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길리우스 서사시
  <아이네이스> 의  종교철학적  주제
 
 
                                                                                  1993 희랍과라틴문학연구 1 (93-116)
 
1. 베르길리우스의 생애와 문학적 위치

    라틴문학의 최고봉인 Publius VERGILIUS Maro(B.C.70-19)는 T.S.엘리어트의 평대로 '시대의 증인이요 인류의 예언자'로서, Th.헥커의 호칭대로 '서양의 어버이'(Vergilius Vater des Abendlands) 로서 서구인들의 숭앙을 받는,로마 서정시(抒情詩)와 서사시(敍事詩)의 대가이다. 혹자는 평하기를, 좁은 의미에서 서구문학은 Theocritus에게서, 서구철학은 Epicurus에게서, 그리고 서구의 휴머니즘은 Vergilius에게서 발원하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단테가 서양 그리스도교 중세기 문화를 총결산한 <신곡 (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 베르길리우스를 명계(冥界)를 순례하는 길잡이로 모신 것도 이유가 없지 않다(<신곡>지옥편 1.82-87 참조).

    그는 <목가집(牧歌集 Bucolica)>에서 에피쿠루스적인 평온한 목가적 생활이 전쟁이라는 악과 토지몰수라는 불의에 의해서 무너지는 비통을 노래하였고, <농경시(農耕詩 Georgica)>에서는 땅에 대한 사랑 속에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으며, 그의 명성을 불후하게 만든 마지막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에서는 인간 혹은 인류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넓다란 지평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베르길리우스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철학적 종교적 주제들을 지적해 보는 것으로, 그의 종교철학의 맥락을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에게서 고증해내는 작업이 아니라, 서사시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즉 소위 문헌학적 방법(philology)에 의거하여 그의 시문들을 인용하면서 거기에 담긴 사상을 해설체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한 편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현실에서 베르길리우스 인물과 주요 작품,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대표작인 <아이네이스>의 대강 줄거리와 그 심미적 인간적 정감(情感)을 소개하여 입문적인 지식이라도 갖고 시인의 종교철학적인 시선에 접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생애를 간추리는 것은 우리에게 구전으로 전수되어 오는 그의 묘비명으로, 임종시에 직접 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또바 나를 낳고 깔라브리아가 나의 숨을 거두었으며 지금은  파르테노페 여신이 나를 품고 있느니라.   내 일찌기 전원과 들녘과 호걸을 노래하였느니라."
 
그는 B.C.70년(10월 15일)에 Mantua 근교 Ande에서 출생하여 인근지역에서 수학을 하고 로마에 와서 에피쿠루스학파인 Epidius, Siro에게서 사사하였고 당대의 거의 모든 문인들(Catullus, Pollio, Cinna, 후일에는 Horatius, Varius [베르길리우스의 사후에 그의 유고집을 간행한다] Plotius Tucca) 과 교유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에 문학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교와 카툴루스의 시풍이 강렬하게 나타나고 바탕에  깔린 철학은 에피쿠루스 사상임은 여기서 이해가 가능하다. 청년시절 그는 로마의 내란과 그에 수반한 무수한 사회악을 체험케 된다. 카이사르의 승리가 구축된 뒤인 45년에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즐기 며 작품활동에 몰두하던 중 42년 옥타비아누스의 군인들 veterani에게 북이탈리아 토지가 분배되자 조상전래의 농토(dulcia arva:  Bucolica 9.28)를 모조리 몰수당하고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로마에서 Maecenas 의 보호와 후원하에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주로 나폴리에 머무르면서 시작(詩作)을 했던 것으로 전한다.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19년에 그리스에 건너가 잠시 철학을 연구하다가 옥타비아누스의 권유로 함께 돌아오던 중 선상에서 병을 얻어 Brundisium에서 50세의 고독한 생애를 마쳤으며(9월 20일) 나폴리에 묻혔다.

    그의 청년시절 단편들은 <베르길리우스 별록(別錄) Appendix Vergiliana>이라는 문집 속에 담겨져 있지만 그의 본격적인 첫 작품은 <목가집 Bucolica>이며 BC 42-39년(28-30세) 사이에 나온 10편의 목가들이다. 시상과 주제는 Theocritus(BC. 3세기의 시라쿠사 시인), Pseudo-Theocritus의 목가 Idylia를 모방하고 있는데(4, 6은 제외)  테오크리투스가 자연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에 비해서 베르길리우스는 거기에 인간의 사회적 고통과 고뇌를 깊이 각인시키고 있어 서구 문학의 조류를 바꾸고 있다. 특히 4편과 6편은 예언적이고도 계시적인 색조를 띠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한 세기 가까운 내전에 휩쓸리는 척박한 인간 운명과 재앙(calamitas humanae animique dolores :1과 9)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면서 민중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시적인 유비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태평성대 aurea saecula를 희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4.6), 보다 넓은 안목으로 역사의 지평을 내다보는 그의 시혼(sacer poesis cultus: 3.8)은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느니"(10.
66: omnia vincit Amor: et nos cedamus Amori)라는 종교적인 명구로 끝맺는다.

