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천성(宋泉盛)의 신학적 전위(轉位)

 

 

                                                                                           1987 [종교신학연구 1 (1987), 321-345]

 

 

1. 머리말

2. 선교학상의 전위

2.1 피어리스(A. Pieris)의 4단계 선교이론

2.2 송천성의 선교학

3. 신학상의 전위

3.1 ‘전위’의 개념

3.2 중심주의(中心主義)의 탈피

3.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4. 아시아 신학으로의 전위

4.1 상황신학(狀況神學)의 정립

4.2 민중으로의 전위

 

 

 

1. 머리말

 

송천성(宋泉盛, Choan-Seng Song)은 신학교육자로서, 신학자로서 특히 아시아 신학이 형성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83년  차례 한국을 방문한 바 있어 개신교 신학계에는 이미 친숙한 인물일 뿐더러, 그의 저서들이 거의 전부 우리말로 번역, 소개되다시피 한 특전적인 저술가이기도 하다.

송천성은 1929년 대만에서 출생하여 대만국립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에딘버그대학 뉴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5년 이래로 대남(臺南)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가르치면서 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대만인의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정치적 노선 때문에 정부와 알력을 빚어 이후로는 제네바에서 세계교회평의회(WCC) 신앙직제위원회(Faith and Order Community) 사무차장, 프린스턴 신학대학 객원교수, 개혁교회 세계동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 연학위원장 등을 역임하다가 지금은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있는 태평양 종교학연구소(The Pacific School of Religion)에서 신학 및 아시아문화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신학교육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1983년 이래로 싱가포르에 있는 동남아시아지역 신학교육협의회(The Association for Theological Education in South East Asia: ATESEA) 주관하에 Doing Theology Asian Resources라는 신학 워크숍을 주도해 왔고, 1987년부터는 교토에서 동북아시아 신학대학협의회(The North Asia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 NAATS)와 협조하여 Programme for Theology and Cultures를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간행된 그의 저서 다섯 권에는 사상적 발전이 현저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단행본 저서 「그리스도교 선교학의 재건(Christian Mission in Reconstruction, 1975)은 아직 서구적 토대에 서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또는 교회의 선교가 타 지역의 문화, 역사, 종교 앞에서 취해야 할 바른 자세를 탐구하는데, 이후의 사상이 모두 이 책을 출발점으로 하여 발아하고 성장발달하고 있다. 1982년에 우리나라에 최초로 번역 소개된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Third Eye Theology: Theology in Formation in Asian Settings, 1979)은 부제 그대로, 송천성의 본격적인 ‘토착된 신학’이며 이미 아시아인 그리스도인으로 돌아와 아시아라는 거대한 대지에 뿌리박고 있는 영성(靈性) 내지는 심성(心性)과, 아시아인들이 현시점에서 겪고 있는 고난을 신학의 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벌써 ‘제3의 눈(third-eye)’으로 신학을 보는 시선의 전위(轉位)를 일으키고 있다. 세 번째 역작 「대자대비하신 하느님(The Compassionate God: An Exercise in the Theology of Trans- positions, 1982)에서는, 아시아신학에 끼친 그의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신학적 전위(神學的 轉位)를 본격적으로, 사변적으로 시도한다. 이스라엘-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부터 그의 초점은 아시아 세계로 바뀌며, 소위 전통적인 구세사관(救世史觀) 및 계시론(啓示論)과 ‘야곱의 씨름’을 벌인다. 그는 구세사 특히 예수의 가르침에서 중심주의(中心主義)를 탈피시키시는 하느님의 교육학(paedagogia divina)을 발견하고, 제3부에서 아시아의 현실을 신학적으로 ‘풀이’하는 작업을 한다. 이것은 그의 방법론의 전환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 민중신학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입었겠지만, 그의 신학의 주체가 서구에서 세뇌받은 지성인 신학자에서 고난받는 아시아의 민중으로 바뀌고, 신학의 객체 역시 서구 관념론자들이 하는 신학적 명제의 연역 대신에 민중의 언어(민담과 노래)가 자리를 잡고, 이야기의 ‘풀이’가 신학적 서술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풀이한 「아시아 이야기 신학(Tell Us Our Names: Story Theology from an Asian Perspective, 1984)과 노래를 풀이한 「아시아의 자궁에서 탄생하는 신학(Theology from the Womb of Asia, 1986)이 나왔다.

