 부하들도 자기네 주공(主公)에게 바치던 덕성이었다. 카르타고 해안에 파선한 아이네아스 일행이 디도 여왕에게 아이네아를 소개하는 장면에는 그의 신원을 표현하는 두 덕성, 정의와 무공이 한데 나온다(1.544-545).

 

   rex erat Aeneas nobis, quo iustior alter
   nec pietate fuit, nec bello maior et armis
   아이네아가 우리 주공이었는데, 경건에서 그보다 의로운 이
   없었고 전쟁과 군사에서 그보다 출중한 이 없었더이다.

여기서 아이네아스에게 부여되는 칭호 iustus pietate(경건으로 의롭다)는 <아이네이스>에 담아둔 베르길리우스의 정의관을 해독하는 열쇠가 된다. 작품 전체에서 아이네아스에게 바쳐지는 가장 비중있는 호칭은 pius Aeneas(경건한 아이네아스)이다. 아이네아스가 조국땅을 잃고 신천지를 찾아 방랑중인 소집단의 군주로서(Rex erat nobis Aeneas) 자기가 통솔하는 집단을 상대로는 대내적 정치정의를 구현할 수 있겠고, 그의 자손만대에 가서는 상고시대의 정의로운 태평성대(aurea saecula Saturnia)를 재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서사시 전편에 개진되는 작품구성상으로는 그러한 통상적이고 대내적인 정의로 해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

   호메로스의 시세계가 파리스 사건에서처럼 인간 사회에 무너진 신의(pollutum hospitium)라던가 도시국가와 도시국가 사이의 국제법(ius gentium, iustum bellum)라던가, 같은 동맹세력 사이에서나 단일한 도시국가내의 법정의 와 법절차를 거론하고 있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흐르는 시적 정의는 한결 복잡하고 심원하다.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떠밀려서 (fato profugus)지상에 로마 제국이라는 역사를 창건하는 사명을 띠고서 본의 아니게 남의 영토를 침범하고, 본의 아니게  투르누스에게서 라비니아를 빼앗는 제 2의 파리스가 되며, 본의 아니게 온갖 불행과 제난을 자기 부하들과 상대방에게 초래하는 숙명을 지고 있다(7.321-322; 7.361-364 참조). 그렇지만 그것은 당사자의 경솔한 야심이나 애욕에서 나온 과오가 아니고 운명과 역사에 대한 의무로 지워진 숙명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이네아의 행동명분은 법정의(ius civile)나 국제법상의 정의(ius gentium)의 준수에 있지 않고, 영웅으로서  로마 제국의 출현이라는 역사의 경륜을 성취하라는 신의 뜻(Fatum으로 표상된다)을 따른다는 점에 있다.

   아이네아스의 등장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반대받는 표적'(signum contradictionis)이요, '많은 사람들의 파멸'(in ruinam multorum)이 된다. 그러므로 시인은 단순한 인간적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어가야만 한다. 아이네아스 자신이 신비로운 운명이 부리는 첫번째의 희생물이면서 또한 어디를 가든지, 본인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고통과 파멸을 가져다 주고 적이나 원수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부하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오로지 죽음과 고통을 초래할 따름이다.

   디도는 간절하고 순수한 사랑을 버림받고(non aequo foedere amantis) 영원한 저주를 남긴 채 자결하며, 라티누스는 아이네아스에게 온갖 친절을 다하고서도 아이네아스와 전쟁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며(pollutum hospitium), 두 진영에 남편과 아들들을 출정시키고 사랑하는 이들의 전사를 통곡하고 절망 속에 받아들이는 평범한 여인들의 군상(bella, horrida bella), 난데없는 침입자와 그 야심(imperium sine fine)에 대항하여 국가와 명예와 권리를 지키려는 투르누스의 정당방위(10.75: patria Turnum consistere terra)... 이 모두가 범상한 사회정의로는 도무지 해답을 얻을 길 없는 사건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웅의 행적에서는 일정한 국가 공동체(civitas) 안에서 통하는 법정의(ius ac aequom)로는 해명이 안되는 요소가 많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의 기존의 권리와 영토를 침략하여 소유하고 민족들을 굴종시키는 전쟁(in armis silent leges)에서는 승리자의 행동 명분은 오로지 "운명에 대한 경건한 복종"(pietas erga fatum)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자기가 도달하는 곳이면 어디나 파괴와 침략 그리고 전쟁의 참화를 몰고 오는 아이네아스로서는 인간들에게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신들에게 그 덕목이 해당하며 따라서 그가 준수할 정의는 국가사회나 국제법을 초탈하는 운명 앞에서의 정의라는 베르길리우스의 정의 개념이 등장한다.