    두번째 작품(BC 36-29년의 창작)인 <농경시 Georgica>는 4권 2168행의 장시로 알렉산드리아의 시법을 따르면서 소위 곡식 재배, 실과나무 재배, 가축치기, 꿀벌치기 등을 노래한다.

    그는 Cato(De agricultura)의 oeconomia 즉 노예를 거느리는 대장원의 경영은 알지 못하며, 자기의 집안이 조상대대로 만또바에서 해온 것처럼, 소작농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흙을 사랑하고 혈연을 위하는 민중들의 삶, 사랑의 위력, 대재앙의 위력(전염병)을 박진감있는 필체로 묘사하지만, 그러나 신의 섭리를 긍정하고 종교적 자세를 취하며 죽음과 명계를 중시한다. 여하튼 이 시에 나타나는 시인의 자연과 동물,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최고의 시인이 쓴 최고의 걸작"(Dryden)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 글에서 그 종교사상적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베르길리우스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는 B.C.26-19년의 작업으로 전해져 오는데 그 범위는 로마의 역사와 문학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12권 12,913행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 아이네아스 Aeneas는 트로이아 왕가의 용장으로 인간 앙키세스와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heros으로 전해지고 있다(일리아스 5권). 그는 트로이아 방어전에서도 용맹을 떨쳤을 뿐더러(일리아스 5,13,20권 참조), 그와 그의 후손들이 장차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리게 되리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전해온다(일리아스 20.300-08).

    이미 Naevius(B.C.269-200)가 '트로이아인 아이네아스' Aeneas Troius를 로마 역사와 결부시키는 시도를 한 바 있고, 이어서 Ennius(B.C.239-169)는 아이네아스가 천신만고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에 도달하였다(Aeneas in Italia)는 전설을 다루었다.

    작품 구성상 <아이네이스> 12권 전반부(1-6)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해당하는, 아이네아스의 유랑기이고 후반부(7-12)가 라티움의 본토 용장 뚜르누스와 겨루면서 건국의 기초를 놓는, <일리아스>에 해당함이 사실이지만, 베르길리우스가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나 호메로스 서사시의 대응작 아닌, 순수한 '로마 서사시' epicum Romanum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연대기적 구조에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Homeros의 신화, Aristoteles의 시론, 그리고 Cato (Origines)의 '뿌리찾기' 등이 그의 작품 저변에 흐름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스 또는 오디쎄우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베르길리우스는 한 국가적 운명을 종교적인 안목으로 전개한다. 한 인간의 정치적 사명과 한 국가 사회의 세계사적인 역할을 주제로 삼았기에 이 작품이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와 나란히 인류의 정신 유산으로 전수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는 구전을 집대성한 신화적인 서사극이 아니고 후대에 이미 철학적인 반성을 거쳐서 엮어진, 새로운 창작이다. 명계에서 앙키세스가 들려주는 인간 운명에 대한 연설(6.724-51)에는 신피타고라스 사상에 입각한 비관주의와 인간 육체에 대한 이원론적 적대감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세계사의 시각으로 영원한 로마의 역할을 본 사관(史觀)이라던가, 로마의 평화 pax Romana를 이룩한 아우구스투스를, 황금시대를 복원할, 신적인 존재로 묘사한 것 등은 이미 하나의 체화된 역사철학이 아닐 수 없다.

2.  <아이네이스>의 종교철학적 전개


      <아이네이스>의 맨 첫 구절부터 우리는 거기서 인간 역사의 문제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차원과 우주적 통찰의 인간 문제들을 접하게 된다(1.1-3):

   Arma virumque cano, Troiae qui primus ab oris Italiam fato profugus Laviniaque venit  litora.

    "병갑과 용사를 두고 내 노래하노니, 일찌기 트로이아 해변을 떠나 운명에 떠밀려 이딸리아 땅을 최초로 밟고 라비니아 강변에 당도한 사나이로다."
 
