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1006.gif신존재와 이해에 관한 철학적 조명

   DEUS VERITAS (眞理로서의 神)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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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 철학적신론(철학과현실사 1995) (197-238)  

 

 

 

 서 론: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와 철학 /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본고의 범위와 방법
    I.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의 빛 /  삶의 예술
          신을 사랑함
    II. 진리로서의 하느님                                  
          진리의 내면성 / 진리: 판단규범 / 진리: 지성의 빛
          인간의 혁신 / 진리에 관한 정의 / 진리에 관한 정의
          진리요 빛인 하느님 / 진리인 하느님을 향하여
    III.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                          
          신에게로의 소급 / 신존재 증명 / 이 논증의 신개념
          Deus ut Veritas
    결 론: 철학자는 신을 사랑하는 자                  
              Verus philosophus amator Dei
           "오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 철학적 안식


 

 

서 론: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0.1   그리스도교와 철학


   그리스도교 교부(敎父)들은 원래 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에서 혜택을 입는 신앙인들이었다. 서기 1-5세기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당시의 헬레니즘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과 이교도들에게 공통된 문화배경이었으며, 양자는 같은 세계관, 문화, 해석학,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양자 사이에 만일 상충점이 있었다면, 원천적인  신념의  문제였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는 자기들이 온전한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신념이 있었으므로 교부들은 이교도들과 공통되는 문화를 향유하면서도 당대의 문화에 신앙에  입각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그리스-로마를 지배하는 헬레니즘을 단순한 문화적 배경으로 간주하였고, 교육적 차원(ordo propedeuticus)에서 그 철학만을 차용하는 풍조를 보였다. 일찌기 알렉산드리아의 필론(BC ca.20-AD ca.45)은 구약  율법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또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성서적인 신앙의 사변적 이해를 위해서 헬레니즘 철학을 원용하였다.


   지혜에 대한 사랑 자체가 신적인 빛을 갈구하는 인간의 동경을  표현하는  것이요, 따라서 지혜에 대한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을 묵시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며, 지혜에 대한 사랑의 꾸준한 노력 속에 결국은 신에 대한 명시적인 사랑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특히 그리스계 교부들의 주된 입장이다. 인간 조건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질문을 올바로 표명하고 그 해답을 희구해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답변이 된다고 여기던 사상가들은, 그리스도의 계시가 폭넓은 역사적 계시의 정점에 해당하고 모든 계시는 신의 로고스에게서  나오고, 그리스도는 곧 육화(肉化)한 로고스라고 천명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신앙이란 본질적인 것들에 관한 압축된 지식[영지]이다. 그리고  영지(靈智 gnosis)는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확고한 논증이다"(Stromata  7.10)라고 변호하고 "사변적 논증은, 그것을 추구하여 인정하는 사람의 영혼에 정확한 신앙을 심어 준다"(Stromata 1.6)고 천명하였다.1)

 

0.2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철학의 문제에 가장 진지했던 그리스도교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2)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과 신앙의 두 세계를 온 몸으로 살아간 사상가이다. 그런데  철학함에 있어서 그의 부단한 관심사는 "자기 일신의 체험"을 사변적으로 해석하는 일이었다. <고백록>에서 보듯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사상 전체가 자기 회심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정신적 여정을 아는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서 지혜(Sapientia)의 추구를 시작하였고, 훗날 플라톤 학파의 책(마리누스가 번역한 플로티누스의 Enneades)을 읽고서 그 진리를 영원한 누스(Nous)에게서 보았으며, 마침내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여 그 진리가 신적 존재로, 역사 속에 육화한  로고스(Logos)임을 알아보았다고 해석한다("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지식이요  지혜이다"Christus, scientia et sapientia nostra: 교사론 6.3.). 여기서 그의 철학과  신학을 관통하는 일관성있는 추동력, 곧 지성적인 추구가 한 눈에 나타난다. 그의 나이  열여덟에 키케로의 책을 읽으면서부터, 그의 평생을 결정한 진리에 대한 사랑, 혹은  진리를 기여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정열(amor inveniendi veri)이  그를  사로잡아왔음을 알 수 있다.3)

 

0.3  본고의 범위와 방법


   본고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함을 "신을 사랑함"(verus  philosophus  amator Dei: De civitate Dei 8.1)으로 규정한데서부터 시작하여(I), 그가 어떻게 해서  진리 곧 "하느님"으로, 혹은 진리로서의 하느님(Deus ut Veritas)이라고  명명하고  섬기게 되었는지(II), 그리고 그의 유명한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의 요체가 무엇인지(III)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인 철학함을 명분으로 하여 삶의 예술로서의 철학을 떠남으로 인해서 자연과학의 시녀로서의 철학을 서슴지 않거나, 진리를 지성의 해부칼로 분석할 따름 진리를 뜨겁게 사랑하는 정열을 잃어가는 우리의 철학함에 5세기의 사상가가  던져주는 경종을 듣고자 하는 의향이 전제되고 있다. 주로 그의 철학서 <참된  종교  Devera religione>를 전거로 삼겠지만 다른 문전들도 자유로이 인용하는 문헌학적  방법을 따르기로 한다.4)


I.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

 

1.1  진리에 대한 사랑


   "인간이란 무엇이옵니까? 인간이란 실로 그윽한 심연이로소이다(grande  profundumest ipse homo)"(고백록 4.14).5) 이 심연으로서의 인간이 그 완성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다름 아닌 진리이다. "인간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한 완성을 볼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이란 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습니다"(아카데미아학파  논박 1.3.9). 진리가 인간 실존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철학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생생하게 감지한 사상가가 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사랑스러운 것이나 유쾌한 것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법인데...   영혼에게 진리처럼 저항할 수 없으리만큼 매혹적인 것이 또 무엇인가? 인간 영혼만   큼이나 게걸스러운 목구멍을 가진 것이 또 있을까? 인간 내면의 미각이 입맛을 얼마나 쩝쩝 다시는지 모른다. 그 미각은 어떤 것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며, 지혜를 먹고 마시며 정의와 진리와 영원을 먹고 마신다!"(요한복음 강해 16.5).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pondus meum amor meus),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나이다"(고백록 13.9)라고 실토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실존의 중심(重心)이 있었고 "중력에 이끌려가는 목표는 다름이 아니라 영혼들이 사랑으로  도달코자  향하는 바로 그 목표"(서간 55.10.18) 곧 진리였다. 무릇 철학을 하는 사람은 지혜, 깨달음을 다른 가치들에 앞서는 최상의 가치로 간주하므로 고대인들은 철학하는 생활이라면  진리를 관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 veritatis)이라고 이해하였으며,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인간의 존재론적 갈구(渴求)는 멈추고 인간 정신은, 사람을 방황케  만드는 온갖 감정과 욕정으로부터 탈피하여, 그  무엇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anima quieta)에 도달한다.6) 그도 한때는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론에 기울어져 절대진리의 존재에 대해서,  적어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절망적인 의심을 품은 바 있었다. 그러나 "내가 속는다면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sum)는 명제를 만들어 그는 회의론에서  빠져 나온다.


   "'진리란 도시 없는가? 유한한 공간이든 무한한 공간이든 공간에 펼쳐 있지 않으니 진리란 없는 것이 아닐까?' 그때 그대[진리]는 먼데서 외쳤더니라. '그럴리 없도다. 나는 있는 자 그로라.' 나는 마음에 울려오는 그대를 들었노라.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었노라. 차라리 내가 살고 있음을 의심할지언정 진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으리라, 창조된 모든 것으로 지성 앞에 보여지는 그 진리를!"(고백록 7.10).


   우리 인간은 이미 진리를 손아귀에 넣은 사람이 아니라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바에 대한 선인식(先認識), 진리가 있다는 선천적  신념,  인간 지성이 그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리라는 확신과 희망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진리를 지성안에 선취(Vorgriff)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한 선취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마저도 모를 것이고 우리가 이미 얻은 진리가 정녕 옳은지 그른지 비판하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느니, 있더라도 알 수  없다느니, 이것은 확고한 진리가 아니라느니 하는 판단마저 기실 우리가 진리를  선취하고 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념이었다. 7)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을 결코 사랑할 수 없으므로 자기가 추구하는 바, 즉 아직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자 추구하는 바에 대한 사랑을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영혼은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향유하고 싶어한다.   영혼이 아름다움 전반에 관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까닭이다. 새로운 지식의 경우에, 보통으로 그것을 이미 알고 좋다고 찬양하는 이들의 권위가 상당히 작용하겠지만, 정신에 대강으로나마 그것의 인식이 전혀 인각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을 파악하여 배우려는 열망에 불타는 일도 없을 것이다(nisi breviter impressam cuiusque doctrinae haberemus in animo notionem, nullo ad eam discendam studio   flagraremus)" (삼위일체론10.1.1).

