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1006.gif창조 개념의 철학적 난제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파라독스 해법
                     -『신국론』을 중심으로

                                          1998 중세철학 5 (35-68)

 * 네티즌 독자에게: 이 논문은 필자의 퇴임기념논문집 「사랑만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경세원 2007), 133-154면에 보완되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수정본에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인용이 필자에 의한 번역본 「신국론」(분도출판사 2004)에서 직접 인용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서론: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존재한다"(ideo sumus, quia facta sumus) (Confessiones 11.4.6)

 

무릇 올바르게 철학하는 사람들은 신에 관해서 들을 때에 존재의 원인과 인식의 근거와 삶의 질서(causa subsistendi et ratio intellegendi et ordo vivendi)를 그에게서 발견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 셋 가운데 첫째는 자연철학에 해당하고 둘째는 인식론에 해당하며 세 번째는 윤리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도 탁월한 그 능력을 통해서 만유를 초월하는 분에게 귀의하도록 창조되었으니, 그는 유일하고 진실하고 지극히 선한 신이며, 그 없이는 어떤 자연사물도 존재하지 못하고 어느 학설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느 행동규범도 정립하지 않는다. 그를 찾아갈 것이니 그에게서 만유가 우리에게 확보되며, 그를 추구할 것이니 그에게서 만사가 우리에게 확실해지며, 그를 사랑할 것이니 그에게서 만사가 우리에게 올바르게 정립되는 까닭이다."(De civitate Dei 8.4)

 

    아우구스티누스의 형이상학은, 인간이 "창조받은 존재"(esse creatum)로 자기를 의식하는 종교 체험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그의 창조론은 피조물로서의 자기 의식이요, 스스로 "나는 존재하는 자로다"(Ego sum, qui sum: 출애 3,14)라고 자기를 명명하는 신, 혹은 존재 자체(Idipsum 혹은 ipsum esse)에게서 존재를 부여받은 실존, 그야말로 선사된 존재, 창조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존재 체험이며[1] 『신국론』(De civitate Dei: 이하 본문에 나오는 전거로는 DCD로 약칭)에는 신과 존재 창조에 관한 핵심적인 텍스트가 있다. 신이 사물에게 부여한 것은 어떤 형상이나 작용이나 운명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존재 분여"(Deus fecit esse)라는 실재론이다.[2]

 

"신은 '나는 존재하는 자로다'라고 말하였다. 신은 최고의 존재자, 곧 최고로 존재하는 자이므로 또한 불변하는 자이다. 그리고 당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최고 존재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떤 사물들에는 더 풍부한 존재를, 어떤 사물들에게는 덜한 존재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존재자들의 본성들을 등급으로 배열 하였다.... 존재하는 분인 그에게 상반되는 것은 비존재이다. 그리고 최고 존재자요 모든 온갖 존재자들의 창조주인 신에게는 그 어느 존재자도 상반되지 않는다."(DCD 12.2)[3]

 

    다름 아닌 "신의 나라"(civitas Dei)를 논하면서 구원의 역사를 세계사의 지평에서 고찰하려는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시원(始源)에 관해서 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4] 그는 신플라톤사상과의 교류를 통해서 세계의 기원을 유출설(流出說)로 설명하는 도식에 접했지만 그리스도교가 전수해준 창조론(創造論)에 입각한 해설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신이 언제 창조를 행했느냐?"는 마니교의 논박에 대해서는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creatio cum tempore)를 주장하고, 선재하는 질료를 내세우는 신플라톤 사상과의 논쟁에서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nihilo)를 사변적으로 이론화한다. 그리고 완전무결하고 자족하는 신이 무엇 때문에 굳이 세계를 만들었겠느냐는 반박에는 "신이 선하기 때문에"(quia bonus)라는 플라톤 사상의 명분에 "신이 원해서"(quia voluit)라는 주의론적 명분을 첨가하여 두 명분을 "신은 사랑이기 때문에"(quia amavit)라는 궁극 이유에다 종합한다. "선은 자기 확산적"(bonum est diffusivum sui)이라는 유출설을 "사랑은 자기 확산적"(amor diffusivus sui)이라는 창조론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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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 초기사상에 해당하는 교부 철학(敎父哲學)에서 히브리-그리스도교 창조사상이 가장 정교하게 사변화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였다. 세계를 피조물로 보려는 유신론 철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신론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철학자들이 고대에는 세계가 창조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있다고 하거나, 근대 이래로는 "거기 그렇게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 창조사상을 수긍하는 경우에 파생하는 사변적 문제점들을 시비할 때에, 그 반론의 심각성을 의식하고 창조론을 사변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심지어 유신론적 입장에서 유출론을 수긍하는 경우에도 신과 세계의 근본적 구분은 없어지고 양자가 동일하며, 신이 필연적으로 세계를 창출하게 되고 따라서 세계는 존재할 권리가 있게 되므로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으로 많은 토론을 유발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철학의 이론이든 그리스도교 이론이든 창조론에 사변철학상으로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논리적 맹점이 많다는 것은, 창조론의 비논리성을 가리키기보다는,  창조를 이룩한 신의 절대 전능이 그만큼 위대하다는 증거라는 응수한다. 창조가 필연의 결과라기보다는 신의 편에서 무상으로 베푼 사랑의 선물이라면 신의 자유가 그만큼 위대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신이 자기 자족성으로부터, 또 동일률이라는 철학적 필연으로부터 벗어나는 신의 능력, 절대필연인 신이 피조계의 우유성이라는 근본적 이질성을 내포할 만큼 자유스러운 존재로 비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 체계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급적 역설이나 이율배반, 변증법을 배제하는 편이 사변적 투명성을 보존하는 길이겠지만, 그리스도교 철학은 어쩌면 그 가장 핵심되는 교의에서부터, 신은 하나이자 셋이고(unus et trinus), 신이 사람이 되었으며(Deus-homo), 피조물의 자유가 신의 은총에 저항 못하고 은총에 의해서 해방되고(libertas et gratia), 시간적이고 육체적인 피조물까지도 궁극에는 시간을 초월하여 신의 영원성에 참여한다(resurrectio carnis)는 등, 개념상으로 상반되는 어휘들을 공존시키면서 어떻게든 통일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 지성에는 상반되고 심지어 모순되어 보이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논리적 인자들을 신이 초월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와 논변에서는 상반되는 개념들을 부단히 병치하는 수사학적 기법인 파라독스(paradoxa)[5]를 철학적 논증 전체에서 자유롭게 구사하며, 창조론에서 봉착하는 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데도 이 기법을 활용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에서 영원과 피조된 시간 사이에, 신학에서 거론되는 신의 유일성과 삼위성 사이에, 인간론에서 예정된 은총과 인간의 자유 사이에 양자택일을 할 수 없는 주제에 봉착할 때마다 "기묘하여 형언할 수 없고 형언할 길 없이 기묘하다"(mirabiliter ineffabilie vel ineffabiliter mirabile: DCD 15.23.4)는 수사학적 문장을 쓴다.[6] 그리고 창조 문제에 대한 고찰에 들어가면서 그는 당초부터 창조는 철학자들이 상정하는 "존재론적 필연"이라는 경계를 초월하는 신의 자유를 암시하면서 "신은 기묘한(= 파라독스에 찬) 조물주"(Deus mirus artifex: DCD 22.14)요 인간 지성에 "불가능한 바도 신은 할 수 있다"(Deus facit impossibilia: DCD 22.26)고 선언한다. "신은, 신앙에 입각해서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바도 수월하게 행할 능력이 있다."(Deus potens est facere quae infidelibus sunt incredibilia, sed illius facilia potestati: DCD 21.6.2)고 단언한다.