   Arma virumque cano(병갑과 용사를 두고 내 노래하노니...):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이라는 <일리아스> 첫 구절을 연상시킨다. 호메로스가 "아카이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으며/ 영웅들의 수많은 굳센 혼들을 아이데스에게 보낸.../ 그 잔혹한 노여움"을 노래하였지만 베르길리우스는 (역사의 위대한 사명을 띠고) "운명에 떠밀려 이탈리아 땅을 최초로 밟은" 사나이와, 운명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가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던 전쟁을 노래한다. ①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이라는 모순에 찬, 인생 최대의 비극, 곧 악의 신비가 있고 그 가련하기 이를 데 없는 온갖 참상을 시인은 직접 목격하였다(quaeque ipse miserrima vidi: 2.5). ②전쟁과 더불어 한 사람의 용사 vir가 등장한다. 그는 번번이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련을 받는 가운데 스스로 영웅적인 사람됨을 보여 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순히 인간의 귀감,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스토아적 이상형에서 그치지 않고,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농경가>에서 일찌기 노래한 바와 같이, 노동과 수고의 철학을 몸소사는 범부(凡夫)의 모습도 아울러 보여준다. 그러나 영웅이 걷는 길은 고난의 길은 한층 높은 역사의 진로 자체이다. ③ 그리고 시인이 등장한다(cano Ego). 인간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실존에서도 그 한계상황과 더불어 인간들의 책임과 자의(恣意)가 초래하는 비극의 절정이라 할 전쟁을 두고 노래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인이 있다. 그가 이전의 그리스 문학과 라틴 문학의 전통과 사료를 얼마만큼이나 이용하고 모방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④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하나의 사건이 있으니, 역사의 새로운 굽이, 영웅 하나가 출현하여 나서서 개척하는 새로운 역사, 곧 로마 제국의 발원이 있다. 인간사를 주재하는 운명에 떠밀려 fato profugus '처음으로' 트로이아의 바닷가를 떠나 이탈리아에 도달하여 라비니아 해안에 이르러 인류사의 섭리적인 사건, 즉 "드높은 로마의 성벽" (altae moenia Romae 1.7)을 구축하는 것이다.

(1) 첫째 주제: 악의 존재


    곧 이어서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에서 풀어보고자 하는 종교철학의 첫째 주제가 시인 자신의 입으로 정식 제기된다(1.8-11):

    "무사여, 내게 까닭을 일깨워 주오. 어느 신령을 범하였기에, 신들의 여왕이 무엇을 아파하기에, 저토록 우여곡절을 엮어내는 것이며 경건이 극진한 인물로 하여금 그 많은 고생을 겪도록 몰아 세웠던가? 천상 존재들의 심정에 그토록 심한 분노가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쩌다 경건 (당시의 pietas는 '신의 뜻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덕목이었다)이 극진한 인간에게, 다시 말해서, 단지 윤리도덕적으로 무죄할 뿐만 아니라 신들에게 도리를 다하는 인간에게 고통이 따른다는 말인가? 모든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물음이 여기서 나타난다. 일찌기 Theognides, Sophocles에서 시작하여 "도대체 왜 의인들이 박해받고 고생하는데 악인들은 성하고 승리하느냐?"는 의문은 문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더욱이나 그러한 악과 박해가 어느 신성(神聖)에게서 유래하였다고 해설하면 의문의 해답은 더욱 난감해지는 것이다. tantaene animis caelestibus irae?


   그러니까 증오에 찬 어떤 분노 (시인은 이를 악으로 보고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로 간주한다)가 신성(神聖)들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으며(선악 이원론적인 시각), 그 점은 10권 첫머리에 나오는 천계의 회의에서 드러난다. 가련한 인생들의 어리석은 발광 뒤에는 인력을 초월하는 악마적인 세력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선과 운명을 대표하고 해석하는 유피터는 지상의 전투가 신의 뜻에 어긋남을 지적한다(10.5-9)


    "천계의 위대한 주민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의 뜻을 돌이켜 불손한 마음으로 서로들 그리

   쟁론하는가?
    내 이딸리아가 떼우끄리아인들과 겨루는 것을 일찌기 금하였도다.
    무슨 불화가 있어 나의 금령을 거스리며,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들 무기를 찾아 싸움을 일으키게

   선동하는가?
    싸움을 할 정당한 때가 오리니 부디 이를 앞당기지 말지어다."


    이 천상 회의에서 아이네아스의 어머니 베누스 여신이 나서서 트로이아인들의 운명을 두고 유피터에게 호소하는가 하면, '크나큰 분노에 떨며' 여신 유노가 이에 맞서서 전쟁의 근본원인이 트로이아 사람들의 침입이며 떼우끄리아인들은 정당방위 뿐이라고, 그리고 더 먼 원인으로는, 베누스가 시킨 파레스의 헬레나 납치라고 공박한다(10.90-93). 서사시의 신화적 배경이 구성되는 것이다. 하계에서 '운명의 이름으로' 왔노라는 이방인 아이네아스와 '조국과 자기 권리를 지키겠노라는' 뚜르누스 사이의 전쟁이 어떻게 발발했는가 그 원인을 따지는 (iustum bellum을 명분으로 하는) 이 토론에서는 일리아스를 배경으로하는, 파리스의 헬레나 납치와 신의의 파기가 유노에 의해서 제소된다. 그렇지만 지금 지상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는 선과 악이라는 존재론적인 분열이 있으며, '불화'라는 초인간적 존재 (Allecto luctifera 통곡을 가져오는 알렉토 7.324)로 표상되어 있고,  그 존재론적 분열과 신화론적인 불화가 가져올 것이라고는 "서글픈 전쟁, 분노와 모략과 마음을 해치는 죄악"cui tristia bella / iraeque insidiaeque et crimina noxia cordi (7.325-326)뿐이다.