IV. 형이상학적 정의 개념: FATUM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읽는 사람은 맨첫구절부터  인간 역사의 문제와 더불어, 온갖 불의로 표상되는 악(惡)의 형이상학적 차원과 우주적 통찰의 인간 문제들을 접하게 된다(1.1-3).

 

   Arma virumque cano, Troiae qui primus ab oris
   Italiam fato profugus Laviniaque venit
   litora.
   병갑과 용사를 두고 내 노래하노니, 일찌기 트로이아 해변을 떠나
   운명에 떠밀려 이딸리아 땅을 최초로 밟고 라비니아 강변에 당도한
   사나이로다.

 

인간사를 주재하는 운명에 떠밀려서 이탈리아에 도달하여 라비니아 해안을 처음으로 밟고서 인류사의 섭리적 사건, 즉 "드높은 로마의 성벽"(1.7: altae moenia Romae)을 구축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인생이 하나의 신비이고 거기 사멸할 인간의 정욕과 자유가 신성한 천계의 의지(voluntas divina)와 어떻게 공존하며 해명되느냐는 철학자들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영웅과 그를 수행하는 인간들의 비극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는 지난하면서도 도저히 회피할 길 없는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아이네아스와 그 일행은 자기들이 남의 땅 라티움에 상륙한 명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7.239-240).

 

         nos fata deum vestras exquirere terras
   imperiis egere suis.
         신들의 운명이 그 명령으로 우리를 떠밀어 그대들의 땅을
   찾아오게 했소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시어(詩語) 중에서 운명(Fatum)이라는 시적 형상(figura poetica)은 가장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신비의 열쇠(1.262: arcana fatorum)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아이네이스> 전작품이 이 어휘로 시작하고(1.2: fato profugus) 이 어휘로 끝난다(12.726: Iuppiter fata imponit diversa duorum)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운명이란 신들의 뜻을 초월하는 어떤 추상적 원리이기도 하고 제신(諸神)혹은 최고신(最高神) 유피터의 결의(決意) 내지는 의지(decretum et voluntas divina: fata deum, fata Iovis, fata et deus)라고 모호하게 정의된다. 입법자의 의지가 법률의 원천이라는 로마인들의 사고(Claudianus: regis voluntas suprema lex)에 의하면 운명 혹은 유피터 신의 뜻이야말로 법률 곧 정의의 최고원천이 된다. 그리고 이 운명이라는 시적 형상이 서사시에서 최고의 법정의(Fati lex)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시인은 여신 유노의 입으로 고백케 한다. 이탈리아가 트로이아인들의 왕에게 지배되는 일을 여신은 막고 싶지만 그것은 "운명이 금하는 바" (1.39: vetor fatis)이며, 자기나 대신(大神) 유피터가 처리할 수 있는 바도 "운명의 법이 금하지 않는 범위내에서"(nulla fati quod lege tenetur)임을 다음과 같이 자백한다(12.818-820).

 

   et nunc cedo equidem pugnasque exosa relinquo
   illud te, nulla fati quod lege tenetur
   pro Latio obtestor, pro maiestate tuorum.
   이젠 물러가며 싸움일랑 지겨워서라도 떠나리다.
   하지만 운명의 법이 금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당신에게 하나 청하리다.
   당신의 주권이 해결할 수 있는 바를 라티움을 위해 청하리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이치가 그렇다면 사멸하는 인간들이 추종해야 할 최고의 법적 권위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주인공 아이네아스가 한때 의기소침하여 망설일 때에 연로한 신하가 격려하는 말마디가 있다(5.709-710).

   nate dea, quo fata trahunt retrahuntque sequamur;
   quidqud erit, superanda omnis fortuna ferendo est!
   여신의 아들이여, 우리야 운명이 어디로 끌고 되끌어가든 따르기로 합시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갖 숙명을 견뎌내어 이기는 수밖에 없으리다.

