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m-1006.gif     단테의 세계평화론(世界平和論)

단테의 <제정론(帝政論)> 제 1권에 나타난
세계평화와 단일군주제의 철학적 연관성

 

 

1995 평화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1995) (121-164)

 I.  서  론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eghieri:  1265-1321),  일찌기  그를  두고  엘리어트(T.S.Eliot)는 "근대어로 표현한 시인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인물..., 인간  정염에다 가장 위대한 넓이와 가장 위대한 깊이를 부여하였다."고 평한 바 있다. 1)   중세 그리스도교 문명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 포괄적인 표현으로 간주되는 그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은  그리스도교가 지닌 구속과 심판의 놀라운 언어를 구사하여 묘사한, 인간 체험 전체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빛나는 통찰이며 이 작품에 나타난  단테의 정신적 순례를 따라가면서 인류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운명을 보다 심원하게  사색해 왔다. 그러면 어떤 메시지를 인류에게 남겼길래 그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뒤를 따라 명계(冥界)를 여행하였듯이, 인류는 이탈리아 플로렌스 시인을 길잡이로 하여 세계사의 정신적 여정을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가? 단테가 자기의 시세계(詩世界)에서 남긴 메시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류의 평화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다. <신곡>에서 단테는 자신으로 하여금 지옥과 연옥을 두루 거쳐 천국에 이르는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 오로지 `평화를 위하여'(per quella pace)라고 토로한다. 2)


   금세기 인류사의 가장 잔혹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世界大戰)을 경험하기 훨씬 전부터 인류는 세계평화(世界平和)라는 것을 꿈꿔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꿈이었기 때문에 현실 정치가들보다는 이념의 세계를 직관할 특전이 주어진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입에서  마치 신탁처럼 울려나왔으며 그래서 범상한 속인들은 여러 세대 때로는  수세기가  지난 연후에야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듣곤 하였다. 20세기를 닫아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류의 위대한 지성의 하나 단테 알레기에리가 인류의 영원한 과제, 즉 세계평화를 두고 사루어온 꿈을 돌이켜 봄은 결코 회고적인 취향만 아닐것이다. 3)

 

   본고에서는 단테의 중기 작품(1312-1313년)에 해당하는 <제정론(帝政論 De Monarchia>에 실려있는 단테의 보편평화(普遍平和 pax universalis) 혹은 세계평화(世界平和) 사상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데에 목표를 두기로 한다. 논문은 <제정론> 제 1권의 내용,즉 인류의 가장 큰 선익인 세계평화에 보편군주(普遍君主) 혹은 황제(皇帝)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단테의 주장에 범위를 국한시킬 것이다. 4) 그리고 <제정론> 제 1권의 철학적 논증을 위한 형식논리학적 구성을 일일이 논구하기보다는 단테의 평화 사상 전반의 관점에서 그의 군주론의 철학적 요체를 개괄할 것이다.


   <제정론>은, 당대의 유럽 지성인들이 흔히 하듯이, 라틴어로 집필되었다. 중세 라틴어인만큼 어휘도 고전 라틴 문장가들의 글처럼 풍부하지 아니하고,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엮어져 되어 있으며, 얼마 뒤에 출현하는 페트라르카나 에라스무스에게서 볼 수 있는 고전문장의 답습도 아니요, 수사학적 수식도 매우 드물다. 내용 전개 방식은 14세기 초엽의 고유한 스타일, 즉 중세적이고 스콜라적이다. 자기가 주장하는 명제를 첫머리에 제시하고 이어서 형식논리학의 삼단논법을 사용하여 꾸준하고 반복적으로 논증을 개진하는 방법이다. 5)


   단테의 <신곡> 및 <신생(新生 Vita nuova)> 외에는 우리말로 번역된 일이 없는 사정을 감안하여, 본고의 방법론은 <제정론>의 본문을 근거로 논술하는 문헌학적 방법이되겠다.

 

 

II. 단테의 평화 사상과 <제정론>

 

(1) 시대적 배경

 

   카노사의 굴욕(1077년)으로 기억에 남는,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소위 서임권논쟁(敍任權論爭 controversia de investuris)은 결국 보름스 정교 조약(政敎條約 1122년)과 제 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로 매듭이 지어졌지만, 13세기부터 양자의 패권 다툼은 이론과 실제 양면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1250년 이래로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는 대공위(大空位 Interregnum) 기간이 오면서 제권(帝權)은 그 권위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1273년에야 합스부르그가의 루돌프가 황제로 피선되고 그레고리우스 10세 교황(1271-1276)의 승인을 받는 형식절차가 이루어졌고 1279년 황제는 자기 직무를 교황으로 받는다는 이론에 승복하고 말았다.6)


   이어서 불란서 필립 4세와  교황 보니파치우스 8세 사이의 대결이  사실상  교황의 패배로 끝났으며, 알베르트 황제(1298년)를 겨냥하여  1302년에  보니파치우스  8세가 현세 권력 위에 영적 권력의 수장권을 공언한 칙서(Unam Sanctam)로 말미암아 그 대결은 절정에 달한다. 7) 거기다가 1305년 불란서인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당선되면서  신성로마의 황제권을 독일에서 불란서로 이전하려는 정치적 시도가 발생함과 동시에  불란서와 독일 두 민족국가의 패권  대결에  교황권이  말려드는  이른바  아비뇽  유폐(1309-1377년)가 발생한다.


    그러던 중 하인리히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뽑히고 몇 차례의 대관식을  가지면서 (1309.1.6 Aix-la-chapelle, 1311.1  Milano, 1312.7  Roma Laterano)  이탈리아에 진주하여 실추된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단테는  이  인물이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 전체에 정치적 평화를 확립해 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단테연구가들에 의하면, 1309-13년은 <제정론>의 구상 및 집필 기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하인리히가 교황의 승인하에 이탈리아에 진군하여 교황당과 황제당의 대결을  청산하려고 노력한 시대에 해당한다. 하인리히 7세가 밀라노에서 남하할 당시에 단테는 피사에 함께 있었고 황제가 플로렌스로 진군하자 단테는 군대를 떠나서 황제의 측근들을 수행하여  로마로  여행한다. 그리고 황제가 플로렌스 공략을 중단하고 로마로 내려오자 라테란에서 있었던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당시 로마와 교황의  간교한  이중외교와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의 정치개입을 목격하면서 정치적 불안과 전쟁의 원인이  교황권의 속권 개입에 있다는 소신을 재확인하기에 이른다. 대관식 후에 다시 황제를 수행하여 플로렌스 가까이까지 갔지만 황제의 플로렌스 공격에는 수행하지 않고 갑자기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은거하며(Catria산 근처의 Fonte Avellano에 있는 어떤  수도원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1312년말이나 1313년초에 <제정론>을 집필한다.


   1312년 교황의 치밀한 이중외교로 나폴리의 로베르토 국왕이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9월에는 황제의 플로렌스 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황제 측에서 "모든 인간은 로마 황제에게 종속된다"는 선포를 하는가하면  (1313.4.26)  불란서 필립 4세 국왕의 수중에 있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에서 이에 반발하여  제권이 만인을 포괄하는 주권임을 부정하는 칙서(Pastoralis cura: 1313.6.13)를 내는 등  이론적 공방을 벌이지만 황제 하인리히가 나폴리로 진군하다가 병사하고(1313.8.24)  이듬해에는 교황도, 필립도 사망함으로써 이탈리아에 신성로마제권을 확립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무너졌고 단테가 이 인물(alto Arrigo)에게 걸었던 꿈도  무산된다.  그때부터 단테의 정신 세계는 정치현실에 대한 꿈을 버리고 <신곡>  집필에 착수하였고 7년여에 걸쳐 인류사의 이 대작을 마쳤는데 그 뒤 얼마 안되어 라벤나에서   서거한다(1321.9.14).

 

(2) 단테의 평화 사상 개관

 

   서구 사상사에서 만인의 보편적 평화를 예언하고 노래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기원전 5세기 히브리인 예언자 이사야, 서기 1세기 로마의 서사시인(敍事詩人) 베르길리우스,13세기의 정치사상가 단테 알레기에리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철학자 칸트를 덧붙일 수 있다)를 꼽는다면 그다지 심한 반대가 없을 것이다. 단테에게서는 평화의 종교적인자와  정치 사회적 인자를 분리해내기 힘들고 인간들 사이의 평화가 종교적 색채를 강렬하게  띤다. 지상 백성들 사이의 조화와 화해가 늘 천상 조화의 거울이요 낙원의 평화를  비춰주는 영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단테에게서 우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두  사조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감지한다.


   구약의 예언서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왕국  후반기에  활약한  예언자  이사야(BC765-700?)의 신탁들(1-39장), 그리고 바빌론 유배중에 이스라엘인들에게 희망을  일깨워주고 사라지면서 학계에 '제 2 이사야'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인물(fl.BC 550-538)의 신탁들(40-55장)로 꾸며져 있다. 이사야는 자기네 민족의 하느님 야훼를 `평화의 임금'(sar  salom)이라고  불렀고, 이스라엘 민족과 천하만인의 평화를 역사의 주(主) 하느님의 능동적인 개입에서  기대하였으며, 전쟁과 패망 그리고 민족전체의 강제이주와 유배 중에서도 력사의 미래지평에로 시선을 돌리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이 평화로이 공존하는 이상향(理想鄕)을 노래하였다.


   그런가 하면 베르길리우스(Publius Maro Vergilius: BC 70-19)는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한 세기에 긍한 내란을 종식시켜 소위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ea)를 성취한 시점에서 로마 제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궁구하였고, 불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s>에서 역사의 시원에 있었던  태평성대(aureasaecula Saturnia)와 역사의 현시점에서 성취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결부시켜 세계 평화에 대한 인류의 영원한 꿈에 구체적인 패러다임이 가능함을 주창하였다.