 

파라독스는 인간 지성에 상반되어 무의미하고 모순된 내용보다는, 인간 지성에 감추어져 있어서 신에게서만 합리적 이유가 발견되는 무엇, "합리적 사유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지성에 그 합리적 사유가 은폐되어 있을 따름인"(non quia non est ratio, sed quia latet: Epistola. 162.8) 무엇이다. 그 이유로는 "피조물의 지식이라는 것은, 창조주의 지식과 비교해서, 땅거미지고 여명이 트고 아침이 밝아오는 양상을 띠는", 즉 추론적(discursiva)이기 때문이다(DCD  11.7). "우리 인간들은 [논리적으로] 탐구할 수 없다고 하는 바도 신은 행할 수 있다. 그러한 사안에 있어서 사태의 합리적 이유는 그 사태를 발생시킨 이의 능력에 있다(in talibus rebus tota ratio facti est potentia facientis)."(Ep. 137.2.8)

 

   창조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논제에 반드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라!"(de singulis reddite rationem)는 철학자들에게, 그들의 힐문은 신의 전능한 자유를 모순율에 입각한 인간의 허약한 논리에 종속시키려 들 것이 아니라고 교부는 타이른다.[7] 이에 관한 설득력있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지성이나 그 이해작용이 "세계 안에" 내포되지만 세계 자체는 인간 지성에 내포되지 않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인간 지성에 내포되지 않는 그 세계를 유한자로 창조한 신과 그 창조 방법은 더욱 인간 지성에 내포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8]

 

   본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창조론의 핵심문제, 즉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련되는, 세계에 대한 신의 내재와 초월,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에 연관되는 영원과 시간, 그리고 창조의 동기를 물을 때에 내려지는 "신이 선하기 때문에"(quia bonus)라는 명분과 "신이 의지해서"(quia voluit)라는 해답을 두고서 모순율에 의거한 양자택일보다도 파라독스에 의거한 변증법으로 양자를 병존시키는 교부의 논변을 살펴보는 데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그의 문전을 따르는 문헌학적 방법을 채택할 것이며 그 인용 범위는 가급적 『신국론』에 치중하겠다.[9]

 

 

I.  신의 세계내 내재와 세계에 대한 초월 [10]

 

  서구의 철학적 기반을 이루는 그리스 사상으로는, "무로부터는 무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명제처럼, 그리스도교 창조사상의 핵심인 "무로부터의 창조"는 착안하기 힘들었다. 플라톤처럼 영원한 질료와 데뮤르고스를 상정하거나, 플로티누스처럼 신의 본질이 충일하여 세계를 발생시킨다는 유출설을 펴겨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신을 "부동의 제일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로만 보면, 세계는 자율적이요 신과 무관하게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는 "세계가 곧 신"(dieu-monde)이라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리스도교 창조관은 바로 이러한 "자율적 세계관"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세계가 자체로 폐쇄되고 자율적인 실재이며 스스로 그 궁극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고수하는 이유는 질료를 포함한 만유 위에 신의 주권(主權)과 세계에 대한 신의 초월성을 살리려는 의도에서다. 만약 물질 혹은 원초적 질료도 신에게 창조되지 않았다면 신이 "만물의" 창조주는 아니므로 그리스도교 신조에 상반되고, 신이 선재하는 질료로 세계를 만들었다면 인간 장인과 다를 바 없으며, 또 물질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불변할 것이나 이는 경험과 상반된다.

   먼저 신플라톤주의 전체의 고유 관점이 영원하고 비인격적인 우주의 유출(processio)이라는 점은 아우구스티누스도 확연하게 의식하고 있었다.[11]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유출에 의해서 피조계가 자연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 사상가들"(platonici)의 본취지가 절대 자에게 의지의 작용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며 적어도 세계의 기원에  관한 한 의지라는 속성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것임도 교부는 잘 알고 있었다.[12]  플로티누스가 세계의 기원을 말하면서, 영원한 실재들에 관해서 이야기할 적에는 시간 속의 탄생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에 원인과 질

 

   스스로는 불변한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신의 영원성, 그러면서도 신의 의지에 새로운 것이 발생하지 않는 신의 영원성"(aeternitas Dei nova creantis sine novitate aliqua voluntatis: DCD 12.21)은 참으로 역설에 찬 철학적 난제이며 에피쿠로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 사상가들이 거듭 제기하는 물음이다. 이처럼 창조에 관한 파라독스(에피쿠로스가 일찍이 제기한)를 피하는 데는 "영원한 창조"가 안성맞춤일지도 모른다(DCD 12.10; 12.16-17). 창조에서 우유성, 시간성, 우유적 존재를 논해야 하거나 영원하고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신에게 무한한 (다양한) 가능성을 부여해야 하는 난문제를 미리서 기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결론적으로 세계가 신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유적이고 비필연적인 실재를 시간 속에 이루어내는 창조 행위가 결과의 불완전성을 원인 속에다 역도입하는 결과를 빚는다. 따라서 신의 행위의 결과물인 세계를 절대화해야만 신의 완전성이 살아남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세계가 신과 견줄만한 사물이 되어 버리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것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우상숭배사상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이런 사고는 "인간들이 사유할 수 없는 신을 놓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을 신의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 셈이다. 신을 생각지 않고 인간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요, 신을 신에게 비견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인간 자신에 비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DCD 12.17...)

 

2) 유출설이든, 백보 양보해서 영원한 창조든 가장 평범한 원인론적 설명은 신이 사물들에 존재론적 형상(形相)을 부여하는 것으로, 곧 사물의 발생이 다름 아닌 형상화(형상화: formatio)라고 제시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과 세계의 존재론적 차이를 망각하고 존재 자체(Idipsum)와 존재자들(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로는 essentiae)을 동일한 차원에 놓고서 사유하거나 거꾸로 존재 자체를 평범한 존재자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만약 아우구스티누스가 내세운 "무로부터의 창조"가 "형상화" 이론과 맞닿을 여지가 있다면 양자의 이론이 한데 종합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인(causa formalis)과 작용인(causa efficiens)을 한 문장 안에 내포시키는 파라독스로 이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형상(specie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에 관하여 논하면서 기존하는 질료에 장인(丈人)들이 부여하는 형상이 있고 신만이 부여할 수 있는 또다른 형상, 존재 부여의 형상이 있다고 구분한다.

 

"다른 형상(形相)은, 내면적으로 작용인(作用因)을 갖춘(quae intrinsecus efficientes causas habet) 형상이고, 생명과 지성을 거진 어떤 존재의 심오하고 은밀한 의사(意思)에서 우러나는 형상으로서, 물체들의 자연적 형상들을 만들어냄은 물론이려니와 생명체들의 생명 자체를 만들어 낸다. 있지 않은 생명들을 [있게] 만든다(ipsas animantium animas, dum non fit, facit). 처음 말한  형상은 여하한 기술공들에게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말한 형상은, 유일무이한 기술자요 창조주이며 창시자인 신에게만 돌릴 수 있다. 신은 아무 세계도 없이 세계를 만들었고 아무 천사도 없이 천사들을 만들었다(qui mundum ipsum et angelos sine ullo mundo et sine ullis angelis fecit)."(DCD 12.25) [14]

 

"내면적으로 작용인(作用因)을 갖춘(quae intrinsecus efficientes causas habet) 형상"이나 신의 "심오하고 은밀한 의사(意思)에서 우러나는 형상", 심지어는 "있지 않은 생명들을 [있게] 만드는(ipsas animantium animas, dum non fit, facit)" 형상은 플라톤과 신플라톤 사상의 창조론에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작용인을 내포시키고 양자를 공존시키는 발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면서도 "아무 세계도 없이 세계를 만들었고(mundum sine ullo mundo) 아무 천사도 없이 천사들을 만들었다(angelos sine ullis angelis)"는 진술은 신 외부에 원초적 질료나 범형적 이념을 일체 설정하지 못하게 못박고 있다. 

   그리고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할 적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활동으로 말미암아 대비적이 된 신의 안돈과 운동, 신과 피조물에게서 발생하는 동일성과 차이성 역시 파라독스의 논법으로 해소하고자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신은 기묘한 정적(靜寂)으로 행동하"(facere mirabili Deo, qui mundum ipsum et angelos sine ullo mundo et sine ullis angelis fecitquiescere: DCD 12.17.2)는 역설적 표현이 예사로 나타난다.[15]stabilitate: DCD 11.28), "안돈하며 행동하고 행동하면서 안돈할 줄 안다"(novit quiescens agere et agens 

 

   따라서 관계성(relatio)이라는 범주를 두고 신플라톤 학파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관계범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처럼 우유성에 국한되는 의미를 넘어서, 신적 '실체'는 '관계'(세계의 우유성과 맺는 "관계")라는 범주를 자기 의지 속에 초월적으로 함유하는 원인이라고 해설해 본다.[16] "신은 자기 안에 머물면서 원하는 바를 움직이고, 원하는 바를, 자기는 불변하면서, 변화시킨다(in se manens quod vult movet et quod vult inmutabilis mutat)"(In Ioannis Evangelium 99.2)는 명제처럼, 신은 "단일하고 동일하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의지로"(una eademque sempiterna et immutabili voluntate) 현상계의 다양한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렇다면 창조에 있어서 "세계를 의지(意志)하는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부각되며, 당신의 지성으로 "세계를 인식(認識)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게 된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에 찬 여러 텍스트에 의거하면, 신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 관계로부터 독립해 있다. 모든 공간에 있으면서도 그 어느 공간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시간을 설정하고 시간을 움직여나가지만 스스로 시간화하지 않는다. 모든 것 안에 현존하지만 그것에 소유되거나 고갈되지 않는다.[18]

