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적 지각론에서

 指向의 역할 (De Trinitate XI.1.1-2.5를 중심으로)

              1992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의식의지향성 (한국현상학회) (15-52)

 

 

I.  서   론

 

1.1  아우구스티누스가 별도의 저서로 感覺的知覺[1]이나 오성적 인식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바는 없다. 그의 여러 저서들에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그의 감각과 인식 이론을 재구성하여야 한다.[2] 그렇지만 우리의 추측과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지각이라는 이 현상학적 문제에 의외로 많은 작업을 하였다. 질송은 감각적 인식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이 인식에 대한 체계적인 노력을 한 흔적이 있다고 본다.
    감각적 지각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흔히는 플로티누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Gilson, Boyer). 감각을 인간의 행위로 간주하는 관점(Enneades 3.6.2; 4.6.2-3), 감각을 판단이라는 궁극 행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ibid., 3.6.1; 4.3.23 et 26), 따라서 감각도 신체의 행위가 아니라 지성의행위로 간주하는 이론이 그것이다. 그리고 감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을 평가하면서 질송 등은 인식에 있어서 감각의 역할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과소평가하였다면서 그것은 플로티누스를 경유한 플라톤의 영향 때문이라는 해석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감각적 지각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에는 생각보다 많은 자료들이 들어 있고, 특히 스토아적 요소 (키케로 (Academica prioret posterior) 등이 라틴어로 소개하는 스토아 인식론)이 들어 있으며, 여기서 금세기 현상학을 연상시키는, 指向性에 관한 초보적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1.2  본고는 감각적 지각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술들 가운데서, 감각작용에 능동적 성격을 부여하는, 감각자의 지성이 보여주는 指向 intentio에 관한 이론을 소개하여 그것이 후대 스콜라 철학 인식론의 지향성 문제를 예시하고 있음을 전거에 따라서 제시하는 일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상학이 철저히 추구하는 그 길을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에 이미 시도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일찌기 데카르트 이래로 거부되어 온 의식의 지향성을 살리는 길이자 감각, 나아가서는 인식 전반의 초월성으로 통하는 길이 되겠다. [3]

 

1.3  이 연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기 작품 De Trinitate (삼위일체론) 제XI권의 머릿 부분(1.1-2.5)을 전거로 하여 논의를 국한한다. 419년에 발표된 이 대저는 전부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I-VII)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요체인 신의 삼위일체를 성서와 신학 및 철학에 입각하여 논하는 부분이고,후반부(VIII-XV)는 인간의 정신생활에 나타나는 삼위론적 구성을 논구하면서 감각적 지각, 오성적 인식, 진리의 탐구와 향유를 차례대로 다룬다. 신과 인간[영혼] 을 시종일관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우구스티누스다운 작품 구도라고 하겠다. 이 책 후반부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을 기억-오성-의지(memoria-intellectus-voluntas)로 삼분하고 그 작용을 지성-인식-사랑(mens-notitia-amor)으로 나누는 등 인간의 의식활동 전반에 신의 삼위론적 신비가 구조적 틀을 이루는 것으로 해설하는 그의 특유한 인간구성론을 볼 수 있다. 제 XI권은 외적 감성(sensus exterior)과 내적 감성(sensus interior)이라는 내용으로 나누어 감각적 지각과 오성적 인식을 상세히 논하는데, 필자는 그 첫머리 부분을 축자번역하여, 의식이 감각적 표상으로서의 寫像에 갖는 지향성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소개하는 방법을 따르겠다.

 

1.4  감각적 지각에서는 먼저 외부 사물과 감관 사이에, 그리고 감관과 오성 사이에 이루어지는 기계론적이거나 정신현상학적인 해명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이 갖추고 있는 形象 forma in re과 신체 감관에 만들어지는 형상 forma in sensu은 쌍방관계를 전제하는데, 감관은 사물에로 빛을 投射하는 작용을 하고 porrectio radiorum, 사물은 감관을 形象化하며 informatio, 그 결과로 형상화된 감관 sensus informatus이 곧 감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감각이 인간 오성에 감지되는 단계, 곧 감각적 지각 perceptio[aisthesis]은, 혼이 부단히 신체 전체에 작용하는 가운데 감관이 형상화됨을 감지하고 non latens[놓치지 않고], 그것이 혼의 지향을 촉발한다 anima fit attentio. 이것이 본고의 줄거리가 된다. 우리가 각별히 유의할 만한 점은, 오성이 지각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형상화된 감관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현상학적 시각과, 혼으로부터 나오는 지향이 형상화된 감관을 외부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고 그 사물에 결합시킨다는 실재론적 해명이다.

II. 감각적 지각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 일반

 

2.1  아우구스티누스가 감각적 지각을 어떤 시각에서 보았는지 궁구하려면 먼저 그의 인간관이, 인간은 곧 영혼이라고 규정하거나, 인간을 영육의 합일체로 보면서도 영혼에 주안점을 두는 신플라톤 계열의 그리스도교 철학 전통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과, <삼위일체론>에서는 바울로의 표현에 입각하여, 단일한 인간을 두 면으로 나누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이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감각적 지각과 오성적 인식을 구분하고 논하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4]

"내적 인간은 오성을 갖추고 있으며 외적 인간은 신체 감관을 갖추고 있음은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 외부에서도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내도록 노력할 수 있다."(XI.1.1 ①)
"외적 인간은 신체의 감관을 갖추고 물체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감관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으로 나누어진다."
(XI 1.1. ④)

그러나 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와 결합하고자 신체를 향하고 신체를 살리는 animare 능력이며, 혼이 살리는 그 신체의 온전한 보존을 지향하고 신체에 해를 끼치는 모든 것에 반응함과 아울러 신체에 미치는 외부의 모든 자극에도 반응한다. 감각은 신체를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는, 혼의 이같은 본성적 활동의 일환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은 전적으로 혼에 속하는, 혼이 신체를 사용하는 행위로 간주되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指向의 개념이 도입된다.


2.2  무엇보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간은 곧 혼이고 신체는 도구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5] 인간은 곧 영과 육의 단일한 복합체라고 정의할 때에도[6] 신체는 도구적인 기능을 하고 혼이 생명과 작용의 원리로서 소개된다.  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와 결합하고 신체를 살리며, "신체는 혼에 의해서 생명을 받고 온전하게 보존된다."[7] 따라서 혼은 신체에 미치는 외부의 모든 자극에 반응한다. 감각은 혼의 이같은 본성적 활동의 일환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감각을 일차적으로 혼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논거는 플로티노스에 따른 존재론적 位階이다. 존재의 위계상, 신체는 혼보다 하위이며 따라서 하위의 존재가 상위의 존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가 받은 수동적 상태가 혼에 감각적 지각을 유발[생성]할 수는 없다. 정작 혼이 감지하는 것은, 혼이 신체를 통하여 물체의 운동을 받아서 혼 안에 스스로 形成하는, 그 사물의 類似性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혼은 신체보다 훌륭하고 강력하므로, 혼을 통하여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감관이라는] 신체는 어떠한 형상도 되지 않는다."[8] 이런 이론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대 스콜라철학의 이론처럼 혼이 신체에 대해서 內的 因果關係[형상원리]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통해서 신체가 살고 느끼고 움직이고 사유하는 能動原理의 역할, 다시 말해서 外的인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2.3  감각적 지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을 보면, 무엇보다도 감각은 전적으로 혼에 속하는, 혼이 신체를 사용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신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신체를 통해서 혼이 느끼는 것이다." [9]