    일찌기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했던 로마의 평화가 4세기만에 악취 속에서 무너진 뒤에도, 그리스도교를 중추로 하는 지상의 평화의 이념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부활하여(AD800) 다시 그만한 세월을 보낸다. 신성로마제국이 약화된 다음에도  서구에는  평화의 보루로 그리스도교회가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평화에 대한 단테의 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로는 1304-1307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향연>과   1312-1313년에 집필된 <제정론>에서다. 단테는 중세 시대의 가장 명민하고 섬세한 지성이 바라본 세계 평화, 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전망을 갖는 평화를 동경하고 노래한다.

 

[1] 정치적 평화

   단테에게 평화(pax)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정치사회적 개념이며, 전쟁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두 정치 집단 사이에 화합과 정상의 관계를 가리킨다. 단테의 관심에서 이차적인 비중을 갖는다. 한 정치공동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평화이며,  지나간 세월을 이상향으로 그리는 인간습성으로 말미암아서인지 단테 역시 일찌기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하던 `아우구스투스 평화'를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삼고 있음을 여러 저서에서 엿볼 수 있다. 8) 단테가 말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그의 역사  철학에 비추어 보건데 단순히 일회적인 역사적 事件에서 그치지 않고 섭리적이고 메시아적 성격을 띠는 하나의 범례(凡例)가 된다. 독수리 깃발(aquila imperialis) 아래 이룩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시인은 <신곡>에서 `세상을 평화 속에 둔' 위업으로 승화시킨다.

 

   저이와 함께 그것[독수리]은 붉은 해안에까지 치닫고
   저이와 함께 세상을 평화 속에 두어
   야노에게 그 신전을 닫게 했나니라. (천국편 6.79-81)

 

   만약 신의 섭리에 따른 역사적 범례가 그렇다면, 인류가 정치적으로 보편적 평화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로마 제국처럼, 구체적인 군사, 입법, 행정의 권력을 보유하고 실제로 발휘하여 국가들과 민족들간의 모든 분쟁을 해소시킬만한 보편제국(普遍帝國)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신념에 단테는 도달하였다. 이탈리아가 당하고 있는  전쟁과  당쟁의 살륙 근저에는 속권(俗權)을 추구하고 행사하는 교황권(敎皇權)의 무질서한 탐욕이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하였다. <제정론> 제 3권에 잘 나타나지만, 바로 교황권의 무분별한 권력욕  때문에 보편제국이 유명무실할만큼 약화되었고 보편적 평화가 원천적으로 장애를 받는다는 것이 단테의 견해이다.


   <향연>에서부터도 단테의 사상에 있어서, 세계평화라는 인류 행복의  여건은  중세 개념에 의하면 단일군주(單一君主 unus Monarcha), 만민을 통치하는 단일군주, 혹은(고전적인 개념에 의하면) 황제(皇帝 Imperator)의 이념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그 군주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 더 이상 무엇을 욕구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국왕들이 자기네 영토의 경계선 안에서 자족하도록 제어할 수 있을 것이고,  왕국들간에 평화가 깃들이게 만들 것이며, 그 속에서 도시 국가들이 안주할 것이다. 또 그러한 안정 속에서 마을들은 서로 위할 것이요 그 사랑 중에 집안들은 각자의 필요를 충당해주고 그 속에서 개인들은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함이다(che e quello perche esso e nato)." (향연 4.4.4)

 

그러나 단테가 보편적 평화를 보다 분명하고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제정론>이다.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교황의 지상권(至上權)이 세상 군주들 위에 위치한다는 지론자들을 단테는 똑같은 평화의 이름으로 논박한다. 단테 이전의  교황권  옹호론자 들도 교황의 속권을 내세울 때에 반드시 `평화를 위하여'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황제권 옹호론자들 역시 평화의 이름으로 나섰다.

 

[2]  평화는 최고선(最高善)

   단테가 말하는 평화, 보편적 평화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하는 `평온한 질서'(tranquilitas ordinis)를 인류 가족 전체의 온전한 안녕으로 확대한 것이며,  <향연>에서는 평화를 최고선과 동일시하고 <제정론>에서는 초월적 목적에로까지 승화시킨다.


우선 평화는 인간의 본질과 가장 적합하고 인간의 자기완성 (특히 집단으로서)에 가장 먼저 요구되는 무엇이다.

   "모든 사물은 자기 완성을 최고도로 열망하며, 그 완성에서만 그 사물의 모든 열망이 잠잠해지고, 그 완성을 보고서 일체의 사물이 또한 욕구된다....   그리고 바로 이 완성, 이승의 인간들이 극진히 사랑하는 이 善은 평화를 보다 많이 누릴 때에야 얻는다"(향연 3.6.7-8)

 

   그런데 단테의 사상에서도 정의(正義) 없이는 평화(平和) 없다. 정의와 평화의 상관관계는 서구사상의 본류에 해당하며 그것이 성서에서 발원하였음은 물론이려니와, 단테에게도 정의는 신적인 무엇이다. "정의 없이는 땅위에 평화가 없느니라."(Rime105.14) <제정론>(1.11)에서도 단테는 기다란 장을 할애하여 정의를 구현할 심성과 실력을 갖춘 군주만이 세계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평화(平和)와 진리(眞理), 오성적 인식 혹은 진리와 인간의 사회 정치적 평화를 관련시키는 특유한 사조가 단테에게서 나온다. 이것은 일찌기 구약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이사야는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딩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는 태평성대를 노래하면서 그것을 `야훼를 아는 지식'과 결부시켜 그리스도교 평화관에 전수시켰다. 진리,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아는 참 지식은  평화의 한 결실이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단테는 참 지식 곧 신학이나 철학을 평화와 연관짓는다. 단테는 하느님이 계시며 존재계의 핵심이 되는 구천(九天 cielo empireo)에서 평화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서술할 뿐더러 신학 지식과 평화를 존재론상으로  결속시키고 있다.

 

   "구천은 그 평화로움 때문에 가히 신적지식과  흡사하다. 그 지식은 평화가 충만하고 오로지 평화뿐이다. 신적 지식은 의견 충돌이 있을 수 없고 미묘한 논쟁도 없다. 하느님이시라는 그 주체가 탁월하게 확실한 까닭이다. 그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며 내 평화를 너희에게 남기노라' 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사실은 당신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남기셨으니, 내가 이야기하는 지식이 바로 그런 것이다."(향연 2.14.9)

 

"평화가 충만한 신성한 지식"(la Divina Scienza piena di tutta pace)이 인간의 현세적 차원에서는 철학이라는 귀부인(Donna filosofia)으로 나타나고 이 귀부인 역시  평화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철학이라는 귀부인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완성인데, 내 말하거니와, 인간들이 최고도로 평화를 누릴 때에 현세에서 가장 큰 희열을 향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최고도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이 철학의 귀부인이] 인간들의 사유 속에서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향연 3.6.8)

 

그 논거는 철학(哲學)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고 이차적으로만  창조된 지성 안에 있다는 착상에 있다.

 

   "사랑께서 당신의 평화를 느끼게 해 줄 때에... 인간이 실제로 사색하는 중이 아니고는 말씀을 건네고자 하지 않으시며, 그렇지만 이 귀부인의 평화로 말하자면 사색하는 행위 중이 아니고서는 듣고자 귀를 기울일 수도 없다" (향연 3.13.7)16)

 

<제정론>에서(3.15) 단테가 인류(人類)라는 한 종(種)으로서 인간의 고유한 작용(operatio propriae virtutis)을 통해서 인간들이 함께 도달하는 목표, 현세 행복의  절정으로서 철학적 사변을 제시하면서 그 실현 조건으로 평화를 거론하는 특이한 논리구조는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는 곧 철학의 최고 목표인 진리의 관조(觀照)이며, 평화가 없이는 결코 인류가 집단으로든 개인으로든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논리이다. 또한 인류가 함께 갖고 있는 가능지성(可能知性)의 최고구현을  위해서 평화가 요구된다는 근본조건(1.3-4) 설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3]  종교적 평화

   철학과 신학의 중세적인 연관 때문에 단테에게서는, 선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평화는 정치사회적 성격과 동일하게 또한 종교적 성격을 띤다. 그 이유는 평화라는 것이 구세사의 결정적 순간에 `기쁜 소식'으로 인류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하느님의 분노를 해소시키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킨 것(pax deum)을 골자로 하고 그 결과 인류에게 제공된 것이 또한 평화, <신곡>에서노래하는 것처럼 "오랜 세월에 눈물로 기다렸던 평화(la molt'anni lagrimata  pace)"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금단(禁斷)에서 천국을 열고
   오랜 세월에 눈물로 기다렸던 평화의
   천명(天命)을 지상에 가지고 온 천사... (연옥편 10.34-36)

 

   그리하여 인간 개인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그 참회를 통해서 죄과를  정화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게 되는데 <신곡>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하느님과의 평화"(pacecon Dio)라고 한다(신곡, 연옥편 13.124). 그러니까 인간이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외형적인 평화,  단테가 평생을 두고 추구한 정치사회적 평화는 결국 잠시적일 뿐더러 그나마도  무수한 장애가 가로놓은 그런 것인데, 잠시적인 현세 평화라도 부단히 모색하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 속에는 인간 위에 충만한 천상 평화라는 것이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화야말로 인간의 여정의 종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초자연적 평화는 신을 관조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인간의 집단적 개인적 의지를 하느님 의지에 완전  합일시키는데서 이 평화가 성립하는데 그 까닭은 "하느님의 의지가 곧  우리의  평화"('n  la  sua volontade e nostra pace: 신곡, 천국편 3.85-87)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를  인류가  바라고 성취하는 그만큼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신곡> 연옥편에서 자꾸만  희구되는 평화, 그곳 영혼들이 동경하는 평화는 결국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구원을  가리킨다. 중세인답게 단테의 정신계에서도 마지막에는 구원(救援)이 곧 평화라는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점은, 단테가 천상평화(天上平和)라는 것을 단순한 시후의세계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테가 보기에 인간이 현세에서 이룩하려고 몸부림치는 평화, 혹은 사회적 평화를 달성하고자 그토록 힘겹게 노력하는 근거는 현세적  평화가 영원한 평화의 담보물(per arra  d'etterna  pace)이기  때문이다.천상평화(etterna pace)는 지상 낙원의 종착점이지만 단테가 동경하는 지상의 평화,
그것은 어쩌면 영원한 평화의 볼모이다. 즉 지상의 평화 없이는 영원한 평화를 얻지 못하리라는 암시까지 바닥에 깔려 있다.