 

1.2  지혜의 빛


   그러면 그가 철학함에서 평생 추구한 지혜란 무엇인가? 진리를 보는  지성을  말한다. 따라서 그에게 철학함이란 지성의 고유한 법칙과 특성에 따라서 이뤄지는  노력이요 작업이다. 그는 가설을 검토하고, 실재 세계 전체를 합리성의 틀 안에다  잡아넣고자 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 자기의 삶과 믿음과 사상 전부에 통용될,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한 논리적 일관성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 그는 진리 앞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질서며 방법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방법으로 체계적으로 수립하였다.


   진리를 찾아내는 일 자체는 어디까지나 지성의 역할이며, 진리의 발견은 인간 지성이 이룩하는 하나의 정복이다. 빛은 육안이 사물을 보게 만들 따름이지 사물을 눈  대신 보아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구현되는 힘든 작업이다. 지성의 주의력을 그  방향으로  유지시키려는 의지의 부단한 노력, 물체적인 것에서부터 가지적인 것에로 고양되려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바, 이성의 노력과 의지의 긴장은 진리를 보고자 의욕하거나 진리를  사랑하는 상호보완작용을 하며, 진리의 빛 속에서 무엇인가 보겠다는 태세(dispositio)를 갖추어 준다. 그러므로 지성은 피동적 기능이 아니라 정신 전체의 역동적 활동이다.  빛을 향하여 정신의 모든 활동들을 수렴하는 운동이다. 그 빛이 하는 역할은 참을  찾고 발견하는 길로 지성을 인도하고 정향(定向)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함은 지성의 기쁨이요 행복이 된다. 8)

   물론 신에게 창조된 것으로 해석되는 이상 인간은 인식하는 능력과 작용을  신으로부터 받는다. 진리요 존재이며 생명인 신에게서 받는다. 그렇지만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오성과 이성이 갖추어진 정신으로 창조하였으며, 이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본성에 부합하게 작용하기 위함이다. 지성은 진리들을 인식하도록 신이  주신  선물이다. 인간 오성이라는 빛을 선물받지 않았던들, 인간이 감각적 소여를 반성하고 비교하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고, 진선미와 일자에 관한  판단의 영원한 규준들을 오성으로 직관하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지성에 의한 인식에 의해서 존재의 강도가 높아진다는 의식을 갖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지성의 빛"(lux mentis)이라고 명명한다. 달리는 그것을 "내면의  빛"(luxinterior)이라고도 부르며 인간이 그 속에 현전(現前)하는 것으로도 표현한다.9)   "지성의 이 빛에 의해서... 나는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이 빛을 통해서 이것들을 이해한다는 사실도 다시 이해한다... 내가 이해를 하면 할수록 내 생명의 강도(强度)가 높아진다(me vivaciorem intelligendo fieri)는 것도 나는 이해한다"(참된 종교 49.97).


   그가 본 "진리"는 궁극의 사물을 직관하고 인간 내면으로부터 조명을 받는  "오성"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해서 찾아내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오성으로 작업을 하되 억견들의 영역을 넘어서서, 오성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가운데(reflexio) 진리를 파악한다."는 대답을 내어 놓는다. 사실 진리는 오성이 직관으로 판단에 활용하는 대상이요, 오성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오성은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고 믿어야 한다. 다만 여기에는 지성의 정화(淨化)를  요구하는  도덕적 호소가 수반된다.10)

 

1.3  삶의 예술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가? 11)
   일찌기 키케로는 철학을 로마인답게 정의하여 "선하게 사는 학문(philosophia benevivendi disciplina)"(Oratio in Pisonem 29.71)이라 불렀고,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 역시 철학을 "선하고 행복한 삶의 예술(ars bene beateque vivendi)"(Epistula  89.2)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똑같이 로마 제국의 문화를 배경으로 사고하고 집필한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선하고 행복한 삶의 길(vitae bonae ac beatae via)"을  추구하였는데 다만 그 길을 일컬어 "참 종교"(vera religio)라고 부르는 점이 다르다.12)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철학을 일단 삶의 예술(ars vivendi)로 간주할 때에, 그  추구하는 대상(지혜)과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태도(사랑)에 의해서 이 삶의 방식이  정해 진다는 결론이 유도된다. 철학이 단순히 어떤 식견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삶의 방식이자 인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삶의 방식을 취하도록 호소하는 부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앎, 혹은 철학함에 대해서 종교적인 경건을 갖고 임하였다.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 문제에서 철학을 개진할 줄을 모르거나 철학에서 종교적인 처신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바, 그 이유는 "앎이 배움의  목적이거늘 인식한 바를 경멸하고 신기한 것을 즐기며, 앎보다는 배움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철학함의 본말이 전도된 지적 호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참된 종교 7.12). 여기서우리는 어쩌면 서구 사상사 전체에 걸쳐 철학과 종교의 관계를  규정하는  사고방식을 엿보게 된다.

 

1.4  신을 사랑함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사에 끼친 각별한 공헌을 하나 꼽는다면, 철학함의 고전적인 의미에 대한 심원하고 명석한 식견이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그에게 철학함은  삶에 대한 암호 해독이요 그 파악이었다는 사실이다. 구체와 역사에서 솟아나는  생생한 역동성을 갖고서 사유자 본인과 결부되는 사색이었다.  한마디로 <고백>으로서의 철학함이었고  "어떤 분"에 관한 사념이었다.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분"과  결부된사색이었다. 13)


   "진리여, 어딘들 나와 함께 아니 가셨더이까? 되도록이면 내 속을 보여드리고, 높으신 뜻을 묻자왔을 제, 진리여, 당신께서 할 것, 삼갈 것을 친히 가르쳐 주지 않으셨나이까? 나는 힘 닿는 데까지 바깥 우주를 감각으로 두루살피고, 내 육체를 살리는 생명, 그리고 그 감각 자체를 익히 보았습니다. 거기서 내 기억의 그윽한 속으로 들어와서는 넓으나 넓은 구석구석이 묘하게도 무한량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님이 없이는 무어가 무언지 하나도 분간할 수 없었고, 그 어느 것도 당신이 아니심을 깨달았습니다"(고백록 10.40).


   그리스도교 철학이나 일반 철학이나 공통점은 스스로 그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며, 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익들을 경멸하고  포기하여야 한다고 요구하는 점이다.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양자가 같지만,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에서 그치느냐, 하느님에 대한 사랑(amor Dei) 으로까지 발전하느냐에서 양자는 차이를 보인다.


   철학자가 진리를 탐색할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어디까지나 이미 자기 앞에  제시되어  있고  그  진리가  빛이  되어  인간을   충동하기   때문이라는(veritas   quacognoscitur) 겸허한 생각을 한다면, 방금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신은  인간보다 인간에게 더욱 내밀한 존재이라는 (intimior intimo meo) 의식을 갖기에  이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은 진리로서의 신을 향하는 동경이요 여로가 아닐 수 없다.


   "(진정한 철학도들은) 하느님에게서 존재의 원인을 발견하고 인식의근거를 찾아내며 삶의 규범(causa subsistendi et ratio intellegendi et ordo vivendi)을 얻어 내야 마땅할 것이다... 이 하느님 없이는 그 어느 자연본성(존재자)도 실존하지 못하고 그어느 가르침(철학)도 인간을 교육하지 못하며 그 어느 실천행동도 인간을  이롭게 만들지 못한다"(신국론 8.4).


II. 진리로서의 하느님

 

2.0  진리의 내면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내면[내적 인간]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는  명제와  더불어  "진리가  곧  지성의  빛"(veritas  luxmentis)이라는 명제를 자기 인식론의 근간으로 삼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그대 자신 속으로 돌아가라. 인간 내면에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초월할 적에  그대는 추론하는 영혼을 초월하고 있음을!그러니 이성의 원초적 광명이 밝혀져 있는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라! 제대로 추론을 하는 모든 이는 진리 말고 어디에 도달하겠는가?"(참된 종교 39.72).