혹자는 그의 신학을 단순히 일컬어 ‘문화신학(inculturationist theology)’이라고 하지만, 송천성 본인은 자기의 신학적 시도를 ‘전위(transpositional)신학’이라고도 하고 ‘상황(contextual)신학’이라고도 하며, ‘보고 듣고 깨닫는 가슴의 신학’, 간단히 말해서 ‘마음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요컨대 아시아인으로서 그는 ‘아시아의 산 신학’을 수립코자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송천성의 처음 세 책자를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의 산 신학’을 개척해 보고자 그가 정립한 ‘전위(transposition) 개념이 어떻게 착안되고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2. 선교학상의 전위

 

2.1 피어리스(A. Pieris)의 4단계 선교이론

 

신대륙의 발견과 아시아로의 서구진출 이래로 4세기에 걸쳐서 그리스도 교회가 타 종교들을 대하는 자세가 변천을 이루어 왔는데, 그 자세의 저변에 흐르는 묵시적 또는 명시적 신학원리를 간추린다면 다음과 같다.

- 정복론(征服論, the conquest theory)

- 적응론(適應論, the adaptation theory)

- 완성론(完成論, the fulfilment theory)

- 성사론(聖事論, the sacramental theory)

이런 이론들은 교회론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가 설교한 하느님의 나라와 그가 세운 교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발전적인 양태를 보이고 있다.

2.1.1 반(反)그리스도(anti-Christian) 종교인들에 대한 정복 이 이론의 주창자들에 의하면,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는 외연(外延)이 같다. 하느님 나라 밖에 구원이 없듯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이를 수 없다. 타 종교는 그리스도 신앙과 양립 못하는 체계요,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악마적 세력이며 거기에 계시(‘특수계시’와 상반되는 일반계시)가 만약에라도 있다면 그들을 단죄하는 계시일 따름이다. 이교도들은 멸망에 이르는 단죄를 받았으므로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억지로라도 그들을 타 종교로부터 ‘그리스도께로 탈취해 내는’ 영웅적인 애덕이 곧 선교이다.

 

2.1.2 비(非)그리스도(non-Christian) 종교들에 대한 적응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나 데 노빌리(R. de Nobili) 같은 선교사들은 중국과 인도의 종교적 영성과 문화유산 자체가 좋을 뿐더러 또한 복음전파에도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전파키 위해서는 타 문화의 언어로 활용하되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2.1.3 전(前)그리스도(pre-Christian) 종교들의 완성 타 종교들은 메시아적 존재를 기다리고 있는 만큼 ‘복음으로의 준비 역할’을 하고 그 창시자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내지는 예언자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런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도 교회와 ‘관련되어 있다(ordinantur)’는 막연한 표현이 쓰인다. 선교는 타 종교들의 가치들이 “광정되고 높여지고 완성되어”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고 그 가치들을 만드신 그리스도께로 되돌아 오게 하는 일이다.

 

2.1.4 익명의 그리스도인들(anonymous Christians)을 위한 성사 교회의 구원의 보편적 성사요,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의 활동을 하고 계시며, 따라서 교회는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교를 밝히 드러내야 하고, 제 종교가 발견하여 쌓아올린 가치들을 그곳에서 더욱 신장시키는 것이 선교활동이다. 또한 세계 종교들은(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성사적 체현(聖事旳 體現)이라고 본다.

 

2.2 송천성의 선교학

 

그는 피어리스가 도식화한 이 넷째 단계(성사론)에서도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와 문화에 주는 성사성보다 후자가 그리스도교에 갖는 성사성을 보여주려는 데에 신학적 사변의 목표를 둔다. 그 목표를 감춘 채로 그는 세계 종교들이 신 지향(God-ward)과 인간 지향(human concern)이라는 두 차원을 갖추고 있음을 제시하면서 하느님이 인간 역사와 사건과 문화들 속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배우라고, 다른 구세사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해독하고, 거기에 깃든 성사성에 의해서 회심하고 복음화되라고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한다.

그의 첫 번째 저서 「그리스도 선교학의 재건(Christian Mission in Reconstruction)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모든 저서에서 쓰는 똑같은 구도, 즉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취하신 행동방식을 소개하고서 (성서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또는 선교(missio) 역시 당연히 그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비판받고 정립되어야 한다는 도식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의 견해는 “복음이 선교활동을 통해서 이방세계에 파급되어 간다는 발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속량사업이 타 문화와 타 종교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선교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아시아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의 신비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2.2.1 창조와 선교 그의 신학체계 전체가 창조를 기간으로 삼는다. “나는 창조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신학작업을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창조가 나의 신학적 사고와 신학적 노력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이스라엘-그리스도 교회라는 중심주의(中心主義)를 탈피하여 아시아 ‘문화와 역사와 종교’ 속에 일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과 계시를 논증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창조와 구원(그리스도 사건)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이야기이다.…창조와 구속은 동일한 사물의 표리이다. 역으로 말해서 구속이 있다면 그곳에 창조가 있다.…창조란 하느님의 구속행위요, 구속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인 것이다.…창조를 구속과 긴밀히 연관시켜 봄으로써,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행동에 신학을 하는 본()이 들어있음을 깨닫는다.” 다만 구원에서 창조로 소급을 하는 고전적인 신학전통을 벗어나 창조에서 신학적 접근을 하는 것은 신학적 ‘전위(transposition) 작업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그는 하느님의 창조활동을 넷으로 정의하고서 그 각도에서 선교학을 정립한다.