 

(신의 편에서) 피조물에 대해서 무엇인가 상대적으로(관계적으로) 서술하는 경우, 신의 저 불변하는 실체에 관하여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바가 있다면, 비록 시간적으로 기술을 시작하게 되지만, 신의 실체 자체에 무엇이 우발하지는 않고, 기술을 하는 그 피조물에게만 무엇이 우발하는 것으로(non tamen ipsi substantiae Dei accidisse aliquid sed illi creaturae ad quam dicitur)  이해하는 범위내에서만 받아들여야 한다."(De Trinitate 5.16.17) 

 

   가장 평이한 예를 들어, 신이 각 사물 안에 전적으로 내재한다(ubique totus)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명제를 두고, 이것은 신이 그 사물의 원리와 이념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신의 영원한 비물질성으로 인해서 실재의 모든 측면을 무한하게 초월한다는 의미로 풀이한다.[19] 신은 사물 자체의 형이상학적 본거(locus)이고, 결국 사물의 존재론적 안식(quies)이 신에게 있다. 신은 세계에 대해서 "은밀한 능력으로 만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사물에 의해서) 영향받지 않는 현존을 발휘하여 어느 모로든 무엇이 존재하는 이상, 존재하는 한 그것이 존재하게 만든다"(occulta potentia cuncta penetrans incontaminabili praesentia facit esse quidquid alio modo est, inquantumcumque est: DCD 12.25). 요점은 세계에 대한 신의 현존이 공간적 내포가 아니라 존재 원인으로서의 기저존재(基底存在)라는 것이다. 그의 초공간적 현존은 자기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물들에게 전일적으로 현존하고(totus omnibus) 각각의 개물에 전일적으로 현존하는" 양상 이다.[20] 그런 뜻에서 신의 "본성 안에는 아무런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공간과 자기에게 복속된 피조물을 움직인다(in se ipsa sine ullo tempore ac loco, movet tamen per tempus et locum sibi subditam creaturam)."(De Gen. ad litt. 8.23.44)는 언표가 가능하다. 신은 시간 속에서 흐르는 사물들을 인식하더라도 "순일하고 기묘한 양상으로 모든 것을 안다.  정적으로 또 불변하게 모든 것을 안다(novit omnia stabiliter atque commutabiliter)."(Confess. 11.6.8) 

 

   그리고 플라톤 사상의 존재론에 핵심이 되는 참여(methexis) 개념은 존재 자체(ipsum esse)인 신과 피조물(esse creatum) 사이에 중간개념을 설정해 준다. 먼저, 선과 존재가 환치된다면, 그리고 참다운 존재(vere esse)를 항속성(manere)에다 정의하고 나면 참여는 존재와 허무의 중간 개념을 채워준다. 참여는 참 존재에 자기 존재를 의지하니까 존재 자체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신으로 부터 유출하지 않고(non de Deo) 허무로부터(ex nihilo) 이끌려 나왔으니까 존재 자체와 거리를 둔다. 사물 자체에서도 신에게서 유래하는 선성과 더불어 사멸성이 공존하는 현상은 이 교부는 이 역설에서 푼다. 궁극적인 이유는 앞서 인용한 텍스트대로(DCD 12.2), 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사물들에게 존재를 부여하되 당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최고 존재를 부여하지는 않았다."(esse dedit, sed non summe esse)"는 데서 찾는다. 그리하여 목적인의 관점에서도 피조물은 "스스로에게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무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non ex se ipsa [beata] potest, quia ex nihilo creata est). 오히려 신에게서 행복해진다. 그분한테서 창조받았기 때문이다.(sed ex illo, a quo creata est)"(DCD 12.1.2). [21]

 

   파라독스 기법을 아는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신이 절대적으로 순일한 존재요 절대적으로 부동하고 동일한 존재라고만 주장할 의사가 없었으며, 플라톤 사상가들이 늘 우려해온 바와는 달리, 자신의 "존재론적 절대성"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우유적 피조물을 향해서, 자신의 필연적 완전성이라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자신의 절대 안돈에 안주하지 않고 피조물을 향하는 사랑에서 우러나는 신의 지향성(志向性)과 절대적 존재론적 자율성과 불변성 사이에 이 파라독스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의 능력은 또한 효과를 내는 능력이며, 신의 위력은 은밀하여 상관받지 않는 현존으로 만유에 침투하는"(vis divina et effectiva... occulta potentia cuncta penetrans incontaminabili praesentia) 까닭이다(DCD 12.25)

 

 

II. 시간적 창조 [22]

 

   아우구스티누스가 허무로부터 이끌어내는 시간의 창조(또는 시간 속의 세계 창조)를 주장할 경우 다음과 같은 파라독스가 발생한다. 그 시간이라는 것이 (자체가 유래한) "시간없는 세계"를 시간화(時間化 temporalizatio)하는 결과가 오지 않는가? 신의 창조가 (피조물에게 갖추어진) 시간성이나 우유성과 영합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교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창조를 실행하기로 하는 신의 결정이 비록 시간상으로(ex tempore) 펼쳐지기는 했지만, 자체로는 부동하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고, 이런 설명은 결국 세계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유출 혹은 발생 과정을 말하는 신플라톤 사상가들의 지론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신플라톤 사상의 설명을 받아들여서, 신에게 굳이 "창조"라는 짐을 지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짐을 신에게서 벗겨주는 편이 더 논리에 맞지 않은가? 
 

   이런 철학적 반문(DCD 12.20.1-4)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신에게는 필연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절대성과, 절대 우유적이라고 할 존재들을 창조해내는 자유의지가 공존(共存)할 수 있고 공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의 의지가 허무(nihil)와 갖는 자유로운 관계를 사변적으로 살려야 하는 것이다. 영원한 존재가 저 허무로부터, 시간 속에서, 그리고 생성되는 피조물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연속성(한 사물이 소멸하고 다른 사물이 생기하는 연속성) 속에서, 필연적이 아닌 우유적 존재를 이끌어내는 그러한 관계를 살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텍스트에서 그는 전반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신은 영원하여 시작이 없지만, 어느 시작을 두고 시간과 인간이 출현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결코 만들지 않은 인간을 시간 속에다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새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영원한 숙고에 따라서 한 것이다. 추적할 길 없는 이 심오함을 누가 추적하며 탐색할 수 없는 이 심오함을 누가 탐색할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그 심오함에 의거하여 신은 시간적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 이전에는 어느 인간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는데, 가변적이 아닌 의지로 시간 속에다 시간적 인간을 조성하였고(Deus hominem temporalem... non mutabili voluntate in tempore condidit) 인류가 한 인간에게서 많아지게 하였다. [이전에는] 결코 창조한 바 없는 인간을 신이 어느 시간에서 처음으로 창조하기로 의지하였다는 것, 그리고도 계획과 의지를 바꾼 것은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심오하고 항상 심오한 사실이었다."(DCD 12.14))

 

"[이전에는] 결코 창조한 바 없는 인간을 신이 어느 시간에서 처음으로 창조하기로 의지하였다"(hominem, quem numquam fecerat, ex aliquo tempore primum facere voluisse)는 문장, 더군 다나 "어느 시간에서"(ex aliquo tempore)와 "처음으로 창조하기로 의지하였다"(primum facere voluisse)고 분절된 구절은 참으로 날카로운 파라독스에 당면한다. 우유성, 시간성은, 이를 허용한 신의 사랑의 의지를 중개로 하여, 세계가 결국 신의 필연성과 영원성에 "참여한다"는 결론으로 간다. 그 자체가 필연적이 아닌 우유적 세계, 시간 속에서 개시된 피조계가 신에 의해서 불변하게 의지되고, 영원하게 의지되고, 시작이 없이(sine initio), 마치 신적 필연성에 내밀한 요소인 것처럼 신에 의해서 의지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의 필연성은 피조물이 나타나는 "시점"(quando)마저 비시간적으로 확정하고 의지한다. 우유적 시간(우유성 때문에 "새로움"이라는 호칭이 가능하다)이 신적 의지의 "새롭지 않은 결의"(non novum consilium) 속에 영원으로부터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필연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창조 행위는 시간 속에 펼쳐지면서도 파라독스하게 신의 영원한 안돈과 동일한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23]

 

   "시간적 존재 인간"(homo temporalis)이 자기 유한 존재의 시간적 범주에, 시간 속에 신을 귀속기키려는 무지한 철학적 시도를 넘어서서, 시간도 신의 피조물이라는 설명, 창조란 그야말로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뛰어 나온 무시간적인 도약(跳躍)이라는 사실, 따라서 그 도약은 결코 시간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본문에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게는 창조의 '순간'에 앞서거나 뒤지는 시간이 없다. 그 까닭은 신은 영원에 있으며, 영원은 단일하고 무한정하고(aeternitas interminata), 여하한 시간을 초월하며, 거기에는 시작이 없고(initium omnino nullum est), 영원에 비하면 시간 자체, 시간의 성질 자체가 무가 되어 버린다.