"눈의 감관이 신체의 감관이라 불리우는 까닭은 신체의 기관이기 때문이요, 혼이 신체와 결합하여 감관이라는 물체적 도구를 이용하여 감각한다."(XI    2.2 ⑦)

이 문구대로 일단 감관은 신체의 기관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감각한다는 것이요, 감각한다는 것은 곧 혼이 신체 안에서 행사하는 생명기능이다. 중요한 것은 혼과 신체의 총체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혼의 遍在이다. 혼은 생명의 주체로서 신체 어느 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전체에 두루미치는 무엇이며 "신체의 모든 부분에 영혼 전체가 현존한다.  tota anima in quaque parte corporis."(De imm.animae 16.25: Enneades 4.7.5) [10] 신체의 모든 부분에 [혼의 일부가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혼 전체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플로티누스에 의거하여,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혼이 "놓치지 않고" non latet [me lathein] 감지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에 대한 소극적 정의가 된다. "[신체에 발생하는 자극이] 혼의 注意를 촉발하고 그 촉발이 혼에 의해서 간과되지 않을 때에, 감각한다고 말한다."(De musica 6.5.9) 다시 말해서  "감관은 혼에 의해서 조정되는 신체 기관으로서, 그 기관을 통해서 혼은 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ad passiones corporis 보다 주의를 기울여 작용케 된다."(ibid.6.5.10) 혼은 신체에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 말고도, 신체의 모든 상태에 注意 attentio를 기울이는 보완적 활동을 하므로, 외부 사물에 의해서 감관에 寫像 imago이 발생하면 즉각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는데 fit paratior 그것이 곧 감각이다.

2.4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지각을 빌미삼아 회의론에 빠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신체상의 감각에 의해서 익혀 온 진리를 의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에 의해서 하늘과 땅을 아는 방법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의 감각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감각도 우리 인식에 많은 보탬이
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De Trinitate 15.12.21)

영육으로 결합된 인간조건에 있어서 감각적 사물이 인식의 첫째가는 대상임을 인정한다. 우리의 텍스트도 바로 이 입장에서 시작한다.

"우리 인간 조건이 사멸하고 육체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可知的 사물들보다는 可視的 사물들을 더 용이하고 더 친숙하게 다룬다. 가시적인 것들은 밖에 있고 가지적인 것들은 안에 있어서, 전자는 신체의 감관으로 감각하고 후자는 지성으로 이해한다."(XI 1.1 ②)
"물체들에 대한 친근성은 하도 크고 [인간 생명이] 외부와 갖는 우리의 指向이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어서... 정신은... 물체들을 향하고...거기서 평정을 찾는 것이 [인간의 성향이다].
"(XI 1.1 ③)

경험적 인식은 일단 감관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신체의 감관[감각]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물체적인 세계에 속한다." 감각이 지각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론이지만 지각에 발생하는 寫像은 감각에 의해서 직접 야기됨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포착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주관적 착각이 아니라 '물체들에 관한 지각' 이라는 점이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이루는 관문인 신체 기관들도 당연히 물체적 성격을 띤다.

"돌이나 어떤 불꽃이나 그밖에 눈에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사물 자체 ipsa res는 보여지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을 수 있다."(2.2. ①) "그러므로 시각은 눈에 보이는 사물에 의해서 발생한다."(XI 2.3 ②)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된 사물의 實在性을 믿는 것이다. 물론 그 실재성은 감관에 의해서 판별되지 않고 지성에 의해서 판별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는 물체들과 (감관에 들어온) 그 물체들의 寫像들 (그 물체들이 현존함으로써 우리 감관이 곧 물체들의 사상이 된다)을 확연하게 구분한다."[11]는 명시적인 주장에서 보듯이 그의 입장은 실재론에 해당한다. 이하에서 재론하겠지만,눈에서 물체를 향하여 발산한다는 광선 radius ut virga 이론이 대상에 대한 간접적 지식만 전한다는 설명이라고 해서 플로티누스는 거부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 학설에 따라서, 거기에도 사물에 관한 '직접적' 지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내가 지팡이로 그대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만지는 것은 나요,그대를 지팡이 끝으로 내가 느끼는 것이다."(De quant.animae 23.43) "인간은 어떠한 사물에 관해서든 자명하게 알려주는 감관에 대해서도 신용을 둔다." (De civ.Dei 19.18) 그 이유는 "신체의 감관[감각]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이고 물체적인 세계에 속할 뿐더러" (De Genesi ad litteram 12.16.32) "신체의 모든 감관들은 자체가 밖으로부터 감지한 바를 마음[지성] 안으로 알려 준다."(In Ioannis Evangelium 18.10)는 실재론적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12]

 

2.5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이 갖고 있는 形相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성 안의 槪念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제일 먼저 물체적 대상물의 形相 forma in re, forma obiecti이 있고 그것에 의해서 사물은 감관에 可視的이고 지성에 대해 可知的이 된다. 그 형상이 시각에 잡히면 그 사물의 類似像을 감관에 만드는데 이것을 대개 事象 forma in sensu 또는 印象 imago이라고 한다. 감관의 형상은 자연히 기억에 형상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寫像phantasia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事象, 印象, 寫像을 거의 구분 않고 쓴다. 마지막으로 기억의 형상은 지성의 영역 acies mentis에 형상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곧 槪念 conceptus이다. 네 형태의 사상들이, 먼저 것이 그 다음 것을 발생시키는 순서로 생겨난다.(De Trin. 11.9.16) 본고에서는 물체의 形相과 감관에 생기는 寫像에 논의가 국한될 것이다.
     視角 visio을 예로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지각이 발생하는 세 요소를 열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고 구분하여야 한다.
    먼저 돌이나 어떤 불꽃이나 그밖에 눈에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
    는 사물 자체 ipsa res인데, 그것은 보여지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을 수 있
    다. 그 다음에는 봄[시각] visio인데 이것은 대상적인 그 사물이 감관에
    감각을 유발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번째로, [눈에] 보이
    는 사물 안에, 그것이 보이는 동안 내내 눈의 감각을 지속시키는 작용, 즉
    혼의 指向 animi intentio을 꼽을 수 있다.
(XI 2.2 ①)

여기서 시각 visio의 성격을 규정하는 일과 본고의 주제인, 혼의 지향의 논구는 뒤로 미루고, 먼저 사물 자체가 "눈에 보여지기 전에도 이미 존재한다."는 말에서처럼,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물 자체와 감관에 만들어진 寫像 즉 시각을 별개의 실체로 본다는 사실을 유념할 만하다. 그 점은 텍스트 속에서만도 차츰 분명해지는데, "시각은 가시적 객체와 보는 주체 양편에 의해서 발생한다."(XI2.3 ②)는 전제하에서, 우선, 눈에 보이는 물체와 그 물체에 의해서 감관에 인각되는 형상이 "동일한 실체에 속하지 않는다." nullo modo eiusdem substantiae est (XI 2.2. ③)고 했다가 말미에 가서는 "이 세 요소들이 아주 다른 실체들이다." tam diversae substantiae sint (XI 2.5 ③)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물의 실재성보다도 감관의 실재성을 먼저 강조한다.

    예를 들어, 물속에 물체가 잠겨 있으면서 그 인각을 물에 제공하는 동안,
   물은 그 물체의 흔적을 보존한다. 그러나 만일 물체를 꺼내면, 물은 그대
   로 있음에도, 물체의 흔적이 없어진다. 물은 그 물체의 형상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XI 2.3 ③).