   주지하다시피 아우구스티누스가 관심을 집중하는 대상은 감각적  지식(scientia)이라기보다는, 어떤 사물을 두고 그것의 진선미(眞善美)에 관해서 내리는 지성의 판단인데 이것에는 인식(cognitio)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감관에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는 모든 것은...지성을 통해서, 감관의 중개를 거쳐서 물체들의 아름다움이 파악되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름답다고 보이는 사물이 갖춘) 저 균등과 통일성은 공간 안에 분산되거나 시간 안에 변천되거나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단일하고 불변하는 균등(均等)의 척도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각형의 광장(廣場)이든 사각의 돌이든 사각형 책상이나 조그만 사각의 보석이든 그밖의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것이 사각형인 한, 우리는 사각형의 법칙에 준해서 판단을 한다.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개미의 걸음 폭을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하듯이 점잖게 걸어가는 코끼리의 걸음 폭도 우리는 동일한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 법칙, 모든  예술에 적용되는 이 법칙은 불변하는 것이다. 다만 그 법칙을 직관하도록 허용된   인간 지성은 오류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예술의 척도가 되는 이) 법칙은 우리 지성을 초월하는 것임이분명하며, 이 법칙을 일컬어 진리(眞理)라고 한다"(참된 종교 30.56).

 

2.1  진리: 판단규범


   지금 인용한 문장의 끝부분, 즉 무슨 물건이든 간에 그것이 사각형인 한, 우리는 "사각형의 법칙에 준해서 판단을 한다(secundum quadraturae legem iudicari)", 마찬 가지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개미의 걸음 폭을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을 하듯이 점잖게 걸어가는  코끼리의  걸음  폭도  "동일한  비례의  법칙에  의거해서  판단한다(secundum aequalitatis legem iudicari)"는 표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소위  조명설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를 보게 된다.  그의 조명설이라는 것이 오성이 관찰하는 직접적 대상을 가리키기보다는, 오성이 판단하는 작용(iudicari)을 염두에  두고서, 그 판단의 규준이 되는 법칙(lex)이 따로 있는데 "그것에 의거해서(secundum quam)" 사물들을 판단하는 "규범적 작용"이 아니겠느냐 하는 해석이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불변하는 형상 (formae)이나 이념(rationes)이나 규준(regulae), 심지어는 가장 일반적으로 진리(veritates)를 "지성으로 본다(mente videre)"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 창조사상 때문에 플라톤의 본체론적 이데아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입장으로 미루어, 아우구스티누스 인식론의 조명설은 신의 조명이 인간 지성에 대해서 "관념발생적"(ideogenetic) 내지 "규범"(regulative)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음을 알 수 있다. 14) 실제로 그는 지성이 그 대상을 육안이 아닌 심안(心眼)으로 본다고 하여 이념들의 구상성(具象性)을 피해나간 다음, 그 대상이 공간성을 갖지 않고 "가능성을 통해서(per potentiam)" 지성과 연관된다는 표현으로  이념들의 대상성(對象性)마저 부정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 우리가 다양한 부분과 지체로 구성된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하나라고 판단하는 경우를 관찰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당신은 어떤 단일성에 의거해서 물체를 판단하고 있는데, 그 단일성이라는 것을 어디서 알아내는가? 당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이 단일성을 관조하고 있지 않다면)   어느 물체가 그 단일성에 결코 도달 못하리라는 판단도 내리지 못할텐데 말이다.   그리고 만약 육안으로 그(단일성을)본다고 한다면, 어느 물체가 비록 (단일성의)자취를 띠고는 있지만 그(완벽한 단일성으로부터는) 요원하게 떨어져 있다고 하는 말도 거짓말이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안으로 보는 것은 육체적 사물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성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어디에 보이는가? 우리 육체가 자리잡는 공간에 그것이 자리잡고 있다면, 저 동방에서 물체들에 관해서 우리와 똑같은 식으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그(단일성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간에 내포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항상 거기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공간을 통해서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통해서는 없는 곳이 없다(nusquam est perspatia locorum et per potentiam nusquam non est)"(참된 종교 32.60). 15)


   간추리자면, 인간이 물체적 사물들을 두고 지식에 해당하는 판단이든 인식에  해당하는 판단이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단지 지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것이라고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지성까지도  모르다가  배워아는가 하면 기억하다 잊고는 하므로 그 자체 가변적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인간지성에서 나오는 지식이 그 자체로 불변하는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지이다. 앞서 인용한 구절에서 "그대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발견하거든 그대 자신도 초월하라.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초월할 적에  그대는 추론하는 영혼을 초월하고 있음을!"(참된 종교  39.72)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다.  따라서  이성이 내리는 판단이 참일 수 있다면, 오성이 영혼의 눈(oculus animae) 또는  지성의  정곡(apex mentis)으로서, 비물체적이고 영원한 이념들, 불변하는 규준들, 즉 신적인 진리들과 어떤 상관을 갖는데서 기인한다.


   아는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의하여 어떻게 추상적  보편 개념이 형성되고 그 보편개념이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느냐는 것은 진지하게  거론하지 않고 차라리 주지의 사실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인간 이성이 감각적 사물을 두고 내리는 판단, 그리고 오성이 내리는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판단이 갖는  진리성의 토대를 제시하기 위하여, 그 판단 준거가 되는 이념, 원리, 규준들이 어떤  양상으로든지 "인간에게(in interiore homine) 존재한다", 혹은 "인간 지성이 그것을 관조한다(mente videre)", 또는 그 규준들이 "가능성을 통해서(per potentiam) 인간  지성과 어떤 상관을 갖는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규준 또는 진리가 "공간을  통해서는 그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통해서는  없는  곳이  없다(nusquam est per spatia locorum et per potentiam nusquam non est)"는 앞서의 문장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과 그 진리 사이에, 마치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에 설정되는 공간을 부인함과 아울러, 인간 지성과 진리 사이에 어떠한 매개체도  거부하고서 진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케  만드는  내면의  빛"(veritatem,  id  est uceminteiorem, per quam illum intellegimus)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잘 드러낸다. 16)

 

2.2  진리: 지성의 빛


   인간 지성이 사물을 판단하는데 준거하는 진리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토론을 요한다. 제일 먼저 지적할 바는, 인간의 "추론이 이 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발견할 따름이다(non enim ratiocinatio talia facit, sed  invenit).  그러므로 발견되기 전에도 스스로 존재한다"(참된 종교 39.73)는 문장에서 밝히 드러나듯이, 인간 사유는 진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발견되는  진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사유보다 선재한다.  만약 인간들이 무엇을 인식함으로써  진리를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지성이 주관적 원리가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지성이 진리의 준거 혹은 진리 자체가 될 것이다.


   지성은 어디에서 진리를 발견하는가? 진리는 인간 내부(homo interior)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외부나 상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인간 안에 있다.  그것들이 지성의 빛이 되어 인간 오성을 조명하며, 인간 지성이 참다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상황을 가리켜, 우리  내면에서  진리를  불러주는(dictare) 스승이 현존하고 인간 지성은 그에게 문의를 하는(consulere) 것처럼  비유한다.  "우리 인간은 내면의 빛을  그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Ep.140.36.85:  quidaliud quam internum lumen, magistrum nos habere testamur?)는 문장에서처럼,  진리는 지성을 비춰주는 빛(lux interior)이자 내면에서 인간을 가르치는  교사(magister)라는 이중적인 유비로 표현되고 있으며 그것을 다음 두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하는 보편자들(universa: 보편 개념)에 대해서는, (문의를 하게 되어  있겠지만) 우리는 밖에서 소리를 내는 어느 화자(話者)에게 하듯이 문의하는 것이 아니고, 내면에서 정신 자체를 주관하는 진리에게 문의하는 것이다(ipsi menti praesid entem consulimus tatem). (그 진리가 곧) 문의를 받고 가르친다....
   모든 이성적 영혼은 그에게 문의를 한다"(교사론 11.38).


