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1006.gif<하느님 나라>의 초석: 사회적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의 기조 사상으로서

 

 

                                                                                                  1997 역사와사회 (현암사 1997) (939-973)

 

 

서  론

 

    이 논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전거로 하여, 그리스도교와 그 신앙인들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과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갖고 발언하고 나아가서는 투신하는 행위의 역사적 연원을 찾아내려는 하나의 작업이다.

    무릇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한계에 부딪치면서 신령한 초자연적 존재에게 귀의하고 초현세적이고 초시간적 존재 양상에 희망을 걺으로써 생노병사라는 인간고와 죄악의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이고 해석학적인 해결을 시도하는 문화현상이다. 그런데 세계 대종교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교는 초창기부터 빈곤과 질병, 노예와 착취, 전쟁과 학살이라는 물리악에 대해서 숙명론적이고 인과응보적인 해설을 거부하고서, 이 물리악에 희생당하는 인간들에게 각별히 애잔한 시선을 보내었고, 그 창시자 그리스도가 역사를 청산한다는 종말의 시점에서 "이 지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심판하겠다고 예고할만큼 그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의식과 구제활동을 고취시켜 왔다.

    그리스도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교회 단체의 차원에서 빈곤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구제하는 자선사업에 치중해왔지만, 그러한 비참과 불의를 발생시키는 제도적 사회적 차원에 관해서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희생자들에게 기울이는 관심 역시 사사로운 사랑이 아닌 `사회적 사랑'임도 일깨워져 왔으며, 우리는 그리스도교 위대한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과 사상에서 이러한 착안을 뚜렷이 발견한다.

    이 논문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철학에 입각해서 그리스도교가 인류 사회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고 그의 『신국론』에서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를 구분하는 기준점을 `사회적 사랑'과 `사사로운 사랑'으로 설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착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논자는 『신국론』의 집필배경과 구성을 간략하게 살핀 다음 주로 문헌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그의 정치철학을 개괄하며, 논문의 핵심인 `사회적 사랑'을 논구해 보고자 한다.


I. 아우구스티누스의『신국론』의 성격과 집필 배경 [1]

 

1.  『신국론』의 집필 배경[2]

 

    아우구스티누스[3]는 자기가 『신국론』을 집필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알라릭이 거느린 고트족의 침략으로 로마가 파괴되었다.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자 거짓 신들을 다수 섬겨오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가 항용 외교인(外敎人)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봉기하여 그 재앙의 탓을 그리스도교에 씌우려고 하면서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혹독하고 신랄하게 참 하느님을 모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집에 대한 열성에 불타 나는 그자들의 모독과 오류에 맞서 <신국론>을 집필하기로 작정하였다."[4]   고대세계의 가장 위대한 역사적 경이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이 5세기에 들어와 급격한 쇠퇴와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서기 410년 8월24일 고트족의 알라릭이 로마를 함락시키고 입성한 다음 대학살과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퇴각하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자 제국내에 거국적인 혼란이 발생하였으며 이 대재앙에 뒤따른 정신적 혼돈이 격심하였다. 이 사건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부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피력하면서도 그는 고통과 재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법을 모색한다.[5]  로마의 침탈에 당면하여 `영원한 로마'(Roma aeterna)에 대한 제국 신민 전체의 사상적 붕괴가 만연하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우들(Volusianus와 Marcellinus)은 이 사건을 이념적으로 감당할만한 대작을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히포의 주교에게 해온다. 본인도 일찌기 인간 역사의 두 축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라는 거창한 주제를 언젠가 한번 다루어 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던 중이었으므로,[6]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15년의 기나긴 세월에 걸쳐 『신국론』을 집필한다.


   『신국론』은 그리스도교에 개종하지 않거나 오히려 적대적이던 `외교인들'(pagani)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울러 쓰여진 책으로 이중 목적을 띤다. 외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로마의 침탈이 조상전래의 제신(諸神)들을 그리스도교도들이 저버려 그 신들의 분노를 산 까닭에 초래된 재앙이라는 비난과 유언비어에 나름대로 응수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뒤집어  씌우는 고발이 근거없고 불의함을 반증하고, 이러한 비상사태에 즈음하여 이교도들의 종교사상이나 윤리도덕으로는 해결하지 못하거나 잘못 해결하는 사회문제와 종교문제,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행복을 그리스도교야말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제국 전체를 뒤흔드는 저 종교적 논쟁의 와중에서, 제국의이 엄청난 비극이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 예배나 제사가 성행하기 훨씬 전부터 로마에는 끊임없이 재앙과 비극이 있었고 이교 숭배가 그 재난을 결코 막아주지 못했다는 논변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외교인들이 자행하는 부당한 공격과 이론에 응수하는 이론적 무기들을 제공하면서 `구원의 역사'라는 고고한 시선으로 인간 역사를 바라보는 경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과거 300년 동안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로 사이에서 울민해오다 가까스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던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철학적 신학적 성찰의 계기를 얻어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게 하고 역사의 지평을 넘어서는 선의 궁극적 승리와 영구한 평화를 내다보고 희구하도록 호소한다.

   『신국론』은 인류의 위대한 한 지성인이 구상할 수 있는 거창하고도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7] 이 저작은 두 부분, 다섯 단원, 전체 22권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11-14권은 이 책자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으로,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의 전개과정을 서술하는데, 아벨부터 노아 홍수까지, 대홍수부터 아브라함까지나 왕정시대까지, 열왕기 이후로 예언자 시대까지, 그리고 지상 도성의 그리스도 이야기까지를 구분하여 아우구스티누스 특유의 역사철학을 개진하고 있고, 마지막 세 권(15-18)은 시간적 역사의 지평선을 넘어서는 종말론적 역사관을 담고 있어 최고선 및 최고악의 문제와 평화의 개념, 최후심판이나 근거없는 천년왕국 사상, 악인들의 운명과 총괄갱신사상, 육신의 부활 등의 신앙교리가 취급되고 있다.

 

   이 책의 집필 시기는 로마 침탈 직후에 마르켈리누스의 청탁을 받고서 집필에 착수 하였다고 한다면, 마르켈리누스가 410년 8월 북아프리카에 부임하였다가  대역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413년 9월 사이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집필착수 시기에 해당한다.[8] 그리고 로마 침탈에 관하여 호교론적 내용을 담은 처음 세 권은 413년에 집필이 끝났지만 작품 전체를 탈고한 시기는, 그가 『재론고(Retractationes)』를 쓴 때가   426-427년 사이였고 이 책에서는 『신국론』이 이미 완결된 것으로 소개하면서 책을 수정하고 있으므로, 427년 이전으로 추정한다.[8]

 

2. 『신국론』의 문화철학적 시각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가장 현저한 면모는 종합이며 사실 서구 문명의 두 줄기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게서 합류하였다는 것이 철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리고 『신국론』은 이 종합을 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타문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하여 평가하는 자세는 그의 사상체계 전체에서 이성과 신앙, 자연과 은총,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섭리, 이교문화와 그리스도교, 한 마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하나로 종합하는 그의 고유한 방법론의 전제가 된다.


   그는『신국론』을 집필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에 관하여 공공연하고 결연한 주장을 내세우며,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 사상에 대한 면밀하고도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그리스도교 사상이 고대 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는 전제하에 그리스도교 역사관과 정치사상 안에 고대사를 승화시켜 삽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스도교 사회관 및 역사관은 고대 철학자들이 제기하고서도 해명을 하지 못한 중대한 문제들에 해답을 제공한다는 입장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수한다.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인생과 사회와 역사에 관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지혜, 새로운 문화가 대두되었으며 이것이 고대의 사상을 보완하고 완성시킨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로마 철학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사상을 기준으로 삼고서 이교도 철학을 수용 또는 비판하는 확고한 입장인데 "이성을 면밀하게 구사함으로써 플라톤학파에서 건전한 그리스도교 사상과 상충되지 않은 바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9], 또 "최고의 참 하느님이 창조계의 주인으로서 인식의 광명이요 행위의 선 자체이며 그분에게서 우리가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진리와 삶의 행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가깝다고"[10]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정한다.