 

   오직 저 스스로가 스스로를 마음에 차게 할 뿐인
   짝이 없이 높으신 善이 사람을 착하게, 또 선을 위하여
   내시고 이곳을 영원한 평화의 볼모로 주셨더니라. (연옥편 28.91-93)

 

(3)  <제정론>의 평화사상 9)


   그는 <제정론> 첫머리에서 이 책을 집필한 의도가 "사회 정치  문제에  관한  이론 (publica documenta)을 습득한 사람으로서 국가(res publica)에 어떤 이바지를 하고자"(1.1.2) 함이라고 명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나 이론적인 소재들 가운데  "유익하면서도 [인간에게] 감추어진 진리들 가운데 현세군주제(現世君主制 temporalis Monarchia)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극히 유용할 것이다."(1.1.5) 라는 서두로 자기 저술의주제를  도입한다.


   단테는 <제정론>에서 다루어질 주제들을 단테는 첫머리에  확실하게 삼분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 특히 다음 세 가지 의문점이 논의될  것이다.  첫째, 군주제라는 것이 세계의 선익에 필요한 것이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탐구할 것이다.  둘째는 로마 국민은 정당하게(de iure) 군주(君主 Monarcha)의 직위를  획득하였느냐는  것이요, 셋째는 군주의 권한이 신(神)에게 직접 의존하느냐 아니면 다른 인물 즉 신의  사자(使者)나 대리(代理)에게 의존하느냐는 것이다."(1.2.3)


   단테는 자기의 여러 작품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중세의  보편사상은 인류를 단일한 공동체로 간주해 왔는데, 인류는 그 고유한 특성이 그  이성에  있으므로, 인류가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삶도  합리적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류가한 집단으로서 합리적 생활을 영위하는 근본 여건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평화이다. 단테가 보기에 유혈과 파괴를 본질로 하는 전쟁은, 인간과 인류의 합리적  생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반립개념이며,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적으로 구축해 온 일체의 제도를 총괄하는 정치 공동체의 최고 목적이야말로 만인이 평화로이 그 통치권 밑에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평화야말로 인간 사회의 모든 축들이 집중하는 목표이다. 만일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류를 단일 공동체로 본다면, 또  그  인류가 합리적 삶을 희구하는 공동의 염원으로 한데 결속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평화는  의당히 전인류의 공통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테는 (중세의 당대를 감안할 때에) 인류에게 평화를, 그것도  한  도시나왕국에서 국한되지 않고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보편적 평화(普遍的平和 pax universalis)라는 것을 실제로 또 항속적으로 보장하는 유일한 정부 형태는 세계정부(世界政府)라고 여겼고,  당대까지 아직 존속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25) 이라는 패러다임에 맞추어서 단테는 그것을 보편군주제(普遍君主制 universalis Monarchia)라고 불렀다. 무릇 어느 공동체나 그것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지도자가 있듯이 인류 전체도 단일한 통치자의 권위하에 복속(服屬)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리고 이 통치자는 이미 전세계를, 즉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권력과 소유를 증대시키려는 탐욕에서 전쟁을 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희망을 걸어본다. 또 만인은 그의 철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분쟁을  촉발할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위적 상황이라야 인간들의 탐욕과 오만이 제어될 것이고전쟁은 방지될 것이며 평화가 군림할 것이다.


   단테와 동시대에도 제권을 옹호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온 인류가 한 제국 밑에 통합된다는 개념보다도 `신앙으로 단결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상정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제국(帝國)이라는 것을 곧 그리스도교세계(Christianitas =  Christentum)와 동일시하였고, 황제는 이교도 세계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세계의 복지를 위해야 하는 것이 본분으로 거론되었다. 11) 더군다나 논의의 실제 의도는  그리스도교 세계는  독일 황제가 통치해야 마땅하고, 불란서 국왕에게 제권이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요지였으므로 그 평화 개념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그같은 논의에서는 제권의 이동에 영향력이 클 교황권과의 대립은 외교적 언어를 써서 피하고자 하였다. 12)


   그들과는 달리, 단테는 <제정론>에서 온 인류를 총괄하는 보편제국을 위한  정신적 법률적 정치적 기초를 놓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제국에서는 각각의 왕국이 독립과 자주를 존중받겠지만 모든 왕국(王國)과 제후국(諸侯國)과 자유시(自由市)들이 자기보다 상위에 정치사회  문제에 관한 최고 입법자요 재판관이요 판결자를 두게 된다. 그렇다면 단테가 말하는 보편제국(普遍帝國 imperium universale)이라는 것은 하나의 국제시민사회요 인류  전체의  연합과 통일을 위한 유기체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단테는 일신상의 체험으로도  플로렌스의 민주정치, 베네치아의 과두정치, 롬바르디아의 전제 정치 모두에 환멸을 느끼던 터라서 보편군주가 통치하는 보편제국만이 자기가 열망하는 보편적인 평화를 이룩하리라 믿었다.

 

 

III. <제정론> 제 1권의 철학적 원리

 

   <제정론> 제 1권의 논제는 "인류의 선익을 위해서 제권(帝權)이 필요한가?" (an adbene esse mundi necessaria sit universalis Monarchia)는 것이며 우리 논문의 주제와  결부시킨다면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세계정부가 필요한가?"는 형식이 된다. 이주제를 단테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전개한다.


-. 인간들은 지상에서 인류(人類 genus humanum)라는 하나의 種으로서 이룩해야  할 특수한 사명 또는 목적(finis totius humanae civilitatis)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유한 활동(propria operatio humanae  universitatis)이다.
-. 그런데 이 고유한 활동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사회적 조건으로서 평화, 그것도 인류 전체가 향유하는 보편적평화(普遍的平和 pax universalis)가 보장되어야 한다.
-. 이 조건이 조성되기 위해서는 단일군주(單一君主 unus Monarcha) 혹은 황제 밑에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13)


   우선 단테는 Monarchia(군주국 또는 군주제)14) 라는 어휘에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서 시작한다:

 

   "현세 군주제,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제권이라는 것은 단일 주권 으로서,
   시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위에, 혹은 시간에 의해서 측정되는 모든
   사물들 안에서와 그 사물들 위에 군림하는 주권이다"(1.2.2).

 

한 마디로 군주국 또는 제권은 시간 속에 사는 만인에게 미치는 유일무이한 주권이다. 그가 군주에다 `현세적'(現世的 temporalis)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시간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omnes in tempore), 또는 `시간에 의해서 측정되는 모든 사물들'(quae tempore mensurantur) 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당대 사회에서 황제나 국왕들의 권력과  교황의 권력을 가리켜 `현세적  권한'(potestas temporalis), `영적  권한'(potestas spiritualis)이라고 통칭하던 관례를 따르겠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종교계, 즉 교황이 관장하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과 그에 관련된 사물들을 아직 존중하고 군주의 통치권에서 제외한다는 표현이다.


   단테에게는 제권(帝權)이 인류의 평화, 정의, 행복을 보장할 만한 유일한 체제였으며, 단일 군주 밑에 통합되고 평정된 인류, 그리스도교의 보편교회(Ecclesia universalis)에 상응하는 보편제국(universale Imperium)을 논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그의 이 연구는 그때가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ab omnibus intemptata)이라고 공언한다. 요컨데  자타가 공인하는 바와 같이, 당대까지 단테는 제권에 대한  '철학적'  논고를 제공한 최초의 정치철학자이다. 이 논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단테가 사용하는 두 용어, universalis civilitas humani generis(전인류의 보편사회)와 humanacivilitas(인류사회) 15) 라는 용어로서 어쩌면 인류의 사회의식 발달에 중요한 전기가 된 개념이 담겨 있다. 플로렌스의 예언적 사상가로서는 자기가 제시하는 그 새로운 세계상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해야 하는 임무를 절감하였다. 단일한 군주 밑에서, 단일한 법에 따르고, 단일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류를 그는 상정하고 있다. 16)


   <제정론>에서 단테는 자기가 제시하는 명제들을 그때마다 삼단논법을 이용하여  개진하고 있는데, 제 1권에서는 인류가 種이라는 단일한 집단으로서 고유한 목적을 달성 하는데 세계 평화가 요구되고, 그 세계평화가 확립되려면 단일한 제국을 이루어  모든 개인과 정치 집단들을 통치하는 단일군주가 필요하다는 정치철학적 논변을 위해서 11가지 논증을 내놓는다. 17) 우리는 본론에서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으며 오히려 단테가 이 논증들의 토태로 삼는 세 가지 사변적 원리 내지는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논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논증 전체의 원리라고 단테가 일컫는 목적론(目的論 causa finalis), 인류의 단일성을 입증하려는 가능지성(可能知性 Intellectus possibilis) 이론, 그리고 군주의 유일성을 확립하는 단일성논증(單一性論證 argumenta  unitatis) 등이다.