   "지성의 이 빛에 의해서... 나는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내가 이 빛을 통해서 이것들을 이해한다는 사실도 다시 이해한다... 내가 이해를 하면 할수록내 생명의 강도(强度)가 높아진다는 것도 나는 이해한다"(참된 종교 49.97).17)


   그러므로 육안이 햇빛을 통해서 물체적 사물을 보게 되듯이, 지성이  진리의  빛을 통해서 가지적 사물 또는 이념들을 보게 된다는 논리는 자연스럽게 '빛'에 관한  이야기로 집중된다.


   "우리가 지성으로, 다시 말해서 오성과 이성으로 인식하는 사물들에 관한 한, 진리의 내적 빛 속에(in illa interiore luce veritatis) 현전하는 것으로 우리가 직관 하는 것이며, 내적 인간이라 부르는 주체가 그 진리의 빛에 의해서 조명받고 그 빛을 향유하는 것이다"(교사론 12.40).


   우선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일반적으로 빛이라고 부르는 진리는 무조건 신을 지칭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상적으로 인간의  판단 준거가 되는 진리가 창조된 빛임을 분명히 한다: "이 빛은 하느님인 그 빛이  아니다. 이것은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다. 이것은 창조받은 것이고 그분은  창조하신 분이다"(마니교도 파우스투스 논박 20.7).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자연적 빛이 있다.  그  빛으로, 또 오성이 돕는 기억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은 감각들을 결합하고 조합하여  인간의 실천적 필요에 따라서 사용한다. 또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되는 창조된 빛이  있다. 그것이 있어서 인간은 가지적 규준들을 직관하고, 지성을 써서 사물들과 자기  행위을 판단하며 지식과 지혜를 거기서 얻는다. 그리고 이 빛에는 신의 가호 혹은 특별한  빛이 부과된다. 그 빛은 지성으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계속해서 견지하게 만들고 진리속에 머물게 한다. 신의 은총이 여기서는 지성을 조명하는 신의 특별한 빛이다.  그것없이는 우리 지성이 지혜와 정의를 지향하지 못한다. 그리고 신적인 빛이어서  사물이 지성에 가시적인 것들이 되게 만들고, 또 지성으로서는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규준들을 지성에 가시적인 것이 되게 한다.

 

2.3  인간의 혁신


   누차 언급하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흥미를 끄는 것은 인간 지성이 감각적 표상에서 출발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서 추상적인 보편 개념으로 나아가느냐는 상승적 방향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감각적인 인간이 초감각적이고 불변하는 어떤 준거에  따라서 사물을 판단하는 기능을 갖느냐는 하행적 방향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가 되는 것은 인간이 잠시적인 사물에서 영원한 가치로 소급하는 작업(ad aeterna regressio)이며, 이  작업을  일컬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학적  혁신"(in  novum hominem reformatio)이라고 한다. 앞에서(2.2) 인용한 구절(참된 종교 39.73)에서 "추론이 이 진리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발견할 따름이다"는 문장이 "발견되기 전에도 스스로 존재하고, 발견될 때에는 우리를 쇄신할 따름이다(et cum  inveniunturnos innovant)"라는 구절로 끝남을 유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이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육체가 감지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하고 훌륭한 것만을 인식하는 것일까?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대상에서 자극을 받아서 우리는 판단을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며,예술의 작품에서부터 예술의 법칙으로 소급하게 된다... 이것이 잠시적인 사물들로부터 영원한 사물에로의 소급(遡及)이며 묵은 인간으로부터 새 인간에로의 혁신(革新)이다"(참된 종교 52.101).


   불변의 진리가 개별 지성에 내밀하게 존재한다고 할 때에, 지성이 그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그 진리에 비추임받아 단순히 물체적 사물들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비물체적 사물들을 인식하고 참다운 삶을 살게 만드는 데에  의의가 있음을 암시한다.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오직  하나 전인적 완성, 즉 현세와 영원을 통틀어 자기를 성취하는 것이며, 순수한 종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구원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를 올바로 찾는다는 것은 진리 자체인  신을 찾고 사랑하려는 유일한 목적으로만 참다운 진리 추구이며, 그것은 해방과  정화의 과정이 된다. "하느님, 당신은 정화된 사람들이 아니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나이다"(독백 1.1.3).

 

2.4  진리에 관한 정의


   우리 인식의 궁극 대상은 물체적 사물도 아니고 우리 지성도 아니고  우리  지성과 사물을 초월하는 진리이며, 그 진리에 기인하여 우리 지성과 사물과 가지적인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연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정의내릴  것인가? 그의 정의들이 한데 모아진 구절이 있다(참된 종교 31.66). 긴 문장이지만 그대로 인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개념을 지적할까 한다.


   "적어도 허위라는 것이 있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는 것이 곧 진리임을 이해할 것이다.... 일자(一者)라는 원리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어느 모로든 하나의 단일체가 되 는데,어떤 존재는 홀로 존재하는 이 일자와 하도(완벽하게) 비슷해져서 그 일자를 완전히 성취하고 일자 자체가 되기까지 하는 일이 있음은 납득이 간다. 바로 이것이 진리이다. 태초에 계시는 말씀,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이신 하느님이시다.... 일자를 성취할 수 있었고 일자가 갖춘 그 존재가 된 데에 진리가 있다. 진리는 일자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자의 말씀이시요 일자의 빛이라고 불리운다. 그 대신에 그밖의 모든 것은, 존재를 하는 한에서는 일자와  유사한 존재라고 할 수 있고, 또 존재를 하는 한에서는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단  (진리는) 일자와 완전히 유사한 존재이므로 곧 진리가 되신다. 진리로 말미암아 진실한 것들이 진실한 것이 되며, 마찬가지로 (일자와의)유사성에 의해서 유사한 것들이 다 비슷한 것이 된다. 따라서 진리가 진실한 사물들의 형상(形相)이듯이, 유사성이 유사한 사물들의 형상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그만큼 진실한 것이 되듯이,    원리가 되시는 일자와 유사하면 할수록 그만큼 (밀도있게)존재하는 것이다. (말씀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형상이시며, 따라서 원리의 가장 높은 유사성이시다. 그리고 (원리 또는 일자와)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이유에서 그이는 진리이시다."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론은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진리에서 시작한다. 궁극존재 혹은 존재자체인 일자(一者 Unum)와 연관시켜서  그리스도교의 로고스를 진리(Veritas)로 명명한다. 로고스는 "일자를 성취할 수  있었고  일자가 갖춘 그 존재가 된 데에 진리가 있다(illa est veritas, quae id implere  potuit  etid esse, quod illud est)". 로고스인 "진리는 일자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며(illa est veritas, quae illud ostendit, sicut est)",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자의  빛이라고 불리운다.  로고스는 "진실한 것들의 형상(veritas forma verorum est)"이므로  이"진리로 말미암아 진실한 것들이 진실한 것들이 된다(ut  enim  veritate  sunt  veraquae vera sunt)".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와 진리를 항상 동일시한다. "오 진리이시여, 참으로 존재하시는 이여!(O Veritas, quae vere es!)"(요한복음 강해 38.8.10)라고  불리우는  신은 또한 "저 원초의 존재자,  진리라고  불리우는  존재자(prima  illa  essentia,  quaedicitur veritas)"(영혼의 불멸 12.19)라고도 한다. 실상 로고스는 일자와 완전히  유사한 존재이므로 곧 진리가 된다. 그 대신에 그밖의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를  하는
한에서는" 일자와 유사한 존재라고 할 수 있고, 또 "존재를 하는  한에서는  진실하다(in quantum sunt, in tantum enim et vera sunt)"고 할 수 있다. 18)


   인식론적 진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가장 하급의 진리이다. "있는  그대로를제시하는 것이 곧 진리이다(eam esse veritatem, quae ostendit id quod est)".

 

2.5  진리요 빛인 하느님


   플로티누스 철학에 따라서 일자라고 부르는 성부와 로고스로 알려진 성자는 성령과 더불어 단일한 실체, 단일한 신성(神性)을 이룬다. 따라서 로고스에게 돌아가는  진리의 칭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단순하게 하느님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 되어도 신학적인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불러  "그에게서 모든 것이 기원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며, 그에게로 모든 것이 지향하는(ex quo omnia, per quem omnia, in quo omnia)" 존재, 곧 하느님으로  간주한다(창세기 축자 해석 12.24.50). "그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 그 아래  만유가  존재하고 그 안에 만유가 존재하며 그와 더불어 만유가 존재하는 하느님"(독백 1.1.4)이다.