도장이 물속에 잠겨 있는 동안 물속에 도장 모양이 만들어질 것이고 印象도 물 속에 생기지만 도장을 물에서 꺼내면 인상 또한 사라진다. 도장은 물체요, 도장에 새겨진 印刻은 사물의 形相이며, 물은 감관이고, 물속에 만들어지는 인상은 감관에 만들어진 寫像을 가리킨다면, 물체적 대상에 의해서 사상이 발생하기 전에도 감관은 실재한다는 설명이 된다.
    아울러 그는 사물 자체(존재론 아닌 인식론의 차원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사물 '안의' 형상 forma in re이라는 표현을 쓴다)의 실재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액체에 인장을 치는 비유를 들어서 물체적 대상이 없이는 감각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실재론을 전개한다.

    만약 액체에다 도장을 친다면, 도장을 치운 다음에는 印象이 남아 있지
    않다. [액체에 새겨졌던] 이 형상은 도장 자체에 있는 형상과 구분해야 마
    땅하다. [액체에 새겨졌던] 형상은  [도장에 새겨져 있는] 형상의 산물이
    다. 도장을 치우면 앞의 형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장에는 앞의 형상을 산출해냈던 형상이 존속한다
.(XI 2.3 ⑥)

다만 사물의 형상 forma in re과 감관에 인각된 형상 forma in sensu을 구분하는 것은 감관 자체가 아닌 지성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실히 언명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는 물체[객체]의 형상과 그 형상이 [보는] 주체의 감관
    에 발생시킨 형상을 구별해내는 일은 감각의 역할이 아니다. [이 두 형상
    들 사이의] 결합이 하도 긴밀하여 양자를 구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는 물체의 어떤 유사상이 우리 감관에 발생하지 않는 한, 감각
    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식별하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다.

    (XI 2.3. ⑤)

곧 이어서 밀랍에 인장을 치는 비유를 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서, 밀랍에 인장을 칠 때는 [도장이 아직 박혀 있어 인장이] 식
    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관에 이미 만들어진] 事象 imago이 없다고 하
    면 안된다. 그러나 도장이 박혀 있는 동안은 인장이 보이지 않고 그것을
    치워야만 인장이 보인다. 도장을 치우기 전에도 밀랍에 이미 인장이 박혀
    있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인간 이성은, 도장에 의해서 새겨진 형상
    이, 도장이 치워지기 전에도...존재했음을 이해 못할 이유는 없다.

    (XI 2.3. ⑥)

 

2.6  그러면 감각적 지각을 지성 측에서 지향성을 통하여 물체와 감관을 매개하고 조정하는 심리적 도식을 소개하기 전에, 본 텍스트에서도 언급되는, 소위'눈의 광선' radius oculorum 이론을 잠시 언급키로 한다. 이것은 물체와 감관 사이의 상관 관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하여 신체 안에 자리잡고 있는 혼[정신]이 어떻게 해서 공간상으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감지하느냐를 풀이해보려는 것이다. 본 텍스트에서 이 개념이 언급되는 곳은 끝대목이다.

    한 램프의 불꽃을 우두커니 바라보노라면 불꽃이 둘로 겹쳐 보인다. 보이
    는 사물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視光線 radii oculorum이 벌어지면서 이
    중의 식견이 발생하는 것이다. 각 눈에서 발사되는 광선들이 바라보는 물
    체로 집중되어 양편의 광선으로 단일한 시선을 이룰 정도로 수렴되지 못하
    고 분리되어서 인각되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가 한 눈을 감으면 불꽃
    이 더는 둘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대로 하나로 보인다
.(XI 2.4 ②)

오관 중에서 예컨데 사물을 보는 시각에서, 객체와 보는 주체를 결합시키는 매개적 인자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반적으로 '빛' lux, lumen이라고 일컫는다.스토아 학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입한 것이다. [13] 시각이라는 감각적 지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사물에게서 오는 빛살과, 보는 능력[기관]에서 오는 빛살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광선이 교차하여 일종의 합일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고대인들은 고양이 눈이 밤에 파아란 불꽃을 내는 사실이나 야광체를 관찰하고서 이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런 빛으로 우리는 흑과 백을 분간하고, 쓰고 단 것을 구분하며, 차고 더운 것을 분별한다. 혼이 5관이라는 모든 감관을 통해서 그 빛을 발산하며, (각기 차등이 있는 다섯 개의 수도꼭지를 이용하듯이) 감관들을 통해서 그 빛을 대상에로 발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감각이 갖는 능동적 성격은 마치 그것이 특정한 빛의 역할,혼이 그 모든 활동에서 [감각 대상을 향하여] 투사하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먼저, 감관에 만들어지는 事象 imago들은 어디까지나 물체적 대상들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결국 그 대상물들의 形相들이며, 따라서 그것을 싣고 오는 빛은 당연히 물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만 외부에 있는 사물에 비해서는 훨씬 精巧하다. 사물에서 오는 물체적 빛은 비물질에 가까울 정도로 정교한 물체 illud quod est subtilissimum이지만 빛은 '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곧 4원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거기에 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생활[생명] vita sentiendi이라고 부를 빛 [14]을 상정한다. 이 빛은 혼에 자리잡고 있다. "이 빛은 먼저 눈을 통해서 발산되며 눈의 광선으로 주시하는 가시적 대상물들에로 투사된다."(De Gen.ad litt. 12.16.32) '눈의 광선' radii oculorum이라고 부른 이 현상은 시각의 대상물을 향하여 눈에서 나아가는 시선을 일종의 光線의 發射 iactus radiorum ex oculis라고 비유된다.[15] 그렇지만 그 기능은 시각의 대상물을 주시하는 attendere 데에 있다. 빛이 무조건적으로 방사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대상에로 집중되는 것이다. 여하튼 시각은 우리 눈에서 나오는 어떤 광선을 전제한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가 눈으로부터 발사된 광선이 물체를 건드려 감각한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광선으로 우리가 사물을 '만지는' 것처럼 형용한다. "내가 지팡이로 그대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만지는 것은 나요, 그대를 지팡이 끝으로 내가 느끼는 것이다."[16]
    빛을 수용하고 빛을 방사하는 이 작용은 어디까지나 쌍방적이다. [17] 그 점을 텍스트는 곧이어 설명한다. "신체의 눈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물체들이다.눈을 통해서 조사되는 광선, 우리가 감지하는 대상에 접촉하는 광선은, 우리가 거울을 바라보는 경우가 아닌 한, [우리 뜻대로] 제어하거나 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De Trin. 9.3.3) 눈에서 나가 물체를 건드리는 광선은 물체로부터 나오는 광선과 더불어 눈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촛불의 착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째서 왼눈을 감으면 오른편에 있었던 형상이 보이기를 중단하고, 역으로
    만일 오른눈을 감으면 왼편에 있었던 형상이 보이기를 중단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두고는, 만일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극히 유사한 사상  quae
    dam imago simillima rei eius quam cernimus이 우리 감관에 생겨나지 않
    는다면, 눈의 숫자만큼 불꽃의 형상이 겹이 되는[복제되는] 일이 없으리라
    는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본다. 즉 광선들의 수렴을 분리시키
    는 지각 방식이 작용한다면 [눈의 숫자만큼 불꽃의 형상이 겹쳐져 보인다
    는 것이다.] 한 눈을 감은 이상, 눈을 하나만 뜨면 그것이 직선적이든 외
    곡되든 간에, 단일한 사물을 겹으로 보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

    (XI 2.4. ②-③)

    이 빛의 투사 이론은 본고의 주제인 지성의 지향으로 건너가는 교량이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에 따라서 사실 지성의 지향을 서술하는 데에 이 이론을 사용한다. 그 점은 이하에 다시 거론하겠다.