   "신이 언제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유치한 질문에 당면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놓는 답변은 명백하다. "세상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non est mundus factus in tempore, sed cum tempore)![24] 여기서 사물의 한 차원(次元)으로서의 시간이 명기된다. "피조물의 가변적 운동으로 작용하는 것"(creatura, cuius mutabilibus motibus ageretur)이 시간이고, 이 "가변적 운동이 피조물의 (존재론적) 조건"(in creaturae conditione factus est mutabilis motus)이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신의 시간적 차원을 영원(aeternum)으로 파악하지 않고 피조계 시간의 무한한 영속(perpetuum)으로 개념하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신은 "시간으로 시간들을 앞서는 분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모든 시간들을 앞설 수 없을 것이다"(nec tu tempore tempora praecedis: alioquin non omnia tempora praecederes)라는 모순에 떨어진다.[25]  "신은 당신의 시간적 개념들을 갖고서 시간을 아시는 것이 아니며 당신의 시간적 운동을 갖고서 시간적 사물들을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기"(quoniam tempora ita novit nullis suis temporalibus notionibus, quemadmodum temporalia movet nullis suis temporalibus motibus: DCD 11.21) 때문이다.[26]

 

   시간과 영원의 문제를 대비하면서 제기되는 영원한 창조 혹은 천사의 창조를 다루는 논변에서 이 점이 분명해진다.  천사같은 비물체적 존재는 "시간 속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터이므로 이를 논거로 "영원한 창조"를 주장하는데 대해서는(DCD 12.15.1-3)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사들은 설령 항상 존재했더라도 창조되었다"(etsi semper fuerunt, creati sunt)고 단언한다.[27] "시간 속에서" 창조되지 않고 "모든 시간에 존재한" 천사들이지만 시간이 창조된 이상 그들도 적어도 "시간과 동시에" 창조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모든 시간"(omnia tempora)이라는 것을 "항상"(semper)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시간이 없었을 때(= 시간)가 있었다"라는 명제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28]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은 영원자에게 시간을 수용하는 노선을 택한다. 신이 시간의 생성을 발생시키고자 의지하고, 시간의 무한성(만일 그런 시간이 있다면)을 인식 하고자 의지하며, 피조계의 다양한 타자성을 또한 인식하고자 의지하면서도, 신은 여전히 부동하고 동일한 존재로 머물 수 있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유가 가능한 것은 그 종교에 그리스도라는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육화한 말씀(Verbum caro factum est)에게서 시간과 영원의 결합을 발견하며, 영원한 필연자가 시간의 우유성 속에 존재하여 시간적 존재로 살았다고 계시된 까닭이다. 그 우유성과 더불어 시간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러면서 동시에 영원하게 예정된 존재로서 살았던 것이다. 육화한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철학이 파라독스를 구사하여 창조를 설명하는 해석학적 단초를 제공한다. 사랑의 자유에 입각해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영원자가 무상으로 "자기를 비움"에서 시간과 영원의 결합가능성을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신앙하고 체험하고 드디어는 사변화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III. 창조의 동기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창조 사상에 등장하는 또 다른 파라독스를 접하게 된다. 신의 절대 전능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거나 도무지 파라독스로만 보이는 기묘한 위업(mirabile)을 감행할 수 있다! 신의 의지, 특히 신약시대에 "사랑"으로 언표되어 계시된 개념, 즉 "오로지 호의에서 우러나 당신의 작품에 부어지는 사랑(ex beneficentia veniens amor in opera sua: De Gen. ad litt. 1.5.11)에 의해서 초논리적으로 해소되는 파라독스를 말한다. 그 파라독스는 창조를 하기로 하는 신의 선택이 필연적이자 동시에 우유적이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신의 행위가 영원성을 띠는데 시간적 결과가 나왔다는 데에서 기인하고, 무엇보다도 창조의 이유를 두고 신의 존재론적 완전성(quia bonus)과 사랑의 의지(quia voluit) 사이에  성립하는 파라독스이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양자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지 않고 신은, 파라독스 어법 그대로, 부동의 다이나미즘이요 영원한 의지요 불변하는 사랑이며 자유로운 필연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신의 절대적이고도 전능한 "행위"에 주안점을 두는 방향으로, 절대자의 주체성과 인격성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세계는 신의 조건없는 은총에서 유래하는 영원한 행위에 절대 의존하는 것이 되고, 필연적이 아닌 신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에서 존재가 유래한 것이 된다. 


 

   그래서 "하늘과 땅" 즉 전체로 본 현상계보다 그 현상계를 창조한 신의 의지가 더 위대하거늘, 신의 의지가 의존해서 창조를 행한 이유 또는 명분을 다시 묻는 인간 지성의 방자한 힐문은 결코 답변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답변이다. 신의 의지보다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신이 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원해서 창조하였다'고 대답해야 한다. 신의 의지가 하늘과 땅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신의 의지는 하늘과 땅보다 위대하다. 그런데 '신이 하늘과 창조하기를 왜 원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신의 의지보다 위대한 것을 묻는 셈이다. 그런데 신의 의지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의 의지의 원인을 알려고 묻는 사람들은 [다음고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신의 의지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인데, 만일 그 신의 의지가 원인을 갖는다면, 신의 의지를 선행하는 무엇이 된다. 이런 생각은 불가하다."(De Genesi contra Manichaeos 1.2.4)[29]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창조적 의지행위를 논구하는 계기는 단순히 신플라톤 사상과의 논리적 조율을 위해서만은 아니고 그의 가장 중요한 창조론 논거인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언표로 정작 강조하려는 바가 신이 "무엇을 갖고 세상을 만들었느냐?"는 것보다는, 그저 "창조할 의도를 갖고서 창조하였다"는 점에 이유가 있다.[30] 그리고 왜 창조하였느냐고 물을 적에도 대답은 같았다: "원해서 창조하였다. 우리가 신의 의지를 두고는 왜라고 물을 수 없는 터이므로" (왜냐하면 신의 의지 위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신의 의지 이상으로 소급하는 일을 불가하다). 끝으로 피조된 세계의 관점에서는 질문을 바꾸어 "세계는 왜 창조되었느냐?"고 묻더라도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를 내는 무엇(efficiens)이다. 그런데 모든 작용인은 그 결과보다 위대하다. 그리고 신의 의지보다 더 위대한 것(원인)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 원인을 물을 수는 없다 (non ergo eius causa quaerenda est)"는 대답으로 끝난다.[31] 그렇게 해서 신의 편에서 묻든, 피조계의 편에서 묻든 만유를 만든 궁극적 이유와 원인은 신의 의지(causa omnium quae fecit, voluntas eius est: Enarrationes in Psalmos 134.10)가 된다. 인간에게서도 그 유비가 있지만 특히 신에게서는 신의 원의(velle)는 곧 신의 달성되는 행위(facere)이기 때문이다. 『신국론』에서도 마지막 권(22.2.2)에 인간의지 행위에 대한 신의 예견과 예지라는 극히 난해한 신학논제를 다루면서도 "하늘과 땅에서 그가 의지한 모든 것(omnia quaecumque voluit)을, 그러니까 지나간 것과 현재의 것만 아니라 장차올 것도 이미 만드셨다(iam fecit)"라는 문장으로 의지(voluit)와 창조(fecit)를 염연하게 결부시킨 바 있다.[32]

 