  유노 여신의 술책에도 불구하고 이딸리아의 군주 라띠누스는 아이네아스의 사신들에게 이미 이방인들을 영접하겠노라고 단언하고 (ne fugite hospitium neve ignorate Latinos 7.202 "호의를 거절하지 말지며 라띠움인들을 멸시하지 말기 바라오"), 예물까지 받아들였으며, 거기다가 아이네아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신탁으로 들은 '이방인 사위'가 바로 이 사람이로구나 하여 왕녀 라비니아까지 주겠노라는 언약까지 하고 만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트로이아인들은 성채를 쌓고 배를 버린 뒤였다. 여신 유노는 토로이아인들이 "벌써 집을 짓고 뭍을 의지하여 배를 버렸음을 보았다"(7.290-291).


    유노 여신의 불같은 노가 폭발한다. 인간들의 화목과 조약이 천계의 영원한 결의(decretum)를 실현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유노는 백방으로 손을 쓴다. 여신이야말로 <아이네이스> 전편에 있어서 악의 원리요 패륜의 원리이며, 과연 유노 여신은 지옥의 온갖 세력을 동원하여 인간세상에 참혹한 파탄을 몰고 온다 (flectere si 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 7.312 "내 상계신들을 꺾지 못할 바에야 아케론을 움직이리라"). 두 백성과 집안들은 오로지 평화와 화친을 도모하려는 마당에 여신 유노의 불길한 저주가 떨어지면서, 신성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사악이 날뛰고 불화와 전쟁이 닥칠 조짐이 보인다.
  

 "허나 나도야 이 대사를 끌고 지체시킬 수야 있겠지.  적어도 두 임금의 백성들이야 내 몰살시킬 수가 있겠지.  사위든 장인이든 부하들의 [피를] 예단으로 삼아 맺어지라지. 처녀야, 너는 트로이아 피와 루뚤리아 피를 지참금 삼을 테고 벨로나가 네 겨시를 서리라." (7,315-319)


    악의 본질이 선의 결핍이라는 플라토니즘을 차치하더라도, 베르길리우스가 내리는 정의 그대로 악은 '선의 지체(遲滯)' trahere atque moras addere 라는 철학적 해설이 등장한다. 여신의 이 터무니없는 증오와 발악을 볼 때에 세상에는 도덕의 질서가 있고 천계에 정의가 있으리라는 믿음이 과연 지당한 것일까?
<아이네이스> 제 7권은 제 1권의 주제를 다시 들고 나온다. '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 두 권은 서사시는 마치 악신들에게 바쳐지는 두 권의 송가같다.

 

(2) 둘째 주제: 역사의 신비


 

    그렇지만 첫머리부터 <아이네이스>의 두번째 요소 곧 '역사의 신비'라는 것이 대두된다. 일찍부터 여신 유노가 사랑하고 보호하는 '옛 도성' 카르타고가 있었다. 여신의 소망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이다(1.17-18):
             
 "만일 운명이 그리 허락한다면, 이 왕국이 만백성에게 군림하기를 여신은 작정하며 도모하고 있었다." (1.17-18)

그러나 곧이어 여신의 역사적 계획을 위협하는 반명제가 등장한다(sed enim):
 
"그러나 여신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트로이아 혈통에서 부족이 하나 일어나고 그들이 장치 티로스 성곽을 무너뜨리라는 것이며 드넓게 통치를 하고 전쟁에는 오만한 이 백성이 리비아의 파멸이 되리라는 것을. 이렇게 운명은 실꾸리를 풀어간다."  (1.19-22)

    존재도 않던 민족이 하나 일어나서, 신들의 여왕인 유노 여신의 옹호를 받으며 리비아에 융성하던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재패하는 그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엄연히 하나의 신비이다. 다시 말해서 운명이다: sic volvere Parcas. Parcae는 운명의 섭리를 표상하는 여신들이다. 그것은 필히 일어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종국을 멀리 내다볼 줄 알면서도 그 역사에 저항하고 트로이아인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터뜨리며 온갖 사악한 수단, 급기야는 참혹한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이를 막아보려는 여신 유노의 획책은 모순과 역설에 찬 복수요 광란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 시인의 선언이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인간이 너무 탁월하거나 어느 백성이 지나치게 강성하면 신들의 질투 (phthonos theon, invidia deum)를 사서 그 세가 꺾이고 만다는 착안을 하였다. 옥타비아의 아들로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젊은 나이에 황실과 제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요절한 마르켈루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시인은 헤로도투스와 같은 논리를 편다(6.870-871):
       
 "오, 천계의 신들이여, 당신들에게는 로마 후예들이 너무도 강성해 보인다는 말입니까? 너무도 오랜 세월을 그 은덕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제국의 사명은 '세계 정신'으로부터 이 민족에게 부여되어 있었다. 아이네아스는 명계에서 아버지 앙키세스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다(6.851-853):

  
  "로마인이여, 기억하라. 그대는 뭇 백성들을 주권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평화로 법도를 부여하는 일, 이것이 그대의 예술이어라. 속민에게는 관용하고 오만한 자들은 정벌하는 것이다."