 

(1) 첫번째 논증 원리: 목적론


   "세계평화를 확립하는데는 단일군주제가 필요하다."는 정치학적 논제를 다루면서 단테는 논변전체에 해당하는 하나의 형이상학 원리를 설정하고 그것에 준하여  논리를 전개하겠다고 선언한다. 다만 보편 군주 혹은 제권에 대한 이 책자의 주제가 정치인만큼 "이러한 학문에서는 사변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기 위하여  사변을 채택하게 되는데 거기서는 실천이  목적"(1.2.5)임을 그는 잊지 않고 있다. 18) 단테가 말하는 원리란 "인류 전체가 지향하는 단일한 목적이 있다"는 명제로 간추려진다.

 

   "실천영역에서 모든 것의 원인과 원리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최종목적(最終目的)
   (ultimus finis)이므로 (일차적으로는 최종목적이 행동자를 움직인다), 목
   적을 지양하는 모든 사물들은 모든 [존재] 명분(ratio)을 바로 그 목적으로
   부터 얻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1.2.7)

 

   "목적, 최종목적이 행위자를 움직인다(ultimus finis movet  agentem)."는  원칙에 입각해 볼 때에, 정치 문제는 분명히 인간 행위에 해당하고, 따라서  행위의  가능성,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단테의 말대로, "그 이유는 집을  짓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는 명분이 다르고 배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는 명분이 다르기 때문이다."(1.2.7) 그렇다면 단테가  "우리 연구의 기본 원리(principium directi
vum)"(1.3.2) 라고 부르는, <제정론>의 기본 원리는 목적인(目的因 causa finalis)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목적론이다. 행위하는 모든 주체는 목적을 위해서 행위한다. 부분적이고 특수한 목적들은 나선형으로 상승하면 그 정상에는 최종목적이 있고, 하위 목적은 필히 상위 목적에 종속되며, 부분적인 작용들은 전체 목적의 실현에 존재 명분이 있다.


   또 "신과 자연은 아무것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Deus et natura nil  otiosumfacit)."(1.3.3)는 원칙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사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활동, 그 존재의 고유한 활동(propria operatio)을 위한 것이라면, 19) "영원한 神이 당신의 예술 (그것이 곧 자연이다)에 의거하여 그것들 안에다 보편적으로 인류를 생성해낸 목적"(1.3.2)이 없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신이 자연 본성이라는 당신 기술을 발휘하여 인간들이 인류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케 하신 데에는 반드시 그 궁극 목적이 따로 있으리라는 관점이다. "그리하여 보편 인류(humana universitas)의 고유한 활동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인류 보편이 그토록 다수를 이루면서도 [하나로서] 정향(定向)되어 있는 것이다."(1.3.4) 20)


   만사를 목적론에 입각하여 사고하던 중세인들은 존재계 전체에 목적의 서열이 있다고 여겼다. 하위의 모든 목적들은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데 창조계 특히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은 창조주의 외적인 영광이요 후세의 영원한 행복이다. 그러나  개개인을 초월하여 보편 인류(universitas humana qua talis) 자체가 집단으로서 갖는  고유의 목적을 상정하고 논구한 것은 단테가 처음이다. 그런 목적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더군다나 인류라 하더라도 어느 한 시점에서 이룰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과 자연은 인류라는 종(種)에게 특수한 사명을  부여하였음에 틀림없다. 전체 인류 사회의 목적(finis totius humanae civilitatis), 다시 말해서 존재계의 한 종으로서 보편 인류의 고유 활동 또는  작용(propria  operatio humanae universitatis)은 그것을 성취하는 주체가 되는 보편 공동체의 존재를 요구한다. 그 공동체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의 최종목적을 달성하도록 보장하는 일은  물론 이려니와 인간의 집단적 능력의 충만한 실현을 보장하는 데 의의가 있다.


   "보편 인류로서의 고유한 활동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인류 보편이 그토록  다수를 이루면서도 [하나로서] 정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인간도, 한 집도, 한 마을도, 한 도시도, 어느 특정 왕국도 그 고유한 활동을 [다] 성취할 수는 없다. 사실이 그렇다면 인류 전체(tota humanitas)의 능력이 그 종국에 다다를 때에야  비로소 그 활동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1.3.4)

 

(2) 가능지성에 의한 논증


   이어서 단테는 보편평화 및 보편군주에 대한 인식론적 계기를 마련하고자 소위  가능지성(Intellectus possibilis)에 입각하여 그의 목적론을 보강한다. 제일원리에  대한 인식에서 새로운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 진행하는 논리 형식을 따르려는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성론(悟性論)에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근거를 찾아서 가장 훌륭한 인류  공동체는 단일 인격에 지배되는 공동체라는 결론에 도달코자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이 사회적 정치적 동물이라면 국가  생활은  인간의 자기 성취에 본질적 요소라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다시 말해서 인간 공동체는 인간 개인의 궁극 목적을 달성하는데도 필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류는 집단으로서도 고유한 궁극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개인으로서의 목적이든 집단으로서의  목적이든 인간의 목적은 인간의 본질(本質)에서 연역되어야 하고 인간의 본질적 특징은 다름 아닌 이성(理性 ratio)이다. 철학적으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정의되는 이상, 그 정의를 성립시키는 종차(種差 ifferentia specifica)가 바로 인간의  이성성(理性性)이다.


   단테가 여기서 논리전개의 계기로 삼는 것 하나가 이성이라는 인간의 본질과  그것을 구사하는 작용의 선후관계이다. 이하에 나올 가능지성의 경우에 그러한 본질이  인간에게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발휘하여 인간 개인과 집단 인류가  자기성취를 하는 활동이 중요하고, 따라서 단테는 그 활동을 보장하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로서의 보편 제권의 필요성을 도출하고자 한다. 21)


   하느님이 인간들이 인류라는 한 종을 이루게 한 이상, 인류가  전체로서  지향하는 고유활동(固有活動)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1.3) 그렇다면 존재계의 한 종, 단일한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성취할 최종목적, 다시 말해서 전체적으로 보는 인류의 고유한 활동이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중세 플로렌스의 주지론자(主知論者)답게 단테는 그것을 "가능지성의 가능태(可能態) 전체를 항상 현실태화(現實態化)하는  것(actuare semper  totam  potentiam  intellectus possibilis)"이라는, 중세 특유의 표현을 쓴다.(1.4.1) 단테의 논리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작용은 가능 지성을 통해서 충만한 지식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고, 전체로 본 인류의 고유한 활동이란 가능지성 전체를 총망라하여 완성하는 일이며, 그 일에는  평화라는 여건이 구비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오직 가능지성에 의한 지각적 존재(esse apprehensivum per intellectum
   possibilem)라는 점이 [인간을 인간이라는 종으로 종결시킨다]. 이것은 인
   간 이외의 어느 존재도, 인간 위나 인간 아래의 어느 존재도 갖지 못한 것
   이다... 인류의 능력에서 종국을 이루는 것은 오성적 능력혹은 기능임이 분
   명하다."(1.3.7)

 

단테는 천사도 지니지 못한 가능지성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특이한 본질이라고  간주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규정짓는 능력상의 종차, 곧 그의 존재, 생명, 특히 인식에다 단테는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인간의 궁극이 되는 오성 능력과 단일한 집단으로서 인류가 갖는 궁극 활동은 어떻게 결부되는가?

 

   "이 능력이 어느 한 인간, 혹은 위에서 구분한 특정한 공동체들 중의 어느
   하나에 의해서 전체가 동시에(tota simul) 현실화될 수 없는만큼, 인류에는
   다수(multitudo)가 있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다수를 통해서 이 능력 전체
   가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1.3.8)

 

   그런데 단일한 세계 군주제의 필요성에 관한 인식론적 계기를 제시하기 위하여  가능지성이라는 개념을 차용하면서 단테는 "이 견해와 상응한 내용이  <영혼론>에  대한 아베로에스의 주석에 나온다."(1.3.9)는 발언을 하여 그것이 아베로에스와 관련된  개념임을 수긍하고 있다. 22) 사실상 가능지성에 관한 개념에서 단일 군주 사상으로 넘어가려면 아무래도 아베로에스가 말하는 인간 개인들의 가능지성들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지성(unus Intellectus)의 존재를 바탕에 깔았어야만 했다.  실제로 단테는 본문에서 이를 시사하는 문구를 남겨 두고 있다.   이처럼 인류가 공유하는 어떤 단일한 가능지성이 갖추고 있을 가능태 전체를  항상 현실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사변에 의해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 지성의 연장(延長)이라고 할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주지론자인 단테에게는 전체 인류가 궁극 목적으로 간주하여  도달할 총체적 지식이 가장  위대한 가치로 상정되었고 그것을 성취하는 길로서 인류 전체의 단결된 노력이 요구된다고 사료되었다. 그리고 그 지식에 도달하는 주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당시 인식론에서 논쟁의  핵심이 되던 소위 가능지성이었다. 집단으로 고찰한 가능지성, 혹은 개인들의 가능지성들이 총체적으로 동시에 구현되기 위해서는 보편 평화를 향유함이 필연적  조건이  된다. 그래서 평화는 인간 행복을 지향하는 선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선이다.