   그렇다면 신은 "전적으로 우유적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영원으로부터 원하고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유스럽게, 아무런 필연도 개입 않은채로 말이다. 신의 자유로운 의지, 곧 "좋아서"(quia bonum est) 창조를 행한 당신의 의지에서 창조의 필연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더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신이 창조를 한 것은 여하한 필연성 때문도 아니고 여하한 유용성에서 오는 아쉬움 때문도 아니요 오직 선함 때문에 창조한 바를 창조한 것이었다. 곧 그것이 좋아서 였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주고 남는다."(DCD 11.24)[33]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 명분으로 내세우는 두 번째 이유에 접하게 된다. 신이 세계를 왜 창조하였느냐는 질문에는 여기에는 창조의 작용인(causa efficiens)과 목적인(causa finalis)이 논의된다. 신에게 자유를 논하면 작용인, 신의 선성을 거론하면 목적인의 차원에서 논의된다. 만약 철학적으로 순일한 신에게서 선성과 자유를 대치시키는 안티노미가 발생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시에 나타난 사랑의 신(Deus-Amor)에 의거하여 신의 선성(Deus-Bonus)과 신의 의지 (Deus-Volens)의 파라독스를 살리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34] 

 

   사실상 『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차적으로 표명하는 바는 신의 창조행위에 관하여 부여하는 목적인으로서의 선성을 강조하는 "좋아서"(quia bonus)이다.[35] 그리고 "바로 이 이유, 선한 것들을 창조하는 신의 선성... 이 유야말로 참으로 정당하고 적절하며, 이 이유를 진자하고 경건하게 고려한다면, 세계의 기원에 대한 온갖 시비를 종결시키고 남는다."(DCD 11.22)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36]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창조]행동이 "그 무엇에 의해서도 조건지워지지 않음"을 강조하려는 뜻에서, 신은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상태에 있으며 오로지 당신의 선만을 연관시켜서 발생하는 행동임을 부각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으로는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nulla necessitate, non utilitatis indegentia) 자유로운 것으로 드러난다. "필연에 종속되는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voluntates... non essent liberae, si subderentur necessitati: DCD 5.10.1)는 스토아의 전제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한 마디로 내린 고백적 선언에서 이 명제는 더없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신이 선하셔서 우리가 존재한다"(quia enim (Deus) bonus est, sumus.: DCD 11.22)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파라독스를 한데 종합하는 시도를 찾을 만하고 비록 『신국론』아닌 텍스트에서라도 두 개념을 한데 병치 시킨 텍스트를 찾을 만하다.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강요에 의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신 모든 것을 만드셨다.' 당신이 만드신 모든 만물의 원인은 당신의 의지이다.... 신은 선성에 의해서 만드셨고 당신이 만드신 것이 당신에게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하신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다."(Enarr. in Ps. 134.10)[37]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선성과 신의 자유라는 파라독스를 융합시키려면 작용인의 관점에서 거론되는 신의 전능과 완전한 자유의지, 목적인에서 보는 신의 선성과 자유의지가 제각기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작용인 차원에서 보자면, 제일 작용인은 다름 아닌 신의 전능한 의지이며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 곧 전능이다"(facit quidquid vult, ipsa est omnipotentia: De symbolo ad catechumenos 1.2)라는 정의로 인해서 신의 전능과 신의 의지가 외연을 함께하는 것으로 해결을 본다.[38] "전능하다고 하는 것은 의지하는 바를 행하는 데에 있지(omnipotens faciendo quod vult) 의지하지 않는 바를 감수하는 데에 있지 않다."(DCD 5.10.1). 인간의 의지가 자율적으로 행사됨을 설명하는 글에서도(DCD 5.9.1) "지존하고 참된 신"에 대해서  "그분의 의지와 최고의 능력과 예지를 또한 고백하는"(ita voluntatem summamque potestatem ac praescientiam eius confitemur) 입장을 표명하고, 평범한 인간들도 누구나 세계에서 관찰되는 원인들의 질서와 결합을 신의 "의지와 능력에 돌린다"(Dei summi tribuunt voluntati et potestati: DCD 5.8)[39]고 소개하는 등, 『신국론』에는 의지(velle)와 능력(posse)을 병치시키는 문구들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전능자로서는 "필연적으로" 자유롭다. "하고 싶은대로 함"에서는 전능이 곧 자유로 개념되고(그 반대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함(non posse)이 된다), 그러면 피조물에서 구분되는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 구체적 선에 대한 선택)과 일반의지(voluntas: 선일반을 원의함) 가 신에게서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40]

 

   두 번째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음이 전능을 곧 초월로 이해하기에 이르고(그 반대는 어떤 소용(necessitas)에 매이는 경우가 된다), 신의 절대초월과 행동하려는 의지를 한데 통합하게 된다. 신의 의지는 절대적으로 실현을 하는 의지이다. 신의 자유를 설명하면서 신의 절대초월을 강조하는 것이다. 신의 자유와 선성을 거론할 경우, 우선 창조를 이룩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만유가 좋다"는 사실에 있지만 이 점을 너무 강조하면 플로티누스의 결정론적 낙관론에 떨어질 우려가 있다. 사물의 선성이 그 창조의 이유로 설명되면 신은 만유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의 선성을 신의 의지 아래에 위치시킴으로써 이러한 허점을 극복한다. 창조의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답변 그대로, 신적 의지가 만유 위에 자리잡는다. 그리하여 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만유 위에 있는 절대자이다. 그는 만유로부터 독립되어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자유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세기』의 첫 구절을 풀이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Et vidit Deus, quia bonum est: Gen. 1.10)"라는 구절이나 "이렇게 만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Et vidit Deus omnia, quae fecit, et ecce bona valde: Gen. 1.31)라는 구절을, "좋아서 만들었다"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만들고 보니 좋았다"라고 이해할 것인가 라는 토론을 상대하면서 "자기가 만든 것을 좋다고 본 것"(vidit bonum esse quod fecit)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 것"(ubi bonum esse vidit ut faceret)에는 차이가 없다고,[41] 즉 창조의 결과에 부여하는 창조자의 평가와 창조를 이루려는 신의 의지 사이에, 결국 창조의 선한 동기와 창조하려는 의지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단정하는 발언으로, 신의 의지와 선성이 역설적으로 통합된다. 

 

   바로 이런 절대적 선성이 그의 자유를 설명하고, 사실상 그의 자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자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절대 초월성에로 귀결되어 신의 비종속성과 외부에 설정된 목적에 대한 자유를 공존시키는 결과를 낸다. 물론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고 그러한 사물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런 자유는 결국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개념처럼 보인다.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도 의식하고 있었다. 구원받은 선인들에게서 예를 보게 되겠지만,[42] 선과 악(또는 작은 선)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의미의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돌리지 않으며, 신의 자유는 어쩌면 "악을 행할 수 없는 자유"라는 점에서 완전한 자유가 된다.

 

   사랑에서 우러나 스스로 부여하는 바는 속박이라기보다는 자유가 아닌가? 의지, 더군다나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포용하는 필연은 주체가 선 자체를 포용하는 그 의지와 동일할 터이므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인격신(人格神)을 안전에 두고 있는 철학자는 사랑의 차원에서 자유 행위를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과 자유의 이 상관 개념은 피조물을 유비로 개진된다. 자연적 사랑과 초자연적 사랑, 창조되지 않는 사랑과 창조된 사랑의 실례에서 보듯이, 자유롭다는 것은 사랑의 질서에 입각하여 원의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면서 하는 것은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다"(libera voluntate facis, quando amas quod laudas)라는 명제대로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것은 자유로운 것이다."우리도 자유의지에 의해서 행동한다고 여기는가?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는 필연에 의해서 우리가 행한다. 만일 하지 않는다면 궁핍하고 부족한 처지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것은 자유의지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도 깨닫지 않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찬미한다.