① 창조는 문화적 활동이다: 창조가 하느님의 문화이며, 전체로 본 문화란 구체적 형태와 사건으로 바꾸어진 하느님의 창조능력이다. 세계는 하느님의 지배하에 있으며 문화의 형태적 차이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풍부함을 증언한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사랑이 문화와 에토스가 다른 상황과 종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 업적에서 얼마나 찬란히 반사되고 있는지에 눈뜨고,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성서신앙에 입각하여, 특정문화의 영성을 식별하고 해석하며 동시에 새로운 빛이 그리스도 신앙의 성채 안으로 비쳐 들어오게 문을 여는 활동이다. 성서가 말하는 새창조란 옛 창조의 파괴에 있지 않고 완결과 종합에 있다.

② 각 민족들의 역사는 창조의 연장(延長)이다: 창조와 육화가 동일한 구원경륜(救援經綸)이라면, 역사는 곧 창조의 연장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아담과 그의 무수한 후손들에게 맡겨진 창조사업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와 비그리스도교 역사, 구세사(救世史)와 세속사(世俗史)를 구분하고 차등 짓는다든가 계시와 역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설정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사의 포로가 아니다. 천차만별한 시공간의 맥락들 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신비를 계시함에 있어서 그가 굳이 한 가지 관점만 폈을 리가 없다. “구원하시고 화해하기 위해 하느님이 세계에 들어오신 것이 세계의 종교요, 문화요, 역사인데 (아시아의 그것들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선교는 ‘각국의 역사들에 깃든 의미와 경계선을 확장시켜서 그것이 창조주-구원자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언’임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세속화(世俗化)되어야 한다.

③ 창조는 미완성(未完成)이다: 미완성이므로 땅을 가꾸고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과 투쟁하는 인간의 사명이 가능하다. 인간은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진리를 볼 따름이요, 우리 이웃 즉 타 종교들과 더불어서, 하느님이 피조계에 펼쳐 놓으신 진리를 탐색하고자 노력한다. “진리에 관한 한 아무도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자세로 임해야 하며” 교회를 위시해서 어느 누가 진리를 독점하는 것으로 자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신앙의 진리를 정교(正敎, orthodoxia)와 이단(異端, haeresis)으로 도식화하던 시대도 끝났다. “진리를 방어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진리가 발견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진리에 봉사하는 것이 의무이다.”

선교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완전한 진리와 신앙의 규범과 안전과 권위를 남에게 강요하는 활동이 아니고 남들이 갖추고 발견해낸 진리를 바라보고 배우고 탄복하는 일이다.

④ 창조는 하느님의 정치적 행위이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펼치시며 혼돈(chaos)으로부터 우주(cosmos)가 나타나는 과정은 분명히 정치적이다. 하느님의 힘(권력)의 발로요, 조직이요, 행사가 곧 창조이다. 역사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개인적․집단적 힘(권력)은 필히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입장(pro/contra)으로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교회까지도 그 존립 자체가 정치적 실재이고 교회의 어떤 결의나 입장도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특정한 권력구조와 행사가 하느님의 권능과 상합한 역학관계에 있는지 비판하고 하느님의 뜻이 그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식별하는 활동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주 하느님의 성품과 인간의 사명을 각성시키며,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 같은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과 화해를 드러내는 성사가 될 수 있는지 궁구하여야 한다.

 

2.2.2 육화와 선교 그는 ‘토착화(土着化, indigenization)’라는 용어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말씀의 육화를 본으로 삼는, ‘수육(受肉, enfleshment)’이라는 어휘를 쓴다. 창조의 하느님이 곧 육화의 하느님이심은 요한복음 서언이 입증한다. 1장 14절 Καὶ ὁ λόγος ϭά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ήμι̑ν에서 καί(그리고)는 1-5절에 서술된 원초의 창조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세계 내 현존을 하나로 결부시키고 있다. 그리고 육화의 신비는 하느님이 특정한 역사 내의 인물들이나 사건들 속으로 체현(體現, embodied)되시고자 당신을 비우시는 행동이므로 마땅히 교회의 선교도 이 원리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

세상과 함께하시고자 하느님은 당신이 아닌 것(less God)이 되심으로 당신 사랑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availability) 내지는 인간들의 손에 조건 없이(unconditionality) 내맡겨진 하느님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가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나타났었는지를 증언하려면 그리스도교는 자기의 문화적 분장을 벗고(less Christianity), 또 교회가 이방민족들을 위해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일보다는 그들에게 교회가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less Church) 숙고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기비움(κένωσις)은 타자(인간)를 받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전제조건, 유보사항, 자기주장을 비움으로써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완성하시는 행동방식이다. 그리스도교 선교라는 인류 봉사도 자기비움, 즉 타자를 받아들임을 원리로 한다. 아울러 하느님의 비움, 당신의 것을 벗으심(nakedness)이 인간을 부요케 하였듯이, 교회의 자기비움도 타 문화와 종교를 부요케 하는 데에 뜻이 있다.