 

   "특정 인간이 자리에 앉거나 휴식할 때에 그 현명과 지혜가 온전해지는 이상, [전체로 본] 인류 역시 평화의 안정이나 평온 중에(in quiete sive  tranquilitate pacis) 자기 고유의 활동을 극히 자유스럽고 극히 용이하게 수행한다. '당신은 그를[=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나이다.' 라는 말씀처럼, [인류가 수행하는] 활동[= 과업]은 거의 신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보편적 평화(pax universalis)야말로 우리 행복에로 정향 된 것들 가운데 최선의 것임이 분명하다."(1.4.2)

 

   이처럼 종으로서 인류가 이룩할 지적완성과 그것을 보장하는 여건으로서의  보편평화가 연관됨으로써 단테가 군주론을 개진한 정치철학적 명분이 확립된다. 동시에 단테가 <제정론>에서 개진하는 추론의 원리(principium rationum)로서, 인류가 궁극  목적이라는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가장 근사한 수단(propinquissimum medium)으로서  보편적 평화가 부상된다. 만약 앞서 말한 것처럼 어느 한 개인이나 부분 공동체들은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면 그 논리적 귀결로는 보편군주가 요구된다.

 

   "그것을 통해서 인류가 보다 낫게, 아니 가장 훌륭하게 자기 고유한 활동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귀결로, 거기에 도달하는 가장 근사한 수단이 무엇인지, 최종 목적을 삼아 우리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보편적 평화이다. 보편적 평화,  그것은 이하에서 우리 추론의 원리로 전제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입증하려는 모든 것을, 이 보편적 평화를 고정된 표적으로 삼아서, 더 할 나위없이 분명한 진리로 삼아서, 이것에 소급하여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1.4.5)

 

   요컨데 인간 개개인은 가능지성을 갖추고 있다. 가능지성이란  능동지성(能動知性)의 빛을  받아서 점진적으로 형상화(形相化)하는 기능을 말하는데, 여기서 인간이 개인으로  얻는  지식은 사실 인류가 한 種으로서 획득하는 지식의 일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활동 배후에는 인류가 공유하는 단일한 가능지성이 존재하고 그 지성의  능력을  채워줄 지식을 전부 한꺼번에 획득하려면 보편 사회niversalis civilitas)가 요구되며,  인류가 전체로서 도달하려는 이 거대한 목표는 소규모의 사회 및  정치  집단들만으로는 성취되지 않는다.

 

(3) 단일성 논증 (argumenta unitatis)

 

   세계의 선익(= 평화)을 위해서 군주제가 필요하다는 11가지 논증이 <제정론> 제 1권의 내용을 이루지만, 실제로 논의의 핵심은 군주 자체의 필요성이 아니라 단일군주(unus Monarcha) 혹은 보편제권(普遍帝權 Imperium universale)의 필요성이다. 23) 그런데 특히 후반부 논증들은 인류 전체가 하나(1.6)요 인류의 머리가 (우주에는 한 분 하느님이  군주이시듯) 하나여야 하며(1.7), 인류는 그 원인 곧 유일한 하느님(unus Deus)과  유사해야 한다거나(1.8), 인류의 기원은 하늘이요 天界는 유일한 원동자(原動者) 하느님이  유일한 동자(動者)를 통해서 움직인다(1.9)는 것을 논거로 삼기 때문에 단일성에 입각한 논법은 <제정론>에서 매우 비중이 크다. 그래서 단테는 일성(一性)에 관한 형이상학을 개진하고  있다(1.15)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종합을 본 존재론 즉 존재는 일성(一性), 진리(眞理), 선(善)과 환치(還置)된다는 원리를 도입하여 단테는 최상 군주제(suprema Monarchia) 또는 그 정치체제가 확보한다는 세계 평화의 존재론적 논거를 마련하고 있다.

 

   "최고로 존재하는 것은 최고로 일자이며, 최고로 일자인 것은 최고로 선하다. 어떤 것이 최고 존재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은 하나임(esse unum)으로부터 멀어짐이요 따라서 선함(esse bonum)으로부터  멀어짐이다."(1.15.1)

 

단테는 피타고라스까지 인용해가면서 이 일성(一性)의 형이상학적 성격에서 일반적인 윤리, 나아가서는 사회윤리로까지 비약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서 "최고로 하나인 것이 최고로선하다"(illud est optimum quod est maxime unum)는 명제에 따른다면 "하나임은 선함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보이고 여럿임은 악함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1.15.2)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자기가 말하는 상관자(相關者 correlationes)를 열거하면서 일자(一者)는 선의 편에 세우고 다수는 악의 세웠음이 <형이상학> 제 1권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에 비추어 보건데 죄짓는다는 것은 일자로부터 다수를 향하여 나아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peccare nihil est aliud quam progredi abuno spreto ad multa ens maxime unum)."(1.15.3)

 

   일성의 철학적 성격을 이처럼 탁월한 경지로 승화하고나면 "그렇다면 화합이  어느 모르든 선한 것이다"(concordia, inquantum hujusmodi, sit quoddam bonum)(1.15.4)라는 결론에 이르고, 화합이란 다수 의지의  획일적인  운동(uniformis  motus  plurium voluntatum)이므로(1.15.5) 그것의 기준과 결집력이 되는 어떤 존재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것은 하나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선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화합이 어느 모르든 선한 것이라면, 어떤 하나를 뿌리로 삼아 성립함이 또한 분명하다. 화합의 [자연]본성이나 명분이 무엇인지 파악한다면 그 뿌리가 어떤 것인지 밝혀질 것이다."(1.15.4-5) 다시 말해서 정치적 화합을 도모하고 성취하는 의지, 혹은 제권은  선을 형이상학적 토대로 삼고 있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가능지성의 논리 역시 단일성 논증의 인식론적 범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아베로에스가 가능지성의 단일성(unus Intellectus Possibilis)을 주장한, 당대에 논란이 심하던 과제를 차용하여, 단테는 인류 집단의 가능지성을 완성시키는 과제, 인간의 집단적 완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집단적 차원에서도  완결 시킴이 보편 제국의 사명중 하나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뒤에 나오지만 단테는  단일성에 관한 우주론적 범례도 제시할 것인데 천체들을 다스리는 신적 통치에서 그  원형을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단테의 인간학이 무척 낙관적임을 엿볼 수 있다.

 

   "인류는 평화의 안정이나 평온 중에 자기 고유의 활동을 극히 자유스럽고
   극히 용이하게 수행한다. '당신은 그를[=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
   드셨나이다' 라는 말씀처럼, [인류가 수행하는] 활동은 거의 신적인 것이라
   고 하겠다."(1.4.2)

 

단테가 인용하는 성서 전거(시편 8.6), "당신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나이다."라는 구절은 단테의 낙관적 인간학의 기조 관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류가 지상에서 수행하는 활동은 거의 신적인 것이라면, 그 신성한 사명을 보장하는 평화 역시 신성한 색채를 띤다. 단테는 평화의 신성함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보편적 평화야말로 우리 행복에로 정향된 것들 가운데 최선의 것임이 분명   하다. 바로 그래서 저 위로부터 목동들에게 울려온 소리가 재산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고 명에도 아니고 장수도 아니며 건강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아니요 오로지 평화였던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바로 그래서 인간들의 구원이신 분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Pax vobis!' 이라고 인사하였다. 최고의 구세주로서는 최고의 인사를 표명함이 합당하였다" (1.4.3-4)

 

과연 인간은 신의 모상으로서 인간들 사이에 평화와 질서와 정의를 이룩할 때에  신의세계 통치와 가장 유사한 세계를 성취하는 셈이다. (1.9)


   보편 군주정 혹은 제정(帝政 universalis Monarchia vel Imperium), 그것이 인류의 목적 달성에 필요하다는 명제를 사변적으로 입증하는 뜻에서 단테는 한결같이 이 단일성 논증에서 도출하는 11가지 논증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것이 제 1권   대부분(1.5-14)을 차지한다. 24) 그러나 단순히 군주의 필요성이 아니라 전세계를 단일 통치권아래 장악하는 단일군주가 요체이므로 각각의 논증은 반드시 세계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는 단일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단테의 특유한 스콜라적 논증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논거를 비롯하여 자연적,생물학적 논거를 거쳐 사회학적 논거로 발전하는 논변을 구사한다. 그가 거론하는 사회 단위는 개인과 가정, 마을(vicus), 도시(플로렌스 같은 자치도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왕국 단위로 상승 확장한다.(1.6-9)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인류라고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공동체가 천체들을 지배하는 신의 단일한 통치라는  우주론적 범형에까지  확산한다.(1,9)


   그러면 지금부터 단테가 <제정론> 제 1권에서 제시하는 단일성 논증 가운데 대표적인 세 논증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단일목적(單一目的)에 의한 단일통솔(單一統率)의 논리(1.5), 창조주 하느님의 단일성에 의한 논리(1.8),  운동의 단일성에 의한 논리(1.9)가 그것이다.

 

[1]  단일목적에 의한 단일통솔의 논리 (1.5)

   목적론은 특히 <제정론>의 역사적 평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는 제 3권의 '두 가지 최종 목적'(duo ultima) 이론의 토대요 주축이 되지만, 제 1권에서도 보편 군주의  필요성 논증에서 단연 첫째 논증으로 채택된다.


   논증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는 여러 인자들이  단일한  공통 목적에로 정향되어 있을 때에는 그 중의 하나가 여타의 모든 것을 통솔하는 것이 자연 이치이다. 그런데 인류는 개인 혹은 특정 집단들로서 공동의 목적에로 정향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류는 단일한 보편군주 혹은 황제에게서 통솔받아야 한다.