그럴 경우 그대는 자유의지로 행한다. 그대가 찬양하는 바를 그대가 사랑할 경우(libera voluntate facis, quando amas quod laudas) 말이다. 필연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행하는(non enim ex necessitate, sed quia placet) 것이다."(Enarr. in Ps. 134.11)

   그는 의지와 사랑의 관계를 인간의 경우에서 유추하는 글에서 "바른 의지는 선한 사랑이다(recta itaque voluntas est bonus amor)라고 정의하였고[43], 또 천사들의 의지를 논하는 가운데 "피조물들이 창조받은 바로 그 사랑(amore, cum quo facti sunt: DCD 12.9.1)"이라는 문구가 창조동기에다 의지와 사랑을 연결한 바 있다.[44]

 

신의 창조적 사랑을 인간의 심경을 빗대어 가르치는 이 텍스트에서 보듯이 신은 "필연(= 필요)에 이해서가 아니라 선성에서"(non ex necessitate sed e bonitate) 창조한다라는 명제에다 "사랑해서 행동하는 것은 필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quod amando facit, non ex necessitate) 라는 명제를 덧붙임으로써, 창조의 동기를 두고 나오는 철학사의 두 정답, 곧 신의 선성(quia bonus)과 신의 자유(quia voluit)를 동일한 파라독스 명제의 두 표현이라고 결론 짓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느 사물을 그 자체 때문에 욕구함(propter se ipsam rem aliquam appetere)이다. 이렇게 필연적인 사랑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움직임(motus quidam: De div.quaest.83 q.25)이고 어떤 경향이며 자유로운 존재들에게서는 이 경향이 사랑의 구체적인 지침이며 그 원천은 신에게 있다.

결  론  

 

   사랑을 내세움으로써, 신의 의지에 관한 플로티누스의 결정론을 피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사한 분석을 행한다. 그 역시 창조 동기를 "당신 선성의 충일함에서 연유하여 당신의 피조물이 존립하나이다"(ex plenitudine quippe bonitatis tuae creatura tua subsistit: De Gen. ad litt. 1.7.13)라고 설명한다. 이 명제는 최고선의 본성에는 창조의 행위가 본질적인 것이 되지만 또한 자발적인 것이 되어 온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함을 표명하기 위한 전제설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신은, 자신의 사랑에서 우러나 오로지 거저 주는 의지로 인해서 영원으로부터 시간으로, 필연으로부터 우유로, 절대 일자로부터 사멸하는 다자들로 넘어가는 초시간적 도약(跳躍)을 이루어낸다. 이 도약에서는 신적 의지가 신비롭지만 일종의 복합작용으로 보이고 시간이라는 것이 하느님에 의해서 영원으로부터 의지된(원한) 것처럼 보이며 영원이 우유적인 타자성 속으로 숙여든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도약 내지는 비약이, 추론적으로(discursive) 사유하도록 지음받은 인간지성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논리적 허점으로 보이리라.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파라독스를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거부감없이 수용할 수 있는 까닭은 "육화한 말씀"(Verbum incarnatum)으로 언칭되는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영원자가, 사랑의 자유에 입각해서, 자기를 비움을 체험하였다고 믿기 때문에 세계의 원리되는 존재가 존재의 근본원리로 간주되는 동일률과 모순률 외에도 스스로 작동시킨 변증법을 자기 안에 육화 시킬만큼 신의 사랑의 의지가 위대한 것으로 설명된다.

 

"바로 그러한 의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의지하였고, 그 의지는 영원히 현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것과 현재하는 것만 아니라 미래의 것들도 이미 [다] 만들었다.... 신이 전에는 품지 않았던 새로운 의지를 그때 품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그의 부동하는 의지 속에 미련되어 있던 바가 그때 이루어지는 것뿐이다."(DCD 22.2.2)

 

창조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으로 풀려면 아무래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았듯이 피조물 편에서 피조물의 신에 대한 내재성과 피조물의 시간성을 축으로 삼는 것이 좋다. 파라독스에 의거하는 표현이지만, 신은 완전히 내재자이자 완전히 초월자이며 무엇보다도 신의 창조에서 이 파라독스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내재이자 초월이라는 범주는 신이 피조계의 목적인이자 작용인이라는 범주만큼, 그리고 창조의 동기를 두고 신의 선성(quia bonus)과 신의 의지(quia voluit)가 동시에 제시되어야 하는만큼이나 파라독스를 성립시킨다. 파라독스는 양자를 분리할 필요를 없애 준다. 시간 역시 창조의 필요조건이 아니고 오히려 시간은 피조계의 구조 자체라는 설명도 같은 평면에서 보아야 한다. 시간은 영원 속에 자리잡고 있고 영원은 시간적 존재자에게 일차적인 유비개념 이 된다. 영원한 존재자는 순수한 현실태이고 시간적 존재자는 합성된 존재자이다. 그러나 시간은 구조적이고도 동적인 존재자를 드러낸다. 신에 관해서 철학사가 보여주는 내재적 언표들(quia bonus, causa finalis, communicabilis, immanens, spontaneus, aeternus)과 초월적 언표들(quia voluit, causa efficiens, immutabilis, transcendens, liberum arbirtium, in tempore)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교부의 주장이며, 아우구스티누스 창조론 전반에서 양자 가운데 하나가 부정된 바는 결코 없다. 신처럼 위대한 실재를 두고 한정적으로 발언하는 일은 양자를 동시에 내포하는 존재에게는 부적당하다.

 

인간의 언표는 아무래도 변증적이고 역설적이어야 오래간다. 안티테시스로 보이는 이 두 언표는 사실상 신에 관한 유비적 개념들이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파라독스 기법을 따르면서 철학적 변증법을 구사한 기본이기도 하다. 

 

 

==  각 주 ==

[1] "우리가 창조된 사실을 두고도 신의 은총을 거론하는 것은 부당한 이유가 아니다(non improbanda ratione dicitur gratia dei, qua creati sumus). 우리는 허무일 수도 있었고 생명이 없는 시체일 수도 있으며 감각이 없는 초목일 수도 있고 지성이 없는 가축일 수도 있었는데 사람이 되었다. 존재를 하면서 생명도 누리고 감각도 지니고 지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창조된 사실을 두고) 응당 은총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하다(homines, qui, ut essemus, et viveremus et sentiremus et intellegeremus... unde merito et ista gratia dici ."potest (Epistula 177.7)

[2] 성염, "아우구스티누스의 ESSE 개념: 스콜라 존재론으로 전위되는 계기", 哲學 33(1990 봄), 153-171면 참조.


[3] De civ. Dei 12.2: Deus dixit: Ego sum, qui sum. Cum enim Deus summa essentia sit, hoc est summe sit, et ideo immutabilis sit: rebus, quas ex nihilo creavit, esse dedit, sed non summe esse, sicut est ipse; et aliis dedit esse amplius, aliis minus, atque ita naturas essentiarum gradibus ordinavit.... Ei quippe, quod est, non esse contrarium est. Et propterea Deo, id est summae essentiae et auctori omnium qualiumque essentiarum, essentia nulla contraria est

 

[4] 『신국론』에 다루어지는 창조론 개요: Robert Russell, "Introduzione: II. Filosofia" in LA CITTA DI DIO I, Roma 1978, pp.cxii-cxxx, esp. cxiv-cxvii: "Dio e l'universo(causa constituendae universitatis)."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창조사상이 갖는 철학사적 비중과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사상을 아주 평이하게 간추린 문전으로는 Tarcisius van Bavel, "The Creator and the Integrity of Creation in the Fathers of Church, especially in Saint Augustine", Augustinian Studies 21(1990), 1-33 = [The 1990 Saint Augustine Lecture]을 읽독할 것

 

[5] paradoxus [Thesaurus]: ① Cicero, Paradoxa Stoicorum 1.4: mihi ista paradoxa quae appellant videntur esse.. verissima("파라독스라고는 부르는데 내게는 더할나위없이 참되다고 여겨진다"); De finibus bonorum et malorum 4.27.74.: admirabilia contraque opinionum omnium, ab ipsis [Stoicis] etiam paradoxa appellantur.(온갖 의견들의 기묘하고 상반되는 [병치를] 스토아철학자들은 파라독스라고 부른다.")


[6] 아우구스티누스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기묘한" (admirabile)이라는 형용사 그룹은 대부분 paradoxa의 라틴어 번역어로 간주할 만하다. De rhetorica 17(p.147, 23): inter quattuor figuras controversiarum, paradoxos, quod non opinionis malae possumus dicere, tametsi quidem parum diligenter graece loquentes paradoxa pro his, quae sunt bonae opinionis, accipiunt.("수사학의 네 가지 격식(figura) 가운데 파라독스라는 것은 허위의 의견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인들은 파라독스를 참인 진술로 간주하여 받아들인다").