   "(하느님과 한 실체를 이루는) 이 진리는... 만유의 형상이니, 그 모든 존재들이 그 일자에게서 창조되었고 그 일자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우리가 존재하고 그분을 통해서 존재하며 그분 안에서 존재한다.... 그분은 우리가 되돌아가는 원천이고, 우리가 뒤따라가는 형상이며, 우리가 화해하는 은총이다"(참된 종교  55.113).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저서에서 단수로 채택하는 "진리(Veritas)"라는 단어는  거의 언제나 "하느님"과 동의어가 된다. 결국 그의 폭넓은 존재론적 사고의  틀에서  볼때에, 진리가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며, 진리로부터 오는 조명이 있을때만 우리 지성에, 상위적인 인식인 이해(intelligentia)라는 것이 가능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개념을 매개로 하여 하느님 앞에 현존하는 인간 지성이,  지성을 비추어 주는 빛으로서 인간 지성에 현존하는 신에게 건너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시편(36.10)의 한 구절,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in lumine tuo videmus lumen)"라는 구절을 이 문맥에서  빈번히  인용한다. 또 "우리는 참된 모든 것을 신 안에서, 신으로부터, 신을 통하여 본다"는 말이 가능한 것은 모든 진리가 참이 되는 그것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신)  신께로부터  기원하기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을 "우리를 조명하는 아버지(Pater illuminationis nostrae)라고까지 부르듯이, 하느님은 빛이며 그 안에서,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가지적인  것들이 가지적인 것이 된다. 신은 빛의 아버지로서 우리 지성을 비춘다. 그러니까 신이 곧 진리이다. 참된 모든 것이 그를 통해서 참이 된다. 앞에(1.5)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당신이야말로 항상되신 빛(lux es tu permanens)! 내가 온갖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지, 그 어떤 것인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물을  때마다(quam  de  omnibus consulebam) 가르치시고 분부하시는 소리를 들은 까닭입니다"(고백록 10.40)는 구절로 이어지는 것처럼, 지혜를 향하는 모든 탐구와 추구가 그를 통해서 성취된다.

 

2.6  진리인 하느님을 향하여


   그러므로 진리를 향하는 지성의 역동성은 신을 향하는 도약이요,  인간의 모든  진리 인식은 진리 자체이신 분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따라서 사물을 올바로 인식함이란, 무엇보다도 지성이 발견해가는 "이" 진리 혹은 "저" 진리가 원초적 진리가 아님을  알고, 오직 그 원초적 진리의 표지 혹은 자취임을 깨달음이다. 구체적으로 만나는 이 진리 혹은 저 진리가 참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통해서 인식된다는 사실을 깨달음이요, 단편적인 진리들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원천, 그 진리들이 참되게 만드는 원천을 희구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는 그 하나 하나가 신을 증언하는 것이다. 지성은 그 본성상 부분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획득할 때마다 진리 자체를 향하는  그  열망, 더 높은 것을 보려고, 진리 자체 안에서 보려고 하는 열망이 더 커진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 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나이다"(고백록 10.27).


   사실상 존재근거인 신적 지성으로부터 조명을 받기 때문에 인간  지성은  수동적인 매개체로 만족하여 안주하지 못하며, 단편적 진리들을 파악하면 할수록  진리에  대한 갈증과 허기는 더욱 강렬해진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에서 얻은 경험적  결론이다. 더 높은 것을 보려고, 신 안에서 궁극적인 것을 보려고 하는 열망이 더  커진다. 우리가 만나는 단편적인 진리들을 그 자체로만 본다거나 단편적인 진리들을  절대화하면 그 단편적인 진리들마저 사라져 버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철학함을 호기심(curiositas)이라고 격하시킨다. 호기심 이상의 올바른 지성일 때에 오성 안에서 진리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신에게 연관시킬 줄 알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성 자체를 신에게로 끌어가는 것이다(de temporalibus ad aeterna regressio). 왜냐하면 지성이 보는 진리들이 신 자체가 아니고 그 진리들만 가지고서는 신을 전적으로 알  수도  없어서, 그 단편적인 진리들이 갈수록 이성을 자극하고 충동하여 신께로 떠밀고  가는  까닭이다. 인간의 인식활동에서 발견하는 모든 진리를 의식적으로 진리 자체와 결부시켜  나아가고, 그 이상의 진리에로 부단히 상승해 갈 때에, 그 인식자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다"(삼위일체론 14.15.21).


   바로 그런 뜻에서 인간은 신적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들을 본다고도 하고 모든 진리 인식에서 하느님을 본다고도 한다.


III.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

 

3.0  신에게로의 소급


   인간의 지성은 어떤 고유한 규제 원리에 입각하여 작용하며, 감각  세계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같은 인간 안에서도 경험에 근거하여 추론 기능을 하는 이성(ratio)이있고, 그보다는 상위에 있는 오성(intellectus)은 직관으로, 즉 감각의 중재 없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이념에 근거하여 사물들을 (진선미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인간이 진리를 의식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 또는 지성의 상위 부분인  오성으로한다지만 오성 역시 가변적이라고 할 때에, 지성이 물체적 사물을 판단하거나  인간이무엇을 인식할 때에 구사하는 규준들은 어디까지나 원천적 진리(Veritas)의 모상일따름이며, 따라서 지성에 인각된, 혹은 지성이 경험적 인식에서 판단의 근거로 삼는  이념들은 진리 자체는 아니고 원초적 진리의 반사물이라는 뜻이다. 그 반사물들이  지성의 빛이 되어 인간 오성을 조명하며, 인간 이성이 경험적 사물이나 인식적 사실에  관하여 참다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여하튼 만약 인간 지성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재를 지각한다면, 그리고  온  세상 모든 사물이 이 가변적이요 우연적이고 또 인간 지성까지도 가변적인 이상,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신은 존재한다!"는 의식(con-scientia)을 인간은 분명히 갖고 있는것이다. 19)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는 세계는 신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된 세계(esse creatum)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그 존재근거인 신과 존재론적으로 결부시킬 때에, 세계는  신의존재(유일하게 필연유이며 존재 자체이다)에 참여(參與)한다고 표현한다. 지성 자체인 신에게서 창조되었고 존재론적으로 신의 지성에 참여하고 있는만큼 사물들은 인간  지성에게 투명성(透明性)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 지성에 의하여 인식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는 존재계는, 플라톤의 사고대로, 반드시 상위의 존재자가 하위의 존재자와 그 작용을 규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여받는  근본  존재는 자기에게 존재를 의존하는 참여자들의 활동, 따라서 인식 활동도 규제한다. 그의 인식론 역시 참여와 규제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개진된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 판단의 최종준거가 되는 것은 신적인 지혜, 달리 표현하면 신 자체이거나, 로고스이다. 그 이상으로 소급되지는 않는다.20)


   아우구스티누스가 "영원한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o aeterna veritas...tues deus meus!)라는 명제에 도달하기까지 걸어온 기나긴 정신적 여정에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들의 관념이 등장하는 사상적 배경을 살펴 본다면, 그 진리들이 "필히" 영원한 보존자, 성서상의 하느님을 요청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에보디우스마저도  분명하게 선언한다. 사실상 Deus est Veritas!라는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논증적  맥락에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신 홀로 불변하고, 신만이 궁극적으로 우리 지성을 규제한다. 인간은 자신의  사고와  도덕심을  성찰함으로써,  수의  법칙(regulae numerorum), 지혜의 도덕적 법칙(regulae sapientiae)이 존재함을 실감한다.우리가 감지하는 이 영원한 진리들(veritates aeternae)은 엄연한 사실이면서도  인간 지성과 세계 및 사물들의 가변성과 잠시성으로 미루어 당연한 것(self-explanatory)으로 비쳐지지 못하고 아무래도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엄연히 존재하고 우리 사유를 규제하는 이 진리들을 설명하려면 영원하고 무한하고  유일무이한 진리(Veritas aeterna, infinita et unica), 진리 자체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고이다.

 

3.1  신존재 증명 21)


   "영원한 진리로부터의 신존재 논증"으로 통칭되어 전해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증은 사실상 "진리로서의 하느님(Deus Veritas)"을 향하는 그의 심리적 상승을 도식화한 작업이었다. 회의론에 빠져 방황한 경험이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바탕이 불변의 궁극 진리라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대는  불변하는 진리께서 존재함을 결코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진리란 불변하게 참 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런 진리입니다(incommutabilem veritatem, haec omnia  quae in commutabiliter vera sunt continentem)"(자유의지론 2.12.33).