   그래서 『신국론』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제시와 옹호라는 호교론에 그치지 않고 이교도 세계의 고유하고 본연적인 가치들을 복원해내려는 진지하고도 거창한 작업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의 마지막 대가였고 또한 그 문화를 예찬하고 연구하는 학자였으므로 그의 연구는 플라톤 철학에서 시작하여 언어학, 역사학, 사회 및 도덕까지 확대된다.[11]


   『신국론』에서 그는 로마의 위인들(Regulus, Scaevola, Nasica, Camillus, Scipio Africanus)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으며 그들의 덕성스러운 삶에 대한 보답으로 하느님이 로마인들에게 유럽에 대한 제권을 주셨다는 해석마저 내놓고 있다(5.13). 지상국의 영광보다도 신국의 영광을 도모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선인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5.17.1).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나 문화로서만 아니고 감정과 심경에서도 철저히 로마인이었으므로 로마 문화, 재국의 법률, 속국들에게 끼친 영향을 크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에게 로마는 어느 면에서 신국의 상징이 될 수도 있었다.[12] 그의 이같은 판단은 하느님의 도성이 받아들이는 백성들의 법률과 관습과 제도 그리고 문화를, 유일하신 참 하느님 숭배를 훼방하는 요소를 빼놓고는, 모두 포용한다는 견해를 원리로 삼고 있어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천상 도성은 "지상에 나그네로 있는 동안, 모든 백성들 사이에서 시민을 모집해서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순례자 사회를 형성한다. 지상평화를 확보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풍속과 법률과 제도가 다른 것을 문제시하지 않으며, 이런 것이 제아무리 다를지라도 모두 지상 평화라는 한 목적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이런 차이점들을 제거하거나 폐지하기는 고사하고, 유일 진정한 하느님을 경배하는데 방해만 되지 않으면, 오히려 보존하며 채용한다"(19.17).

   지상 도성의 적극적인 가치들(자유, 승리, 영예, 평화 그리고 삶)은 천상 도성에 의해서 완성을 본다는 지론이다. 예를 들어 자유라는 개념이 충만한 자유, 오류와 악덕으로부터의 자유, 진정한 사랑에서 오는 자유로 완성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들의 본성 속에 어떤 뛰어난 덕성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경건에 의하여 정화되고 완성되지만 불경건에 의해서는 파멸당하고 형벌로 인도되게 된다... 그렇다면 더 이상 거짓되고 속이는 신들을 추종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버리고 경멸한 후에, 진정한 자유를 향하여 뛰어오라!"(2.29).

   그리스도교는 이교 문화를 완결시키고 질적인 도약을 제공한다는 신념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식과 덕성과 평화라는 세 관점에서 특히 부각시킨다. 먼저, 인식은 사물의 시원에 관해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상사의 가장 요긴한 주제가 된다. 그 사유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존재의 문제(창조), 인식의 문제(조명), 사랑의 문제(참된 행복), 그리고 무엇보다도 악의 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특히 악은 인류를 부단히 괴롭히는 문제이며 악의 기원과 지배력에 대한 마땅한 해명을 요구한다. 『신국론』의 철학적 정치적 교의적 내용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덕성의 문제는 완전한 덕성이 무엇인지, 인간 덕성을 온전하게 만드는 신의 은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풀어본다. 로마인들의 덕성은 참다운 덕성이로되 악덕에 감염된 것이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덕성은 지상 도성을 건설하는데 목적과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참다운 덕성이지만, 영광을 탐하는(cupido gloriae) 동기로 출발했고 하느님과 연관을 갖지 않고 천상 도성을 희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악덕에 감염되어 있다고 하겠다(5.12.1). 진정한 덕성은 하느님이라는 숭고한 척도에 맞추어야 하고 하느님 홀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며 덕성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다(19.25). 덕목에 자연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도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결부시키는 이 새로운 개념은 그의 특유한 공적이다.

    아울러 그는 국민(populus)과 정의(iustitia)에 대한 키케로의 정의에도 새로운 요소를 첨가한다. 이하에 다시 논의되겠지만, 정의는 하느님 사랑으로 보완되지 않으면 진정한 정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2.21.4; 19.21-24).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자연의 차원과 은총의 차원이  단순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고 심원하게 삼투하며 그렇다고 혼동되지도 않는다. 그의 사상적 전망은 항상 역사적 시각,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시각을 갖는다.

   정치철학의 항구한 주제인 평화(平和)가 『신국론』에서 갖는 위치도 중요하다(특히 19권). 지상국도 평화를 추구하며 평화가 달성되면 천상국의 시민들도 지상의 평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신국의 완전한 평화야말로 참 평화이며, 은총이 복원하고 구현하는 본연의 지성, 내면적 질서에서 오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불멸을 보장하는 궁극의 승리요, 영원한 참 행복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설파하는 참 평화는  폭력과 불의 그리고 전쟁을 혐오하는 인간적 평화를 바탕으로 하고, 그 평화에 새로운 가치와 활력을 부여하여 신국의 평화로 승화된다. 참으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이교 문화의 가치들 가운데 자율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가치들은 해소되고 다른 가치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염원의 반영으로 채택되고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 승화된다.[13]


II. 『신국론』의 정치철학 [14]

 

   『신국론』의 두 도성 대조가 교회와 국가간의 대립을 보여준다는 정치철학적 해석이 옳지 않음을 지금은 학계가 두루 인정한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이상적인 정치 구조나 체제에 대한 언급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이 책자를 전용할 여지도 없는 셈이다. 그렇지만 철학과 신앙에 입각하여 인간사를 관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 시각에 입각한다면, 이 저서도 인간의 정치사회적 차원과 정치의 본질 및 그 조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정치의 구조적 측면은 아니지만 그 규범적 착안은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국론』에서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 국민의 개념, 그리고 평화 사상 등이 돋보이는 주제가 되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국가사회의 본연성을 무시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 복원이 오기까지는 인간의 사회-정치적 차원이 간과되었다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1. 사회적 존재의 명암

 

   고대사상에서 정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 (zoon politikon)이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그리스-로마 전통에 입각하여 이 개념을 적극 수용한다. "현자의 삶은 사회적인 것이어야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다"(19.5)라고 명기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차원은 단지 지성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존재양상이다. 사회성(社會性)은 인간의 본성이고 만민에게 공통된다는 사실을 그는 "인류에게 본성에 있어서 사회적이라는 점보다 철저한 특성이 또 없다"(nihil enim est quam hoc genus...tam sociale natura: 12.28)는 명제로 표현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요 관계적 존재요 동료 인간들과 결합하려는 자연적 성향이 있다.[15]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간을 구성하는 존재론적 원리이며, 이 원리가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갖가지 형태의 사회들을 모색하게 만들고, 온갖 갈등과 전쟁의 와중에서도 타인들과 평화를 추구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회와 평화는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며 어떤 형태로든 평화가 없이는 인간 사회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 두 본성이 곡해되어 표출되는 것이 인간 역사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가 제거되는 일은 결코 없다. 원죄가 인간본성에 끼친 해악을 누구보다 통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그 어느 사물도 사물들의 어떤 부분 속에, 어떤 부분에 의해서, 어떤 부분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혀 존재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어떻든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본성의 가장 희미한 흔적까지도 말살할 정도로 [인간] 본성에 상반되는 그러한 악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19.12).

   인간의 이 천성적인 사회성은 원죄로도 말소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려니와 가정(domus), 도시국가(civitas vel urbs), 그리고 세계(orbis terrae)라는 세 차원에서 엄연하게 실존하는 현상이다(19.7). 그러니까 사회성은 정치의 토대(gradus societatishumanae: 19.7)이며, 도성이라는 정치조직 역시 사회성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설명을 얻는다.[16]

   그러나 그에게 인간 사회의 심원한 의의를 제시한 것은 역시 성서였다. 성서에 의하면 인류가 한 조상에서 유래한다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것이 하느님이 인류가 "자연본성의 유사성에 의해서만 아니라 혈연에 의해서"(non tantum inter se naturaesimilitudinem vero etiam cognationis affectu: 12.22) 하나되기 바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혈연의 애정이 "평화의 사슬로 묶이는 합심하는 일치"(in unitatemconcordem pacis vinculo: 14.1)에로 인간들을 이끈다는 것이다. 계시는 인간의 이 존재론적 본성을 더욱 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거기에 본성론에서 그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토대로 인간의 유대, 사해동포사상을 대중적으로 보급하였던 것이다. 스토아 철학 이래로 서구사상이 추구해오던 인류의 단일성과 세계화 의식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뚜렷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이처럼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사회성을 전제하면서도 『신국론』에서 두도성의 기원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현실적 정치조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지를 보이는데 이것 때문에 그의 정치철학은 수많은 오해를 초래한다.