 

[7] 창조에 얽힌 "신의 저 파라독스에 찬 행업이나 이와 유사한 행업에 대해서, 사멸할 인간들의 허약한 추론으로는 장악할 수 없음을 우리는 고백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고한 이유가 있고, 전능하신 분이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음도 아울러 고백한다. 다만 허약한 인간 지성이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따름이다(fixam esse rationem, non sine ratione omnipotentem facere, unde animus humanus infirmus rationem non potest reddere)."(DCD 21.5.2)

 

[8] "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 세계 전체(totus mundus)보다는 작다. 곧 하늘과 땅, 그리고 그둘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이 전세계이다. 그것들을 만든 이는 분명히 신이다. 그러다 보니까 (전세계를) 만든 신도, 만든 방법도 (저 세계보다 작은) 인간에게는 감추어지고 불가해

 

[9]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론에서 구사하는 파라독스 논법에 관해서 필자는 다음 논문에서 착상을 얻었다: Gaetano Lettieri, "Il paradosso della creazione nel De civitate Dei. Il confronto con il platonismo", in Elena Cavalcanti ed., Il De civitate Dei. L'Opera, le interpretazioni, l'influsso, Roma/Freiburg/Wien 1996, pp.215-244

 

[10] 참조: E.Samek Lodovici, Dio e mondo. Relazione, causa, spazio in S.Agostino, Roma 1979: 신플라톤 사상에 의거하여 '작용인'을 벗어나 '형상인'으로 신과 세계 관계를 해결하였다는 주장; Werner Beierwaltes, "Creatio come posizione della differenza" in eiusdem, Agostino e il neoplatonismo cristiano, Milano 1995, pp.121-142: 『고백록』11권을 중심으로 창조가 신의 존재에 과연 어떤 차이성, 이질성을 발생시키는가를 논구; L.Obertello, Boezio e dintorni, Firenze 1989, pp.13-39: "Capitolo I: Creazione e redenzione nel pensiero di Agostino": 신과 피조계 사이의 비쌍방적 관계 정리서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말하는 것임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명백하게 의식하고 있었다.[13]

 

[11] "신이 전에는 행하지 않던 바를 하필 그 시점에서 좋아하게 된 것은 무엇이었느냐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 세계가 아무런 시원도 없이 영원한 것으로 여기려는 사람들, 따라서 신에게서 창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si mundum aeternum sine ullo initio, et ideo nec a Deo factum videri)고 하려는 사람들."(DCD 11.4.2)

 

[12] "세계가 신에게 만들어졌음을 인정하면서도 세계가 시간상의 시작을 갖는 것으로는 보려고 하지 않고 그 창조의 시작이, 극히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신에게 마치 우발적인 의욕(fortuita temeritas)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신이 전에는 아무것도 않고 있다가 돌연히 세상 만들 생각을 품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가변적인 것이 전혀 없어야 할) 신에게 새로운 의지가 우발하였다는 결론(accidisse illi voluntatem novam, cum in nullo sit omnino mutabilis)으로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DCD 9.4.2)


[13] 그들이 제시하는 시작은 "시간(時間)의 시작이 아니라 존재설정(substitutio)의 시작이다. 발이 영원으로부터 먼지를 밟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밑에는 언제나 발자국이 존재할 것이나 발자국이 밟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런 경우, 발자국이 발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있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로는,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와 그 안에 깃드는 신들이, 자기들을 만든 존재가 항상 존재하듯이, 항상 존재하였고, 그렇지만 창조된 것이다(et mundus atque in illo dii creati et semper fuerunt semper existente quo fecit, et tamen facti sunt)."(DCD 10.31)하다(= 인간 지성에 내포되지 않는다 in-comprehensibilis)."(DCD 10.12)

 

[14] De civ. Dei 12.25: alia vero [species], quae intrinsecus efficientes causas habet et de secreto et occulto naturae viventis atque intellegentis arbitrio, quae non solum naturales corporum species, verum etiam ipsas animantium animas, dum non fit, facit; supra dicta illa species artificibus quibusque tribuatur; haec autem altera non nisi uni artifici, creatori et conditori

 

[15] "신은 동시에 행동하고 안돈한다. 피조물에게 적절한 안배를 내리면서 자신으로서는 영원한 평안을 누린다(Deus simul et operatur et quiescit et creaturae praebens congruam gubernationem et apud se habens aeternam tranquilitatem)"(De Genesi ad litteram 4.13.24)

 

[16] "신의 본성에서는 변화하는 무엇이 아무것도 우발(偶發)하지 않는다(ipsius naturae nihil accidit quo mutetur)는 (원칙에 입각해서가 아니면) 신에게는 아무것도 우유성(偶有性)에 입각하여 서술되지 못한다

 

[17] "신이 무엇을 인식하지 못한 채 창조한 일은 없다. 이 말은 인간 장인에게도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자기가 아는 바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우리 지성에는 신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참인 것이, 이 세상은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알려질 수 없으나(mundus notus esse non posset, nisi esset), 신에게는 미리 알려지지 않으면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Deo autem nisi notus esset, esse non posset)."(DCD 11.10.3)

 

[18] "우리는 신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여야 한다. 그는 선하지만 성질이 없고 위대하지만 질량이 없고 창조주이지만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고 주관하지만 위치가 없고 모든 것을 내포하지만 상태가 없으며 무소부재하지만 공간이 없고 영구하지만 시간이 없으며 가변적 사물들을 만들지만 자기가 변하는 바 없으며 아무것도 당하는 바 없다(sine ulla sui mutatione mutabilia facientem, nihilque patientem.)."(De Trin. 5.1.2)

 

[19] 그들의 말로 "신은 어디서든지 전일적으로 존재하지만(ubique totus),  어느 공간에 내포되는 일이 없으며, 어느 속박에도 매이는 일이 없고(nullis inclusus locis, nullis vinculis alligatus), (세계의) 어느 부분으로도 분리되는 일 없다. 신은 하늘과 땅을 가득히 채우지만 현존하는 능력으로 채우는 것이지 (세상을) 필요로 하는 자연본성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다(implens caelum et terram praesente potentia, non indigente natura)" (DCD 7.30)

 

[20] "신이 자기 안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해서 어디든지 전적으로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디든지 현존한다는 것은 신이 부재하는 곳이 아무 곳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당신이 현존하는 그 어느 사물에 의해서도 내포되지 않는, 즉 그 사물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존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신은 우선 비물질적 자연본성이고, 불변하게 살아있고 영원한 정적(靜寂)으로 자기 안에 존속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사물들에게 전적으로 현존하고(totus omnibus) 각각의 개물에 전적으로 현존한다(singulis totus)"(Ep. 187.6.18-19)

 

[21] "불변하는 선은 유일하고 참답고 지복한 신 외에는 없다고 우리는 말하는 바이며, 그대신 그가 만든 것들은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점에서는] 선한 사물들이지만(bona quidem esse, quod ab illo) 그분에게서 유래하지 않고 오히려 무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가변적이다(mutabilia, quod non de illo, sed de nihilo facta sunt)고 말하는 바이다."(DCD 12.1.3)

 

[22] Cf., Etienne Gilson, Introduzzione allo studio di Sant'Agostino, Genova 1983, pp.213-260: Parte terza: La contemplazione di Dio nella sua opera"; E.Peters, "What was God doing before He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ugustiniana 34(1984), 53-74.

 

[23] "신은 쉬면서 일할 줄 알고 일하면서 쉴 줄 안다. 그는 새로운 작업에다 새롭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결의(ad opus novum non novum, sed sempiternum consilium)를 부여할 줄 안다. 행하지 않던 바를 시작하는 것도 전에 그만 두었음을 후회하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선행하던 다른 의지를 후속하는 다른 의지가 변경하거나 제거한 것이 아니었고, 단일하고 동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의지로(una eademque sempiterna et immutabili voluntate), 당신이 창조한 사물들을,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동안에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게 하다가, 그것들이 존재하기 시작할 때에는 드디어 존재하게 하였다."(DCD 12.17.2)

 

[24] "세상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시간 다음에 이루어지거나 어떤 시간 앞에 이루어질 수 있다. 지나간 과거 이후가 되고 장차 올 미래에 선행한다. 그런데 (창조에는) 과거라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 그때는 피조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니, (시간이란) 피조물의 가변적 운동으로 작용하는 까닭이다. 피조물의 조건으로서 가변적 운동이 이루어졌다면 시간과 더불어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cum tempore autem factus est mundus, si in eius conditione factus est mutabilis motus)."(DCD 11.6)

 