교회가 거짓된 안전추구나 방어적 태도 혹은 허황한 세력 장악의 공격자세를 청산하고 아시아의 영성이라는 강물 속으로 세례받으러 들어가고 아시아인들의 고난이라는 갈바리아의 세례를 받을 때에 비로소, 그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아시아의 교회’로 아시아인들에게 인정받을 것이다. 그때에야 아시아인들은 우리가 선포하는 분을 가리키며 속으로 “이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고백할지 모른다.

 

2.2.3 선교의 성사적(聖事的) 차원 넓게는 하느님의 구세적 사랑을 표시하고 재현하는 모든 행위와 사물들이 성사적이요, 탄생에서 부활에 이르는 예수의 생애와 신원 자체가 가장 근원적인 성사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통째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면 평범한 사물(빵과 포도주, 물과 기름)이 성사성(聖事性)을 띠는 일은 불가능하다. 성사적 세계(sacramental universe)가 하느님의 구원활동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만큼, 하느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보편적이고도 지극히 다양한 방식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교회요, 따라서 선교 역시 성사적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선교는 만유가 하느님 안에서 그 충만함을 발견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이다. 타지역의 특정한 종교와 문화를 대할 때에, 교회가 도달하기 전에 또는 도달 못하는 곳에서 벌써 하느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호응하는 일이다.

베드로의 요빠 체험(사도행전 10장)에서처럼, 우리가 대하는 아시아의 영성은 하느님이 이미 깨끗이 만드신 것이요, 이미 축성하셔서 우리가 받아먹을 성사적 음식이다. 그것을 감히 속되다(κοίνον)고 불러서는 안 된다.

최후만찬(‘빵을 쪼개는 성사’)은 육화 사명의 절정이요, 그리스도 교회 역시 주님의 그 행동을 재현하면서 존속한다. 당신 생애의 마지막 장면, 십자가 위에서 당신 몸이 부스러지는 사건을 앞당기고 또 기념하는 이 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드라마가 전 세계 온 인류를 상대로 확산되는 분기점이다. 만약 성찬의 핵심이 ‘현존’이라면, 교회는 이 성사를 중심으로, 믿는 이에게나 믿지 않는 이에게나 예수의 구원의 현존, 사랑하고 나누는 공동체를 이룩하고 하나로 일치시키는 현존을 ‘현실화(現實化)’할 본분이 있다. 선교로 교회는 세상 앞에, 세상을 위해 있는 그대로 당신을 드러내신 주님의 모습을 선포한다. 그래서 최후만찬은 거행(擧行)될 것이 아니고 발생(發生)해야 한다.

 

3. 신학상의 전위

 

3.1 ‘전위’의 개념

 

송천성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학작업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금 우리가 신학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역사,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 등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져야 할 전위신학(transpositional theology)이다.” 그의 신학의 기조가 되는 이 단어로 그는 아시아인의 영성(문화, 역사, 종교)과 체험(고난 또는 가난)을 출발점으로 신학을 개진하고자 하며, 자기 말대로 ‘신학의 성육신(成肉身)’을 도모하고 있는 셈이다.

전위란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뜻한다.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신앙과 함께 성서의 세계는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로마 세계로, 다시 유럽과 서양세계로 이동되었다. 신앙의 이 같은 지리적 전위가 서양세계로부터 소위 말하는 제3세계로 이루어질 것인가? 송천성의 대답은 “그렇다!”는 긍정적 답변이다.

전위란 의사소통 또는 번역이다. 사람들의 의사소통에는 문화와 문화 사이의,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위가 요구된다. 현재 그 메시지를 수용하고 있는 문화에 의거하여 부호화(符號化)된 메시지가 그 의미를 받아들일 문화의 부호로 바뀌어야만 전달이 가능하다. 그러나 송천성은 문제가 단순히 (형식적 언어학적) 부호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메시지의 내용 내지는 측면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든다. 성서적 신앙세계에서 아시아 종교와 영성세계로 건너가는 작업은 사실 신앙의 거창한 전위가 아닐 수 없다. 신학의 권위, 신앙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신학적 명제들이 전혀 이질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어떻게 될까?

전위란 성육신(成肉身)이다. 복음이 그것을 수용하는 문화를 변용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의 가변성(可變性) 때문이다. “복음은 어떤 형태든, 어떤 색깔이든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타문화와 종교에 접함으로써 복음 자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깔과 형태, 맛과 어조를 띤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입어 우리와 하나가 되신 모험을 신학도 감행하라는 암시이다.