 

그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운명의 질서(fatorum ordo)를 맹종하거나 그렇지 않고 항거하다가 신들의 엄청난 분노(ira magna deum)를 사서 파멸하거나 양자택일의 길밖에 없는 까닭이다. 영웅으로서는 "운명을 따름"(fatum sequi: 18회)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악과 불의라는 고통에 직면하여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에서 풀어보고자 하는 주제를 운명이라는 형이상학적 원리에로 소급시키더라도, 만일 인간의 맹목적 탐욕 외에도 운명의 실현을 훼방하는 저항 세력이 있다면 문제는 또다시 심각해진다. 운명의 정의를 제대로 풀어가려면 호메로스의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신적 정의(神的正義)를 동시에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시인이 서사시 서두에서 자기 입으로 직접 의문을 제기한다(1.8-11).

 

    무사여, 내게 까닭을 일깨워 주오. 어느 신령을 범하였기에,
    신들의 여왕이 무엇을 아파하기에, 저토록 우여곡절을 엮어내는 것이며
    경건이 극진한 인물로 하여금 그 많은 고생을 겪도록 몰아 세웠던가?
    천상 존재들의 심정에 그토록 심한 분노가 있다는 말인가?

 

인간들 사이의 정의와 불의를 궁극으로는 신들의 뜻마저 초월하는 '운명'에 소급시킨다면, 그러한 운명을 집행하는 유피터나 운명의 실현을 방해하는 신들에게 그 마지막 책임이 소급됨은 당연한 논리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제기하는 의문처럼, 도대체 어쩌다 경건(pietas: 신들의 뜻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덕목)이 극진한 인간에게, 다시 말해서 단지 윤리도덕상으로 무죄할 뿐더러 신들에게 도리를 다하는 인간에게 전쟁과 온갖 역경과 고통이 따른다는 말인가? 아이네아스의 경우, 운명의 뜻을 따르고 신들에게 도리를 다하는 이상(insignis pietate vir), 비록 제아무리 천계의 신성들에 의해서 도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닥치는 온갖 역경과 전쟁과 박해는 불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베누스 여신이 아들을 편들어 유피터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 (1.253: hic pietatis honos?)에서 그런 발언이 있다.


   운명에 떠밀려가는(fato profugus) 한 용사와 병갑을 노래하자면 의당히 우주와 그 운명을 주관하는 형이상학적 정의와, 형이상학적 정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인간의 운세를 좌우하려는 신들의 행패(quo numine laeso?)를 시비하여 신적 정의를 함께 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악에 관한 보편적이고 이론적인 문제가 풀려야만, 그리고 지상의 현세적 악을 해명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신적인 정의가 풀려야만 그것에 근거하여 인간들의 사회정치적 정의가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신적 정의와 인간적 정의를 화해시키려는 베르길리우스의 사상은 신들 간의 평화(pax deum)가 깨어지면 지상에는 정의도, 그 열매인 평화도 있을 수 없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아이네이스> 10권 서두에는 천계의 회의가 열리는데 그 회의석상에서는 운명의 뜻을 성취하려는 한 영웅의 행적을 두고 신성한 두 세력이 대결한다. 아이네아스의 어머니 베누스 여신이 나서서 트로이아인들에게 점지된 '운명'을 내세우면서 몇몇 신들이 나서서 운명의 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논리로 유피터에게 신적 정의(神的正義)를 호소하는가 하면, "크나큰 분노에 떨며" 여신 유노가 라티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근본원인이 트로이아사람들의 침략이며 라티움사람들은 정당방위를 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옹호한다. 신들의 회의에서 신적 정의와 사회 정의가 대결하면서 정의의 신학적 배경이 구성되는 것이다. 하계에서 운명의 이름으로 왔노라는 아이네아스와 조상의 땅을 지키겠다는 투르누스 사이의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가를 따지는 '의로운 전쟁'(iustum bellum) 시비에도 일리아스를 배경으로 파리스의 헬레나 납치와 신의의 파기가 여신 유노에 의해서 다시 제소된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정의론에 임하여 선을 표상하고 운명의 집행을 책임지는 유피터는 지상의 전투가 신의 뜻에 어긋나는 불의한 것이라는 판정을  내린다(10.6-11).

