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관용에 있어서 아시아 교회의 공헌

                                                                     

                                                                                                  신학전망 132(2001), 21-35.

 

 

서론: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관용과 선교신학적 배경

 

     나자렛사람 예수가 일평생 펼친 케리그마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를 골자로 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인구 3%의 교우들과 함께 사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의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들을 대하는 종교적 관용의 문제는 인구 백퍼센트를 그리스도인으로 가정하는 유럽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스리랑카의 예수회 신학자 피어리스(Aloysius Pieris)는 그의 저서 「아시아 解放神學」에서 신대륙 발견과 서구 열강의 아시아 진출 이래로 가톨릭교회가 타종교들을 대하는 자세가 변천해 온 과정을 정복론(征服論), 적응론(適應論), 완성론(完成論), 그리고 성사론(聖事論)으로 도식화하였다. 이 이론들은 한결같이 당대의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설교한 하느님 나라와 역사적인 제도인 교회 사이의 외연적(外延的) 연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왔다.

 

정복론(征服論)에 입각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곧 로마 가톨릭교회이며 따라서 인류는 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이를 수 없다. 타종교는 그리스도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미신체계이고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악마적 세력이므로 당연히 반(反)-그리스도적(anti-Christian) 종교로 간주된다. 이교도(異敎徒)들은 멸망에로 단죄받았으므로 억지로라도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왕권(王權) 밑에 탈취해내는 영웅적인 애덕이 곧 선교(宣敎)이다.

 

적응론(適應論)은 지난 1998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 일명 아시아 시노드에서도 훌륭한 선교 귀감으로 기억된 예수회 마태오 리치, 데 노빌리스 같은 선교사들이 인도와 중국의 고등종교와 철학과 문화에 접하고서 취한 태도로서, 유교, 도교, 불교같은 아시아의 대종교들을 반그리스도적(anti-Christian)이라고 단죄하기보다 비(非)-그리스도적(non-Christian) 종교로 간주하고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표현이나 용어, 교회 전례 등을 그 문화와 종교에 적응해 보려는 입장이었다.

 

완성론(完成論)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199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시아 주교 시노드 후속문서 「아시아 교회(Ecclesia in Asia)」의 기본입장이다. 타종교들은 메시아적 존재를 기다리는 중이므로 성령(聖靈)이 그들 안에 역사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길을 준비하는 전(前)그리스도(pre-Christian) 종교들로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福音)을 받아들일 준비역할을 한다고 간주되고, 그 창시자들은 그리스도의 선구자 내지 예언자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런 대상을 받들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어느 모로 로마교회로 관련되어 있다(ordinantur). 덕분에 구원의 범위도 어느 정도 넓어진다.

 

1980년대에 이르러 교회를 익명(匿名)의 그리스도인들(anonymous Christians)을 위한 성사(聖事)로 보는 이론이 등장한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적 성사(聖事)이면서 하느님 나라의 성사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구원의 활동을 하고 계시며, 따라서 교회는 자기의 삶을 통해서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교를 밝히 드러내고 제종교가 발견하여 쌓아올린 가치들을 그곳에서 신장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입장 역시 그리스도교가 일방적으로 제종교에 성사가 되어 준다는 말에서 그친다.

 

그런데 1998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는 이 성사론의 쌍방성을 정립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곧 타종교들도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성사성(聖事性)을 갖는다는 이념을 (직접적 표현을 자제하면서도) 언표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1998년의 시노드를 앞두고 아시아교회에는 아시아의 대종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성사적 체현이라고 보려는 괄목할 만한 신학적 발전이 있었다. 본고는 아시아 교회의 이 입장이 가톨릭교회의 타종교에 대한 관용(寬容)에 있어서 현재까지 가장 발전된 이론임을 천명하는데 목표를 둔다.

 

 

1. 아시아적 신학성찰과 바티칸의 반응

 

1970년대부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ederation of Asian Bishops Conferences) 이름으로 한데 모이기 시작한 아시아교회는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탐색에서 나온 아시아교회의 첫 신학적 성과가 「오늘의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1974년도의 문서였다.