 

3.2 중심주의(中心主義)의 탈피

 

신학을 서구에서 아시아로 전위시켜 아시아신학을 수립하려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교회 둘로 ‘구세사’를 성립시켜 놓고서 이 구세사에서 세계사로 비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스라엘-교회는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 온 인류를 대변하고(대변신학) 이방민족들은 마땅히 교회를 대리인으로 해서만(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민족의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이르는 길로서, 그들의 역사는 구세사에 통합되는 범위 내에서, 그들의 문화는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 또는 “신앙세계 안으로 수용되는” 한도 내에서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전위신학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장애물 하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교 역사의 관점이 되었던 소위 중심주의란 것이다.” 그는 ‘구세사’라는 중심주의를 하느님이 어떻게 타파해 오셨던가를 성서적 관점에서 논술하고 있는데 그것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제1부와 제2부의 내용이다. 먼저 그는 구약성서에 초점을 두고서 선택과 계약의 신학으로 도취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들이 창조신학에 입각하여 어떻게 그들의 구원관과 역사관을 확장시켰는지, 이스라엘이 자기중심주의에서 세계만국과의 관계 속으로 옮겨갔는지 해설한다. 여기서 하느님이 쓰신 교육학은 ‘분리-확산’이라는 과정의 반복이며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성숙시키신다. 그가 전개하는 ‘전위의 해석학(transpositional hermeneutics)’은 다음과 같다.

- 바벨탑 사건: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인류의 확산의 공포를 하느님이 깨뜨리시고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는 소명을 수행케 하셨다.

- 아브라함의 소명:성조는 고향과 부족으로부터 ‘뿌리 뽑혀’ 모험의 길을 떠났었고, 그의 하느님도 이동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늘 모험을 계속하신다. 결국에는 “우리들 사이에 천막을 치시기에” 이르기까지. 출애굽 사건도 노예처지지만 안정된 삶으로부터 분리시켜서 홍해 건너편 세계로 확산시키시는 작업이다.

- 유배의 체험:계약이 체결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선택의 계약’이라는 이스라엘 중심의 정치신학이 수립된다. 타민족들에 대해 폐쇄된 혈통과 종교의 집단을 구축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들을 남북으로 분리시켜 북이스라엘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다음에는 둘 다 뿌리 뽑아 유배지로 확산시키신다. 그리고 예언자들을 시켜서 계약사상에서 창조사상으로, 선택의 역사관에서 보편적인 세계사로, 조상들의 하느님에게서 만인의 하느님께로 눈을 돌리게 만드신다. 유배 중에 이스라엘은 자기네가 이방민족들과 뿌리를 함께하고 있으며, 이방인들의 생명과 삶도 같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지켜주시며, 그들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일하고 계심을 터득한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부분은 제2이사야의 전위신학이다. 약속의 땅을 빼앗기고 조상들의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백성에게 신명기계사관(申命記系史觀)으로는 역사적 현실이 해명 안 되었다.

이사야가 그때에 ‘고난의 종’을 등장시키는데 “그는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것이며”(이사야 42.1) 하느님은 “그를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고 땅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이르게 할 것이다”(49.6). “야훼는 고레스를 사랑하신다. 그가 야훼의 뜻을 이루어 바빌론과 갈대아를 짓부수리라”(48.14)는 선언은, 이방민족들도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대상이 될 뿐더러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확언이 된다. 이스라엘뿐 아니고 민족마다 각기 역사의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하시듯이) 친근한 관계를 맺고 계신다. 거기서 유일중심주의(唯一中心主義)에서 다원중심주의(多元中心主義)로, 일방적(一方的) 신앙체계에서 다변적(多變的) 신앙체계로 확대되는 사상적 전위가 가능하였다.

그보다 좀 늦게 나온 느부갓네살의 꿈과 해몽(다니엘 2장)에서도 송천성은 하느님의 교육학을 발견한다. “아무나 내 눈에 드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권한이 나에게 있다. 이제 나는 이 천하를 나의 종인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맡겨 부리게 하였다”(예레미야 27.5-6)는 신탁이 있다. 또 예언자는 환상을 본다. 그의 꿈에서 동상을 파괴한 돌은 이 세상의 권력 또는 국가들 안에서 작용하는 주권을 가리킨다. 네 왕국의 멸망으로도 그 주권은 단절되지 않고 점점 커져서 산만해졌다. 고레스와 달리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잡아간 원수를 하느님이 ‘나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중심주의사관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다.