   대전제인 "다수의 것이 단일한 것에로 정향되어 있을 경우에 그것들  중의  하나가 규제하거나 지배해야 하며, 다른 것들은 규제받거나 지배받아야 한다."(1.5.3)는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외하올 권위'에서 도출해낸 것이다. 25)


   소전제는 "철학자의 영예로운 이름"에서만 아니고 현실 세계에서 목격하는  현상에 대한 귀납적 논리(ratio inductiva)라고 한다. 개인에게서는 모든 것이 오성에 귀속하며, 그것이 인간의 행복의 길이다. 가족에서는 모든 식솔이 가장에게 귀속하며,  그것이 가족의 행복의 길이고, 마을에서도, 도시국가에서도,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하나에로 정향된 개개의 사물들에게서 위에 말한 바가 사실이라면, 인류 전체가 하나에로 정향되어 있음도 이미 입증한 것처럼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가 규제하고 다스리는 자라야 하는데 그가 곧 군주 혹은 황제라고 말해야 한다."(1.5.9)

 

[2] 창조주 하느님의 단일성에 의한 논리 (1.8)

   이 논증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다섯번째 논증, 즉 제일원동자(第一原動者) 논리와 연속된다. 창조주의 모상(模像)으로서의 피조물들은 창조주와 유사(類似)하면 할수록,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일성을 모방할수록 행복해지며, 따라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류'도 단일한 황제 밑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때에 가장 완전하다는 논리이다.


   대전제: "어느 사물이든 제일행위자(第一行爲者 primus agens = 하느님)의 의향에 따라서 처신할 때에 선하고 행복한 경지에 있."(1.8.1) 26) 그리고 "창조받은 모든 사물이, 그 사물의 자연본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내에서, 신적 유사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향에 해당한다."(1.8.2)


   소전제: "그런데 인류가 최고로 하나가 될 때에 하느님과 최고로 비슷해진다(genus humanum maxime Deo assimilatur quando maxime est unum). 단일성의 참된 근거(veraratio unius)가 하느님에게만 있기 때문이다."(1.8.3)


   결론: "그런데 인류 전체가 한 인물 안에 단결할 때야말로 인류는  최고로  하나가 된다. 또 이것은 인류가 단일한 주공에게 전적으로 복종할 때가 아니면 불가능함도 분명하다."(1.8.4) 그리하여 단테는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단일한 주공에게 복종하는 인류야말로 하느님과 최고로 비슷하며 그 결과 하느님의 의향에 가장부합하다."(1.8.5)

 

[3]  운동의 단일성에 의한 논리 (1.9)

   인류의 완전성과 천계의 완전함을 비교하여 천계의 운동이 갖는 통일성에서 도출해 내는 논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의하면 "인류는 하늘의 아들이요...  사람을 낳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태양이다." 27) 그렇다면 인간 혹은 인류는  하늘[천계]의 운동을 본받을 때에 선하고 행복한 경지에 있게 된다.


   그런데 "하늘 전체가 단일한 운동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제일운동체(第一 運動體 Primum  Mobile)의 운동에 의해서,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유일동자(唯一動者)에 의해서, 하늘의 모든 부분들과 운동들과 운동자들에 있어서 규제를 받는다."(1.9.2)56) 당대의 천문학에 따르면 아홉 하늘[九天]로 나누어진 천계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제일 운동체(Primum Mobile)가 움직이는 단일 운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아울러 제일 운동체는 단일운동자(單一運動者 unicus motor)인 하느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단테는 여기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 나오는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는데 (II. metrica28-30) 단일운동자가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대목이다. 같은 사상을 단테는 <신곡>에서도 아름답게 묘사한다: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그이의 영광이
         온 누리를 꿰뚫고 빛나시어도
         어디는 더하고 또 어디는 덜하시나니 (천국편 1.1-3)57)

 

   우주의 가장 완전한 세계인 천계가 이렇게 움직인다면, 그 천계로부터  힘을  받아 발생한 인류 역시 단일한 군주 즉 황제에 의해서 선포된 단일한 법률에 의해서 통치될 때에 가장 완전할 것이다. 유의할 점은 단테가 천계의 운동과 운동자의  도식을  인간 정치계에서는 법률과 통치자라는 도식으로 변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류가 자기의 운동자들과 운동에 있어서 유일동자(唯一動者)에 의해서 움   직여지듯이 유일한 주공에게서 지배를 받고, 유일한 운동에 의해서 움직이듯이 유일한 법률에 의해서 지배를 받을 때에, 인류는 선하고 행복한 경지에 있다." (1.9.2)

 

   단테는 인내롭게 열 한 가지 논증을 하나나 같은 결론으로 맺는다:  "앞에서 개진한 결론들이 모두 참이라면, 또 사실 그렇다면, 인류가 가장 훌륭한 경지에 있으려면 군주가 있어야 하고, 따라서 군주국은 세상의 선익[평화]에 필요한 것이다."(1.15.10)28)

 

 

IV. 단테의 <제정론> 제 1권에 나타난 평화관의 평가

 

   마지막으로 보편평화에 대한 요청을 근거로 세계 제국 혹은  보편군주의  필요성을 주장한 단테의 `철학적' 논변에서 몇 가지 논쟁점이 없을 수 없겠다.

 

(1) 보편군주의 정체는 누구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궁극목적이 후세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단일한  목적이라는 명분에서 제후(princeps)가 그 속권에 있어서 교황(papa)에게 종속하고 의존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단테는, <제정론> 제 3권에 나오듯이, 인류가 집단으로서  추구하는 현세적 궁극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인류공동체의 현세적 궁극  목적과 인간 개체의 영원한 궁극 목적이 둘 있어서(duo  ultima) 황제와 교황은 서로 독립하고 제각기 하느님에게서 직접 연원하는 최종의 두 권력 주체로서 공존한다는 논리를 펴는데, 사상사적 맥락을 살펴본다면, 단테의 보편군주  혹은 황제라는 존재는 결국 토마스나 당시의 교황권 주창자들이 내세우던 보편교황(普遍敎皇 universalis Pontifex) 개념의 변형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질송은 제기하였다. 29)


   이에 대한 방증으로, 단테와 동시대에 교황권을 옹호하던 신학자들이  이처럼 첨예한 단테의 이론을 별다른 관심없이 지나친 것이라던가, 30) 단테도 군주를 pater라고 일컫거나, 군주의 최고 덕목으로 `사랑과 정의'(charitas et justitia) 같은 비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덕목을 꼽는 사실로 미루어, 교황이 인류의 정신적 어버이로서 행동하듯이 군주도 그렇게 행동하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추정할 만하다. 특히 군주를 `만인의 봉사자'(minister omnium)(1.12.12)라고 하는 단테의 정의는 당시까지 속과 성의 대칭으로 삼아 속권(俗權)에 대한 영권(靈權)이 우위성 내지 간섭권을 토론하던 마당에 교황의 이상적인 모습에서 군주의 이상상을 이끌어냄으로써 시대적 토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렸으리라는 것이다.31) 중세인으로서 단테는 권력을 봉사(ministerium)로 보았고 정의, 평화, 속민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장치로서 간주했고, 지적으로 완전하고 도덕적으로 온전한 군주라면 권력을 남용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는 낙관론이 깔려 있다. 32)

 

(2) 이상과 현실의 괴리


   서양 14세기초엽까지의 사상사에서, 인간의 진보와 사회발전을 논함에 있어서,  단테 알레기에리만큼, 인간 본성 안에 자리잡고 있는 균열이라던가 인간 개인이 전체 사회에 보이는 저항, 인간 공동체들의 집단이기심 등을 거의 고려않은 것처럼  낙관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은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 단테 연구가들은 그가  너무  사변적으로, 형식논리학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다가 보니 현실정치를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부딛친다.  또 보편 제국의 내부 구조에 있어서도 단테의 전망은 매우 이론적이다.그가  보는 통치기구로서의 제국은 일차적으로 입법기능(立法機能)을 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일차적인 사변적 원리로부터 제국의 보편법을 만들어내고, 그 보편법을 준거로 삼아  왕국과 특정 정치공동체들은 (장소와 환경, 관습과 주민에 따라서 다양해지는) 실정법들을 제정하고 또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처럼 말한다. 33)


   그렇지만 아다시피 일체의 혁신 사상, 일체의 혁명 운동에는 반드시  제일원리들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민중의 요구와 호응에 대한 정치학의 응답이 여기서 이상가와 실제 정치가를 구분짓는 한계선인지도 모른다.


   아울러 제국에 관한 그의 논술은, 순수 사변가가 아니라 실제로 플로렌스 정치가요 외교관으로서 현실 정치를 수행했고 그 갈등에서 일평생을 희생당한 사람의 글이기 때문에, 지독히 순진한 정치적 식견이라기보다는, 선의를 가진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처신을 하리라는 단테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정말 단테는 인간을 이성적[= 합리적] 동물로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채택하였고,인간들의 합리적 태도, 모든 인간들이 선의를 갖고서 인류전체의 선익을 위해 협력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은총을 믿던 중세인들의 신앙 기조에 의거하여) 인류가 그것을 실천해내는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단테는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그 판결이,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는 구속력을 갖는 세계법정(世界法廷)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현대 국제법과 국제관계에서마저도 궁극의 문제가 되어 있지 않은가?

 

(3) 정치와 철학


   개개인간의 궁극 목적이라는 것과 인류 집단으로서 갖는 궁극 목적은 어떻게  연관 되는가? 그리스도교는 인격의 절대적 가치를 거의 맹신해 왔는데  인류로서의  고유한 작용(operatio propria humanae universiatis)이라는 것이 과연 개인의 완전성보다 상위이며 그렇게 주장할 권리가 있는가? 단테 알레기에리는 사회집단에 대한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 중세인들이  품고  있던 전통적이 개념을 청산한 사람이다. 개인의 구원에다 삶의 모든 차원을 종속시켜  사고하던 방식을 떠나서 인간의 사회적 차원과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갖는 의의를 확연하게 정치사상의 지평으로 불러들인 사상가이다.