   아우구스티누스가 개진하는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은 철학서 성격이 짙은 <자유의지론 De libero arbitrio>에 선명하게 나타나고 그 책의 제 2권 전체의  내용이  이 명제의 해설이라고까지 일컬을 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체험을 에보디우스에게 호소하는  형식의  논증(argumentumad hominem)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논증에서 보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는, "만일 진리들이 존재한다면 진리 자체가 존재한다(si vera sunt, est Veritas)"는  대전제를 미리서 설정하고서, 그런데  인간  인식을  반성하건데,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들(formae, ideae, rationes)은 분명히 존재하므로 "진리들은 존재한다"는 소전제를  제시하고서는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고 결론을 짓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진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Veritas  est,  ergo  Deusest)"라는 생략형 삼단논법으로서 함축적으로 파악해야만 "진리는 하느님이다. 그런데 진리가 존재한다. 따라서 하느님이 존재한다(Veritas Deus est. deinde veritas  est. ergo Deus est.)"는 형태로 복원된다. 22)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자유의지론 1.15.39)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 지성보다 상위에 있는 무엇이 있음을 내가 입증해낸다면, [그리고] 만일 그 보다 더 상위의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고백하겠노라고 수긍했습니다. 그대의 수긍을 일단 받아들이고서 다음의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충분한 [증명을 제시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즉 만일 [진리를 파악하는 인간의 지성보다] 탁월한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느님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지성이 준거로 삼는 그] 진리 자체가 곧 하느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을 초월하는] 무엇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느님이 존재함을 그대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23)

 

3.2  이 논증의 신개념


   이 논증을 형식상으로 성립시키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보디우스의  입으로 신을 "그보다 상위의 존재가 없는 존재"(quo nullus est superior)라고 정의하게 유도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에보디우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간다(자유의지론2.6.14):


   "아우구스티누스: 존재한다는 것을 그대가 의심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 지성보다 탁월하다는 것을 그대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하느님임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에보디우스: 나의 자연 본성 안에 있는 가장 훌륭한 것보다 탁월한 무엇을 발견할 수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것을 신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보다 나의 지성이 열등한 그 존재라고 해서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마음이 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훌륭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quo nullus est superior)라면 [신이라고 부를 마음이 납니다]."


   이같은 신개념과 논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종교 De doctrina  Christiana>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말해서, 신이라고 하면 "최상의  존재"라는 막연한 개념을 떠올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분이 하나밖에 없는, 신들의 신이라고 여겨질 때에는... 그 생각이, 그보다 더 훌륭하고 더 고귀한 것이 없으리라는 어떤 것(aliquid, quo nihil sit melius atque sublimius)을 개념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지성을 통해서 신이 무엇인지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신을 가견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본성들, 지성적이고 영적인 모든 본성들에 앞세운다. 그 모두가 신에게는 탁월함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보다 훌륭한 무엇이 있는 한, 그것을 신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밖의 모든 사물보다 앞세우는 것(id, quod ceteris rebus omnibus anteponunt)이 신이라고 하는 데는 모든 사람이 의견을 함께한다"(그리스도교 교양, 1.7.7). 신개념을 일단 정의하고서 인간 지성에 규준이 되는 진리가 인간 지성보다  탁월함을 주지시키고, "만일 인간 오성보다 탁월한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최고 존재(summum esse)여야 한다. 최고유보다 상위의 존재가 또 있다면 바로 그 존재가 신이어야 한다"는 논법을 구사한다. 24)


   요점은, 에보디우스가 [최고존재 = 신]이라는 도식을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두번째 명제대로 진리 자체(ipsa Veritas) 위에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야 한다고 답변하는 것이다. 실상 수의 법칙(regulae numerorum)이나 예지의 법칙(regulae sapienti-ae)에는 궁극 진리의 영상(imago Dei)이 반영되고 있으니, 존재상의 원천은 그것에 참여하는 존재자들과 불가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법칙들을 보는 눈은 그  원천을 한 눈에 보는 것이다. 이런 논법을 감히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직관이 논증을  배제하는 것 아니고 함축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다. 수의 법칙들은 영원하고 불변하다. "인간 영혼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무엇을 소통해 줄 존재는 신말고 누구겠는가?"라는 그의 자신감이다. 25)


   "이성적 영혼 위에 있는 불변의 본성이 곧 하느님임(incommutabilem naturam, quae supra rationalem animam  sit, deum esse)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울러 원초적 생명과 원초적 유(有)는 원초적 지혜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는 것도 이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지혜야말로 다름 아닌 불변하는 진리이고, 이 진리가 의당히 모든 예술의 법이라 불리우고 또한 전능하신 예술가의 예술이기도 하다(hac est illa incummutabilis veritas, quae lex omnium artium recte dicitur et ars omnipo- tentis artificis)"(참된 종교 31.57).

 

3.3  Deus ut Veritas


   이 논증 형식은 인간 오성이 벌이는 직관 활동을 논거로 해서 신의 존재를 즉각 주장하는 생략형 삼단논법이라고 하였다. "진리는 하느님이다"라는  대전제를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 지성이 준거로 삼는 그] 진리 자체가 곧  하느님입니다(ipsa veritas Deus est)"라는 논리적 비약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우리  오성을 규제하는 준거 또는 존재가 반드시 최고 존재 또는 그리스도교의 신일까?
   여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제하고 있는 삼단논법이 또 하나 숨겨져 있다. "신은 형상, 최고의 형상이다(Deus est Forma, suprema Forma)." "그런데 진리라는 것은  하나의 형상이다(deinde veritas est aliqua forma)." "그러므로 진리가 있다는 것은 신이 존재함을 지시한다(ergo verum esse indicat Deum esse)."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가 존재와 인식의 틀로 사용하는 "참여의 원리"에  입각하여  본다면,  모든  "참된  것(veum)"  또는  "진리들(veritates)"는  궁극적   "진리(Veritas)"에 의거해서 참이요 진리가 된다. 또 불변하고 영원한  것에  참여한다함은 그 원천이 되는, 불변하고 영원한 사물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래서  "그  자체로(perse)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에 도달케 되고 그보다 위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소급(無限遡及)을 개진하는 셈이고, 무한소급을 내세우는 사람은  그 자체로는 유한하고 가변적이면서도 불변하고 영원한 진리들을 갖추고 있는 인간  지성의 신비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우리가 인식활동에서 반성하여 파악하듯이, 수의 법칙이나 도덕률에  관한  지혜의 법칙들에는 불변하고 영원한 요소가 분명히 있다. 인간 정신은 그것들에 의해서  살고 그 법칙과 규준에 의해서 움직인다. 따라서 최고 진리(Veritas suprema)는  존재한다 .그가 곧 종교인들이 말하는 신이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이  본체론적으로설명하였다는 이데아, 형상 혹은 진리들은 곧 신의 지성 안에 있는 이념,  혹은  신의 이념이라는  도식을  내어  놓는다.  "이  이념들은  창조주의  지성(in  ipsamente Creatoris) 아니고 다른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De div.quaest.83 q.46).그렇지만 가지적 형상 또는 진리와 신 또는 신의 로고스라는 논증은 없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동일성을 마치 신앙의 요소처럼 논리적 전제로 삼고 있다.26) 진리는 진실한  사물들의 형상(veritas forma verorum: 참된 종교 31.66)이며 그 진리는 신의 로고스와 동일시되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결국  진리는  만물의  형상(veritas  forma omnium)이라는 결론으로 유도된다.


   "이 질서의 기준은 영원한 진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기준 없이는 아무 물체도 물체로 존재할 수 없고 아무 운동도 운동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 진리는... 만유의형상으로서 (만유에) 앞서 있다(veritas quae ... praecessit enim forma omni-um)"(참된 종교 43.81).


   이 전거들은 존재와 인식을 고전적으로 통일시키고 있다. 인간 지성이  직관한다는 불변의 형상 또는 이념은 "참으로 또  최고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cum  ipsa  vere summeque sit)"(참된 종교 3.3). 존재론적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 기반이 되는 것은 사물들의 존재이며,  무엇이 "참되다"(verum  esse)는 것은 "참으로  있음"(vere esse)을 가리키고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할 적에  우리는  그것이  항속하는(manere) 한에서 그렇게 말한다"(서간집 18.2).