(3) 셋째 주제: 인간의 희생과 사명

 

    하지만 하계에서 사멸할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비극은 시인의 눈에 전혀 달리 비친다. "낯선 군대가/ 최초로 아우소니아 해안에 선단을 밀어올리면서부터...가공할 싸움들을, 진지들을, 그리고 사기충천하여 파멸에로 뛰어들던 군왕들을,/ 티르루스 군대를, 전토가 병갑으로 에워싸이던/ 헤스뻬리아를" 시인은 노래하지 않으면 안된다(7.38-44).


    지상에서 벌어지는 역사에 대해 신들과 운명의 기본 입장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는 유피터의 다음과 같은 유권해석이 있다(10.107-113).

   "각자가 오늘 맞고 있는 운명이 어떤 것이든, 각자가 품는 희망이 무엇이든 또 그가 트로이아사람이든 루뚤루스이든 나는 전혀 차별하지 않겠노라. 진지가 이딸리아인들의 포위에 에워싸이는데 그것이 운명으로 되든, 트로이아인들의 불길한 잘못이나 사악한 징조에 의해서 되든(상관 않겠노라) 그렇다고 루뚤루스들을 보아줌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업과가 각자에게 수고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니라. 임금 유피터는 모든 이에게 공정하니라. 운명이 길을 찾아내리라.'"

 

    최고신의 이런 발언을 보더라도 이 시가에는 두 가지 사상이 평행하며 병존하면서 하나의 변증법적 작용을 하고 있다. 한편에는 전통적인 서사시에서 보는 영웅 행적이 인간 개인의 위력에 달렸다는 로마인 특유의 인간중심주의가 있고 다른 편에서는 인간 개인의 책임과 자유가 운명 혹은 신들의 섭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중적인 철학원리이다. 그런데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심성과 미학이 제 3의 요소가 되어 이를 수렴하고 있다. 신들과 운명의 뜻에 대한 경건한 수용 pietas과 더불어 인간 고통에 대한 한없는 연민, 인간의 '정염'과 과오에 대한 이해심, 인간 실존에 대한 비극적인 시각, 가정의 안온하고 작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스스로 이루지 못한) 사랑이 만또바의 시인의 가슴에 흐르면서 주인공들을 지극히 자상한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인간애 humanitas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고대의 헤스뻬리아는 참으로 태평을 누리던 땅이었다. 거기는 목가적인 사회에서 현명하고 검박한 군주가 타국민에게 아무런 야심도 품을 줄 모르고 평화를 애호하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목가집>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꿈꾸던 이상국이 에반델 Evander이 다스리던 헤스뻬리아로 그려져 있다. "이미 나이많은 국왕 라띠누스가/ 오랜 평화 속에 전원과 도읍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7.45-46). 그런 땅이 아이네아스 일행의 도착으로 전화에 휩쓸리는 것이다. 상대를 침해한 일이 결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기를 방어하는 뜻에서 그들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인간들의 안목으로는 이해할 길이 없는 역사의 비극 앞에서 희생당하는 인물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주인공 아이네아스이다. 그는 신비로운 그 운명이  부리는 첫번째 희생물로서 어디를 가든지, 본인의 의사와는 반대로, 고통과 파멸을 가져다 준다. 적이나 원수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부하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오로지 죽음과 고통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


   현숙한 아내 크레우사는 영웅의 전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역사와 삶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여왕 디도는 그를 사랑한 죄로 파멸하고 자결한다. 장차 아이네아스의 배우자가 되기로 운명지워진 라비니아는 나라가 망하고 어머니가 자결하고 아버지가 파멸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의 동맹군이 되는 에반델은 외아들을 전장에서 잃는다.

 

   영웅이 걸어온 길은 참으로 예기치 못한 무수한 재난과 모험에 찬 것이었다. 트로이아를 떠난 뒤 오래고 오랜, 오디쎄우스 같은 방랑이며 파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져야 하는 숙명,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의 사랑에 안주하고 싶은 소망을 짓눌러 버리고 떠나도록 명령하는 아폴로, 띠베르강에서 그의 배들이 불타버린 사건, 그리고 본인의 과실, 좌절, 인간적인 야망과 정염 등은 한결 같이 인간 아이네아스의 의사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는 인간들의 행적 전체가 무엇으로 설명할 길 없는 어떤 소동이요 그 배후에는 신들의 음모가 숨어 있는 획책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계의 순례 catabasis에서 영웅은 자기에게 예정된 사명을 파악하였고, 우주를 주재하는 섭리적 경륜 안에서 자기의 역할이 차지하는 몫이 무엇인지 관조하였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신학적 차원에서 악의 문제가 극복된 것처럼 시인은 해설하고 있다.