    "카인이 최초로 도성을 건설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아벨은 뜨네기였므로 도성을 건설하지 않았다. 선택된 사람들의 도성은 위에 있지만 그 도성은 이 지상에 그 시민들을 낳으며, 그 시민들 사이에서 순례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 모두가 자기 몸으로 부활할 임시에 그들을 한데 모아서 그들에게 약속된 나라를 받게 될 것이다."(15.1)

    최초의 지상 도성은 형제살인자 카인에 의해서였고 아벨은 "뜨네기[= 순례자]마냥 도성을 세우지 않았고"(tamquam peregrinus non condidit), 아벨은 "세상에서는 순례자요 하느님 도성에 속하는 사람"(peregrinus in saeculo et pertinens ad civitatemDei)인데 비해서 카인은 그야말로 "인간 도성에 속하는 사람"(pertinens ad hominum civitatem)으로 서술하여, 암울한 정치의 시원이 카인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설정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하느님 도성은 지상 정치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지상 도성으로 측정하거나 추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다. 지상의 어떠한 조직이나 제도를 통해서도 이 "성도들의 천상 도성"(superna sanctorum civitas)과 유사한 조직을 이루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란 오로지 결국 단죄받은 자들로 이루어지는 지상 도성에 국한되어야 하는가? 지상 도성의 최초의 설립자가 형제살해자요 로마의 창건자 로물루스가 형제살해자라면, 카인이라는 이름이 `소유'요 그가 세운 도성이 맏아들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에녹(dedicatio: 그가 속하는 `세상에 드림')이라면(15.17) 결국 정치라는 것은 형제살해와 지상 것에 한 탐욕과 몰두에서 기원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상의 도성이 악마적 실체나 바빌론은 아니다. 오히려 지상 도성은, 위의 본문처럼, 천상 도성의 시민들이 태어나는 곳이요, 역사상으로 실존해온 예루살렘 같은 지상 도성은 장차올 미래 도성의 상징이고 형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천상 도성의 그림자요 예언적 표상이 이 지상에 존재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지상에서 천상 도성을 실현한다기보다는 천상 도성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였다.수시로 천상 도성을 가리켜 보여야 했다. 이 도성도 성도(聖都)라고 불리운 것은 상징적 표상으로서의 역할 때문이었고, 그 진면모 때문은 아니었으니 이것은 장차 이루어 질 것이었다"(15.2).

    따라서 카인은 지상도성의 창건자이기는 하지만 악마의 도성의 창건자는 아니다. 그가 악마의 도성에 태어난 것은, 아벨과 마찬가지로, 단죄받은 인간 아담에게서 태어난 사실에서 기인한다(ex damnata progenie exoritur). 카인은 또한 정치적 도성을 창건하였음을 그 가족이 한 백성을 이룰만큼 되었다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15.8). 다시 말해서 카인의 도성은 가족으로부터 출발한 자연스러운 조직이었으므로 그 자체를 사탄의 도성으로 동일시함은 당치 않다.[17]

   인간의 사회성이라는 자연스러운 성격과 가족에 내리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보아서 정치는 정당한 생활 상태(status vitae)이지만, 현실 영역의 정치사회는 죄의 흉계가 엄연하게 미치는 영역임은 부인할 길 없다. 원조의 타락은 자연스러운 인간 본성과 제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재생을 요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in Christum renascendo proficere: 15.1). 그렇다면 긍정적 의미의 정치는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이 실제로 보이는 이 악덕과 천성적인 자연본성이라는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얼핏 본다면 『신국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치를 정욕과 지상 것에 대한 탐욕 (지배, 부강, 영예, 영광 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영역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신국론』에는 그러한 구절들이 무수할 뿐더러 아예 서문에서부터 "여러 민족의 지배자이면서도 바로 그 자신이 지배욕(dominandi libido)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세상 도성"에 관해서도 말하겠다고 명기할 정도이다.

   그러니까 존재론적으로나 인간학적으로는 자연스럽고 정당하면서도, 『신국론』에서는 또한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마치 단죄받은 영역처럼 여러번 묘사되는 것이 정치사회이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현실의 역사적 정치와 국가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부정적인 단죄를 내리는 연유를 그의 정의관(正義觀)에서 찾아낼 수 있다.

 

2.  아우구스티누스의 국민(國民) 개념

 

   『신국론』에서 국민 개념이 논의되는 것은 제 2권(2.21)에서 그리스도교가 이교도의 덕성을 붕괴시켰고 그 결과로 로마 제국을 쇄망케 한다는 공격을 반박하는 글과, 제 19권(19.21-24)에서 하느님 도성과 공화국(res publica)의 관계를 논하는 글이다. 제 2권과 19권은 연도상으로도 거리가 있고 내용상으로도 전자는 호교적이며 후자는 사변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여기 나오는 국민 개념은 정치가 악덕과 천성의 이율배반을 극복하는 데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적 악을 해소하는 처방은 정의(正義)이다. 정의가 없이는 공화국이 통치될 수 없다(sine summa iustitia rem publicam regi non potest: 2.21).그는 키케로의 정의에 따라서 공화국(= 공공의 사물 res publica)은 국민의 사물(respopuli)이라고 단언하는데 키케로에게서도 정의는 단순히 정치 생활의 규범에서 그치지 않고 국민의 구성적 요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키케로의 문장을 인용하여 국민을 "온갖 종류의 모임이나 군중이 아니라, 법[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하여 연합된 결사체"라고 정의한다.[18] 음악의 조화처럼 정의는 사회 정치 생활에서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일치와 합심을 도모하며 공화국을 이룬다. 정의의 약화는 그러한 일치단결이 사라지게 하고 더 이상 공화국이라 부를 가치도 없다.

   그 논지는 직선적이다. 정치는 정의(正義)에 본질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렉산더 대왕과 해적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정의를 결여한 왕국이란 거대한 강도떼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정의를 결하면 어째서 국가가 강도떼에 불과한 것인가? 강도떼도 나름대로 규약과 공생을 찾는 작은 왕국이기 때문이다. "강도떼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목에 의하여 지배되며 결합체의 규약에 의하여 조직되어 있으며, 약탈물은 일정한 원칙에 의하여 분배된다"(4.4) 키케로의 정의에 들어가는 국민의 개념, 곧 법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iuris consensus)과 공동의 이해관계(utilitatis  communio)가 강도집단에도 해당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강도 집단도 일정한 대내적 정의, 대외적으로 불의하게 행동하는 그런 정의에 입각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집단에 탐욕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세력 때문에 그 탐욕이 징벌당하지 않으므로 이 집단이 존속하면서 정정당당한 집단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교부의 날카로운 눈에는 전세계를 지배하고 정복하여 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제국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참다운 정의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하느님 도성뿐이라는 암시가 나온다. "참다운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창건자요 통치자가 되는 그 공화국에서뿐이다"(vera autem iustitia non est nisi in ea re publica,cuius conditor rectorque Christus est: 2.21).

    정의의 사회적 개념에서 신학적 개념으로 옮겨가는 것이 그에게는 비약이 아닌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전적 개념대로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려줌(suum cuique tribuere)이 정의라면 인간들은 먼저 자기네 창조주 하느님께 맞갖은 몫을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세계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본 정의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들 사이에 정의로운 공화국도 정의로운 국민도 존재하지 못하리라. 따라서 정의는 하느님 사랑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 돌림이 정의라면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함이 충만한 정의라고 하겠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시선은 사랑에서 정의의 절정을 보며 이것이 그의 탁월한 혜안으로 꼽힌다.