 

    천계의 위대한 주민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의 뜻을 돌이켜
    불손한 마음으로 서로들 그리 쟁론하는가?
    내 이딸리아가 떼우끄리아인들과 겨루는 것을 일찌기 금하였도다.
    무슨 불화가 있어 나의 금령을 거스리며,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들 무기를 찾아 싸움을 일으키게 선동하는가?
    싸움을 할 정당한 때가 오리니 부디 이를 앞당기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지금 지상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천계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분열이 있으며, 그렇다면 증오에 찬 어떤 분노,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하기로는 파리스의 황금사과 경쟁에서 미의 여신 베누스에게 패배한 유노여신의 분노(1.36: cum Iuno aeternum servans sub pectore vulnus)가 신성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천계에서 이미 신적 정의가 파괴되어 있고, 따라서 지상에서 가련한 인생들이 벌이는 어리석은 전쟁의 발광 뒤에는 인력을 초월하는 악마적인 세력(7.324: luctifica Allecto), 인간들만 아니라 신들마저 갈라놓는 불화(不和)라는 초인적 존재가 움직이는 것으로 시인은 묘사한다. 천계와 지상에 두루미치는 이러한 존재론적 분열이 가져올 것이라고는 "서글픈 전쟁, 분노와 모략과 마음을 해치는 죄악"(7.325-326: cui tristia bella / iraeque insidiaeque et crimina noxia cordi)뿐이다.


   결국 대신 유피터는 운명의 집행자로서 결정을 내린다. 여신 유노가 운명의 뜻을 "꺾지 못할 바에야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노라"(7.312: flectere si 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며 진척시켜오던 술책과 음모를 정식으로 금지시킨다(12.806: ulterius temptare veto "더 이상의 시도는 엄금하노라!"). 그리고 유피터의 섭리적인 배려로 새로 세워질 로마도 유노 여신에게 극도의 공경을 다하게 되리라는 담보를 받고서 유노는 신들의 뜻, 곧 섭리를 받아들이고 물러선다(12.841: adnuit et relinquit).


   천계에서 이같은 협상과 타협이 이루어지면 그떄까지 신들이 패를 갈라 뒷받침하고 있던 지상의 정치적 군사적 세력은 판도가 달라진다. 지상의 사멸할 인간들이 권리와 정의는 한낱 핑계처럼 미미하고 무력해 보이며 그 명분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간들은 가련한 종말을 맞게 된다. 운명의 실현을 방해하는 신성들의 분노와 개입이 지상의 모든 비극을 초래하는데 유노 여신이 마음을 풀었으니 드디어 존재계에는 화평(pax deum)이 도래한 셈이고 따라서 지상에는 다시 운명이 주재하는 평화가 바로 서게 될 것이다. 유피터신은 더할나위없이 공정한 입장을 내세우면서 운명과 신들의 개입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묘하게 공존하는듯한 선언을 내어놓는다(10.111-113).

 

                   sua cuique exorsa laborem 

   fortunamque ferent. rex Iuppiter omnibus idem. 

   fata viam invenient.
                   각자의 창의(創意)가 각자에게 수고와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임금 유피터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니라.
   그러니 운명이 길을 열어주리라.

 

 

V. 베르길리우스의 시적 정의(詩的正義)

 

   만토바에서 시작하여 로마와 칼라브리아로 떠도는 유랑생활을 하면서 베르길리우스가 도달한 경지,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그가 다루려는 바는, 정의로운 로마 사회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사변이 아니었다. 본인이 체험한 사회악이며 갖은 악과 불의와 고통으로 점철된 현실 삶의 신비를 관조하고, 그 모든 악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설파하는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숙명이 있어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서 그 숙명을 의식하는 가운데 운명이 이끄는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후대의 용어로는 일종의 숙명론적 예정설이 되겠는데 그렇게 예정된 법칙에 인간이 동의하고 참여함으로써 운명은 자유의 법이 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영웅이 명계에 갔을 때에 그의 부친 앙키세스의 입을 빌려 이 신비를 다음 한 마디로 피력한다(6.743).

 

         quisque suos patimur manis
         인생은 누구나 자기 분수를 겪어가게 마련이라.