 

3. 베르길리우스가 찾는 해답: catabasis

 

(1) 고통의 의미

    요컨데 베르길리우스가 하는 설명대로는, 인간의 고통과 역경은 그 사명의 수행과 섭리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말을 달리 하자면 고통은 학교요 인간의 완전함을 달련시키는 수련장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의 차원에서는 악이라는 것은 도덕적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극복된다. 인간 양심을 좌우하는 것이 이 인륜 도덕이며, 그 양심 속에는 종국적인 최고의 정의가 존재하리라는 희망이 깃들어 있을 것이니, 영웅서사시는 그 한 편 한 편이 바로 이 궁극적인 선의 승리를 위하여 나약한 사나이 vir 하나가 인간다운 용기 virtus를 품고서 한 걸음씩 옮겨 놓는 고뇌와 수고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 자신은 거의 초연한 자세로 임하고 있지만 그를 창조하고 기술하는 시인은 에피쿠루스적인 감수성과 훈계로 영웅을 연민과 사랑의 시선으로, 그의 수난을 함께 짊어지는 연대의식에서 바라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은 누구나 역사의 부조리한 흐름 속에서 희생되어 감은 어쩔 수 없다. 주역을 하는 아이네아스도 유유부단한 성품으로 인하여 번번히 (신성의 개입과 협박과 격려를 통해서) 결단(決斷)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을 당하지만, 배역을 이루는 영웅들도, 그리고 별반 눈에 띄지 않는 역사의 엑스트라들도, 심지어는 여인들까지도 같은 길로 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사시의 구성이다. 여인들마저도 뚜르누스의 동맹군으로 온 여걸 까밀라의 용맹과 전투, 트로이아의 화염 속으로 사라진 크레우사 같은 자기헌신, 흡사 메데아를 연상시키는 여왕 디도는 아이네아스를 향하는 애정과 더불어, 자기의 순수한 애정을 신들이 이용하였다는 데에 분개하고서 신들이 정한 운명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완고함과, 홀홀이 떠나버린 아이네아스에 대한 복수심에 찬 분노로 인하여 자결하고 만다. 그리고 두 진영에 남편과 아들들을 출정시키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의 운명을 통곡하며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여인들의 군상을 본다.

    인생고를 해설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설교는 머나먼 항해의 모험을 앞둔 아이네아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토로된다(1.198-209):
 
  "오 동지들이여, 우리는 지나간 고난을 모르는 바 아니다.
   갈수록 힘겨운 걸음이나 이것도 신은 언젠가 끝을 보게 해 주리라.
   어느 날인가는 이 일도 오히려 달콤한 추억이 되리라.
   하여튼 우리는 라띠움, 운명이 우리에게 편한한 처소를 보여주는
   그곳으로 간다. 거기 트로이아 왕국이 다시 서기로 되어 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순경이 닥치는 동안 자신을 가다듬으라!"

   
이렇게 말하면서 크나큰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얼굴에는 억지로 희망의 빛을 띠우고
    깊은 슬픔일랑 가슴에 묻었다.

    갈수록 힘겨운 걸음 passi graviora이지만 그 모든 것을 신은 언젠가 끝을 보게 해 줄 것이고, 운명이 지워준 그 방랑을 끝내고 나면 오히려 지나간 그 모든 세월을 달콤한 웃음 속에 회고하기까지에 이르리라는 것이다.이것은 예언에 가까운 종교적 자세가 아닐 수 없다. 훗날 라띠움에서 영웅 스스로 적장 메젠띠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영웅이 자기 아들 아스까니우스 Ascanius에게 유언삼아 들려주는 말은 좌우명도 같은 초연함을 보여준다(12.435-436):
    "아이야, 용맹은 내게서 배우고 참 수고가 무엇인지는 나한테서 배워라.
   그러나 행운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려므나."
   disce, puer, virtutem ex me verumque laborem
   fortunam ex aliis.
                         (12.435-436)

(2) 역사내적 종말론 (歷史內的終末論)

    시인은 독자들에게 한 권의 비서(秘書)를 펼쳐 보이면서 악이 발호하는 세상이더라도 좌절하지 말도록 격려한다.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비사 (秘事 sacramenta)로 가득한 제 6권이다. 아이네아스가 무녀 시빌라의 안내를 받으며 세상을 떠난 부친 앙키세스를 만나러 명계(冥界)에 내려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히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중심이라 할 만하며 지혜로운 우주적 통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주창하는 이 노래 때문에 아마도 <아이네이스>는 한 편의 성스러운 종교시로까지 승화되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의하면 세계와 인간사에는 섭리적인 질서가 관통하고 있으며, 바로 그 섭리의 계획이 주인공에게 계시되는데, 그 신성한 경륜(經綸)이야말로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고통과 수난을 해명하고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영웅의 길에 쓰러지는 그 모든 희생자들 (이 시가에는 그 숫자가 무수하다: 트로이아인들, 그리스인들, 이딸리아인들, 젊은이들과 늙은이들, 남녀 할 것 없이) 그 모든 희생자들이 역사의 장인(匠人)으로 변하며 인류사의 거창한 모자이크에서 제각기 크고 작은 보석으로 반짝이는 '주인공'으로 바뀐다. 그것을 6권 첫머리에서 미리 무녀(巫女) 시빌라 Sibylla가 다음과 같이 밝혀 준다. 선인들이 당하는 모든 역경들은 결국 영웅적 대업의 행복한 결말과 위대한 운명을 위한 전제라는 것이다. 위대한 미래의 도래, '역사내적인 종말론'이라고 하겠다.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끝이 나면 하나의 대제국이 출현하리라는 꿈이다.