 

2.7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적 지각이론을 실재론이라고 하였으나 그 實在論은,인식자가 존재하고 지각하는 한에서 보는 일종의 心理的 實在論이다. 그가 인식의 첫째 영역을 物體的이라 부르는 것은 신체를 통해서 지각되고 신체의 감관들에 顯現하는 한에서다. "감관은, 감응을 받는 자기 신체의 본성을 따라서,자체가 감응받은 바 suas affectiones를 [신체를] 주관하는 정신에 전달한다." [18]

     그러므로 감각 혹은 시각, 말을 달리하자면, 외부에 의해서 형상화되지
     않은 감관이든 외부에 의해서 형상화된 감관이든 생명체의 본성에 소속하
     며, 그 생명체는 시각에 의해서 감지하는 그 물체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
     다. 따라서 대상물이 감관을 형상화하는 것은 감관으로 존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각을 발생하기 위함이다
. (XI 2.2 ④)

물체적 대상은 우리 지각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서만 감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은 단연 인식 주체의 것이고 ""대상물이 감관을 형상화하는 것은 감관으로 존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각을 발생하기 위함이다. quo sensus non ita formatur ut sensus sit, sed ut visio sit."(De quant.animae23.41)는 문구는 시사하는 바 많다.
   무엇보다 먼저 이 텍스트에서 감각[예컨데 시각 visio]을 규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에서 이 점이 잘 시사된다. 감각적 지각이 일단 신체의 감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나, 감각은 '형상화된 감관' sensus informatus이라는 정의는 우리 인식의 마지막 바깥 창구가 감관이요 그 이상 나가지 못함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발생은 외계 사물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정작 감지하는 바는 감각된 것[수동분사로서의 sensum]이라는 표현은 진지한 해석을 요한다.

    감각은 비록 [눈에] 보이는 물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혼을 갖고 감각하는 주체의 신체로부터 시작한다. 혼이 그 신체에 영합하
    는 방식은 실로 오묘하다. 그렇지만 보이는 물체에 의하여 식견이 발생한
    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물체에 의해서] 감관 자체가 형상화된다. 그때부
    터 그 감관은 더 이상 단순히 감관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감관, 즉 눈이 손상되지 않은 이상,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온전
    한 채로 작용하는 감관이 아니라, 이미 형상화된 감관 sensus informatus
    이며, 이것을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XI 2.3  ①)

    그렇다면 감관에 인각되는 事象은 과연 감각적 지각의 매개적 수단 medium인가, 아니면 감각적 지각의 대상물 obiectum인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나온다.

    가시적 물체는 눈의 감관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서, 감관이 물체와
    조우함으로써 시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은 감지된 사물에 의해서
     形相化된 감관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가시적 사물을 치워버리
    면 시각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물체가 없으면 시각은 불가능하다.

    (XI 2.2 ②)

물론 앞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감각적 지각을 수동적인 무엇 non latens[놓치지 않음]으로 정의했고 감관이 외부 사물로부터 규제받음을 명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지금 이 텍스트에 "가시적 사물을 치워버리면 시각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물체가 없으면 시각은 불가능하므로...시각은 감지된 사물에 '의해서' 형상화된다"거나, 보다 명시적으로 "대상물이 감관을 형상화한다"(2.2.④)는 문구나 "감관의 형상화(그 형상화를 시각이라고 일컫는다)는 눈에 보이는 물체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서 가시적 사물에 의해서만 인각된다."(2.3.②)는 표현은 감각적 지각이 외부 사물에 의해서 규제받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다. "무엇을 보는 사람은 보여지는 사물에 의해서 규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어떤 가시적 대상이든 감지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감각적 대상에게서 규제를 받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가시적인 대상물에게서 규제를 받는 것이다...보는 자는 본다고 느끼는 그 대상을 필히 본다."(De quant.animae 23.41)
    그런데 "시각은 감지되는 사물에 의해서 形相化된 감관" sensus ex ea requae sentitur informatus이라는 표현에서 비록 '감지되는 사물에 의해서' 라는 실재론적 표현이 담겨져 있지만 그것은 사물의 실재성을 말하는 것이지 그 이상의 논구는 않고 있다.[19] 물론 감관에 만들어지는 事象들은 어디까지나 물체적 대상들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결국 그 대상물들의 形相들이며, 그것 때문에 당연히 물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상으로 물체에서 감각적 지각을 통해 감지되는 것은 그 사물의 '존재함' esse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감관에 의한 유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일단 물체적 사물이 존재함을 의식하는 것이다.[20] "어떤 물체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감관이 무엇인가 그 물체에 관하여 알려주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다."(Epistola 13.4)는 소극적 표현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대신에 의식의 주관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언급도 본텍스트에서 여러번 나온다.
    가시적 사물이 감각을 발생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고, [가시적 사물은] 감
    관에다 단지 자기의 유사상인 형상을 발생시킬 따름이다. 우리가 시각을
    통해서 무엇을 감지할 때에 감관에 이 사상이 발생한다."
(XI 2.3.④)

    그러므로 그 물체가 사라지면 事象도 사라진다는 이유를 들어서, 눈의 감
    관이 보이는 물체의 사상을 (그것이 보이는 동안 내내) 갖고 있지 않다고
    는 말 못할 것이다. 이 비유를 들면, 언뜻 알아듣기는 어려울지라도, 우리
    가 어떤 사물을 볼 때에, 그 가시적 사물의 事象이 우리 감관에 형성된다
    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이 곧 시각임을 확신할 수 있다.

    (XI 2.3. ⑦)

만일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에, 그 가시적 사물의 事象이 우리 감관에 형성된다는 것과,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이 곧 시각이다" formari in sensu nostro imaginem rei visibilis, cum eam videmus, et eamdem formam esse visionem.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우리 감관에 형상화되는, 가시적 사물의 형상은 곧 형상화된 감관이니까 양자를 구분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일단 감각의 단계에서 인간이 감지하는 바는 형상화된 감관, 또는 감관에 형상화되는 한에서의 [사물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대목을 다시 인용해 본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는 물체[객체]의 형상과 그 형상이 [보는] 주체의 감관
    에 발생시킨 형상을 구별해내는 일은 감각의 역할이 아니다. [이 두 형상
    들 사이의] 결합이 하도 긴밀하여 양자를 구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이는 물체의 어떤 유사상이 우리 감관에 발생하지 않는 한, 감각
    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식별하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다.