제2부는 예수 자신의 신학적 전위작업을 해설한다. 공생활 중에 이스라엘의 철저한 중심주의에 직면한 예수는 이를 타파코자 언행으로 가르침을 내렸다. 주변의 죄인들, 참된 행복, 착한 사마리아인, 포도원의 비유, “온 세상에 가서…” 등의 언행은 한결같이 그 노선에서 해석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세대를 이어온 유대인들의 신앙과 민족정신, 민족주의적 메시아사상은 ‘대붕괴’를 맞았다. 그리고 그의 부활로 새로운 역사의 진리가 계시되고 실현된다. 송천성은 예수의 죽음에서 나타난 대붕괴의 징조를 둘 꼽는데, 예루살렘 일대를 뒤덮은 짙은 어둠과 두 조각으로 찢어진 휘장이다.

예루살렘 천지를 뒤덮은 저 ‘짙은 어둠’은 뭔가 새 힘이 비쳐야 할, 창조 전에 심연을 덮고 있던 어둠,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새 창조가 진행되는 어둠을 표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예수의 최후의 비명은 동족의 종교적․정치적 기대와 중심으로부터 분리되는 고통에서 오는 비명이라고 한다. 그 비명소리와 동시에 두 조각으로 ‘찢어진 휘장’은 이방인들의 뜰과 유대인들의 경내를 막던 휘장으로 보이며, 하느님과 구원을 특정민족 혹은 신앙공동체의 독점물로 제한시키려는 시도가 거기서 실패로 끝났음을 상징한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위이자, 제자들이 동족의 문화적 전통이라는 굴레에서 풀려났고 예수를 한 민족의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보던 시각을 벗어나게 만든 신앙의 전위다. 제자들이 발견한 ‘빈 무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이던 하느님의 ‘일단 정지’라는 공백이다. 거기서부터 온 세계의 삶과 역사가 재평가되고 재구성된다. ‘주님의 발현들’ 역시 제자들 머리 속에 아직도 여운이 짙게 남은 이스라엘 중심사상, 민족적 메시아관,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분을 육체적 연결로 파악하려는 개념을 청산시키는 활동이었다고 본다.

 

3.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구속의 신학보다는 창조의 신학에서 출발하고, 이스라엘-교회의 동심원적인 중심주의 구세사관을 거부할 때에 그가 당연히 부딪히는 문제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시아문화 및 종교들과의 관계가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타 종교들은 역사적 계시가 없는데 그리스도교는 특별계시와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므로 ‘특별’하며 그 때문에 동심원적 중심주의가 타당하다는 전통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송천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 특별한) 계시의 핵심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의 선포이다. 그 나라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룩하면 거기에 깃든다(“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타민족들의 종교에 하느님의 나라가 보이는가? 보인다(예: 불교 승려들의 분신, 맹자와 나탄의 비교).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의 가르침 속에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라는 핵심적 계시가 들어 있다면 일반계시를 특수계시에서 반드시 구분하거나 더욱이 대립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그의 질문이다.

그리고 특수계시는 구원을 베풀고 이방인들에게 있는 일반계시는 인간을 단죄(斷罪)한다는 주장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의화(또는 의롭다 인정받음)가 신앙에서 오느냐 행실로 얻어지느냐는 고전적 논쟁을 이제는 의화(의인)가 신앙 때문에 오느냐 은총 때문에 오느냐는 도식으로 바꾸어 보자. 대개 “신앙을 통해서 은총으로 말미암아(by grace through faith)” 온다고 대답할 것이다. 문제는 어느 문구에다 강조점을 두느냐는 것이다. 은총이 우리 신앙(또는 신앙체계)에 좌우되고 갇혀 있을 수 있는가? 은총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고 그리스도의 중재적 위치는 아담에게서 세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과 사건(종교, 역사, 문화)을 망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받는 이들의(명시적, 묵시적, 무의식적) 동의(同意) 속에 엄연히 유지된다. 그 동의는 그들이 보이는 사랑(아가페)에서 식별된다.

과연 사랑(아가페)이야말로 종교들 속에 참다운(특별한) 계시가 깃들어 있는지 판별하는 기준이다. 예수의 언행과 생애는 아버지에 대한 증언이었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 대한 증언이었다(요한 3.16). 계시의 핵심인 ‘그리스도 사건’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한 사건이다. 따라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지식(계시)이 있는지 없는지, 참 지식인지 아닌지 식별하는 길은 아가페이다. 신앙은 사랑으로 바치는 은총이다.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여일하고 조건 없는 이웃사랑 그것이다(새 계명).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는 “누가 나의 하느님입니까?”라는 질문이 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에 관한 질문은 곧 인간에 관한 질문이 되고 여기서 계시의 특별함과 일반성을 구분하는 시도는 무너진다.

그리스도 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도 성립한다. 고통받는 것은 인간 모두의 운명이다. 누구의 고통이라도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은 바로 그 고난 속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외인(外人)은 없다.