   그래서 <자유의지론>(2.16.44)의 다음 논증은 <진리로서의 신존재 증명>을  보완한다.   "그대가 육체의 감관이나 정신의 사유를 갖고서 어떤 가변적인 사물을 관찰할 때에, 그 사물이 수(數)의 어떤 형상(形相)에 의해서 존속하고 있지 않는 한, 그 사물을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형상을 상실하자마자 그 사물은 무(無)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영원하고 불변하는 형상이 존재함을 의심하지 마시오.   그 형상은 가변적인 그 사물이 무로 환원하지 않게 하며, 오히려 일정한 운동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상들을 구분해 가면서, 마치 일정한 시간대(時間帶)를 통과하는 것처럼 [만듭니다]. 따라서 [어떤 영원하고 불변하는 형상이 있고] 그 형상은 공간에 분산되듯이 그렇게 연장(延長)을 갖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듯이 그렇게 연속(連續)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 형상을 통해서 그 모든 사물이 형상화(形相化)하고, 자기 고유한 종(種)에 의거하여 시간과 공간의 수[운율]를 채우고 실현하는 것입니다."27)


   그렇지만 진리에서 곧바로 하느님에게 건너가는 선언적 비약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초월하는 상위 실재를  발견한다는 것이 필히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초월성을 발견함으로써 인간 지성은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마련이라는 전제를 달고있었다."28)

 

결 론: 철학자는 신을 사랑하는 자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

 

4.1  "오 진리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을 진리로 호칭하는 구절은 무수하지만 가장 선명하기로는 고백록의 다음 구절이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o aeterna veritas et vera caritas et cara aeternitas, tu es Deus meus!),  그대를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내 처음 그대를 알았을 제 그대 나를 맞아들여,  내가 볼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나는 아직 볼 자격이 없는 것을 보여 주었나니....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 주었기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   었노라."(고백록 7.10)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지성이 더욱 상위의 빛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각별한 빛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빛으로는 신에  대한직접적인 직관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도 의식하고 있다. 바로 그 경지가  지성의  완성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의 이해(intelligentia)이며,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조명  혹은 지혜의 경지이다. "거기서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리 자체를 보게 될 것이요 지극히 명확하고 지극히 확실하게 진리를 향유케 될 것이다. 거기서는 지성으로  추론하여 무엇을 탐구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직관하여  의식하게  될  것이다(nec  aliquid quaeremus mente ratiocinante, sed contemplante cernemus)"(삼위일체 15.24.45).


   그러나 진리 인식과 신인식이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노라(contremui  amore  et  horrore)"는  신비적  체험(mysterium tremendum ac fascinosum)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사변적인  활동보다는 의지적인 사랑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제조건이 있다.


   "무릇 진리를 아는 이 그를 알고, 그를 아는 이는 영원을 아느니, 결국 사랑이 진리를 아는 법이로소이다(qui novit veritatem, novit eam, et qui novit eam novit aeternitatem. charitas novit eam)"(고백록 7.10).

 

4.2  철학적 안식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진실한 철학함, 은총의 작용으로 제일 진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성의 해방이요 안돈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여유의 안식을 찾는 것"(신국론 19.19)이기에 <고백록>을 닫으면서 그는 "주 하느님이시여,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었으니 평화도 주시옵소서. 정묵의 평화, 안식의 평화,  저녁없는 평화를(pacem sine vespera) 주시옵소서"(13.35)라고 기도한다. 그날은 보다 큰 진리를 향하여, 궁극의 진리를 향하여 타오르는 영혼의 그 쉴새없는 갈구(elan vital)가 멈추는 경지이다. "일곱째 시대는 우리 안식일이 되리니 그 안식일은  해넘이가  없을 것이며 오로지 주님의 날이 될 것이다... 그때는 (진리를) 쉬면서 보게 되리라.  보면서 사랑하게 되리라. 사랑하면서 찬미하게 되리라.... 끝이 없는 마지막! 우리의 마지막이란 끝없는 (진리의) 나라에 도달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신국론 22.30.5).


   온 젊음을 다바쳐 방황하고 탐색하고 갈구하던 그 진리를 그의 나이 설흔에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얼굴에서 발견하였을 적의  감회가  얼마나  컸던가는<고백록>에 구구절절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진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열정을 보여 주는 구절로는, 그의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이던 저 탄식, 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하는 사랑의 고백이 있다. 오, 진리여,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sero  teamavi).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고백록 10.27).

 

 

==각주==


1)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이류는 파스카의 신비(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있어서  하느님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였다는 해석학에 경악한 사람들(예:1고린 1,18-25)은 신의 역설적인 배려 앞에서 인간의 철학적 지혜라는 것을  최고가치로 간주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이미 바울로의 전승에서 시작한다.
  "헛된 철학의 속임수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들어서 전해준 것이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닙니다(골로사이 2.8)"라는 경고에서 발원한 잉  장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유명한 명제, "역설이기에 나는 믿노라!:(credo, quia absurdum est)f로 대변된다. 이런 전통은 주로 라틴계 교부들에게서 나타난다.

2)우리말로 간행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적 전기로는 Carlo Cremona(성염 역), <성아우구스티누스전> (성바오로출판사 1992)과 Peter Brown(차종순 역),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예장총회출판국 1992)이 있고 소설체 전기로는 Luis de Whole(조철웅 역),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 (가톨릭출판사 1993)이 나와 있다.

3)(악이 어디서 유래하느냐는 의문이 나를 이단 사상에 깊이 떨어뜨렸을 적에) "진리를 발견내고 말리라는 사랑이... 저 자유, 의문을 제기하는 원초의 자유에로 돌이켜  숨을 돌리게 해 주었다."(amor inveniendi veri... in ipsam primam quaerendi libertatem respirare: 자유의지론 1.2.4).

4)<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는 분도출판사에서 필자의 해제와 역주로 라틴어-우리말 대조본으로 출판되어 있다. 본고에 참조될만한 필자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것  이 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찾아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사랑과 하느님 사랑"  강성위 교수 화갑논문집,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근간); "철학과 종교: 철학과 종교의 이론적 접합면과 그 배경"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편, <인문과학> (근  간); "아우구스티누스의 ESSE 개념: 스콜라 존재론으로 전위되는 계기" <철학>  33(1990 봄), 153-171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적 지각론에서 지향(指向)의 역할:

  삼위일체론 XI 1.1-2.5를 중심으로" 한국현상학회편,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의식 지향성> (서광사 1992), 15-52면.

5)"정신이 육체와 결합하여 생명체가 되는 그 신비하며, 참으로 인간에 의해서 깨달아  질 수 없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omnino mirus est, nec comprehendi ab homine  potest, et hoc ipse homo est)"(신국론 21.10.1).

6)"뜨거운 열로 목이 탈 때에 시원한 샘물을 만나는 사람은 행복하다.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푸짐한 밥상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영혼이 진리로 적셔지고 보양 받을 때에 인간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nos beatos esse cum irrigamur pascimur- que veritate)을 누가 부정하겠는가?"(자유의지론 2.13.35).

7)"지성이 직관하는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저러한 것들이 진리가 아님을 그대가 인식하게 만드는 그 빛이 바로 진리이다(illa lux vera, qua haec non esse vera cognoscis). 이 빛을 통해서  그대는... 다른 사물을 볼 적에 그것이 무엇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다"(참된 종교 34.64).

8)"인간은 그 오성 때문에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오성 덕분에 인간은 하느님께 가깝고, 그 오성 덕분에 하급 피조물들과 공통된 요소들을 모두 초월한다"(신국 11.2).

9)"우리가 지성으로, 다시 말해서 오성과 이성으로 인식하는 사물들에 관한 한, 진리의 내적 빛 속에(in illa interiore luce veritatis) 현전하는 것으로 우리가 직관  하는 것이며, 내적 인간이라 부르는 주체가 그 진리의 빛에 의해서 조명받고 그 빛을 향유하는 것이다"(교사론 12.40).

10)"육안으로가 아니라 순수 지성으로 진리를 보는 법이다... 정신이 정화되어야만 사물의 불변하는 형상(rerum incommutabilis forma)을 직관할 수 있으며... 공간상으로도 분리가 되지 않고 시간상으로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다"(참된 종교 3.3).