[25] "당신은 시간으로 시간들을 앞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모든 시간들을 앞서실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시간들을 당신이 만드셨고, 모든 시간들 앞서 당신은 계시며 어떤 시간에 시간이 없었던 그런 것이 아닙니다."(Confess. 11.13.16)

 

[26] "신은 정작 (눈에 보이는 가시적 기적들을) 하게 될 때에도 동일한 결의가 거의 불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결의의 배려에는 장차 이루어질 시간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간적 사물들을 움직이되 시간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없기(temporalia movens temporaliter non movetur)때문이다. 그리고 이루어져야 할 일을 아는 것이 이루어진 일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 그들이 기도하리라는 것을 내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계명도 그의 영원한 법에 의해서 예견되어 있다."(DCD 10.12)

 

[27] "피조물이 존재하여 그 변하는 운동으로 시간이 지나가게 만들지 않는다면 시간들은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항상 존재했더라도 창조되었으며(etsi semper fuerunt, creati sunt), 그러나 항상 존재했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창조주와 동등하게 영원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다. 창조주는 변하지 않는 영원 속에서 항상 존재하였는데 천사들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시간은 변하면서 흐르기 때문에 불변하는 영원과 동등하게 영원할 수 없다."(DCD 12.15.2)

 

[28] "시간과 동시에 창조된, 또는 시간들과 동시에 창조된 천사들은 모든 시간에 존재했으므로 그들 항상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역시 창조1되었다(usque adeo autem isti omni tempore fuerunt, ut etiam ante omnia tempora facti sunt). 시간이 모든 시간에 존재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시간들도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DCD 12.15.1)

 

[29] De Gen. contra Mani. 1.2.4: "quare fecit deus caelum et terram?"... "quia voluit!" voluntas enim dei causa est caeli et terrae, et ideo maior est voluntas dei quam caelum et terra. qui autem dicit: 'quare voluit facere caelum et terram?' maius aliquid quaerit quam est voluntas dei: nihil autem maius inveniri potest.... causa enim voluntatis dei scire quaerunt, cum voluntas  dei omnium quae sunt, ipsa sit causa. si enim habet causam voluntas dei, est aliquid quod antecedat voluntatem dei, quod nefas est credere. 

 

[30] "신이 무로부터 창조하였다고 할 적에 정작 말하려는 바는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그저 원해서 만들었다(non erat unde faceret, et tamen quia voluit fecit)는 것이다."(Ep. ad Orosium 1.3)

 

[31] "'왜 신이 세계를 창조하기 원하였는가?'를 묻는 사람은 신의 의지의 원인을 묻는 셈이다. 그렇지만 일체의 원인이라는 것은 결과를 낸다. 그리고 결과를 내는 모든 것은 거기에서 결과된 것보다 위대하다. 그런데 신의 의지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신의 의지의 원인을 물어서는 안된다."(De diversis quaestionibus 83, q.28).


[32] "그러나 그분의 의지에 관해서 말하기로 한다면 그의 의지는 그의 영구한 예지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으로 하늘과 땅에서 그가 의지한 모든 것(omnia quaecumque voluit)을, 그러니까 지나간 것과 현재의 것만 아니라 장차올 것도 이미 만드셨다(iam fecit). 그러나 보편 시간에 앞서 그가 예지하였고 안배한 바가 이루어지도록 의지한 그 시간이 오기 전에"(DCD 22.2.2)

 

[33] De civ. Dei 11.24: non eo vero quod dicitur: "vidit Deus, quia bonum est", satis significatur Deum nulla necessitate, nulla suae cuiusquam utilitatis indigentia, sed sola bonitate fecisse quod factum est, id est, quia bonum est

 

[34] Cf., R.H.Cousineau, "Creation and Freedom. An Augustinian Problem: 'quia voluit' and/or 'quia bonus'" Recherches Augustiniennes 2(1962), pp.253-271; K.Kremer, "Bonum est diffusivum sui. Ein Beitrag zum Verhaeltnis von Neuplatonismus und Christentum", in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omischen Welt, II Principat 36,2, Berlin/New York 1987, pp.994-1032.

 

[35] "누가 (빛을) 만들었으며, 무엇을 통해서 만들었으며 그리고 왜 만들었느냐? 우선 신이 만들었다. 빛이 선하기 때문에(= 좋기 때문에) 만들었다.... 그리고 선한 신에 의해서 선한 것이 만들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신이 말씀을 통해서 만들었다. 빛이 선하기 때문에(= 좋기 때문에) 만들었다.... 신이 보시니 좋았다. 그러니 신이 아무런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고, 당신의 이익이라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선함에 의해서 만들었음을 의미하고 남는다. 당신이 만든 바를 오직 선해서(= 좋아서) 만들었다(Deum nulla necessitate, nulla suae cuiusquam utilitatis indigentia, sed sola bonitate fecisse quod factum est, id est, quia bonum est)."(DCD 11.21)

 

[36] "세계가 창조된 이유에 있어서 선한 신에 의해서 선한 것들이 만들어졌다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를 생각지 말기(nullam aliam causam faciendi mundi intellegi voluit, nisi ut bona fierent a bono Deo) 바라셨다."(DCD 11.23)

 

[37] Enarr. in Ps. 134.10: non omnia quae fecit, coactus est facere, sed "omnia quaecumque voluit, fecit". causa omnium quae fecit, voluntas eius est.... Deus bonitate fecit, nullo quod fecit eguit; ideo "omnia quarcumque voluit, fecit."

 

[38] "신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바가 다르고 할 수 있는 바가 다르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존재함과 할 수 있음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신은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esse et posse simul habet, quia velle et facere simul habet = 신에게는 원하는 바가 곧 동시에 행하는 것이다)"(Enarr. in Ps. 134.12)

 

[39] "우리는 신이 지존하고 참된 분임을 고백하듯이 그분의 의지와 최고의 권능(능력)과 예지를 또한 고백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로 하는 바가, 그분이 우리가 그렇게 하리라고 그분이 예견하셨기 때문이고 더군다나 그분의 예견이 틀릴 수 없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지로 행하지 않은 것이 될까봐 두려워하지 말자"(nos ut confitemur summum et verum Deum, ita voluntatem summamque potestatem ac praescientiam eius confitemur; nec timemus ne ideo non voluntate faciamus, quod voluntate facimus, quia id nos facturos ille praescivit, cuius praescientia falli non potest: DCD 5.9.1)


[40] "무엇이 좋아서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느냐고 말할라치면 이렇게 답변해야 한다. 신의 의지에 관해서 알고 싶은 사람들은 인간 의지의 힘을 먼저 배워야 한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인간 경험... 능력있을수록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 미루어) 신의 의지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De Gen. contra Mani. 1.2.4)

 

[41] "신은 한 가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주의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신의 비물체적인 통찰(contuitus)에는 그가 아는 모든 것이 현전한다.  시간들을 알지만 당신의 시간적 인식을 써서 아는 것이 전혀 아니듯이(tempora ita novit nullis suis temporalibus notionibus), 시간적 사물들을 움직이지만 당신의 시간적 운동을 써서 움직이는 것이 전혀 아니다(temporalia movet nullis suis temporalibus motibus). 따라서 자기가 만든 것을 좋다고 본 것과 그것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DCD 11.21)

 

[42] "드디어 인간들은 지복의 영구한 자유에로 구원을 받는다. 거기서는 인간이 더 이상 죄를 섬기지 못할(=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선과 악을 자의로 행하는 가능성만이 자유라고 한다면, 신은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si boni malique voluntarii possibilitas sola libertas est, non habet libertatem Deus)!"(Opus imperfectum contra Iulianum 6.11).

 

[43] "바른 의지는 선한 사랑이며(recta itaque voluntas est bonus amor), 그릇된 의지는 나쁜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랑이 정욕이며, 그 대상을 소유하며 즐기는 사랑이 기쁨이다"(recta itaque voluntas est bonus amor et voluntas perversa malus amor. Amor ergo inhians  habere quod amatur, cupiditas est, id autem habens eoque fruens laetitia: DCD 14.7.2)


 

[44] 12.9.1: "천사들의 선한 의지가 천사들과 동시에 창조된 것이라면, 천사들이 창조받은 바로 그분에게서 이 선한 의지도 창조되었음이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이 창조됨과 동시에 자기네가 창조받은 그사랑으로 자기가 창조받은 분에게 귀의하였음이 분명하다(simulque ut facti sunt, ei , a quo facti sunt, amore, cum quo facti sunt, adhaeserunt.)"(DCD 12.9.1)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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