 

이 문서는 “한 분 하느님의 세계 안에서 모든 장벽과 경계를 가로질러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을 체험하고 있는” 아시아교회가 “오늘날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의 모습에서, 아시아 대륙의 수천 년 역사 동안 우리 선조들에게 친숙하였던 그 힘을 알아본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서론). 아시아에서 이루시는 성령의 이 힘을 알아보는 작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백성들의 위대한 종교적 전통들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다(13항). 그리고 “이 대화는 또한 우리가 어쩌면 미쳐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를 우리들 자신의 신앙의 보화들까지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게 된다.” 는 성사론적 희망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타종교들과 토론 아닌 대화를 하려면 방법론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가식이나 편견없이 진실과 겸손과 솔직으로 하며 대화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행동하려면 그리스도인 편에서도 교리적 일관성을 자기 내심에 유지하여야 마땅하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구속론(救贖論)에 따라 “그리스도의 유일 중개자” 신앙을 타종교인들에게 내세우면 대화가 벽두부터 단절되기 때문에 아시아의 신학자들은 구속론보다 외연이 넓은 창조론(創造論)에 입각하여 타종교에 접근하는 방식에 착안해왔다. 삼위일체론에서도 성령론(聖靈論)으로 우회하여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려면 창조론이 신학적 사고의 근간으로 정립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시아 문화와 역사와 종교 속에 다원적(多圓的)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계시와 구원사업의 일환으로 인정하는 시각을 수립하게 된다. 따라서 대화의 현장에서는 구원에서 창조로 소급하는 방법론 대신에 동양의 종교들이 답습하는 방법, 곧 우주적 창조에서 보편적 구원으로 신학적 접근을 시작하는 “신학의 전위(轉位)”를 시도하게 된다. 실제로 아시아교회의 신학적 성찰에는 탁월한 아시아 신학자들의 개인적 작업이 선행되어 있다.

 

아시아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관한 한 아무도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자세로 아시아에서 타종교를 신봉하는 이들과 더불어, 하느님이 창조계와 각각의 종교적 철학적 예지 속에 펼쳐 놓으시고 계시하신 진리를 탐색하고자 한다. 진리가 발견되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진리에 봉사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면 종교간 대화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완전한 진리와 신앙의 규범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는 남들이 갖추고 있고, 남들이 발견해낸 진리를 바라보고 탄복하는 일이요 그것으로 상대방보다는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는 일로 파악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1970년대부터 종교간 대화를 아시아교회의 근본사명으로 의식하고 있던 차에 모처럼 교황이 소집하는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에서 타종교에 대한 완성론(完成論)을 성사론(聖事論)으로, 그것도 상호성사론(相互聖事論)으로 고양시킬 “은총의 기회”로 간주하고서 신학적 준비와 성찰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의 신학위원회(The Office of Theological Concerns of FABC)는 주교위원들과 준위원 신학자들로 구성되어 1995년부터 2년에 걸쳐 연구해 온 성과를 1997년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태국의 삼프란에서 열린 신학위원회주교연수회(Bishops Institute for the Theological Animation) 제1차 회의에서 최종승인을 받아 「오늘날 아시아에서 활동하시는 성령(The Spirit at Work in Asia Today)」이라는 문서로 내어 놓고 아시아 교회들과 모든 신학자들의 의견과 평가를 구하였다. 이 문서는 초세기를 제외하고 서구가 아닌 아시아교회가 그 신학적 반성을 문서화한 최초의 공식문서였다.

 

아시아교회는 그 문서 첫장에서부터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문화 전통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이들 전통의 신자들이 체험하고 믿고 상상하고 상징화하는 성령의 현존을 식별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시아교회의 이 식별작업에 대응하여 바티칸은 3년만에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이라는 선언을 내어놓고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신학위원회의 문서를 “종교다원주의“로 의심하면서 아시아교회의 ”몇몇의 틀린 견해들이나 혹은 모호한 견해들을 거부하면서 이 점에 관한 가톨릭 신앙교리를 새로이 제시“(DJ 3) 하겠노라고 공언하였다. 그런데 바티칸의 이 문서는 오히려 아시아 교회가 가톨릭의 종교적 관용을 신학계에 얼마나 훌륭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로마의 신앙교리성이 「주예수」를 발표하자 의당히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시아교회였다.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그 문서가 아시아교회를 상대로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봄베이 교구장 디아스주교는 「주예수」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인도를 겨냥하고 나아가 인도의 가톨릭 신학자들까지도 겨냥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서 “나는 인도인으로서 말한다. 인도인들은 매일 이 문제들을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처럼 이번 문헌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단언하는 주교들까지 나오자 교황이 나서서 “기초가 없는 대화는 공허한 말”이라고 경고하면서 이 문서를 적극 옹호하였음은 물론이다.