11)Cf., Goulver Madec, "Verus philosophus est amator Dei(De civ.Dei 8.1)" Revuedes Sciences philosophiques et theologiques 61(1977) 549-566; * M.T. Antonelli, "Aspetti agostiniani del problema del filosofare" in Augustinus magister (Paris 1955), III 335-345; Richard Schaeffler, "Philosophy: I. The Basic Questions, A: Philosophy: The Word and Its Many Meanings"  in Karl Rahner ed., Sacramentum Mundi(New York/ London, 1970) ad vocem.

12)참된 종교 1.1: "참 종교에 선하고 행복한 삶의 길이 있다(cum omnis vitae bonae ac beatae via in vera religione sit constituta).

13)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일에 다음과 같이 단언할 것이다. "인간 인식의 최고 경지라는 것은 아무래도 신을

인식함에 있다. 그러므로 인식의 최고 경지에 이르려면 철학 전체의 사유는 거의가 신에 대한 인식에로 정향될 수밖에 없다"(ut summum
   gradum humanae cognitionis attingerent, qui in cognoscendo Deum consistit...
   cum fere totius philosophiae consideratio ad Dei cognitionem ordinetur: Summa

   contra gentiles 1.4). 이것은 "실제로 철학의 고유한 대상은 신뿐이다. 적어도 철학의 목표는 신을 알고 인식함에 있다."고 언명한 헤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inleitung in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J.Hoffmeister ed., Meiner 1959, p.71).

14)F.Copleston, History of Philosophy vol.II (박영도 역), 중세철학사 (서광사 1988) 94-99면 참조. 플라토로부터 계승받은 이데아의 개념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인식 대상이냐, 판단의 범주냐는 논의는 다음 문헌들을 참조할 것: R.Jolivet,  Dieu soleil des esprits ou la doctrine augustinienne de l'illumination (Paris 1943); R.H.Nash, The Light of the Mind: St.Augustine's Theory of Knowledge  (Lexington 1969);B.Bubacz, St.Augustine's Theory of Knowledge (New York   1981).

15)이 조명설을 규범론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다음 전거에서 다시 확인된다: "온당하게 사리를 파악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물이 왜 우리 마음에 드는지, 그리고 어떤 사물이 더 좋다고 보이면 왜 그것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는지도, 감히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와 이성적 영혼들 전부가 진리에 의거해서 (우리보다) 하위에  있는 사물들을 올바로 판단하게 된다(secundum veritatem de inferioribus recte
   iudicamus). 그러므로 일성(一性)을 추구하는 모든 사물은 이 (진리를) 규준 또는  형식 또는 범례로 삼는다(hanc habent regulam vel formam vel  exemplum)"(참된 종교 31.58).

16)"우리 지성과 진리 자체 사이에는 어떠한 피조물도 간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는 우리 지성과, 우리가 그것을 인식케 만드는 내면의 빛인 진리 사이에는 여하한 피조물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이다(inter mentem nostram et  veritatem, id est lucem inteiorem nulla interposita creatura est)"(참된 종교 55.113). 감각이나 인식의 대상성을 표상하는 공간과 시간을 배제하는 다음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이 보인다면, 거기에는 빛이 있는 것이다. 공간의 간격도, 시간의 간격도, 그러한 간격의 표상도 없이 나타나는 빛 말이다"(참된 종교 39.73).

17)"지성이 직관하는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진리가 아님을 그대가 인식하게 되는 그 빛이 바로 진리이다(illa lux vera). 이 빛을 통해서 그대는 저 일자를 보는 것이며, 다른 사물을 볼 적에 그것이 무엇무엇이든 간에 저 일자를  근거로 해서 그대는 그것을 단일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동시에 무엇이든 가변적인  것은 그 일자 자체와 동일할 수는 없다는 것도 (이 빛을 통해서 파악한다)"(참된 종교 34.64).

18)"무릇 진리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것이 된다면, 또 진실한 그만큼 온전하게 존재하게 된다(siquidem veritatem eam dicimus qua vera sunt omnia in qunatumcumque sunt, in tantum autem sunt in quantum vera sunt)"(영혼의 불멸 12.19).

19)F.J.Thonnard, VI. Dialogues philosophiques, III. De l'ame a Dieu: De libeo arbitrio, pp.521-523 nota 29: intuition et principe de participation; pp.519-521 n.28 Le principe de subordinatio ou regulation.

20)"[그 원초적 지혜에] 대해서는 아무도 판단을 내리지 않으며 또 그 지혜없이 올바로 판단을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지혜가 우리 지성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지혜에 의해서 [인간] 각자의 지성이 지혜로워지고,[인간 지성은] 그 지혜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에 입각하여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입니다"(자유의지론 2.14.38).

21)이 증명의 배경과 삼위일체론에 의한 한계점 등은 다음 문헌을 참조할 것:  Lloyd Philip Gerson, "Saint Augustine's Neoplatonic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Thomist 45(1981), 571-584; Robert Kress, "Veritas rerum. Contrasting Cosmic Truth in Hellenistic and Christian Thought" Thomist 50(1986), 1-27; Salvatore Nicolosi, "La filosopfia dell'amore in Sant'Agostino" Orpheus6(1985), 325-349.

22)진리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로 건너가는 논법은 플로티누스의 것이다.
   "가지적인 것은 누스(Nous) 밖에 있지 않다"((intelligibilia numquam extra mentem)는 전제로 시작한다. 만일 가지적인 것이 안에 있지 않다면 진리 인식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에, 지성은  진리 자체가 아닌 진리의 표상만 파악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의 인식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가지적인 것들은 누스 안에 있다(Enneades 5.3.1).
   만일 "가지적인 것은 누스 밖에 있지 않다"면,  "형상은 가지적이고 영원하다. 형상이 영원한 실재이므로, 그것을 인식하는 누스 및 누스의 활동도 같다."고 발전한다. 이념의 존재로부터 누스의 존재로 건너가는 논법이 등장한다(Enneades 5.3.5).

23)De libero arbitrio 1.15.39: tu autem conceseras, si quid supra mentes nostras

   esse monstrarem, Deum te esse confesssurum si adhuc nihil esset superius. sienim aliquid excellentius, ille potius Deus est: si autem non est, iam ipsa  veritas Deus est. sive ergo illud [= aliquid supra mentes] sit, sive non sit,    Deum tamen esse negare non poteris.

24)비슷한 논법을 다른 초기 저서에서도 볼 수 있다: "진리는 어떤 절대법도(summus modus)로 말미암아 진리로 존재하는 법이니, 즉 진리는 절대 법도에서 출발해서 절대법도에 도달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런데 이 절대법도 위에는 다른 법도라고는 있을 수가 없다(ipsi autem summo modo nullus alius modus imponitur). 왜냐하면 만일 절대법도가 절대법도에 의해서 법도가 된다면, 결국 스스로 법도가 되기 때문이다."(행복한 삶 4.34).

25)추측컨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증명(demonstratio)이라는 것은 자기 영혼의 정상(acies mentis), 곧 오성에 빛나는 "영원한 진리"의 빛을 본인이 직접 체험한 사실에서 기인하고, 또 우리에게 진리들의 영원한 원천(continens omnia)을 관상하라는 경건한 충고가 아닌가 한다.

26)"하느님은 진리이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하느님은 빛이시라고 하였다.(Deus Veritas est. Hoc enim scriptum est: quoniam Deus lux est)"(삼위일체론 8.2.3).

27)De libero arbitrio 2.16.44: si quidquid mutabile aspexeris, vel sensu corporis, vel animi consideratione, capere non potes, NISI aliqua numerorum forma teneatur, qua detracta, in nihil recedat.... esse aliquam formam aeternam et incommutabilem... quae neque contineatur et quasi diffundatur locis, neque protendatur atque varietur temporibus, per quam cuncta ista formari valeant, et pro suo genere implere atque agere locorum ac temporum numeros.

28)E. Gilson , Introduction a 'etude de Saint Augustin(Paris 1949), p.15.  후대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인식자는 인식하는 모든 대상에서 암묵적으로 신을 인식한다" (omnia cognoscentia cognoscunt impicite Deum in quolibet cognito)"는 명쾌한 주장을 폈다(De Veritate q.22, a.1, ad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