 

위대한 인물들과 영웅들도 패배하고 쓰러질 때에(victi tristes), 그리고 전장에서 이름없이 싸우다가 영웅들의 공덕을 높이는데만 이바서 사라져가는 농군들과 목자들, 전쟁이 끝나면 사령관들 밑에서 종군한 베테랑들에게 조상 전래의 농토를 몰수당하고 도시나 식민지로 쫒겨가는 사람들은 어찌되는가?


   그의 서사시에서 엑스트라나 배역으로 등장하는 크고 작은 인물들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다운, 한없이 서글픈 시선과 동정을 보내고 있다. 그 스스로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기에(1.630: non ignara mali) 불행을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향하는 그의 연민을 서사시 전편에서 독자는 감지하게 된다. 고대 로마 문인들 가운데서 악의 문제를 지극히 섬세하게 관조한 최초의 시인으로서 베르길리우스는, 올림포스산의 신들의 시선을 빌려 인간사와 영웅들의 수고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10.758-759).

 

   [천계의 불사자들은] 사멸하는 인간들에게 헛된 분노와 수고며
   그토록 많은 수고가 끼쳐져 있음을 가련하게 보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나서 <아이네이스>를 읽는 독자들은 시인의 감성이 그에게 동정과 비통을 자아내는 그 인물들에게로 집중되어 있음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베르길리우스의 감정과 시세계는 언제난 패자들의 편에, 희생자들의 편에 있다는 점이 문학사의 특이한 요소이다. 시인이 피에 굶주린듯 아이네아스에게 맞서는 용감무상한 용사들을 등장시키는 경우에도, 투르누스나 메젠티우스의 경우처럼, 정작 그들이 죽을 임시에는 주인공의 칼에 여지없이 베어져 복수를 당한다는 쾌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인간 비극 앞에서 뭉개진 인간의 신음과 흐느낌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는듯이, 시인은 그 적장들이 자기 운명 앞에 굴종하는 순간 기이하게도 자기를 의식하고 뚜렷한 의식 속에서 비록 절망하면서도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다.


   메젠티우스의 경우(10.821-908)는 그 최후의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충격 속에서 인간 회복을 얻으며(10.904: scio...) 그리하여 서사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화를 구성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운명의 가혹하고도 엄정한 폭정 앞에서 개개인 영웅들의 운수는 (천계에서 나누는 신들의 대화 속에 나오듯이) 돌이킬 수 없게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연출하는 그 모든 광분과 비명과 몸부림을 객석에서 지켜보는 독자들의 시선에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사멸자들이 오로지 연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인간적 자유가 행사되는 범위는 너무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그들이 저지르는 분노와 음모, 살륙과 배반은 하찮은 실수로 치부된다(nemo malum volens operatur). 신들에게도 전망이 불투명한 운명이 우주와 역사와 그리고 그 안에서 전개되는 인간사를 지배하고 있는 마당에서는 인간 지성이 사리를 제대로 보지 못할 뿐더러, 심지어는 천계 신들의 조작이나 인간 욕정의 분출로 인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게 차단당하는 법이어서, 베르길리우스는 작중 인물 그 누구도 단죄하지 않으며 그 누구의 언행도 선입견적으로 기피하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형이상학적 원리에서도(fata viam invenient), 만사를 공정하게 주관하노라는 유피터의 선언에서도 (rex Iuppiter omnibus idem) 베르길리우스는 자기를 설득할만한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아이네아스가 명계를 찾아갔을 때에 인간 비운과 신적 불의의 표본적인 피해자 플레기아스를 만난다. 그는 일찌기 군신 마르스의 아들로 태어난 영웅으로 아폴로신이 자기의 딸 코르니데를 사랑하여 임신시킨 뒤에 변심하고는 죽여버리자 딸을 위한 복수로 델피의 아폴로 신전을 불질렀다가 아폴로의 화살에 맞아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는 거대한 바위에 짓눌려 영겁에 이르도록 고통받는 처지가 된다. 프로메테우스같은 항거와 발악을 기대하는 독자들이지만 플레기아스가 내놓는 발언은 너무도 의외롭다. 사멸할 인간들 사이에서 통하는 인정법이나 도덕에 비추어보면 자기는 오로지 피해를 당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플레기아스는, 자기한테 그토록 불의를 행하였지만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 앞에서는 역부족임을 인정하라고((델피의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GNOTHI SAUTON의 본뜻이 그러했으리라), 인간은 아무리 저항하고 발악하더라도 결국 운명의 힘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굴종의 자세를 보여준다(6.20)

 

   discite iustitiam moniti et non temnere divos
   그대들 나를 본보기로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것이며
   신들을 경멸하지 말라!