   고대세계로부터 정치철학의 근간으로 내려오던 기본 개념인 평화와 정의 그리고 자유라는 것 말고도, 단테는 제국(帝國) 또는 제정(帝政)에 대해서, 보편 공동체의 협력과 상호관련에다 단순한 정치적 목표 이상의 것, 다시 말해서 `모든 가능지성들의 영적 완결과 더불어  인류의 것으로 간주되는 단일한 가능지성의 완성'이라는, 그 나름의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목표를 설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에 의한 개인의재생과 사회의 정화보다  한 차원 높은, 별도의 인류[인간성] 완성을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특히 <제정론> 제 3권에서 단테가 인류의 `두 개의' 궁극 목적(duo ultima)을 논하는 마당에서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인류사의 한 전기를 단테의 글에서 읽는다. "단테의인문주의적 낙관론은 인류 내지 인간성(humanitas)이 점차 그리스도교(Christianitas)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토대를 구축하는 셈이다. 그리고 <제정론>에서  끝없는  논쟁의 빌미가 된, 현세 질서와 영적 질서가 상호 불개입한다는 원칙을 초래한다." 34) 인간의 존재와 가치의 여러 차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현세의  차원을 영생의 차원에 흡수 통합해버린 시대 사조 속에서 존재와 가치의 여러  차원들을 해체해 놓으려는 동기를 단테는 느꼈을 것이다.

 

(4) 역사적 평가


   그러나 단테 연구가들이 주지시키는 바와 같이, 위대한 플로렌스 시인이 인류에게 보낸 메시지는 그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봄이 바람직하다. 인간의 삶 전체가  단테에게는 또한 심원한 종교적 의미를 띠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앞서 인용한 바 있지만 `저 평화에 대한 동경'(amore per quella  pace)이  단테로 하여금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게 만들었듯이(연옥편 5.61-63) 그가 천국에서 만난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첫 제자(Bernardo di Quintavalle)의 표상처럼, 단테 알레기에리의 생애는 한마디로 "이렇듯한 평화의 뒤를 쫓아 달음질친(dietro  a tanta pace corse e, / correndo, li parve esser tardo)"(천국편 11.80-81) 한  삶이었다고 하겠다.


   정치철학의 논쟁가로서 단테가 <제정론>에서 그리는 꿈, 평화와 인간 완성이  이루어지는 `위대한 신세계'에 대한 열망은 미구에 그가 <신곡>에서 노래할 주제로 연장된다. 거기서 인간은 단순히 정치적 제도를 통해서 외부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부에서 재생해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할 것이고, 현세에서  이루어질  정치적 사회적 재건을 위해서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진리들이 지상의 시민들에게도  길잡이가 되고 동기가 되어야 함을 설파할 것이다. 그의 <신곡>에서는 지옥과 연옥을 인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질리우스와 더불어 천상의 베아트리체도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 있을 것이다.


   <제정론>이라는 논전서를 통해서 기울어져 가는 신성로마제국과 그 황제  하인리히 7세에게 이탈리아에서의 제권 혹은 제정을 복원시키고자 했던 단테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영국, 불란서 같은 민족 국가의 등장과 이탈리아와 독일의 도시국가들의 대두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서 단테는 그런 현상이 세계 평화를 보장할 세계 통치기 구에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세계사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일한 제권 하에서 이루어질지 모르는 세계 영구 평화를 동경하던 단테의  꿈은, 35)  그의 후대에 등장하는15세기의 정치사상가들에게는 물론, 근대의 루쏘나 칸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고 금세기의 국제연합을 통한 세계적  노력에서 그 구체적 실현을 인류가 목격하는 중이다.


   세계 제 2차 대전을 치르고 나서야 인류가 깨닫고 실현에 착수한 국제 평화와 인류의 한 정치 공동체라는 인류의 꿈을 그는 일찌감치 내다본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조국 피렌체로부터 영구추방령을 받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방랑하면서 이 시인이 <제정론>을 집필하던 저 14세기초엽에는 그의 이념들이 현실과 떨어진 하나의 외침으로,한 시인의 주문으로, 역사의 지평을 내다보는 예언자의 신탁으로 들렸을 따름이다. 아마도 그 목표가 하도 숭고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 실현가망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간주해올 지경이었다.


   <제정론>의 요망사항 가운데는 지금까지 우리를 매료하거나 우리 현대인의  사고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것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보편 제국에 대한 단테의 서술과 신념이 너무 상상적이고 이상적일지도  모르지만 평화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선의 하나요 천상 축복이라는 신념에서 자신의 지적이 노력을 다 짜내어 그것을 추구했음은 중세 지성인다운 탁월한 노력이었다. 평화와 정의 그리고 인간 진보에 관한 우리의 염원과 진지한 노력이  정말  소망할 만한 무엇이라면 모든 인류의 근본적인 합리성에 대한 단테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리고 이에 대한 불가결한 단서로서 정의와 자유를 구현함으로써 역사의 도정을 정리하고 변경하는 일이 운명이 아닌 바로 인류 자신의 능력에 맡겨져 있다는 긍정적 신념이 요구된다.

       