    (XI 2.3 ⑤)

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바는 것이다. 비록 물체의 '형상'에 의해서일지라도, 물체적 대상에 의해서 감관의 사상이 직접 발생한다는 것은 인식의 존재론적 위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상물이 감관에 야기한 사상을 인식자가 요리하면서부터 엄밀한 의미의 감각이 발생한다면, 이 질서가 유린되지 않는다.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이 발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대상물의 간접적 작용만 용인하고 직접적 작용은 감각자의 지성에 돌린다.[21] 물체적 대상은 감관에 형상을 제공한 다음에는 지각에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본고의 소재인 혼[지성]의 지향이 등장한다.
    감관편에서는 실재하는 對象과 감관에 발생한 寫像을 사실상 구분 못한다.감각적 지각에서는 사물이 갖고 있는 形相(forma corporis)과 감관에 발생한 寫像(forma in sensu)을 구분 못하고, 지성적 인식에서도 기억에 발생한 寫像(forma in memoria)과 지성에 확립된 개념(forma in mente)을 구분 못한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감각적 대상과, 눈이 형성하는 감각적 표상 즉 寫像은 서로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寫像의 주관적 성격, 즉 시각적 표상이 갖는 유기체적 특징, 그것이 인간 유기체의 일부로서 그것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사상이 의식에 내재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의식 자체가 그 표상에서 머물고 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혼의 指向이 주관적 寫像과 우리가 보는 대상의 形相 사이를 융합시킨다고 천명한다. 다만 우리로서는 양자를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만큼 긴밀하게 융합시킨다. 따라서 눈이라는 신체 감관에 만들어지는 寫像, 보는 사람의 유기체에 類似像을 발생시킨 그 외부 사물의 객관적 존재를 구분하여 추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성에 의해서다.[22]
    여하튼 물체적 대상물과 감각적 인상 양자의 인식론적 결합을 아우구스티누스는 指向을 통해서 매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대상물의 形相, 그 형상이 눈에 각인된 寫像, 그리고 指向이라는 정신 작용으로 인한, 양자의 결합 이 셋이 시각의 삼위론적 구성요소들이라고 하겠으며, 이 셋이 현상학적으로 불가분할만큼 철저하게 기능상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in tantam coeunt unitatem는 주장을 한다. 이하에서 감각적 지각의 이 적극적 기능에 해당하는 지향 문제를 논한다.

    그러므로 시지각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보이는 물체가 있고, 식견이
    있고, 그리고 양자를 결합시키는 지향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뚜렷하게 구
    분되는 것으로 각각의 고유한 기능때문만 아니고 본성의 차이에서도 구분
    된다.
(XI 2.2.⑧)

 

III. 감각적 지각과 정신의 指向

 

3.1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적 지각을 모두 시각  visio[봄]이라고 통칭하면서 시각이 발생하려면 보는 주체, 보이는 객체, 보는 행위 세인자가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또 보이는 대상과 보는 감관을 당사자들 편에서 물리적으로 매개하는 요소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반적으로 '빛'이라 한다는 것도 앞서 언급하였다. 앞서 인용하였지만 본고의 핵심이 되는 문구라서 다시 인용해 본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고 구분하여야 한다. 먼
    저 돌이나 어떤 불꽃이나 그밖에 눈에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사물 자체 ipsa res인데, 그것은 보여지기 전에도 이미 존재했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봄[시각] visio인데 이것은 대상적인 그 사물이 감관에 감각
    을 유발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번째로, [눈에] 보이는 사
    물 안에, 그것이 보이는 동안 내내 눈의 감각을 지속시키는 작용, 즉 정신
    의 指向 animi intentio을 꼽을 수 있다
. (XI 2.2. 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감각이란 곧 혼[정신]이 신체를 使用하는 행위로, 신체의 행위가 아닌 정신의 행위로 간주된다면, 감관으로 들어온 외부 사물들의 寫像이 의식에 內在하는 것으로만 보이고 따라서 의식 자체가 그 表象에서 머물게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주관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정신의 指向이라는 것이 있어서, 감관에 포착되어 지성의 대상이 된 주관적 寫像과 우리가 보는 밖앝 대상의 形相 사이를 統合시킨다고 천명한다. 다만 주객관의 문제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하려는 바는 외부 사물의 객관적 자립성보다는, 감각과 지향이 인식자에게 속한다는 주관성임을 앞서 시사한 문장대로다.

    감각은... 혼을 갖고 감각하는 주체의 신체로부터 시작한다....그렇지만
    보이는 물체에 의하여 시각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물체에 의해
    서] 감관 자체가 형상화된다. 그때부터 그 감관은 더 이상 단순히 감관으
    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감관, 즉 눈이 손상되지 않은
    이상,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온전한 채로 작용하는 감관이 아니라, 이
    미 형상화된 감관 sensus informatus이며, 이것을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
(XI 2.3  ①)

 

3.2 본 텍스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향 intentio을 네번에 걸쳐 거듭 정의하면서 그 내용을 보완해 가고 있다. 그 명칭도 처음 두번은 '정신의 指向' animi intentio 이라고 부르다가 세번째는 '정신의 意志' voluntas animi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네번째는 단순히 意志 voluntas라고 하면서 달리는 "사랑 혹은 욕망 혹은 정열이라고까지 일컬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 정의를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향이란,
    "정신의 지향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 안에, 그것이 보이는 동안 내내 눈
    의 감각을 지속시키는 작용
"(XI 2.2.①)
    "정신의 지향은 우리가 보는 대상에 감관을 고정시키고 사물과 감관을 결
   합시키는 작용"
(XI 2.2 ⑥)
    "정신의 意志는 감관을 감각적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며 시각을 그 사물에
    다 지탱하는" 작
용(XI 2.5 ①)
    "의지[지향]는 이 둘을 철저히 융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감관을 지각되는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 감관이 형상화되게 만들고, 일단
    형상화된 다음에는 감관을 [계속해서] 그 대상에 견지시킨다. [지향의] 추
    동력이 그렇기 때문에 달리는 사랑 혹은 욕망 혹은 정열이라고까지 일컬을
    수 있다
.(XI 2.5 ④) [23]

지향의 작용을 발생상의 순서로 설명하자면, 먼저 지각되는 사물을 향해 지성이 감관을 움직여 나가는 일 ADMOVERE[①], 그 다음은 대상물과 감관을 융합시켜서 감관이 형상화되게 만드는 일 CONIUNGERE[②], 끝으로 그렇게 형상화된 감관 곧 시각을 그 대상물에다 지속시키는 일 TENERE[③]을 꼽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텍스트에서 제시하는 순서는 정반대로 되어 있다. 정신의 지향은 "대상물에다 눈의 감각을 지속시키고" sensum ③ detinere oculorum, "대상에 감관을 고정시키고 사물과 감관을 결합시키며" sensum ③ tenere atque utrum ② coniungere, "감관을 감각적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며 시각을 그 사물에다 지탱하는가 하면" sensum ①admovere et visionem ③ tenere, 마지막으로는, 이 셋을 다 동원하여 둘을 "융합시키고, 감관을 지각되는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 감관이 형상화되게 만들고, 일단 형상화된 다음에는 감관을 [계속해서] 그 대상에 견지시킨다" vim ② copulandi, sensum formandum ① admovere et formatum ③ tenere 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서술을 종합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정신의 지향은 "지각되는 사물을 향해 감관을 움직여 나가고, 그 대상물과 감관을 융합시켜서 감관이 형상화되게 만들며, 그렇게 형상화된 감관 곧 시각을 그 대상물에다 지속시키는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3.3  아우구스티누스는 指向이라는 용어로 intentio, attentio를 섞어 쓰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De musica에서 주로 사용하듯이, 정신의 유기적 기능 또는 정신이 자체의 감관에서 일어나는 변화나 자극에 기울이는 작용은 attentio 注意라고 하며, 정신의 심리적 행위 또는 이러한 자극으로 이미 형상화한 감관을 그 감각 대상에 결부시키는 작용은 intentio 指向라고 구별하더라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우선 초기 작품인 <음악론> De musica(6.5)에서 정신이 감관에 부여하는 注意를 세밀히 관찰하면서 나름대로 감각을 다시 정의한다.  신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혼[정신] 의 기능에 의해서이며 그것은 "혼이 신체를 살린다[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혼이 作用者로서의 指向을 행사함으로써 intentione animae facientis 이루어진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6.5.9) 그렇다면 정신의 지향성은 단지 감각적 지각에 그치지 않고 신체와 유관되는 혼의 작용 전체에 해당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넓은 윤리적 의미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심지어는,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지향에 따라서 행한다."*는 단언까지
있다.
    그 이유는 존재론상으로 하위의 것이 상위의 것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플로티누스식의 관념에 입각해서다. "나는 신체에 의해서 혼이 규제받을 수 없다고 여기며, 오히려 [혼이] 신으로부터 자기 지배에 맡겨진 속민에게 하듯이, 신체에 대해서와 신체 안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하한 물체들도 외부로부터[만 감관이라는] 이 신체에 개입하거나 조우하는 것이며,[감각자의] 혼에가 아니라 [감관이라는] 신체에[만] 작용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작용으로 혼의 활동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거나 한다.   ... 혼이 신체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은 없고 어디까지나 신체에 대해서, 신체 안에서 능동적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24] 경험상으로 감각이란 분명히 물체 → 신체[감관] → 혼[정신]으로 나아가는 작용이고, 우리는 감각을 줄곧 수동적인 것으로 보아왔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이 혼의 행위일 뿐더러, 혼의 指向的 行爲(animae intentionalis actus)이다. 감성 또는 감각하는 생명은 한 마디로 혼에 의해서 인식되고 혼으로부터 투사되는 빛이다. 혼은 이 빛 '안에서' 자체의 指向 혹은, 좀더 상세히 말해서, 指向的行爲를 수행하는 까닭이다. 빛이 비록 물질적이지만 그토록 미세한 물질 혹은 비물질인 빛을 통해서 외계와 매개한다면, 혼은 신체에게서 아무것도 당하지 않고 오로지 신체 안에서 작용할 따
름이라는 설명이 된다.