그는 일찌기 정의를 일컬어 "하느님만을 섬기는 사랑, 그리하여 인간에게 복속되는 다른 모든 것을 잘 통치하는 일"이라고 하였다.[19] 그리고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한 정의요 완전한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정의이다"라고 갈파한다.[20]

   정의를 이처럼 신학적으로까지 엄정하게 정의한다면 진정한 정의가 구현되는 참다운 공화국은 하느님의 도성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도성에 이 세상 것이 아니므로 현세의 국가들은 진정한 공화국이라고도 부르지 못한다. 정치는 그 본연의 사명을 결코 구현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국민이란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한데 뭉친 이성적 존재들"(coetus multitudinis rationalis, rerum quas diligit concordi communione sociatus:19.24)이다. 역사상 현실로 구현되는 일이 결코 없는 법정의(法正義)에 대한 공통된인식(iuris consensus) 대신에, 인간들이 사랑할 대상에 대한 합의(concors dilectio)가 국기(國基)를 이룬다는 착상이요 다시 말해서 정의 대신에 사랑이 국민을 구성하는 근본이 된다. "두 사랑이 있어 두 도성을 이룬다"(fecerunt itaque civitates duasamores duo: 14.28)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사랑이란 막강한 삶의 응집력이요 합심과 단결의 원천이므로 일치된 사회 조직으로서의 국민은 당연히 사랑에 그 구성 원리를 둘 수밖에 없다. 제도와 법률, 도덕 관습과 풍속이 그들의 공통되고 합의된 사랑에 토대와 원리를 둠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랑의 원리가 없으면 정치는 성립되지 않으며, 그 사랑이 약화하면 정치가 부패되고 와해 되고 존속하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에 의하면, 한 국민이 정치적으로 올바로 수립되고 존속하려면 마땅히 그리스도를 건국자요 통치자로 받들어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합의된 사랑을 갖춤으로 충분하리라. 그러나 참으로 정의로운 국민으로 성립하려면 하느님 사랑에로 합의를 이루어야 할 터요 그 사랑은 정의에 입각한 진리(iustitiae veritas: 19.24), 혹은 진정한 정의라야 한다. 아시리아도 헬라도 로마도 정치적 의미로 국가(res publica, regna)를 구성하기는 했으나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교부의 해석이다.

   로마 제국의 위대함도 인간 평가에 의한 위대함이요(5.12) 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덕 혹은 좋게 말해서 덜 치사한(minus turpes) 악덕이라고 하겠다(5.13). 로마인들은 덕성스러운 삶의 보답을 받기는 했는데(perceperunt mercedem suam: 5.15) 영원한 생명을 얻기까지는 못하고(로마의 침탈은 그 증거였다!)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데서 그쳤다. 물론 어느 면에서 하느님 도성은 정치 조직이 아니요 고유한 의미의 공화국이 아니다. 정치는 고유한 구조와 원리를 갖는데 그것은 구성원들의 합의된 사랑이며, "지상의 공동선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는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의존하지만 종교적 신앙에는 종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3. 평화는 정의의 열매

 

   그의 평화 사상은 정치라는 배경을 초월하는 주제이며 평화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도성에서다. 그곳에서야말로 "완전한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을 향유하며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ordinatissima et concordissima societas fruendi Deo et invicem in Deo: 19.17) 경지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족과 모순이 전혀 없는 이 완전한 평화,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의미의 평화를 위시해서 지상에서 가능한 모든 평화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논제 가운데 하나인 평화가 『신국론』에서는 19권 거의 전권이 할당되어 논의되고 있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 실존은 우애와 가정, 사회생활과 국제관계를 막론하고 부단히 불안정과 대결, 충돌과 갈등에 휩싸이고 있다(19.5-9). 그런데 이 절박한 인간조건이 일깨우는 근본 이념이 하나 있으니 그 모든 갈등이 실상은 평화를 열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미로운 평화는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이다"(dulcedo pacis omnibuscara est: 19.11). 가장 치열한 갈등 속에서도 인간이 은밀히 동경하는 바는 다름 아닌 평화이다. 전쟁도 평화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수행되고 강도들도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깨뜨리기는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평화를 도모한다. 생명이 있는 것칙 어떻게든 평화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non amare qualemcumque pacem nullo modopotest).

   "이 지상의 죽을 인생에서도 평화라는 말같이 들어서 즐거운 말이 없으며, 평화처럼 우리가 열망하는 것이 없으며, 평화보다 더 철저한 만족을 주는 것이 없다... 기쁨 누리기를 싫어하는 사람 없듯이 평화를 누리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9.11-12).

   만민이 평화를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는 것 말고도 존재론적 토대에서 평화를 논구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다. 평화가 없이는 존재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자연본성이든지 간에, 어떤 평화에 의해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존재하지 못할 것이"(19.13), "사물들의 어떤 부분 속에, 어떤 부분에 의해서, 어떤 부분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혀 존재할 수 조차 없을 것이다"(19.12).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는 존재의 구성요소요 생명의 필수적  조건이다(19.13-14). 한 마디로, 모든 존재자는 그 존재론적 구조 속에 새겨진 평화를 지니고있다.

   "그 어느 사물도 영과 육, 인간, 가족, 사회와 국가가 그것을 이루는 부분들 사이의 평화와 조화 (temperatura, consensio, concordia)에 의해서 존재하고 그 자체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만유의 평화는 평온한 질서에 있다. 그리고 질서는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는 것들을 각각 그 자리에 배치하는 것이다"(19.13).[21] 각 사물이 그 구조면에서 평온한 질서가 이루어질 때, 구성된 부분들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거기 평화가 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곳에는, 그리고 생명이 있는 한에는 평화가 있다. 평화는 존재의 구성요소로서, 실존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 삶의 모든 측면에 엄존한다.


   각 존재에 평화가 임재하고 일체의 상황이 평화와 연관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마다, 상황마다 평화를 달리 파악하는 일은 가능하다. "악인은 하느님의 정의로운 평화를 싫어하고 자신의 부정한 평화를 사랑한다"(odit iustam pacem Dei et amatiniquam pacem suam: 19.12). 그리고 지상의 모든 사물은 유한자이기 때문에 생명 그 자체는 부단히 성장하면서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22] 이러한 현세적 사물에게는 평화(tranquilitas ordinis)가 온전히 채워지지는 못하고 오히려 부단히 갈등과 무질서를 초래할 따름이다. 죽음이 현존하는 세계에서 하느님 도성의 평화(pax sinevespera)는 죽음이 더 이상 삶을 위협하지 못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리라(ubi non eritvita mortalis, sed plane certeque vitalis: 19.17). 영원에로 태어나서 우주가 온전하게 구속되고 회복된 처지에서만 만유의 온전한 조화가 이루어져 참 평화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 평화 상태에서 우리의 본성은 건전하게 죽지 않음과 썩지 않음을 즐기며 아무 죄악도 없으며, 우리 자신이나 외부로부터 오는 저항들을 당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미 없어진 죄악을 이성이 다스릴 필요가 없고, 하느님이 사람을 다스리며... 이와 같이 행복한 이 평화와 평화로운 이 행복이 최고선일 것이다"(19.27).