 

 

2. “아래로부터의” 성령론

 

「아시아 성령」은 사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성령론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1986)과 「교회의 선교사명(Redemptoris Missio)」(1990)을 충실하게 이해하였고, 문서의 제 3장과 4장에서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을 자세하게 개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성령의 근원이 되셨다.”(SA 3.6.1)는 문구나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나타낸다.”(SA 3.6.2)는 문구는 아시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감추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다만, 바티칸이 유럽의 스무 세기 그리스도교 역사를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말하고 있음을 부러워하면서도, 아시아 인구의 3%를 점유하는 아시아교회는 “타종교들과 대화”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하느님의 성령”을 언급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아시아교회는 전체교회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이 문서는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꼭 필요한 보완물”로서 오늘날 교회가 아시아 선교에서 나아갈 길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 활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SA 4.2.1.3)고 선언하여 아시아교회의 고유한 연구를 천명하면서 일종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 문서의 취지는 그보다 10년전에 아시아 주교회의연합회의 타종교 문제 주교 연수회(1986)에서 정립한 “아래로부터의 성령론”이었다. “아시아의 성령론은 “아래에서, 다시 말해서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과 만남, 운동들에 대한 계시에 비추어, 기도와 체계적인 성찰로부터 발전해 나갈 것이다.... 만남에는 다양한 종류와 많은 차원이 있다. 성령 신학은 서서히 성장하면서 여러 가닥의 실로 짜여질 것이다... 성령 신학은 별개의 고립된 신학이 아니라, 오늘날 생겨나는 모든 아시아 신학에 스며들 누룩인 것이다”(SA 4.2.2.1). 아시아교회가 일종의 신학적 다원성을 공식으로 요청한 셈이다.

 

“아래로부터의 성령론”에 대한 바티칸의 반응은 아시아주교대의원회의 특별총회 폐막 미사의 교황 강론에서부터 드러났다. “사람은 그분이 모든 가시적 사물들의 가장 깊은 신비가 되는 양 그분을 세상 안에서만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분을 “높은 데서” 찾아야 합니다.“ 아시아교회를 대하는 로마의 기본 식각은 “내재론”대 “초월론”, "성령론”대 “그리스도론”을 대치시키면서 아시아교회에 양자택을을 요구하는 구도로 짜여지고 그것이 「아시아 교회」와 「주예수」에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아시아 성령」은 우선 아시아 대종교들과 원시종교들과 민간신앙 속에서 활동해 오신 하느님의 성령의 현존(現存)과 그 위대한 열매를 열거하는 작업부터 착수한다. 아시아교회는 대종교들에서 성령의 현존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힌두교 역사를 거룩한 역사, 곧 성령께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하느님의 깊은 신비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께 인도하시는 역사로 읽을 수 있다.”(SA 1.1.7)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인들의 삶 속에서 실천되는 붓다의 통찰력과 경험을 공유하러 왔을 때, 그들이 깨달았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이미 경험한 성령의 활동이 아니었겠는가?”(SA 1.2.5) 유교와 도교 “이 두 철학은 우주 안에, 특히 인류와 그 역사 속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반영하고 있다. 도교의 순응, 신뢰, 겸손, 비폭력, 초탈, 평정을 잃지 않는 사랑의 덕목들과, 유교의 책임, 정직, 충성, 성실의 덕목들은, 세상의 여러 민족 안에 갖가지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한 분 하느님의 성령의 결실을 증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SA 1.3.2.4) “우주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고자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모슬렘의 삶에 성령의 비할 데 없는 열매가 맺어지도록 이슬람교에서도 활동하신다.”(SA 1.5)

 

하지만 아시아교회의 이러한 개방적 대화자세를 보면서 로마는 자연과 은총, “신학적인 신앙(theological faith)과 타종교들 내의 믿음(belief)"을 친절하게 구분해 주면서 “신앙은 계시된 진리의 은총 “이고 ”타종교들의 믿음은 인간이 진리를 찾는 인간적 보화“ 혹은 단순히 ”인간적인 종교 경험“일 따름이라고 규정해 준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관용의 덕을 발휘하여 대화는 갖지만 타종교들은 ”하느님께 대한 동의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이거나 ”중대한 결핍상태“(DJ 22)에 있다고 선언해주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바티칸의 문서가 오히려 성령의 현존과 그 활동이 띠는 초자연성과 구원론적 효과를 축소시키는 느낌을 받게 된다.