3.4  이런 원리에 입각해서 본다면, 혼은 신체에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말고도, 신체에 일어나는 모든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보완적 활동을 하고 있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혼[정신]은 감관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반사적인 주의를 기울여서 신체가 외부로부터 규제받는 수용상태를 감지한다.

"[평상시 혼은] 감관들에 명암, 건습, 온냉의 원소들을 움직여 보낸다. 혼은
이 모든 것을 무의식 중에 행한다. 그러다가 신체에 작용하는 원소들이 [외부
사물로부터 감관에 미치는] 어떤 다른 힘과 조우하게 되면, 혼은 보다 주의깊
은 활동을 발휘하여 신체 말단[감관]에 작용하게 된다." [25] 그러한 주의가
[감관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생명력을 움직여서 감관으로 하여금 외부의 자극
에 더욱 주의를 집중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곧 혼[정신]을 주체로 하는 '감각
'이다. "[외부 물체로부터 감관에 끼치는 작용으로 말미암아] 혼의 활동에 미
치는 異常으로 말미암아 혼은 注意가 된다. [혼이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임
으로 생기는 이 이상 상태가 놓치지 않고 [지성에 감지된다면] non latet, '감
각한다'고 말한다....혼의 활동이 [신체가 외부 사물과 접촉하거나 외부 자극
에 의해서] 보다 주의를 집중하게 되면, 그것은 [혼에 의해서] 놓치지 않고
[감지된다]."
[26]
혼의 정상적인 활동에 발생하는 곤란 때문에 혼이 注意 그 자체가 된다. anima fit attentio.
    감각적 지각을 논하는 고전 인식론에서 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자요 그것이 감관을 통해서, 감관을 도구로 하여 외계사물을 감지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신체에 대한 혼의 기능은 크게 셋으로 대별되는데 신체를 살리는 活性化 animatio, 물체에 대한 감각 sensus de corpore, 신체 감관을 통한 감적 지각 cognitio per corpus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셋 모두를 活性化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혼이 신체를 살리는 animatio 작용까지도 지향의 어떤 운동 motus라고 설명하는데 그것이 감각으로 작용하면 이 운동은 오관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지향이 혼의 작용을 오관으로 뻗어내면서 나타나는 운동들이 곧 감각이다. 본고에서는 주로 시각을 예로 들어 해설하고 있지만, 청각을 예로 설명하면 지향의 역동성이 보다 쉽게 설명된다.[27]
    즉 지향이 혼에서 나와 신체를 살리면서 animari 순조롭게 뻗어나가는 운동은 마치 무의식 중에 전류처럼 흐르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매우 단순한 운동인데 이것을 그는 혼의 '진행 운동' motus progressores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감각이나 의식은 발생 않는다[고막에 흐르는 운동]. 그런 운동이 만일 외부사물의 자극으로 감관에 발생하고 감관을 규제하는 수동상태 passio와 조우하는 경우, 마치 성질이 다른 두 전류의 충돌로 스파크가 발생하는 '충돌 운동' motus occursores으로 변한다[공기의 진동으로 고막에 자극이 도달]. 감관의 변화에 혼이 반응하는 작용이다. 그것이 혼의 지향에 감지되지 않고 놓칠 수도 있다 latet. 그런데 만약 그것이 놓치지 않고 감지된다면 non latet, 다시 말해서 혼이 그 사건 pati에 주의를 기울이면 '감지 운동' motus recordabiles으로 변한다. 의식의 선에 떠오르지는 않으나 혼의 주의가 집중되는 단계이다[소리가 들림]. 끝으로 혼이 지성으로서 그 반응을 의식하는 경우는 '지각 운동' motus sensuales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엄밀한 의미의 감각 sensatio 또는 감각적 지각 perceptio이다["누구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음].[29]
    다시 말해서 "혼이 신체에서 감각을 한다는 것은 신체에 의해서 혼이 무엇을 규제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외부로부터 받은] 규제에 대해서 혼이 주의깊게 작용함을 뜻한다. 그 주의깊은 작용들이 혼에 의해서 놓치지 않으며 이것이 곧 감각함이다." (ibid. 6.5.10)
    혼이 신체에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 말고도, 신체에 일어나는 모든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보완적 활동을 한다는 설명은, 快苦라는 지각을 예로 든다면 그 유기적 관련성이 잘 드러난다. 신체는 다른 물체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주사를 맞을 때에 외적인 자극을 우리는 분명히 느낀다. 그런데 그때에 그것을 피하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혼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설이다. 다시 말해서 지향이 발동함으로서, 인간 생명체에서 발생하는 유기체적 과정 즉 초보적 感覺과, 외부 대상에게서 오는 그 規定[phantasia] 사이에서 접합체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규정된 내용을 혼에 제시하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지향은 정신에 의해서 감지된 [자체의] 내면 과정 속에다 감각을 축약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혼이 무엇을 느낄 때에 신체의 [외부로부터 규제받은] 수동상태에다 이 작용들을 하는 것이지 그 수동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ibid.) 혼은 감각으로, 신체의 수용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지 그 수용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방금 주사의 예를 든, 痛覺은 신체의 해로운 수용상태[뾰쪽한 바늘로 찔림]에 반응하여 혼에 의해서 행사되는 注意(attentio)행위이다. 배고픔은 신체의 부양에 필요한 음식이 결핍되어 있는 [신체의]상태에 대해서 혼이 긴장하여 각별한 주의를 집중하는 행위이다. "신체에 곤란이 생김으로써 지향의 행위가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ibid. 6.5.9)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29]