 

4. 아시아 신학으로의 전위

 

4.1 상황신학(狀況神學)의 정립

 

그는 서구신학을 서구문화의 산물 또는 일종의 특수한 토착화신학으로 간주하고, 우리 자신의 신학적 사고방법, 신학적 표현을 찾고자 한다. “아시아의 문화, 역사, 종교, 이것들은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사고를 위한 자료”이다. 왜 계시를 출발점으로 하지 않고 상황(狀況, context)을 출발점으로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상황 없는 계시 없고 계시 없는 상황 없다”고 답변한다. 특히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써 말씀이 육신 안에 있고, 계시가 상황이 됨으로써 계시는 상황 안에 있다는 도식이다. 평범한 삶의 상황에서 하느님의 구속적 사랑을 발견하는 예화 ‘성모찬가(Magnificat)’에서 그는 상황신학을 이끌어낸다.

“아기 탄생만큼 평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출산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일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사랑과 열정에 사로잡혀 이루어 놓은 열매에서 삶의 신비와 능력에 기인한 일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일이다. 그것은 또한 출산 없는 삶이란 단절이고 소멸이며 의미 없는 단어가 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부활한 그리스도 속에 나타났던 하느님의 놀라운 구속적 사랑이라는 이 신학적 붓놀림이 한 아기의 평범한 출생을 성모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비범한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루카 1.46-49)

이야말로 훌륭하기 짝이 없는 신학적 붓놀림이다. 비천한 마리아는 자기 뱃속에서 요동치는 하느님의 구속의 능력을 느끼고 있다. 그야말로 그녀는 완전히 신학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하느님의 영이 자신 속에서 놀라운 형태를 취하며 움직이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녀는 상황이 되었고 동시에 계시의 내용이 되었다.”

“사실 저의 신학은 아시아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다른 아시아인들의 맥박,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맥박 속에서 하느님의 맥박소리의 메아리를 듣게 하는 신학-이것이 상황신학이다.”

 

4.2 민중으로의 전위

 

그런데 그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 있는 신학, 보고 듣고 깨닫는 가슴의 신학을 하고자 하며, 그래서 그의 신학의 주체는 종교지성인들보다 민중이 된다. 민중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의 신학적 관심의 주제가 된다. “예를 들어 불교신앙의 체계나 교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고 불교는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신앙의 빛에서 삶의 문제에 대답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불교도의 영성을 포착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신학의 자료도 아시아의 종교경전이나 철학서들보다 가장 평범한 수준에서 민중의 지혜와 유산 그리고 염원과 희망이 담긴 민담(民譚)과 노래가 된다. “민중의 힘에 대한 고려 없는 문화적 종교들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참 역사를 말해 주지 않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두 가지 예문을 든다.

 

4.2.1 민중의 이야기: 우리 이름을 말해주오 “동생 넷을 가진 젊은이가 있었다. 그 젊은이가 처녀를 맞아 장가들었다. 신부는 신혼 나흘 밤을 잤다. 그 후에 방에서 나와 죽을 끓이려고 불을 지피고 솥을 걸었다. 죽이 충분히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다 된 죽을 남편 몫으로 한 그릇 뜨고 시동생들 몫으로 네 그릇을 떴다. 그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었다.

시동생들이 말을 걸었다. “이 죽을 먹을 테니 우리 이름을 말해 보시오.

그녀의 대답 : 나는 당신들 이름을 모른답니다.

그들의 대답 : 우리 이름을 모른다니, 죽을 도로 가져가시오.

그녀는 죽 그릇들을 다시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남편과 함께 죽을 먹어치웠다. 똑같은 일이 이튿날에도 반복되었다. 여인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시동생들이 내가 끓인 죽을 먹으려 들지 않는구나.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걸’ 하였다.

그 다음날, 해가 진 후 여인은 카사바 녹말가루를 얻기 위해 카사바 뿌리를 모았다. 뿌리들을 절구에 집어넣고 공이로 빻기 시작했다. 그때 절굿간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지저귀기 시작했다.

네 시동생들,

그들 이름을 모르지?

잘 들어봐, 내 알려주지

그녀는 줄기를 빻고 있네!

하나는 툼바 시쿤두

하나는 툼바 시쿤두 무나

잘 들어봐, 내 알려주지

하나는 툼바 카울루

하나는 툼바 카울루 무나

잘 들어봐, 내 알려주지

그녀는 뿌리를 빻고 있네!

잘 들어봐, 내가 알려 주었지

신부는 절굿공이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곤 돌을 들어 새에게 던졌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작은 새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가루를 다 만든 후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 다시 불을 지피고 솥을 걸었다. 죽이 끓자 시동생 몫으로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갔다. 그들이 말을 걸었다. “우리 이름을 말해 주오.”

그녀의 대답 : 나는 당신들 이름을 모른답니다.