각   주

1) Joseph F.Costanzo, "The De Monarchia of Dante Aleghieri" Thought 43 (1968),
   87-126 p.88.
2)      ...세계에서 세계로 이렇듯 내
      길잡이의 발자취를 따라 두루 찾게 해 주신
      그 평화의 이름으로 나는 일을 하리라. (신곡, 연옥편 5.61-63)
3) Cf., Kenneth Sills, "The Idea of Universal Peace in the Works of Virgil and
   Dante" Classical Hournal 9(1914), 139-153
4)  제 3권에서 다루어지는 내용, 중세말과 르네쌍스 시대에 가장 첨예하게  대두되었던 俗權과 靈權, 혹은 帝權과 敎皇權의 상호관계와 대립이라는 커다란 주제는 필자의 글 "단테 알레기에리의 <帝政論>의 `두 궁극 목적'과 그 정치철학적 논변" 중세철학 창간호(근간) 참조.
5)  본고에서의 단테의 작품 인용은 Dante Aleghieri, Tutte le opere, Fredi chiap-pelli ed., [Edizione del Centenario] (Milano, U.Mursia, 1965)을 따르며 <군주론> 이탈리아어 번역은 Societa Dantesca Italiana판(Milano, Mondadori, 1965)을  따르는 Dante, Monarchia, ederico Sanguineti tr. et comment. (Milano, Garzanti, 1985), 영역본은 Dante, Monarchy and Three Political Letters, Donald Nicholl- Colin Hardie tr.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1954)를 참조한다.
   <신곡> 번역문 인용은 최민순 역주본(을유문화사 1960)을 따른다.
6) Alexander of Roes(fl.1281-1288)가 그의 저서 Memoriale de prerogativa
    Imperii Romani(1281)에서 서구 그리스도교세계의 평화와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는 교황권, 독일은 제권, 불란서는 학문(studium)을 배분받았다는 논리 속에서 제권이 독일에 있음을 옹호하면서,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직무를 수여받는 절차상의 소속을 인정하고 있다.
7) 칙서 Unam Sanctam의 기본 논조는 다음과 같다(DS 872-875):
    "하나요 유일한 교회의 단일한 몸은 단일한 머리를 가질 따름이요 괴물처럼 두 머리를 갖지 않느니.... 두 개의 검, 즉 영적인 검과 현세적 검이 (베드로의 후계자의) 이 권한에 속하며... 두 검 즉 영적이 검과 현세적인 검 둘 다 교회의 권한에 속한다(in hac eiusque potestate duos esse gladios, spiritualem videlicet ettemporalem... uterque ergo est in potestate Ecclesiae...).
    그러나 후자는 교회를 위하여 행사되고 전자는 교회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
    전자는 사제의 검이요, 후자는 비록 국왕들과 군인들의 손에 있지만 사제의 묵인
    과 용인 속에서(ad nutum et patientiam sacerdotis) 행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에게 종속되어야 함(subesse Romano Pontifici)을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선언하고 고지하며 구원에 필요한 [교리로] 정의하는 바이다."
8)  <향연> 4.5.8 : "그때는 보편적 평화가 전적으로 군림했느니 인류를 실은 배가 가야할 항구를 향해서 그때처럼 곧장 짓쳐가던 때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것이니라."
9) <군주론>과 거기 담긴 평화 및 철학사상을 소개함에 있어서 필자가 크게 의존하는 문헌은 다음과 같으며, 특히 E.Gilson과 J.F.Costanzo을 많이 참조하고 있다:
    E.Gilson, Dante, the Philosopher [Dante et la philosophie, Paris, 1939]
    David Moore tr., New York, Sheed and Ward 1949; Patrick Boyde, Dante,
    Philomythes and Philosopher. Man in the Cosmos, Cambridge, Univ.,1981;
    J.F.Costanzo, op.cit.; Pier G.Ricci, "Monarchia" in U.Bosco ed.,Enciclopedia
    Dantesca, supra cit. ad vocem; Stewart  Farnell, The Political Ideas of the
    Divine Comedy. An Introduction, New York, Univ. Press of America, 1985;
    Garrett L.McAinsh, "Dante" in Young Seek Choue ed., World Encyclopedia of
    Peace (Oxford, Pergamen ....) ad vocem.; Bruno Nardi, Saggi di filosofia
    dantesca, Milano, 1930; A.Renaudet, Dante humaniste, Paris, Les Belles Lettres, 1952.
10) 아다시피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은 역사학의 용어에 가까운 것으로 샤를르마뉴가 황제(imperator)라는 칭호로 대관된 것(800)은 영토권 없는 권위상의 직분으로 였으며, '로만인들의 황제 아우구스투스'(imperator Augustus Romanorum)라는 칭호를 쓴 것은 오토 2세(982)였다. 콘라드 2세가 독일, 이탈리아, 불란서, 부르군디를 포함하여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을 영토개념으로
    사용했고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싸(1157)가 '신성 제국'(Sacrum Imperium)을 칭하였다. '신성로마제국'(Sacrum Imperium Romanum)이 문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1254년부터이다.
11) Cf., Engelbert of Admont, De ortu et fine Romani Imperii: c.18 "모든 왕국들과 모든 국왕들은 단일한 그리스도교 제국과 황제에게 복속해야 한다."; c.18: "교회의 몸과 전체 그리스도교 공화국은 단일한 몸을 이룬다"; c.18: tota Christianitas contra totum paganismum"그리스도교 세계 전체가 전체 이교도 세계를 대항하여...."; c.23: extra Ecclesiam non sit nec possit esse imperium "교회 밖에서는 제국이 있을 수 없다." (cf., E.Gilson, op.cit., p.165 n.2).
12) Jordan of Osnabruck(+ post 1283)이 예외로서 저서 De prerogativa Romani Imperii(ca.1273 )에서 그리스도교 세계(regnum clesiae)의 보전에 제권이 절대 필요하다는 논리 외에도, 로마 황제가 베드로와 초대교황들을 사법처리한 관례로 미루어 황제가 교황을 재판하고 폐위시킬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으며, 제권이 모든 통치권 위에 군림한다고 하였다.
13) Cf., J.F.Costanzo, op.cit., 91-92. 같은 명제들을 논리적 순서를 바꾸어 보다 근대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전세계를 장악하는 단일한 정치조직 내지는 세계정부가 없으면 전세계적 인간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2. 그런데 전세계적 인간 공동체가 없으면 세계평화는 불가능하다.
    3. 그리고 세계평화의 존립이 없으면 신이 인류라는 종에게 부여한 고유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다.  이하에는 특히 J.F.Costanzo, op.cit.; E.Gilson, op.cit.,  pp.162-224: "III. Philosophy in the Monarchy"를 따르게 된다.
14)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평이함을 기하는 뜻에서 해당 어휘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Monarcha(단테는 대문자로 사용한다) 君主, unus Monarcha 單一君主,
    Monarchia 君主國 혹은 君主制, Imperium 帝權 혹은 帝政, principatus 主權.  단테에게서는 君主(Monarcha)와 皇帝(Imperator), 君主制 또는 君主國(Monarchia)과 帝權 또는 帝政(Imperium)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본서에서 그가 지칭하는 '군주'는 사실상 (신성로마황제로 표상되는) '황제'이다. 다만 한국중세학계의 용어사용을 고려하여 <君主論>이 바람직한 단테의 책자를 의미에 따라 <帝政論>으로  한다.
15) J.B.Morrall (박은구 역), 중세서양의 정치사상(서울, 탐구당, 1983) [탐구신서 132]에서는 단테의 이 용어를 풀이하면서(155-168면)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라틴어 번역본에서 유래했으리라고 추정하여 "느슨하게 '인간 문명'(human civilization)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고 제언한다.
16) 당대까지는 普遍社會(universalis civilitas)라고 하면 敎會(Ecclesia), 혹은 그리스도교 세계(Christianitas, Christentum) 외에는 구체적 전형이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이래로, 중세인들의 사고에 어쩌면 교회만이 하느님의 도성(civitas Dei)으로서 신앙을 접착제로 하여 인류를 하나로 집결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눈에 여타의 왕국들이나 제국은 이미 地上國(civitas terrena)으로 격하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붕괴되어 가는 시점에서 전인류의 보편사회(universalis civilitas humani generis)라는 것을 언급하고 그 실현 가능성을 설득시키려면 단테로서도 보편 교회 내지 그리스도교 세계라는 이미지를 채택하여 그것을 세속화하는 수밖에 없었다."(E.Gilson, op.cit. p.166)
17) 그 논증들을 열 한 가지로 나눈 것은 Pier G.Ricci("Monarchia" in U.Bosco ed., Enciclopedia Dantesca, supra cit. ad vocem)이다.
18) 정치철학을 위시한 "여하한 탐구에 있어서도 한 원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무릇 모든 탐구는] 그 원리에 대한 분석에로 소급하고, 그 이하에 나오는 모든 명제들이 바로 그 원리로부터 확실성을 얻는 법이다. 그리고 본 논의는 하나의 탐구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원리에 관해서 연구해야 한다고 보며 그 원리에 의거하여 이하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1.2.4)
19) "작용은 존재를 따른다(operatio sequitur esse)는 중세의 이 공리에 따르면 한 사물의 고유한 작용은 그 사물의 본질을 표출하고, 또 그 본질에서는 필연적으로 고유한 작용이 나온다(cf., P.Boyde, op.cit., p.194).
20) 참조: "그러므로 만일 인류 사회(civilitas)의 보편 목적(finis universalis)이라는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이 원리가 되어 이하에서 우리가 입증코자 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근거해서 충분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사회 혹은 저러한
    사회의 목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서 그 모든 목적들이 [수렴되는] 단일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김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1.2.8)
21) 참조: "사물들에게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활동을 위한 것이다.... 창조된 여하한 본질도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본질의 고유한 활동이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활동이 본질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이 활동을 위해서 존재한다(non operatio propria propter essentiam, sed haec propterillam habet ut sit)."(1.3.3)
22) 아베로에스가 가능지성의 (개인들을 떠난) 별도의 존재(separata  substantia)를 내세웠고 아베로에스 사상이 토마스를 위시한 가톨릭 학자들과 교회당국의 단죄를 받았기 때문에 후대의 단테 주석가들은 현대에 와서까지도 이 문제에 퍽 신경을 쓴다. 단테가 주장하는 `인류 전체의 통합된 지성적 능력들'이 결국 아베로에스가 말한 `보편적이고 독자적인 가능지성'(Intellectus Possibilis [separatus, universalis)와 동일한가?라는 의문이다(cf., Costanzo, op.cit., 92-94, Boyde, op.cit., pp.271-75; Gilson, op.cit., pp.308-16).
23) 처음 다섯은 사변적인 철학 논증이고 그 뒤의 여섯은 심증적 논증(argumenta a fortiori, argumenta moralia)에 해당한다: cf., Ricci, op.cit.; Gilson, op. cit.,p.175.n.1.
24) 하나하나에 제목을 붙인다면 ① 單一目的에 의한 單一統率의 논리(1.5), ② 部分과 全體의 관계에 의한 논리 (1.6), ③ 部分과 部分의 相互關係에 의한 논리 (1.7),
   ④ 창조주 하느님의 單一性에 의한 논리 (1.8), ⑤ 運動의 單一性에 의한 논리 (1 .9), ⑥ 紛爭의 調整者의 필요성에 의한 논리 (1.10), ⑦ 正義에 의한 논리 (1.11),
  ⑧ 自由에 의한 논리 (1.12), ⑨ 行爲의 結果에 의한 논리 (1.13), ⑩ 法律의 普遍性에 의한 논리 (1.14), ⑪ 意志의 和合에 의한 논리 (1.15)라고 명명할 수 있다.
25) Aristoteles, Politica 1.2.1254a : "실제로 다수의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그 부분들이 연속적이든 분리되어 있든 간에, 단일한 공통된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사물들은 [그 안에] 명령하는 [인자와] 명령받는 [인자가 있음을]볼 수 있다."
26) 단테는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용한다: Aristoteles, Ethica Nicomachea 10.8.1178b :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신의 활동이 觀想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활동 가운데서도 신의 활동과 가장 근사한 [관상적 활동이]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인간이 관상하면서 행복해지는 대상인 하느님이 본질에  있어 유일한 분이시므로 하느님을 관상하는 인류도 개인과 전체집단으로서 어떤 단일성을 띠어야만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관상이 가능해질 것이다.

27) Cf., Aristoteles, Physica 2.2.194b : "인간은 인간에게서 생성되지만 또한 태양에게서 생성된다."
28) De Monarchia 1.15.10: Necesse est ad optime se habere humanum genus esse in mundo Monarcham, et per consequens Monarchiam ad bene esse mundi.
29) Cf., E.Gilson, op.cit. 179 sq.
30) 단테의 <군주론>이 집필된 것이 늦어도 1313년이었는데 일부 성직자(Bertrando del Pogetto)의 반발을 사서 焚書 조처를 당한 것이 1329년이었고, Guido Vernani가 De reprobatione Monarchiae (Jarro ed., Firenze, 1906)에서 아베로에스 사상과의 유사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Et huic sententiae concordat Averrois in commento super hiis quae de Anima "이 의견에 있어서는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
    텔레스의 <영혼론> 주석에서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정작 황제권의 독자적 기원론을 이유로 가톨릭 교회의 禁書目錄(Index)에 오른 것은 비교적 늦은 1554년이었다.
31) Cf., E.Gilson, op.cit., p.180.
32) Cf., J.F.Costanzo, op.cit., 95-96.
33) "인류는 모든 성원들에게 해당하는 공통된 [법규들에] 입각해서 군주에게서 통치  받아야 할 것이며, 공통 규범에 의해서 평화에로 통솔되어야 한다. 특정한 제후들은 군주한테서 그러한 규범 내지 법률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1.14.7) Cf., J.F.Costanzo, op.cit., 96-97.
34) J.F.Costanzo, op.cit., 98.
35) 만일 단테의 단일 보편군주론이 역사의 무대에 부단히 가면을 바꾸어 쓰는 제국주의의 이념을 이론화한 것처럼 들리는 사람이 있거든, 20세기의 가장 명석한 지성 중의 하나라는 럿셀이 세계 평화를 명분으로 하여 참으로 힘있는 세계정부를 구상 하였고, 현재 그라나다, 파나마, 이라크, 소말리아, 유고 등 어디든지 세계최강의 무력을 가차없이 구사하는 미합중국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참담한 현상을 인류가 목격하는 중임을 유의하기 바란다.(cf., Bertrand Russell, 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 London, Allen & Unwin, 1916;eiusdem, New Hopes for a changing World, London, Allen & Unwin, 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