    아이네아스는 본의 아니게 남의 영토를 침범하고 본의 아니게 제 2의 파리스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이고 거기서 온갖 불행과 재난이 자기 부하들과 상대방에게 초래되는 숙명을 지고 있다 (이 논제는 7.321-322에서 여신 유노의 입으로, 조금 뒤에는 7.361-364, 기여코 뚜르누스를 사위로 맞고 싶어하는 아마따의 입으로 다시 언급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의 경솔한 야심이나 애욕 때문이 아니고 하나의 숙명이었고 운명과 역사에 대한 의무로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고달픈 방랑과 순례 중에 수많은 예언과 신탁이 부단히 영웅을 독려하고 자극하여 준다. 시빌라 무녀도 영웅을 격려한다(6.95-96):
 
  "그대는 악에 굴하지 말라. 오히려 그럴수록 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라,
   운명이 그대에게 허락하는 데까지!"

    인생들의 가련한 운명과 미래가 연연히 펼쳐지는 명계를 순례하는 마지막 장면을 시인은 이렇게 맺는다(6.888-892): 안키세스는 명계의 곳곳을 아들에게 구경시키고 장차 올 명예에 대한 사랑으로 그 심혼을 불사르고서는 이어서, 그가 미구에 치루어야 할 전쟁들이며 라우렌띠아 백성들과 라띠누스의 도읍에 관해서 또 어떻게 하면 수고를 피하고 감당해야 하는가를 일일이 가르쳤다.

(3) 초역사적 종말론 (超歷史的終末論)

    한 인간의 고난의 길이 역사의 전기를 마련하리라는 철학적인 해석과 더불어 6권에 흐르는 주제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역사의 커다란 수수께끼를 종교적으로 해명해 보려는 베르길리우스의 노력이다.

    위대한 미래의 도래, 역사내적인 종말, 그 모질고도 잔혹한 투쟁의 역사가 끝이 나면 하나의 대제국이 출현하리라는 꿈만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궁극의 희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이네아스는 명계의 Elysium이라는 곳에서 그 답을 얻는다. 명계에 들어선 영웅은 곡절 끝에 입구를 지나서 "희락이 충만한 곳, 행복한 영혼들의 아름다운 녹음이며  복스러운 처소를"(locos laetos et amoena virecta / fortunatorum nemorum sedesque beatas 6.638-639) 바라본다. 영웅의 앞길은 오로지 고통과 험난에 찬 것이지만 이 광경에서 아이네아스는 자기가 이룰 '사명'에 대한 격려를 얻고, 자신이 성취하여야 할 지고 한 임무 (가히 종교적이라고 할)에 확고한 힘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 보는 광경은 트로이아의 영웅적인 선조들에게서 시작하여 장차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로마의 명인들의 모습들이다. 그 다음에는 죽음이라는 슬프고도 종교적인 가락을 들으면서 그 무수한 영웅들이 역사의 일각을 일쿠고는 죽음 저편으로 사라지지만 그들의 업적은 명계 Elysium에서 드높이 그리고 길이 영예와 행복을 누린다.
    
"거기 넓다란 에테르가 있어 자주빛 광채로에워싸이고, 그곳만 비추는 태양과
성좌가 있었느니....오른편과 왼편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에서
잔치를 벌이거나, 노래를 흥겨워 하면서 월계수 숲을 거니는 것이었다.
그 천계의 숲 사이로는 에리다누스강이 여러 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거기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 다친 사람들,삶을 순결하게 보내던 제관들이며
포보스에게 합당한 말을 들려주던 독실한 예언자들"(6.640-641,656-663)

인간은 누구나 자기 숙명이 있어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서 그 숙명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 숙명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용하는 용어로는 일종의 예정설(豫定說)이 되는데, 그렇게 예정된 법칙에 인간의 참여가 있음으로 해서 운명은 자유의 법이 되는 것이다. 하데스에서 앙키세스가 들려
주는 신비스러운 한 마디가 이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quisque suos patimur manis (6.743)
  "인생은 누구나 자기 응보를 겪어가게 마련이다."