   국민과 평화의 개념을 종합한다면 공동선에 관한 합심된 사랑이 부분적이고 상대적 이나마 지상에 내부적 평화를 생성하고 그것 없이는 정치가 생겨나지도 지속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평화는 결코 절대적이고 보편적 평화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평화가 잠시적일 뿐더러 합의하는 공동선이 지상적인 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합심 (concordia civium)이 사멸하는 생명에 속하는 사물(ad mortalem vitam  pertinentes)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19.17).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여하한 정치 공동체도 참다운 평화를 구현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더없이 심원한 존재론적 갈망을 온전히 채워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인간을 단결시키는 바로 그 대상이 자체의 본질로 말미암아 인간을 내외적으로 분열시키게 마련이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기인하고 인간의 사회생활을 보장하는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정치 체제에는 그 구성 원리에서부터 이미 분해와 쇄망의 요소를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정치를 명령과 복종이라는 도식으로 단순화하는 언급을 자주 한다(19.13,16,17). 한 도성의 평화는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들 사이의 잘 정돈된 조화"(pax civitatis est ordinata imperandi ac oboediendi concordia civium: 19.13)라는 정의에서처럼 지상의 평화 그 자체가 명령과 복종 사이의 권력의 등급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항상 권력의 쟁탈을 배경으로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물루스의 형제살해는 대표적인 예이다. 로물루스는 "지배를 하면서 뽐내고 싶어하였다. 그런데 형제가 살아서 그의 권세가 감소된다면 그의 지배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15.5). 권력은 그 속성상 분배될 수 없다. 따라서 경쟁과 갈등을 본질로 한다!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가 공동선에 대한 합의된 사랑으로 한데 단결한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로 인해서 지구를 덮고 있는 인류 보편 사회(societas mortalium)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있는 형태를 띠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하느님에게 창조된 단일한 조상으로 유래하는 집단으로 보고, 단일한 본성의 유대로 한데 묶인 무리(unius tamen eiusdemque naturae quadam communione devincta: 18.2)로 간주하여 하느님의 부성으로부터 인류의 사해동포애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보편성이 그만큼 많은 정치적 위험을 안고 있다. "세계는 넓으므로 그만큼 위험한 일도 더 많다. 마치 넓은 바다일수록 더 위험한 것과 같다"(19.7).

세계가 넓은만큼 "더욱 더 분열되고 더 센 부분이 다른 부분을 억압한다"(18.2). 전쟁이라는 것은 그만큼 통일되고 함심한 국민으로부터 시작되며 "모든 인간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한 국민에게 모든 국민들과 모든 사물이 종속되게 만들려는 욕심"(19.12)에서 발생한다. 영토의 통일된 지배를 염원하는, 인간들의 타고난 열망에 곧 분열의 원천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류를 분산시킨 바벨의 언어의 혼돈(16.4)은 감히 하느님과 맞서고 싶어할 정도로 지배욕(dominatio imperantis)에 찬 인간 오만에 내린 벌로 해석하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통일을 기하려는 막대한 노력이 집중되면 될수록 그만큼 분열이 초래되는 역설적인 현상을 빚는다. 분열과 전쟁, 이 둘이야말로 현세에서 인간이 누릴 평화의 불가피한 요소이다. 전쟁치고 당사자들의 단결을 초래하지 않는 전쟁, 평화를 명분으로 삼거나 희구하지 않는 전쟁이 없듯이, 지상의 평화치고 전쟁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지 않은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국론』에 개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는 정치가 그 자체만으로는 정치가 본래 지향하는 평화로운 일치를 도모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치인의 도덕적 성향에 관한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결론이라기보다는 정치의 본질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정치가 지상적 공동선에 대한 합의된 사랑에 토대를 두고 있는만큼,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는 권력에 의거하는만큼, 또 인류 보편 사회의 제도적 문화적 분열을 전제로 하는만큼, 정치라는 것은 도덕적 판단에서 볼 때에도 악덕과 갈등의 기회가 될 뿐더러, 존재론상으로도 정치는 타락한 인간 조건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빌론의 혼동이 정치적 결사체에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정치는 단죄받은 자들의 신비로운 도성을 특징짓는 무엇(per speculum in aenigmate)이자 경험상으로도 죄악의 신비(mysterium iniquitais)를 확인시키는 무엇으로 등장한다. 바빌론도 로마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눈에는 그것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상할 바 없고 지상 도성에 관하 고찰이 자꾸만 정치 국가에 대한 언급으로 옮겨가는 것도 생소한 바가 아니다.

   그래도 원칙면에서 다음 사실은 분명하다. 첫째,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국가가 곧 악마의 도성(civitas diaboli)은 아니다. 국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사회성의 발로이기 때문이고 가족 사회의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이기 때문이다. "도회에 시민들의 여러 집안들이 있듯이, 전세계에 국민들의 여러 왕국들이 존재함"(4.15)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둘째, 현세에도 하느님의 배려로 나름대로의 선익이 존재하므로 (quaedam bona huic vitae congrua: 19.13) 인간의 자연생활을 보장하는 그나마의 상대적 평화라도 보장하는 국가는 결코 없어서는 안되고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국가는 공통된 사회조직(bonis malisque communis est: 19.26). 따라서 신앙인은 정치와 그 평화를 멸시하지 말고, 본인은 비록 천상도성을 지향하며 이 세상에 나그네 또는 순례자로서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지상의 평화를 향유하여야 마땅하다.
   "천상 도성도 순례 중에 있는 동안 지상 평화를 이용하며... 지상 평화가 천상 평화에 이바지하게 한다... 두 도성이 뒤섞여 있는 이상 우리도 바빌론의 평화를 이용하자!"(19.17).[23]


III. 두 도성의 원리 :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 사랑

 

1. `하느님 사랑'과 `자기 사랑'[24]

 

   우주의 기원과 악의 발생, 그리고 선과 악의 싸움이 『신국론』 후반부의 핵심 주제들을 이룬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두 도성의 착상, 두 도성의 토대 및 발로와 인간 역사를 살펴 보기로 한다.

   신은 아담에게 계명을 내리셨고 아담은 그것을 위반하였다. 자유의지가 참다운 지혜를 인정하거나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지혜에 반기를 들었다. 오만에 사로잡힌 이 의지가 신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면서 스스로 파멸한다. 인간을 잡아당기는 중력(amormeus pondus meum)이 하느님 사랑(amor Dei)과 자기 사랑(amor sui)으로 갈라지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심원한 신비이고 인간 각자가 삶의 매순간, 최후까지 이 신비에 걸려서 살아간다. 두 사랑 사이에, 다시 말해서 사랑과 오만 사이에 벌어지는 이 싸움에는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무엇이 흐르고 있다.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투쟁, 지식과 지혜(scientia et sapientia)의 드라마, 죄와 구속의 드라마, 범죄할 능력을 갖춘 의지와 은총 사이의 드라마가 여기 있다. 이 드라마를 해소하는 길은 인간 본성이 악이나 되는 것처럼 본성을 말소시켜서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느님 사랑을 포기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악을 제거함으로써, 인간 의지가 죄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로이 지혜에 복속함으로써 해소된다. 하지만 의지의 이 해방은 또한 은총의 작업, 해방자 그리스도의 은총의 업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단일한 영혼 속에 두 사랑이 자리잡고 쟁투한다. 그 쟁투는 내면적이며, 탐욕의 중력(pondus cupiditatis)을 따르느냐, 사랑의 중력(pondus caritatis)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구원이거나 멸망이다. 우리는 둘 중의 한 사랑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 사랑을 따라가기도 하는 까닭이다.

   진리는 인간 내면에 거하며(veritas in interiore homine) 이 투쟁의 한가운데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해 주는 것도 이 진리이다. 다만 현재의 인간조건으로서는 계시를 통해서, 원죄의 설화, 육화와 구속의 사실을 통해서 이 진리를 깨닫기에 이른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이 자유야말로 인간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 사랑 사이에 끼어서 하느님에게 반역하여 자아의 노예가 될 것인가(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은 채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실상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다), 사랑을 따라 자기를 해방시킬 것인가(자기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결단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두가지 사랑,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자유의지는 변증적인 작용을 한다. 각인간의 내면에는 두 사랑, 두 시대, 죄의 시간과 기쁨의 시간, 시간의 변증법과 자유의지의 변증법이 작동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문제와 자유의 문제는 역사의 불가분한 두 요인이다. 무릇 시간은 역사의 토대이고, 역사의 문제는 또한 자유의 문제이다. 그야말로 각자의 "자유의 역사" 문제라고 하겠으니 각자 내면에서 두 사랑, 두 선택, 두 시간이 작용하고 인류 전체의 두 사랑, 두 선택, 두 시간이 작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두 사랑의 갈등 속에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우주의 대드라마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류를 마치 한 사람처럼 세우셨다.[25] 그래서 인류의 역사에서도 두 사랑, 두 시간이 작용한다. 죄로 인하여 하느님을 경멸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를 멸시할 정도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두 도성이 존립하는 것이다. 각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변증법이 인류 사회의 역사도 지배한다. 결국 인류는 집단적 이기심과 위타심으로 해서 둘로 갈라진다. 인간의 신비는 결국 인류 전체의 신비이니 이를 해결하는 방도 역시 똑같다.