그들의 대답 : 이 죽을 가져가시오.

그녀는 도로 가져가 자기 방에 들어갔다. 그녀와 남편은 죽을 먹어치웠다. 그 다음날에도 그녀는 카사바 줄기를 갖고 다시 절굿간을 찾았다. 절구질을 시작하자 어제와 똑같이 그 새가 날아와 전날에 하던 그대로 노래하였다. 그녀는 또다시 새를 쫓아 버렸다. 그러나 새가 날아간 후에야 그 작은 새가 그녀에게 말해주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새가 우리 시동생 이름을 알려준 것이구나. 이제야 알았네!’ 가루를 만든 후, 집 안에 들어가 불을 지피고 솥을 걸었다. 죽이 끓자 그릇에 퍼 담아 시동생들에게 가지고 갔다. 그들이 말을 걸었다. “이 죽을 먹을 테니 우리 이름을 말해주오.” 여인은 “당신은 툼바 시쿤두, 당신은 툼바 시쿤두 무나, 당신은 툼바 카울루, 당신은 툼바 카울루 무나”하였다. 시동생들은 웃었다. 그들은 죽그릇을 받아들고 먹어치웠다.

 

4.2.2 민중의 노래 :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노래풀이 : 한(恨)의 신학>

“압제받고 비하된 사람들은 아벨 아래로 자기네 고통을 피력해 왔는데 신학자들은 최근에야 그들의 신음과 흐느낌과 비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죽음을 맞으러 아리랑 열두 구비를 오르던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한 … 그 사형수들의 가락과 더불어 산천초목이 떨며 구원을 외친다(“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로마 8.22).

이 가락은 한의 소리다. 부당한 고난으로 응어리진 원성이다. 그 작은 반도가 원귀들의 아우성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숱한 인생들의 한스러운 곡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의 곡성을 듣지 않고 민중에게 그리스도를 입 밖에 낼 수 있을까?

예수도 이 노래를 알았더라면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를 오르면서 아리랑을 흥얼거렸을지 모른다. 그 꼭대기에 이르러 그분의 눈에는 저 건너 다른 등성이, 새 생명과 부활의 등성이가 들어왔으리라. 그 너머의 고개를 함께 내다볼 눈이 있었기에, 한국 땅의 한스러운 역사에서 가엾은 민중들 속에서 그 고개를 무수히 오르셨던 하느님을 느꼈기에, 오늘도 그 고개를 오르는 수백, 수천 한국인들의 가락에 희망이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리랑은 생명을 내다보는 희망의 가락이리라. 아리랑과 골고타! 아리랑 고개는 골고타를 가리키고 골고타는 아리랑 가락을 울리고 있다.

 

5. 결 론

 

송천성의 신학은 창조신학(創造神學)이다. 육화와 구속이 창조와의 동일선상에서 파악되는 점에서 그는 교부 이레네오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주어는 ‘하느님’이시고 신학의 내용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들’이다.

그는 단일한 ‘구세사’라는 이스라엘-교회 본위의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특수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이나 계시와 상황의 구분을 극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지도판에 중심이 각기 다른 무수한 원들이 가득 그려져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구세사임을 우리에게 설득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아마도 종교신학(宗敎神學)이 가능케 되는 유일한 활로인지도 모른다.

그가 아시아인의 심성과 고난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회사적 연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맹부인의 눈물」이나 「아시아 이야기 신학」에서 민중을 신학의 주체로, 그들의 언어(이야기, 노래)를 신학의 전거로 삼은 것은, 한국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아서겠으나, 추상적 사변과 멀리 ‘하느님의 통애(痛愛)의 신학’을 하려는 우리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전위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중국을 보는 시선에서는 간간이 부정적인 눈빛이 없지 않으나, 역시 중국이야말로 그가 씨름해야 할 골리앗이 될 것이다. 그 나라를 단지 ‘붉은 용’으로 단정해 버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엄연한 구세사라면 “중국의 오늘의 사회적․정치적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이 그의 가장 큰 신학과제라고 하겠다. 비록 대만인이기는 하지만 중국은 언제까지나 그에게 Mother China로 남는 까닭이다.

그의 문화신학은 앞에 소개한 대로 세일론 사람 피어리스의 ‘성사론(聖事論)’을 초월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아시아문화에 성사인가, 후자가 전자에게 성사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서슴없이 아시아 영성이 그리스도 교회에 성사가 된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자기네 주님의 육화가 자기 비움을 본떠서 그리스도인들도 아시아의 종교와 문화와 역사 앞에 겸허한 자세로 임하는 법을 그는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착상이나 교회의 선교보다 언제나 앞질러 일하시는 하느님은, 아시아의 그 깊고 그윽하고 오래된 영성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경탄할 때에(mysterium fascinosum), 저 옛날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하시던 그 엄숙한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실 것이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기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