 

 

3. 대화인가, 선교인가?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가 “선교를 위한 전략”이라는 속임수를 아시아 주교들은 용납하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아시아교회는 1986년의 아시아주교회연합회의 타종교 문제 주교 연수회가 채택한 선언을 인용하여( IV/7.) 다음과 같이 조심스러운 표현을 내놓았다. “대화는 성령의 활동이다. 대화는 우리를 상호 이해와 존중과 풍요로 이끌어준다. 선포의 길을 닦으려고 대화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더라도, 대화는 선포에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분의 광채를 관상하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이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재조명하여야 한다."(SA 4.2.2.3)

 

그리스도교가 소수 종교인 지역에서 당하는 갈등과 도전에 관해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종교 공동체에서나 경건하고 의롭고 선량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주민의 복지를 위하여 함께 연대하고 투쟁할 수 있음을 체험한다. 그러한 전제하에서 아시아교회는 겸허한 자세로 타종교들과 나란한 세계로 육화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교회의 이 조심스러운 자세에 대해서 로마는 “종교간의 대화는 교회의 이방인을 향한 (선교)사명의 일부일 뿐”이라고 못박는다.

 

로마에서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관용은 교회가 “그러한 종교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든가 혹은 그것들이 교회에 보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견해”로서 방달으리 수 없을 뿐더러 교회를 이것들과 동등한 “병행적 구원의 한 방법”으로 격하시키는 짓으로 해석하였다. 아시아교회는 아시아 대종교들을 성령께서 아시아 대륙에 무수히 그려놓으신 구세사건으로 보는 다원적(多圓的) 구원관을 펴고려고 시도하는데 비해서, 유다교-그리스도교의 단원적(單圓的) 구세사만을 인정하려는 측에서는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4. 아시아의 다원주의와 그리스도의 위상

 

만일 누가 오늘날의 아시아대륙을 향하여 “아시아 상황은 해답을 필요로 하는 인간 조건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그 상황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다.” “따라서 교회의 사랑의 사명은 아시아 상황에 그리스도를 모셔가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도식을 내세운다면 종교간의 솔직한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체험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특히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지역에서는“공동체의 내부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여러 아시아 사회들을 다원성과 상호수용으로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으므로”(SA 5.4). “다원화의 주역이신 성령께 대한 접근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아시아인들의 마음에 커다란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SA 5.4).

 

아시아 주교들은 이를 성령에 대한 ‘수용적 다원주의’라 명명하였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양한 종교와 문화와 세계관을 지닌 환경에서 성령을 만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수용적 다원주의의의 입장을 지지한다. 다시 말해, 성령의 촉구에 응답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이고 풍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SA 5.4).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는 아시아인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것 안에 궁극적으로 현존해 계심을 확인하고 “다른 종교인들의 신앙 표현에서 성령의 현존을 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러한 표현들을 성령의 활동에 대한 다양한 응답으로 보게 된다.”(SA 5.4).

 

역사적으로 동방교회 신학은 인간의 구원 사업은 배타적으로 “성령의 작용”이라고 보는데 반하여, 서방교회 신학은 삼위일체의 작용으로 언표하면서도 성령의 역할(appropriatio)로 돌려왔다. 아시아는 지리상으로도 동방교회 지역인만큼 아시아교회는 성령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신적이요 초자연적이요 구원론적이라고 이해하는 가운데 아시아의 타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원만한 이해를 호소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바티칸이 아시아교회와 그 새로운 신학적 시도에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예수가 성령을 보냈지,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못 깨닫는다는 조바심이었던 것 같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에 다가가는 아시아인」(5.2.)들에게는 “성령께 관한 언급은 곧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언급이다. 아시아는 신의 신비스러운 본성에 대하여 특히 예민한 전통을 가진 대륙이다...따라서 계시된 것들은 계시되지 않은 것들의 일부분으로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가 지향하는 모든 것 안에 궁극적으로 현존해 계시지만, 사물의 도식 안에 포함될 수 없으시며, 그분의 길은 한정될 수도 제한될 수도 없다.”(SA 5.2)고 믿고 있다.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 이해가 달랐던만큼, 아시아 신학자들과 주교들은 아시아인들이 이해할만한 그리스도상을 찾는 일이 급선무임을 절감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성령론적 접근 방식”을 시도하였다. “신약성서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서로 다름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모두 특정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배경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한 접근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곧 그분의 삶, 설교, 죽음과 부활이 하느님의 성령의 영향으로 이루졌다고 본다. 아시아 역사의 현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이러한 성령론적 접근 방식은, 우리의 전통과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롭게 접목시키는데 매우 중요하다.”(SA 5.3).