   아담이냐 그리스도냐, 죄냐 은총이냐, 죽음의 시대냐 삶의 시대냐에 따라서 두 도성이 정해진다. 지금은 두 도성이 혼재하고 인간적이자 신적인 역사, 역사적이면서도 초역사적인 드라마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다. 하느님을 향해 가거나 자기 목적을 망각하고서 자기 자신을 향해 치닫거나 한다. 결국 세상의 역사는 두 사랑의 갈등의 역사이다(14.28). 두 도성의 원조는 카인과 아벨이다.  지상국은 천상국을 원수처럼 여겨 죽이기까지 한다. 두 사랑의 갈등에서 파생하는 형제살육은 세기를 두고 거듭 반복된다. 하느님을 등짐(aversio)과 하느님께 돌아섬(conversio), 이 두 운동이 속되 역사든 성스러운 역사든 역사를 가름하는 두 움직임이다. 아시리아와 로마 제국(바빌론과 로마)은 지상국의 가장 위대한 표지가 되고 예루살렘은 신국의 위대한 표지가 된다. 지상국의 증오를 받으면서 신국은 무너지지 않는 세계로 건너간다. 두 나라가 결정적으로 갈라설 때에 영원한 단죄나 영원한 행복을 수여받는다.

 

   그렇다면 언제, 무엇을 바탕으로 두 도성의 착상이 그에 떠올랐을까?* 두 도성(duae civitates)이라는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퍽 일찍이었다. 그가 평신도 신분으로 마지막 집필한(390년경) 저서에도 그 착안이 나타난다.

   "이 두 종류의 인간에 있어서, 하나 곧 묵고 지상적인 인간... 새롭고 천상적인 인간... 이와 비슷하게 인류도 아담에서부터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그것이 나타나는 모양은 마치 두 부류의 인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의 한 부류에는 불경한 자들의 무리가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상적 인간의 모상을 구현하고 있음(terreni hominis imaginem gerentium)에 비해서, 다른 부류에서는 하나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populi uni deo dediti)이 계승되어 왔다."[26]

   그뒤 10년 후는 윤곽이 더 뚜렷해진다. "두 도성, 하나는 불경한 자들의 도성이요 하나는 의인들의 도성이 있어 인류의 시초부터 세상 종말까지 여정을 계속한다. 현세에서는 몸으로는 섞여 있고 영으로는 구분되어 있으나, 장래에, 그러니까 심판의 날에는 몸으로도 분리될 것이다."[27]

   아우구스티누스가 두 도성을 착안한 것은 성서에서였다. "하느님의 도성"(시편 45,5-6; 47,2-3.9; 86,3)이라는 표현과 그 영적이고 신비적 의미에 유의하여 "우리가 그 시민이 되고자 열망하는 하느님의 도성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11.1)고 첫 머리에서 단언한다. 하지만 그의 논제는 하느님 도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두 도성의 이야기이다. " 온 세상에는 무수한 백성들이 있어서 다양한 종교와 습속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지만 두 인간 사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으니 우리 성서에 의하면 이를 두 도성이라고 부를 만하다"(14.1: 마태 6,19-24; 12,25-45; 요한 1,10-13; 3,17-21;15,16-18; 1요한 2,13-23; 5,17-20 참조).

   성서는 두 도성의 생활 양식을 대조시킴은 물론이려니와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 영에 따르는 삶과 육에 따르는 삶, 빛과 어둠의 싸움,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임자), 둘을 예루살렘(시편에서 `거룩한 도성'으로 불리우지만 히브리서[12,22]와 묵시록[3,12; 21,2]에서는 천상 도성으로 불리운다.)과 바빌론으로 직접 지칭한다("불행하여라, 너 큰 도성이여, 너 강한 바빌론이여!": 묵시 18,10). 영적 차원에서 역사를 지배하는 이 상징적 두 도성의 이름을 해석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의 관조"와 "혼란"으로 풀이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두 인간의 역사에 기인하고 있으니 한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자기 뜻을 행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우리를 멸망시켰고, 다른 사람은 자기 뜻이 아니고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였다."[28] 그리하여 "죄로 인해서 부패한 자연본성이 지상 도성의 시민들을 낳고 자연본성을 죄에서 해방하는 은총이 천상 도성의 시민들을 낳는다"(15.2).

 

   두 도성, 하느님 나라와 지상 나라의 토대 혹은 동력이 무엇인가? 그 힘은 `사랑' (amor)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의 전체 역사는 두 도성으로 환원되고 두 도성은 실존적 자세에 입각한 두 인간 유형으로 환원되며 두 인간은 두 사랑으로 환원 된다. 그리고 두 사랑은 현실 세계에 대한 두 가지 자세로 드러나는 것이다.

    먼저 이기적 사랑과 위타적 사랑 혹은 자기애와 하느님 사랑이 두 도성을 가른다. 자기애(= 이기심)는 결국 하느님까지 멸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타심(= 하느님 사랑)의 본질은 자기를 비움이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14.28).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욕정을 사랑으로 환원시키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 사랑은 인간 실존의 중심(重心)이며(amor meus pondus meum: 11.28) 모든 정열과 정욕은 두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 사랑이 선한가, 사랑이 악한가에 따라서  결정된다(14.7). 그리고 사랑의 성격은 사물의 질서 혹은 사랑의 질서(ordo amoris)에 의해서 정해진다(15.22). 하느님의 영원한 법, 사물의 질서를 당신에게로 잡아두신 법도에 순응함이다. 사물의 질서가 바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평화(tranquilitas ordinis: 19.13)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덕(德)이란 "사랑의 질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15.22). 그리하여 자기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게 상충하고 전자에서 온갖 악이 발원하고후자에서는 오로지 선만이 발원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 도식을 이해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아니던가? 양자의 상합을 이야기하면서[29]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이 곧 자기를 사랑함이요 자기를 사랑함이 곧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이라는 수수께끼를 다룬다.[30] 양자가 대립되는 것처럼 느끼는 까닭은 자기애를 이기적 사랑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2.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인 사랑'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저작에서 그는 기실 두 도성의 기반은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과 `사회적인 사랑'(amor socialis)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다.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평온하고 하나는 소란스럽다. 하나는 평화스럽고 하나는 모반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릇 된 인간들의 칭송보다는 진리를 앞세우지만 하나는 무슨 수로든지 찬사를 얻으려고 탐한다. 하나는 우의적이고 하나는 질시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31]

   그가 말하는 사사로운 사랑이란 일부만을 사랑하는 사랑, 하느님과의 친교, 타인들과의 친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랑,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느님과 자신 사이의 일대일 관계만 집착하는 사랑이리라. 사회의 분열, 온갖 차별과 편중, 오만과 탐욕과 인색을 키운다. 그대신 사회적인 사랑은 공동선의 사랑, 화해와 통일과 공평을 도모(평화는 정의의 딴 이름)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 것을 찾지 않습니다"(1고린 13,5) . 그리고 인류의 첫째가는 공동선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다. 자기를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타인을 사랑해도 하느님과 결부시켜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타인들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그러한 사랑이다. 이러한 공동선을 등지고 자기의 사사로운선을 찾음이 파국의 원흉이다.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도성에서는 사사로운 사랑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사회적 사랑만 존재하리라.[32]

   인간은 그 정치적 실존 자체(zoon politikon)만으로는 인간성의 충만에 이르지 못하고 단지 불행한 현세 인간조건을 드러낼 따름이다. 인간은 공공 사물에 대한 헌신과 지상 조국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탐욕을 극복하는 노력을 경주해 왔으나, 그것으로 얻은 것이라고는 현세적 영광과 권력뿐이었으며 죄악으로 점철된 그 영광과 성취는 환멸에 찬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정치철학의 기조인 두 사랑의 이율배반에 입각해서 본다면 국가라는 최상의 정치 조직은 양단간의 결단에 처하게 된다.  현세적 공동선에 집착하여 비록 정치적 성공을 거둘지라도 인간 조건의 현세적 차원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그치거나, 하느님 사랑(amor Dei)으로 전향함으로써 지상의 단결을 하느님 도성의 신비적 단결에 합치시킴으로써 정치의 차원을 초월하고 지상적 성공을 상대화하는 경지에 이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는 그 자체로는 구원되지 못하고 정치를 초월하는 다른 무엇에 의해서 구원된다. 따라서신앙인은 정치가들과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빌론의 지상 평화라도 보전 되도록 힘써야만 한다(19.26).