3.5  지향은 감관에 매이지 않는, 정신의 작용이다. 이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想像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성하던 눈이 멀어 사물을 못 보게 된 경우에도 상상력 imaginatio이나 기억력 recordatio은 여전히 작용하는 것을 관찰하노라면, 감관 없이도 혼[지성]의 지향이 작용함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두뇌로부터 나가는 지향 - 지향에 의해서 감각 운동이 [일정한 방향으로] 통제를 받는다 -의 행로가 마비되고 혼란되고 차단된다면, 혼 자체는 그 고유한 운동에 의해서 [대상물을 향하여 나아가는 지향의] 이 활동을 중단할 수가 없으므로, 혼 자체가 정신의 힘으로 [혼자서] 물체적 사물들의 유사상을 만들어내거나 [과거에 이미] 존치된 사상들을 [다시] 직관하게 된다. [지향의 행로가 차단될 때에] 혼은 신체를 통하여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물체적인 것들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거나, 혼이 가진 지향의 힘을 통해서 물체적인 사물들을 향하지 못하므로 [혼의 지향적 활동은 여전히 지속되기 때문에, 혼 스스로 정신에 물체적 사물들의 유사상을 만들거나 과거에 이미 존치된 사상들을 직관하게 된다]." (De Genesi ad litteram 12.20.42)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바는, 눈을 감고 있거나 잠을 자기 때문에 시감관이 작용을 그치는 단계에서도 혼의 지향 작용이 계속되기 때문에 상상이 떠오르거나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의 작용인 지향이 혼에서 신체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방적인 것이요 또한 신체[감관]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람이 만일 신체적 질병을 앓아서 소경이 되면, 이 감관은 소멸되지만 혼
    과 혼의 지향은 그대로 남는다. 물론 이 경우에 혼의 지향은 더 이상 신체
    의 감관을 사용할 수 없으며, 따라서 봄으로써 감관을 외부 사물에 결합시
    키고, 보이는 사물에 시선을 견지하는 작용은 못한다. 그렇지만 혼의 지향
    은, 빛이 사라져서 신체의 감관을 더 이상 지니지 못하는 경우에도, 어떤
    노력을 보임으로써, 비록 신체의 감관이 제거되더라도, 지향 자체가 말소
    되거나 감소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든 없든 간에
    지향에는 아직도 무엇을 보려는 열망이 남아 있다.
(XI 2.2 ⑦)

꿈을 예로 들어서, 평소에 감관을 통하던 지향의 활동이 잠을 자는 동안 감관이라는 통로가 차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꿈속에 작용함을 보건데 그것이 감관에 절대적으로 매이지 않는다는 증거로 삼는다. "잠을 잘 때에는 [정규적으로] 눈에까지 지향을 유도하는 감각 통로가 마비됨에도 불구하고, 지향 자체는 작용을 여전히 계속하여 마치 물체적 사상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무엇을 보고 스스로 물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De Genesi ad litteram,12.20.42)
    그러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태생 소경이 아예 사물의 색갈이나 형태에 관한 개념을 일체 갖지 못하는 사실을 관찰하여, 감관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러한 개념이 전혀 발생할 수 없다는, '백지'(tabula rasa) 이론을 또한 인정하고 있다. "눈을 앓거나 시각을 잃으면, 감각의 지향이 발산되는 두뇌에 [아예 그런 것을 발생시킬] 원인이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그러한 허상이나 환상이 생겨나지 않는다. 물체적 사물들을 의식 못하는 장애가 [정신이 아닌] 신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그런 시각을 만들어내지 못한다]."(ibid.)

 

3.6  의식 안에 주관적이고 내재적인  표상을 창조해내는 감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외부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지각을 야기할 수 있는가? 객체의 제시가 어떻게 해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가? 우리 감관에 들어온 표상은 이미 질적인 변화를 거친 다음인데, 어떻게 해서 감지된 객체들을 원래 그대로 역번역해낼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점을 두고서 지향에 의해서 우선 지각의 객관성을 살리는 길이 열린다. 지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체가 규제받는 수동 상태에 대해서 초월적 인식의 원천이 될 수가 있다. 지향이 (신체 전체에 작용하는) 유기체적 과정과 (외부 대상으로부터 감관에 오는) 규정 사이에서 접합체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의지[지향]는 이 둘을 철저히 융합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감
    관을 지각되는 사물에로 움직여 나가 감관이 형상화되게 만들고, 일단 형
    상화된 다음에는 감관을 [계속해서] 그 대상에 견지시킨다. [지향의] 추동
    력이 그렇기 때문에 달리는 사랑 혹은 욕망 혹은 정열이라고까지 일컬을
    수 있다.
(XI 2.5 ④)

    지성의 지향 또는 지향적 행위가 주관적 寫像을 형성하고 그것을 외부로 투사하여 대상의 포괄적인 파악으로 전환한다. 다시 말해서 지향이 일차적으로는 감관에 생긴 표상에로, 이차적으로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에로 뻗어나가는 능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만큼, 그러한 운동 자체가 그 대상의 객관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까닭이다 natura nihil frustra facit. "혼은 자기 지향의 힘을 물체들을 향하여 이끌어가고, [상상을 하는] 정신의 능력으로 물체들의 유사상을 스스로 창조하기도 하며, 목전에 놓여 있는 사물들을 주시하거나 한다."[30]  상상의 경우에 현져하게 드러나는 바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혼이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혼이 자체 안에 감각 대상의 寫像을 생성해냄과 동시에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혼은 혼이 자체 안에 생성해내는 寫像을 인지하는 셈이다.
    이것은 이성의 인식에서도 여일하게 해당한다. "이성은 어떤 의미에서 지성의 注視이며, 다른 한편 추론은 이성의 探究, 즉 주시할 대상을 향하는 주시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추론의 역할은 탐구하는 것이며 이성의 역할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성이라고 하는, 지성의 주시가 어떤 대상을 향해 投射하여 그것을 볼 때 지식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주시하려고 지향할지라도 지성이 보지 못하면 이것은 무지 또는 무식이라고 불린다."[31]
    지향을 의지라고 일컫는 까닭은 그것이 감관을 대상물에게로 향할뿐더러 그 대상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주장을 하면서 텍스트 맨끝에 카멜레온의 變色과 인간의 胎敎를 예거한다.

    그리하여 [지향은 주체의 신체가] 대상물의 형상이나 색갈과 비숫한 색갈
    이나 형상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수도 있다. 카멜레온의 작은 몸은 그것이
    바라보는 색갈에 따라서 아주 쉽게 변함을 볼 수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서
    는 거대한 몸집이 이처럼 쉽게 변하지는 않지만, 새로 태어난 작은 새끼들
    은 대개 어미측의 소망을 쉽사리 [몸에] 나타낸다. 즉 어미가 아주 좋아서
    바라보던 것을 자기 몸에 드러낸다. 그러므로 태아가 그 초기에 아주 여리
    고 쉽게 조형되는 단계일수록 어미의 혼의 지향  intentionem maternae
    animae을 따른다. 이럴 경우에는 어미 혼에 있는 지향 자체가 어미가 극진
    한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물체의 表象  phantasma이 되는 것이다.