 

요컨데 아시아교회의 접근은 시노드에서도 언명한대로 “창조와 인간 역사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영께서는 어느 한 순간도 그 구원 활동을 멈추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영께서는 세상 안에서 작용하신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 세상에 작용하셨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관용은 바티칸에 의해서 “상대주의”로,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어떤 역사적인 종교를 통해서도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교와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전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지도 않으며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하는 신념”(DJ 6)처럼 오해받았다.

 

바티칸은 따라서 아시아인들의 이 성령 이해를 “성령과 그리스도와 양자택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말씀 사이에 있으리라고 상상되는 어떤 허공을 메우는 존재도 아니다.”고 훈계하기에 이른다. 아시아교회의 시도는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부활하신 말씀보다는 훨씬 더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성령의 구원 경륜에 관한 가설”로서 “가톨릭 신앙에 역시 위배된다.”는 선언을 받는다. 오히려 다원주의로 기우는 아시아인들에게 “강생하신 말씀과 성령의 구원적 신비 사이의 연결점”을 강조해 가르쳐야겠다는 절박한 사명감을 느낀다. 바티칸은 성령의 역할이 “성자의 구원적 효력을 현실화”일 따름이라고 못박는다.

 

이 문제에서 로마가 아시아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은 “성령과 함께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이 교회의 가시적 경계선들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 펼쳐진다.”(DJ 12)는 것이며, “공식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도,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능하다.” (DJ 22)는 것뿐이다. 계시는 역사적 예수 안에 완결되었고 교회 안에 그것이 배타적으로 보존되어 있다는 독점의식은, 아시아의 입장을 “종교상대주의로 특징되는 신앙무차별주의“라고 단정하게 만들었다.

 

 

결 론

 

첫머리에 인용한 피어리스 신부는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수행해온 토착화 작업을 세 단계로 도식화하고 거기에 네 번째 아시아적 모델을 덧붙이고 있는데 필자는 그의 논지에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종교적 관용문제를 두고 조심해야 할 세 가지 콤플렉스를 꼽고 싶다. 첫째는 “교회 밖에 구원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자만심으로서 피어리스는 이것을 “요나 콤플렉스”라고 명명하였다.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이론적으로 청산되었으나 구원의 길과 수단을 그리스도교가 독점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여전히 교계와 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잠재의식으로 남아있다(“요나는 누구에게나 있다”).

 

두 번째는 “열쇠 콤플렉스”라고 부르고 싶다. 자기 종교의 신앙을 교조화하려는 경향은 어느 종교에나 있겠지만, 자기 종교 외의 종교들을 외교(外敎) 혹은 이교(異敎)라고 하시하고 성령의 보편적 활동을 묵살하기 쉽다. 나자렛사람이 갈릴래아의 어부에게 주었다는 열쇠를 교계가 권력처럼 행사하다보면 구원마저 자기 손으로 주고 받는다는 착각에 빠진다. 열쇠가 서양어(clavis, chiave, clef, key, Schoussel)로는 한결같이 닫아거는 “잠을쇠”라는 의미를 띄지만 우리말로는 “열쇠”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하느님의 나라라는 "진리의 보화는 (만인이) 공유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바벨 콤플렉스”로서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를 청산하기 주저하는 고뇌이다. 그리스도교가 초세기에 그리스 지성계와 접하면서 비그리스도교 철학에 동화되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사변적으로 확립하였으면서도 아시아에서만은 불교나 도교를 그 종교적 맥락에서 유리시켜 그 철학만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 한 예다. 또 종교자유를 얻으면서 서구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문화에 철저하게 육화하여 그 모든 제도와 관습을 포용하였으면서도 아시아에서만은 유교 문화와 종교를 이분하려고 했으며 「아시아 성령」에 표현된 아시아교회의 때늦은 시도마저 봉쇄하려는 성급함을 보인다. 그리고 중세 내내 게르만의 우주적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에 절충을 가하면서 그 민족들을 교회 안에 포용하였으면서도 아시아의 민간신앙과 토속신앙을 경멸해온 사실이 안타깝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묵시 2,7 참조). 우리는 아시아의 전통과 문화, 종교, 정의 평화 운동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께 귀 기울여야 한다.”(SA 결론)「아시아 성령」이 1986년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의 발표를 인용하여 제시하는 말처럼, 종교적 관용의 첫걸음인 종교간 대화는 “성령의 활동이다. 대화는 우리를 상호 이해와 존중과 풍요로 이끌어준다. 다른 사람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재조명하여야 한다. 물론 그것은 흔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SA 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