    하지만 `사회적 사랑'이 하느님 도성을 구성하는 본질이라면 공동 행복이 그 나라의 완결과 종국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19.5). 성도들만이 이루는 사회야말로 더없이 완전하고 사랑에 찬 이상 사회이리라(In Io.Ev. 67.2). 아우구스티누스는 완결된 하느님 도성의 이념을 다음과 같이 셋 또는 넷으로 꼽는다: "진리를 군주로, 사랑을 법도로, 영원을 척도로 두는 사회야말로 완전 사회이다."[33] 그 이유는"천상 도성에서는 진리가 승리자요 거룩함이 품위가 되고 평화가 행복이요 생명은 곧 영원"(ubi victoria veritas, ubi dignitas sanctitas, ubi pax felicitas, ubi vita aeternitas: 2.29.2)이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의 이 목표를 향해서 하느님 도성은 지상의 순례를 하고 있다.

 

   앞서 논한 것처럼 평화야말로 두 도성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하느님 도성에서도 정치적인 이상이다. 질서가 없으면 그 화친은 집단이기주의의 강도떼요, 화친이 없으면 질서라는 것이 감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화친이야말로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집을 이루며 도성을 이룬다. 19권에서 각종 평화를 논구한 다음 "하느님 안에서 향유하고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하는 이들의 질서바르고 화친하는 사회"(19.13.1)를 제시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윤리의 토대인 사용과 향유(uti et frui), 하느님은 향유하고 인간들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향유한다는 원리가 <신국론>에서는 하느님 도성의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을 현저하게 부각시킨다. 이것은 다양성 안에 단일성을 창출할 줄 아는 사랑을 통해서 구현된다. 그때는 또 그때만 사랑이 완전무결한 사회적 사랑이 될 것이요, 참 영광, 참 영예, 참 평화, 참 자유가 모두에게와 각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의 영원과 진리와 사랑을 모두 참여하고 향유하는 까닭이다(22.30.1-3).

   "하느님이 사랑이시므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각자가 갖고 있는 것들이 만인에게 공통된 무엇이 된다. 사람은 자기가 지니지 못했을 지라도 남에게서 그것을 사랑한다면 자기가 지닌 셈이다. 입은 영광이 다양하다고 해서 아무런 질시도 없을 것이니 만인 안에서 통치를 이룩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사랑의 단일성이기 때문이다."[34]

결  론

 

   『신국론』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치 사상을 간추린다면 은총에 의한 정치생활의 구원을 그가 일관되게 암시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므로 정치라는 것을 떠나서 지상의 순례길을 통과할 수는 없다. 이것은 지상의 나라를 통과하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든 간에 그 길이 다름아닌 `사회적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초역사적 여정을 안전에 두고 있는 그로서는 정치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결핍과 그에 대한 대안을 추구해야만 하였다. 지상적 공동선에 대한 사랑, 그 성원들 간의 합의되고 질서잡힌 평화, 제도적인 통일이 정치를 이루고 정치가 존재하는 조건을 이룬다. 여기서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정치철학의 요체가 나온다. 정의를 구현하려는 신앙인들의 부단하고 과감한 노력과 투신이 있다면, 평화와 정의에 대한 이 위대한 교부의 사랑에서 영감을 길어내는 것으로 간주할 만하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치를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무엇으로 만들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공동선(共同善)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들을 궁극적으로 만족시켜 주지 못함을 깨우쳐 주며, 인간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으로 전향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아울러 정치 그 자체가 인류의 단절된 부분이요 분열시키는 요소임을 깨닫게 한다. 정치는 그것을 존재케 하는 조건 자체가 불화와 투쟁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자체만으로는 또자율적으로는 개인과 인류의 궁극적 최고선을 실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불가능하고 무력함을 드러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그리스도교 국가라고 할지라도 정치가 완전한 국가의 건설을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치를 사탄의 통치로 보는 비관론도 배척한다. 정치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하므로 제거될 수는 없으나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 정치의 고유한 수단 방법만을 갖고서는 완전한 치유책이 또한 없다. 정치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들의 부단한 정화와 회심에 의해서만 정치에 내재하는 모순과 갈등과 아포리아들이 해결의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 투신 속에서도 언제나 사회 조건 전체에 종말론적 단서(但書)를 붙이는 여유를 갖는다.

   그 구성원들의 인간적 회심은 "우리의 모든 정의가 향하여 유지되는 목표"(propter verum boni finem ad quem refertur: 19.27)를 염두에 두고서 행동하게 만들며, 그렇게 되려면 이미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 변모되는 전환을 거쳐서, 천상 도성에서나 만끽할 수 있는 평화로운 행복(pax beatitudinis, beatitudo pacis)을 희구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인 시민이든 그리스도인 황제든 하느님 도성을 향하는 순례 중에 이처럼 온전한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내심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요 은총이 역사에 미치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지성을 비추는 구원의 빛 속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서 정치를 관찰하면서 하느님 도성을 바라보도록 인류의 시선을 돌려 준다.

 

 

참고 문헌

* 차제에 우리말로 번역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와 단행본 연구서를 소개하는 것으로 참고문헌을 대신한다.

 

1. 우리말로 번역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Confessiones (최민순 역주), 『고백록』 (성바오로 1965)
De doctrina christiana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분도출판사 1989)
De vera religione (성염 역주), 『참된 종교』 (분도출판사 1991)
De libero arbitrio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분도출판사 1997)
Soliloquia   (김효신 역), 『獨 白』  (가톨릭청년사 1960)
De beata vita (김효신 역), 『행복한 생활』 (가톨릭청년사 1960)
Sermones 46  (최창무 역), "목자론(牧者論)", 가톨릭대학 논문집 8(1982)
Sermo Guelferbytanus, Tractatus de Nocte Sancta(박상배 역), "부활성야 설교",
    신학전망 19(1972.12), 70-74
Carlo Cremona편 (성염 역),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명상록』 (성바오로출판사 1991)
C.Borgogno편 (성염 역),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찬양시편』(성바오로출판사 1995)

* 그밖의 개신교측 중역본
어거스틴 저작집 (김영국 역) (소망사, 1984)
    I. 아카데미아파 논박, 복된 삶, 질서론, 독백
    II. 영혼불멸론, 영혼의 위대성, 교사론, 참 종교론
조호연-김종흡역, 『하느님의 도성』5권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김덕애

 

2.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구서

Carlo Cremona (성염 역) 『성아우구스티누스傳』(성바오로출판사 1994)
Louis de Wohl (조철웅 역), 久遠에의 불길 [소설체전기](가톨릭출판사 1965)
K.Jaspers (김영도 역),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 (이문출판사 1984)
           (김쾌상 역),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전망사 1981)
Leo C.Daley (박일문 역), 어거스틴 입문 (성광문화사 1986)
김규영,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 (형설출판사  1980)
이석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선한용,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과 영원 (성광문화사 1986)
조정옥, 성아오스딩에 의한 인간 및 하느님 (대구 효성여대 1989)
김태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이론 (전북대학교 학위논문 1990)

 

 

각   주

[1]『신국론』(De civitate Dei)의 가장 훌륭한 텍스트로는 로마의 Augustinianum에 편찬하고 있는 라틴어-이탈리아어 대조본 Nuova biblioteca agostiniana(NBA로 약칭된다: Roma, Citta Nuova Editrice)의 Opere di Sant'Agostino V/1-2: La citta di Dio를 소개한다. 독일어(1551-53), 불어(1959-60), 영어(1931) 번역본도 널리 읽히고 있으며, 미비한 중역본이지만 우리말 번역본도 나와 있다: 성아우구스티누스 (조호연,김종흡역), 『하느님의 도성』5권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2] 『신국론』의 사상적 개요로는 위에 소개한 Nuova biblioteca agostiniana V/1:La citta di Dio 의 첫머리에 수록된 <입문 Introduzione generale>  ix-clii 을 소개하며, 논자는 이 문헌을 중심으로 논지를 개진하고 있음을 명기하는 바이다(cfr.,Agostino Trape, I. Teologia, ix-xcviii; Robert Russell, II. Filosofia, xcix-cxxx; Sergio Cotta, III. Politica, cxxxi-clii). 우리말 연구서로는 역사학자의 연구서 이석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서울, 민음사 1995년)이 있다.