(4) 시적 정의(詩的正義)

 

    하지만 위대한 인물들과 영웅들도 패자로 끝장날 때에 victi tristes, 그리고 전장에서 이름없이 쓰러지고 영웅들의 공덕을 높이는데만 이바지하며 사라져가는 목자들과 농꾼들, 전쟁이 끝나고나면 사령관들 밑에서 종군한 베떼랑들에게 조상전래의 농토를 몰수당하고 도시로 쫓겨가는 소지주들 같은 패배자들은 어찌 되는가?  그의 서사시에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크고 작은 인물들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다운, 한없이 서글픈 시선과 동정을 보내고 있다.그 스스로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기에, 일찌기 해안에 난파하여 목숨을 부지한 아이네아스의 무리에게 비극의 영왕 디도가 하는 말, "내 일찌기 불행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가엾은 이들을 돕는 법은 배웠소이다" (non ignara malimiseris succurrere disco 1.630)는 그 말은, 만또바에서 조상 대대로 부쳐오던 토지를 옥따비아누스의 베떼랑에게 몰수당하고서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며 살아온 베르길리우스의 심경, 불행을 당한 사람 모두에게 향하는 그의 연민을 토로하는 말이자 이 서사시 전편에서 보이는 시인의 애잔한 시선이기도 하다.

 

    "눈물겨운 사건들이며 사멸할 인생들의 비운은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니..."
   
  sunt lacrimae rerum et mentem mortalia tangunt (1.462).

이 마지막 구절에는 그래도 인간들의 한 가닥 연민과 동정심을 믿어 보는 시인의 희망이 서려 있다.
    지고한 운명 앞에서 사멸할 인간들이 무력함을 절감하고 <아이네이스>의 독자들이 시인의 숙명론(결정론) 앞에서 불안에 허덕일 때에 시인은 눈물어린 따스한 시선으로 그 약자들의 슬픔과 불안, 공포와 죽음을 지켜 봄으로써 말없는 보상을 하고 있다.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하찮은 전사들의 최후를 묘사하는 장면 하나만 들겠다. 일찌기 헤라클레스의 모험에 동반했다는 안토르 Antor, 이 전설의 용사는 에반드루스에게 식객이 되어서 이딸리아에 자리잡아 살고 있었다. 그도 아이네아스를 도우러 에반드루스의 군대와 함께 싸움터에 나왔다가 적장 메젠띠우스가 아이네아스에게 던진 창에 맞아 이역땅에 쓰러진다.

  "아르고스에서 파견 나온 안토르, 에반드로스에게 얹혀서 이딸리아 도성에 자리잡았던 그는  불운하게도 남이 입었어야 할 상처로 쓰러져 하늘을 우러르면서 사랑하는 땅 아르고스를 회상하면서 숨져간다." (10.779-782)

4. 결 론   

 

    인간의 역사는 악의 신비를 감추고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언행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심정에 뿌리박혀 있을 뿐더러 신성들의 마음 속에까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신성들도 분노니 질투니 하는 것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으며, 영웅의 방랑과 전장에서 볼 수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사랑과 우정과 동지애 속에서도 선의 승리, 정의의 승리, 역사의 신비로운 발전은 이루어진다는 시인의 신념이 엿보인다. <운명>은 천계에서든 지상에서든 결국 평화의 해결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인간들, mortales aegri 병들고 사멸할 존재들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이 <아이네이스>를 단순한 영웅서사시에서 그치지 않고 장중한 비극으로 이끌어가는 근간이다. 거기서 인물들은 본성이 의로운 사람이면서도, 본의 아니게, 불의의 도구로 전락하는가 하면, 정의를 이루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데 반드시 고통을 겪으면서 그 역할을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무죄한 희생자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그야말로 악역(惡役)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정화되고 인간으로 재생하며 숨져가는 장면도 보인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서는 늘 철학사상과 문학적 구상이 두 층의 해류처럼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의 초기작 <목가집>에서는 에피쿠로스 사상과 또 그에 저항하는 반(反)에피쿠로스사상이 깔려 있고, <농경시>에는 스토아 사상과 더불어 인간적 비극 앞에서 진솔한 감정을 숨김없이 피력하는 반(反)스토아 태도가 음영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그의 최후작품 <아이네이스>에는 오르페우스사상과 신비주의와 함께 '신의 분노' ira Dei가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이루고, 격정적인 애정(peri erotos)과 더불어 엄정한 사명감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4권에서), 목가적 속세도피 사상(원초의 태평성대를 회상하는 스토아적이고도 냉소적인 세계관)이 나타나는가 하면, 전쟁과 그에 얽힌 정치사의 흐름이 공존한다. W.Jaeger의 말대로, 베르길리우스는 생의 철학, 인간이 그 사사로운 생활과 공직과 공동체 전체의 운명과 더불어 겪는 그 불안과 번뇌를 사색하는 실존철학자로서 붓을 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면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우주 cosmos가 그 본연의 조화와 균형을 항시 유지하고 세계사는 '운명'혹은, 스토아 개념으로는, '세계 정신' 에 의해서 연연이 지배되며 선은 필히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인간 도덕의 차원에서도 선의 승리와 정의의 구현이 달성된다. 서사시는 무릇 거기 등장하는 인간성들에 대한 탐구가 되며 그들이 이루는 영웅적 행적은 실존적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자유의 승리요 성취라는 개념으로 칭송되며, 그 인간이 내적인 평화와 정치적 안정과 pax Romana 우주적 화평 pax deum을 회복하는 한 단계요 기여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