 

   시인 베르길리우스에게 정의는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준다(suum cuique tribuere)"라는 사회도덕적 덕목도 아니고 공평과 법제를 준수하는 법정의도 아니며, 운명과 신의(神意)를 따르는 종교적 덕성(sua cuique exorsa), 곧 경건(pietas)으로 해석되고 있다. 라틴문학에 새로 도입된 정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목가집>에서 시작하여 <아이네이스>에 이르는 악의 문제는 결국 해결이 없이 끝을 맺는 셈이다. 운명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나 천상회의와 신들의 조정에서 초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해설은 지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온갖 불의를 해명하지는 못하는 희미한 달빛에 불과할 따름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러한 인간 조건을 아이네아스가 운명과 정의에 관한 궁극의 해답을 찾아 명계로 내려가는 어둑한 길로 비유한다(6.270-272).

 

   거기 희끄므레한 달 아래 음산한 빛이 내리비치며
   숲속으로 길이 나 있는데, 그곳에는 유피터가 하늘을 그늘로 가리운듯
   흉흉한 밤이 사물로부터 온갖 색채를 앗아가버리고 없더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찌기 비극이 갖는 정화력(catharsis pathetica)을, 인간사의 모든 역경과 불의와 고통 앞에서 심리적 구원을 찾아얻는 정화작용을 논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바라보는 세계, 악으로 점철된 현세계의 모습은 오히려 독자에게 깊은 한숨과 절망을 줌으로써 정의에 관한 더욱 절박한 문제의식을 고양시킬 따름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독자에게 시적 정의감을 건네주는 절묘한 기교가 아닌가 한다.


   "용사와 병갑을 내 노래하리라(Arma virumque cano 1.1)"던 장중하고 당당하던 서사시적 서두에 비한다면 사실 로마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너무도 급작스럽고 단절적으로 종장을 맺는다. 거대하고 저항할 길 없는 운명의 위력과 신들의 일방적인 개입 앞에서(12.895: di me terrent et Iuppiter hostis) 무력하게 쓰러져가는 영웅 투르누스의 최후 비명으로 붓을 던지는 소리에 우리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악과 불의에 던져오던 "왜?"라는 물음이 거대한 의문표로 눈앞에 확대되는 여운에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12.952).

 

   vitaque cum gemitu fugit indignata sub umbras
   투르누스의 넋은 한맺힌 절규 속에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 베르길리우스에 관한 일반 연구나 본논문의 소재와 관련된 자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cademia Nazionale Virgiliana, Atti del Convegno mondiale scientifico distudi su Virgilio 1981, 2 vols. (Milano 1984)
N.Bosco, Idea e concezione della giustizia nelle civilta occidentale (Torino 1968)
P.Boyance, La religion de Virgile (Paris 1963)
L.Canali, L'eros freddo: Studi sull'Eneide (Roma 1976)
E.Coleiro, Tematica e struttura dell'Eneide di Virgilio (Amsterdam 1983)
G.Del Vecchio, La giustizia (Roma 1959)
E.Hamel, De jure et justitia (Roma 1966)
E.A.Havelock, The Greek Concept of Justice (Cambridge Mass., 1978)
J.Hellegouarc'h, Le vocabulaire latin des relations des partis politiques sous la Republique (Paris 1963)
B.Lloyd-Jones, The Justice of Zeus (Bekerly Calif., 1971)
B.Otis, Virgil. A Study in Civilized Poetry (Oxford 1963)
J.Perret, Virgile. L'homme et l'oeuvres (Paris 1952)
P.Pinna Parpaglia, Aequitas in libera republica (Milano 1973)
M.Pohlenz, La liberta greca, tr.    (Brescia 1963)
M.C.J.Putnam, The Poetry of the Aeneid (Cambridge 1965)
J.Thomas, Structures de l'imaginaire dans l'Eneide (Paris 1981)
J.Van Sickle, Poesia e potere. Il mito virgilio (Roma 1986)
G.Williams, Techniques and Ideas in the Aeneid (London 1983)
Ch.Wirszubski, Libertas as a Political Ideas at Rome during the Later Republic and Early Principate (Cambridge 1950)