[3]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을 섭렵케 해 줄만한 전기로는 카를로 크레모나(성염 역), 『성아우구스티누스傳』(바오로딸 1992)을 읽도록 권장한다.

[4] Retractationes 2.43.1.

[5]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약탈 사건을 사변적으로 해명하고 혼겁한 사람들을 격려 하며 피해자들을 위로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학살과 유린과 약탈을 겪은 신앙인들에게 인간 역사와 행적에 미치는 하느님의 심오한 역사적 경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그리스도교 역사철학을 토로하였다: cfr., Epistulae 135, 136, 137,138; Sermones 81, 105, 296; De Urbis excidio.

[6] 『창세기 축자해석(De Genesi ad litteram』 11.15.20: "이 두 도성에 관해서는 주님이 원하신다면, 다른 곳에서 폭넓게 다루기로 한다"(11.15.20). 아우구스티누스가이 창세기 주석에 착수한 것은 401년경이었다.

[7] 『신국론』의 구조와 내용개괄은 정의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연구" 정의채 수상집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0), II 54-133을 참조할 것.
[7] 마르켈리누스는 411년에 카르타고에서 가톨릭과 도나투스파 사이의 공개토론을 주관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토론의 주역을 하였다. 412년에 쓰여진 서간(138)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총독에게 "내가 서간 등에서 제시한 논리에 반박하는 요지들을 적어 보내 주시오. 그러면 서간으로든 책자로든 다시 한번 반박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국론』을 아직 착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학자들은『신국론』착수 시기가 413년초이리라고 추정한다.

[8] 13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서 집필된 이 책의 낱권들이 언제 완결된 것인지는 확인 하기 어렵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서간이나 다른 저서에서 추정하면 다음과 같은 시기는 지적된다. 413년에 처음 세 권을 집필하였고 415년에는 제 4권과 5권이 완료되었다. 417년에는 제 1부 10권이 끝나고 제 11권에 착수하던 참이었으며, 418년경에는 제 2부 세 권을 끝냈고 네번째 권(제 14권)이 수중에 있었다. 히포의 성스테파노 성당 기록이라는 문헌에는 426년말이나 직후에 마지막 권을 끝마쳤다는 언급이 나온다.

[9] Contra Academocos 3.20.43.

[10] 『신국론』8.9(이하에서는 권, 장, 절수만 표기함).

[11]  독자들은 『신국론』에서 지상의 도성이 타락한 인간 제도라는 인상을 받고, 펠라지우스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대 문화에 내린 부정적 견해(Contra Iulianum 4.31.21ssq.; 『신국론』5.12.4; 19.25)를 상기하겠지만, 다신교 신앙을 제외하고는 이교도들의 삶이 찬사를 받을만하고 지상국가를 세우고 성장시키고 보전할만한 덕성을 갖추고 있음을 천명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강조하려는 것이 본고의 의도이다(Epistola 138.3.17; 164.2.4).

[12] "하느님은 참다운 종교가 없이도 사회적 덕성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저 부요하고 명성 큰 로마 제국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거기에 참다운 종교마저 있다면 그곳 사람들이 또한 천상 도성의 시민도 될 수 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기서는 진리가 다스리고 사랑이 다스리고 영원이 군림합니다 "(Epistola 138.3.17 ad Marcellinum).

[13] 아우구스티누스의 평화 사상은 다음을 참조할 것: 박종대, "아우구스티누스의 平和觀: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신국론』을 중심으로", 가톨릭사회과학연구 5(1988), 7-31; 박종대, "중세의 평화관",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평화의 철학』(서울, 철학과 현실사 1995), 73-120면.

[14] 앞서 언명한 바와 같이 다음 연구 문헌을 간추렸음: Sergio Cotta, III. Politica, ii I temi politici del De civitate Dei, in Introduzione generale in NBA V/1,cxxxii-clii

[15] 19.12: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타인들과 사회와 평화를 맺으려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얻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homo fertur quodam modo suae naturae legibus as ineundam societatem pacemque cum hominibus, quantum in ipso est, omnibus obtinendam).

[16]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사회성은 인간학적 접근에서도 확인되는 성격이다. 도성의 기원은 가족이다(De bono coniugali, 1: prima naturalis humanae societatis copula vir et uxor est). <신국론>에서도 가족을 사회 기반으로 논하고 있으며(copulatio maris et feminae, quantum attinet ad genus mortalium, quoddam seminariumest civitatis: 15.16), "가정이란 도성의 시초 또는 부분이다"(hominis domus initium sive particula civitatis: 19.16)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정치란 가족 사회의 자연적 발전에 해당한다.

[17]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도 가족의 번성은 혼인의 명예(ad gloriam connubii)이지 죄벌(ad poenam peccati)은 아니라고 보았으며(14.21), 혼인의 선물은 사람이 범죄하기 전에 하느님이 내리신 것(ante peccatum hominis ab initio donum nuptiarum : 14.22)임을 확인한다.

[18] 2.21: non omnis coetus multitudinis, sed coetus iuris consensu et utilitatis communione sociatus: Cicero., De republica 1.25.39.

[19] De moribus Ecclesiae catholicae 1.15: amor Deo tantum serviens, et per hocbene imperans ceteris quae homini subiecta sunt.

[20] De natura et gratia 70: caritas magna, magna iustitia est; caritas perfecta, perfecta iustitia est.

[21] 19.13: pax omnium rerum est tranquilitas ordinis... ordo est parium dispariumque rerum sua cuique loca tribuens dispositio.

[22] 『고백록』 4.10.1 참조.

[23] 19.17: ista pace necesse est ut utatur, donec ipsa, cui talis pax necessaria est, mortalitas transeat... quamdiu permixtae sunt ambae civitates, utimur

etnos pace Babylonis.

[24]  Cfr., Trape, "Introduzione" in NBA lxiv- lxxxiii, "III  Lotta tra il benee il male o le due citta."

[25] De diversis quaestionibus 83 q.58: cum totum genus humanum tamquam unum hominem constituerit.

[26] De vera religione 『참된 종교』(성염 역주) 27.50.

[27] De catechecizandis rudibus 20.31. 『창세기  축자해석』에서는 두 도성의 개념과 기초를 언명하고 아울러 『신국론』을 집필하겠다는 약속을 한다(11.15.20). 『시편강해』(특히 61, 64, 86, 136, 138, 142편)에 두 도성의 이야기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두 도성의 기초(두 사랑), 역사, 발로(사랑의 행적과 이기심의 행적), 최종 결과 (행복과 비참)도 시편 강해에서는 드러난다.

[28] 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2.24.28.

[29] Cfr., De mor.Eccl.cath. 1.26.48; Ep. 155.4.15.

[30] Cfr., In Ioannis Evangelium 123.5.

[31] 『창세기 축자해석』(De Genesi ad litteram) 11.15.20.

[32] De sermone Domini in monte 1.15.41.

[33] Ep. 3.17 ad Marcellinum: cuius rex veritas, cuius lex caritas, cuius modusaeternitas.

[34] In Io.Ev. 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