* 베르길리우스에 관한 연구의 종합적 서지(書誌)는 W.Donlan, The Classical World Bibliography (New York 1978); H.Temporini ed.,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omischen Welt II: Principat 31.1-2 (1983)을 참고하면 된다. 그밖에는 잡지 Vergilius에 연재되고 있다. 

 

  각  주

1) 본고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필자의 학위논문 Quid cogitaverit et senserit Vergilius de iustitia in poemate quod inscribitur Aeneis (Romae 1986)의 여러 소재가 참조되었다.

2)  Mantua me genuit, Calabri rapuere, tenet nunc
          Parthenope. cecini pascua rura duces.
   "만또바 나를 낳고 깔라브리아가 나의 숨을 거두었으며 지금은
    파르테노페 여신이 나를 품고 있느니라.
    내 일찌기 전원과 들녘과 호걸을 노래하였느니라."

3) 베르길리우스의 텍스트 인용은 P.Vergili Maronis opera, R.Mynors ed.(Oxonii 1969), 본문 주석은 Virgilio, Eneide, a cura di Ettore Paratore,traduzione di Luca Canali, 6 vols. (Milano 1978-1983)를 사용하였다. 베르길리우스에 관한 기본 입문서로는 E.Paratore, Virgilio (Firenze 1954-2), K.Buchner, Virgilio, tr. Gino Cecchi (Brescia 1963)을 꼽는다.

4) E 1.1-4: Meliboeus ad Tityrum
      Tityre, tu patulae recubans sub tegmine fagi
      silvestrem tenui Musam meditaris avena;
      nos patriae fines et dulcia linquimus arva.
      nos patriam fugimus.

5) E 1.67-72: Meliboeus ad Tityrum
      En umquam patrios longo post tempore fines,
      pauperis et tuguri congestum caespite culmen,
      post aliquot, mea regna videns, mirabor aristas?
      Impius haec tam culta novalia miles habebit,
      barbarus has segetes? En quo discordia cives
      produxit miseros: his nos consevimus agros!

6) A 10.779-782   qui missus ab Argis
      haeserat Evandro atque Itala consederat urbe.
      sternitur infelix alieno volnere caelumque
      adspicit et dulcis moriens reminiscitur Argos.
특히 마지막 행을 낭송하면 그 격한 감정을 SS음으로 생생하게 드러내고있음을 알 것이다:
      !         !       !       !         !       !
      ad-Spicit et dul-ciS mori-enS remi-niScitur Ar-goS

7) 시인이 '땅'에다 '사랑하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는 여러번 있다.
   G 2.511 domos et dulcia limina mutant
   A 4.281 (Aeneas) ardet abire fuga dulcisque relinquere terras
   cul.71  florida cum tellus vere notat dulci distincta coloribus arva.

8) Cf., dulcia arva (-vv -v) ↔ impia arma (-vv -v).
베르길리우스는 운명과 신의를 항거하여 일으키는 전쟁을 impia arma라고
지탄한다:  6.613  qui arma secuti impia; 12.31  arma impia sumpsi.

9) G 2.473-474
                            extrema per illos
      Iustitia excedens terris vestigia fecit.
                   (전원이야말로) 지상을 떠나는
      정의의 여신이 마지막 발자취를 남긴 땅이라.
젊은 시절에 쓴 단편에도 순박한 농경사회에서마저 신의와 정의가 사라지고 없음을 탄식하던 싯구가 있다(Culex 225-227).
                 et rure cessit
      Iustitiae prior illa Fides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보다도
      신의의 여신 피데스가 먼저 시골을 떠났거니와....
그리하여 태평성대가 오면 정의의 여신(Virgo)이 다시 오리라는 기대감이 저 유명한 목가 4편에 그려져 있다(E 4.6).
      iam redit et Virgo, redeunt Saturnia regna
      정의의 처녀 여신이 돌아오며 사투르누스 치세가 돌아오는도다.

10) G 2.458-60
      o fortunatos nimium, sua si bona norint
      agricolas! quibus ipsa procul discordibus armis
      fundit humo facilem victum iustissima tellus.
      너무도 복에 겨운 농사꾼들이여, 자기네 복을 알기만 하면 좋으련만!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온갖 불화를 일으키는 중에도, 참으로 의로운
      대지의 여신은 흙에서 손쉽게 먹을 것을 주시느니....

11) 필자는 다른 기회에 이처럼 이삭줍기식의 지엽적인 작업을 해 보았다. "IUSTITIA의 어원학적 고찰. 라틴문학에 나타나는 IUS, IUSTUS, IUSTITIA 용례" 서양고전학 연구 4(1990), 175-204; "로마 산문작가들의 IUSTITIA 용례. Varro, Caesar, Sallustius, Nepos의 산문에 나타나는 IUS, IUSTUS, IUSTITIA 용례" 김병상(金秉相)신부 화갑기념논문집 <義로운 社會와 敎會> (가톨릭출판사 1992), 123-154 참조.

12) 4세기의 베르길리우스 주석가(Servius)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 iustus secundum leges vel aliqua rationes constructum, aequus iuxta naturam ("정의롭다 함은 법률에 의거해서나 다른 원리에 따라 설정된 사유에 의거하여 하는 말이고, 공정하다 함은 자연 이치에 의거하여 하는 말이다."). 리페우스의 운명을 두고 베르길리우스가 던지는 한 마디(dis aliter visum)는 소위 신적 정의 (神的正義)에 관한 시인의 회의를 표출하는 구절로 지적되기도 한다.

13) 그래서 주석가는 이 구절을 두고 "한 편만이 뜨겁게 바쳐온 참 사랑, 그러나 결국 불공정한 사랑이었으므로, 만일 정의로운 신성(numen iustum)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둘의 시비를 가려줄 것이요 잘못한 편에게 벌을 주리라는 의미"(de amore iniquo iustum ad iudicandum ut expugnetur causa discordiae, memor ad vindicandum: Servius ad loc.)라고 풀이한다.

14) 주석가(Servius)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정의와 경건 사이에는 관련이 크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가 어느 면에서 정의로운 사람인가하는 문제인데 경건에 의해서 의롭다고 한다. 법률과 공정에 입각하여 정의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신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경건에 입각하여 정의롭다는 것이다" (multum interest inter iustitiam et pietatem... nunc ergo hoc dicit, qua parte sit iustus, id est pietate...non iure aequoque sed pietate).

15) Servius ad locum: iustus non erga homines sed erga divos... non secundum aequum et iustum, sed secundum fatum("아이네아스가 의로운 것은 인간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들에 대해서이며, 공정과 정의에 입각하여 의로운 것이
아니라 운명에 입각하여 의롭다").

16) 5.706-707
                           vel quae portenderet ira
      magna deum vel quae fatorum posceret ordo
                      신들의 엄청난 분노가 예고하는 바가 무엇인지
      운명의 질서가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지....

17) 1.8-11
      Musa, mihi causa memora, quo numine laeso
      quidve dolens regina deum tot volvere casus
      insignem pietate virum, tot adire labores
      impulerit. tantaene animis caelestibus irae?

18) 10.6-11
         caelicolae magni, quianam sententia vobis
         versa retro tantumque animis certatis iniquis?
         abnueram bello Italiam concurrere Teucris.
         quae contra vetitum discordia? quis metus aut hos
         aut hos arma sequi ferrumque lacessere suasit?
         adveniet iustum pugnae (ne arcessite) tempus.

19) 12.841-42
      adnuit his Iuno et mentem laetata retorsit;
      interea excedit caelo nubemque relinquit.
      이 말에 유노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유쾌해져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물러서며 구름을 떠나갔다.

20) 10.758-759
                       iram miserantur inanem
      amborum et tantos mortalibus esse labores

21) 6.270-272
      quale per incertam lunam sub luce maligna
      est iter in silvis, ubi caelum condidit umbra
      Iuppiter, et rebus nox abstulit atra colorem.

22) Cf., Aristotelis, Ars poetica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