    (XI 2.5 ⑤))

    때로는 지향이 감관의 작용을 차단하는 반대의 경우도 지향의 능동성을 입증하는 전거가 된다. 사람이 눈을 질끈 감거나, 숨을 죽여 냄새를 피하는 경우처럼 지향의 노력으로 사물이 감관에 들어 오지 못하게 차단하거나, 딴 일을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남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거리를 지나가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지각하지 못하는 형상이 관찰된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보고서도 '못 보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유의 않고 길을 가면서도 장애물은 곧잘 피한다. 그것은 외적인 시각 visio externa은 작용하고 있지만, 그 사물을 유의하여 지각하는  지향 곧 내적 시각 visio interna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므로 주시하는 것 다르고 보는 것 다르다"는 말을 한다. 지향을 발동하여 사물을 주시하는 것 aspicere과 그저 눈에 사상이 들어오는 것 videre이 다르다는 뜻이다. [32] 인식의 차원에서도 지향이 기억도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다. "혼이 다른 사물에로 계속해서 지향을 기울이고 있을 경우에, 지향의 노력으로 기억[일단 지각된 寫像 phantasia을 가리킴)을 감각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33]
    아우구스티누스는 한사코 감각 예컨데 시각은 혼 또는 지성이 행하는 능동적인 활동이요, 신체 기관인 눈은 수동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혼이 신체 속에서 행사하는 활동이 [곧 指向이라는 이유에서] 내재적(주관적)이자 곧 초월적(객관적)이라는 점을 아울러 언명한다. 그의 인식론에는 객관성도 살아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寫像 자체가 아니고, 사상을 통해서 [그것들이 대리하는] 외부 사물들을 인지하는 까닭이다. "사람은 물체에 대해서, 감관이 그 물체에 대해서 알려주는 범위에서만, 그 사물이 존재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Epistula 13.4) [34] 는 표현은 현상론처럼 들리지만, 적어도 소극적으로, 감관이 사물의 존재를 알려 준다는 언명을 하고 있다. 그것을 좀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여 "시각 즉 지각하는 자의 감관에 발생한 形相에 대해서, 그 형상을 발생시키는 물체의 형상은 마치 [그것을 생성하는] 모체와 같다."(De Trin.11.5.9)는 언명도 있다. [35]

IV. 결   론

4.1  근대 이후의 인식론에서 '하나'의 표상이나 경험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중대한 물음이 되어 왔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사유(res cogitans)와 물체적 사물(res extensa)을 갈라놓고서 松果腺 하나로 양편을 중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統覺 apperceptio이라는 용어를 써서 지성이 무엇에 주의하는 것, 혹은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칸트로서는 대상이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질 (지각될) 뿐만 아니라, "받아들여졌다"고하는 간접의식이 성립되는 지각 방식을 염두에 두고서 대상이 '대상'으로서 파악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궁구하였다. 현상학적 체계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物自體를 남겨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각과 인식에로 철학이 사로잡히면서도 주체와 객체, 정신과 세계를 상관짓지 않을 수없는 근대 정신사의 錘運動을 예고한 것이리라.
    칸트에 대한 반발로 철학이 정신과 대상의 '관계'를 다시 문제삼게 되자 브렌타노는 일단 指向性 Intentionalitat의 개념을 다시 도입하여 그 위치를 정하고서(intentiones in anima) 지향이 분명 대상물에 '대한' 지향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이어서 지향의 대상물은 사물들의 실재 형상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지성 '안에' 있는 형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현상학을 수립한다. 인식론적 심리현상에서 지향은 "대상으로서의 어떤 것에의 관계"라고 규정하는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 즉 정신이 어떻게 물체적 대상과 연관하느냐는 관점으로 문제를 돌려 놓았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브렌타노가 후기에 의식 대상이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음을 강조할 때에는  토마스의 지향개념, 즉 대상물이 어떻게 지성 안에 존재하느냐는 시각(esse intentionale: intentional Inexistenz of Gegenstand)을 연상시킨다. 훗설이 지향의 대상물이 실재 세계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괄호로 묶어야 한다고 천명하고서 지향행위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고서 정신이 어떻게 해서 대상을 지향하는지,
어떻게 해서 대상을 구성하는지에 연구와 서술을 집중한 것은 브렌타노보다 발전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 생활세계에 대한 반성을 거론하여 나간 점으로 미루어, 지향성을 거론할 때에 우리가 실재론의 그림자를 빠져나가기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철학함을  현상에 대한 記述로 그치고 說明을 포기하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사실 문제를 원상으로 돌려 놓은 셈이다.
 
4.2  방금 브렌타노가 지향의 개념을 '다시' 도입하였다고 한 것은, 근대식 문제 제기와는 다르고 현대의 현상학적 고찰은 아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문제를 나름대로 의식하여 의문을 만들고 이론적 설명을 시도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의식 안에 주관적이고 내재적인 표상을 창조해내는 감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외부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지각을 야기할 수 있는가? 객체의 제시가 어떻게 해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가? 우리 감관에 들어온 표상은 이미 질적인 변화를 거친 다음인데, 어떻게 해서 감지된 객체들을 원래 그대로 역번역해낼 수 있는가?
    5세기의 인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파라독스를 푸는 열쇠를 암시했다고 보겠는데 그것이 우리 감각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指向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세 인식론의 주제가 되는, 혼의 指向的 行爲 animae intentionalis actus를 정립하게 된다. 즉 지각은 정신의 지향적 행위에서 나오는 작용이요 성과라는 것이다. 지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체에 발생하는 수동 상태에 대해서 초월적 인식의 원천이 될 수가 있다. 지향이 감각이라는 유기체적 과정과,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어떤 규정 사이에서 접합체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다시 간추리자면, 감각적 지각 perceptio, aisthesis에 있어서 정신의 지향 intentio animi이 감관 sensus informatus과 사물 res visibilis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의 감각, 예컨데 시각 visio으로 완성한다는 해설을 내어 놓았다.
 
4.3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찰이 철학사에 가져온 인식론적 성과를 감지할 수 있다. 감각을 순전히 피동적인 무엇으로 보아왔는데, 스토아 학파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르면 감각을 주체 측에서 능동적으로  '파악하는'[웅켜 쥐는] 감각(aisthesis kataleptike, perceptio apprehen siva)으로서 주의를 기울이게 한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웅켜 쥐는 작용을 할 수있게 만드는 것은 지성에서 나오는 指向 synentasis, intentio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파악하는 것도 그 파악에 앞서서 지성이 이미 감각적 지각을 긍정하고서 기다리는 肯認 synkatathesis, adsensio이 마치 선행되어 있는 것으로 전제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인식은 결국 지성이 인식 대상을 웅켜 잡아서 이루어지는 包括的 認識 comprehensiva cognitio으로 정립된다.
    자기 이전의 시대와 비교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적이 있다면, 전에는 자유 의지의 행위로 간주되어 오던,  지향에다 새로이 인식론적 범위를 부여한 일이다. 그리하여 지향은 정신이 모든 인식 활동에 있어서, 특히 감각에 있어서 행사하는 탁월한 행위가 된다.  寫像과 指向의 행위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정신의 고유한 행위 solius animi est이다. 스토아 학자들이, pros-bole [=prae-velle] 先-指向을 설명하기 위해서,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에로 뻗어나가는[튀어나가는] 投企를 설명하기 위하여, 생명력 pneuma에 부여하던 synentasis[=intentio] 라는 기계론적인 해석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심령주의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혼에만 [유기적 기능들을] 지향하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는 스토아 이론을 인식의 초점이 되는 방향으로 수정한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把握的 感覺이라는 고대철학의 유산을 후대의 스콜라철학에 계승시키는 교량을 이루는데, 우리 인식 기능들 중의 첫째가는 기능 곧 감각적 요소에 지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능동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에 관하여 명료한 개념을 물려 주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지성적 이해 또는 지성적 지향들(우리가 품고 있는 이념들)의 기능에 선행하는, 감각적 지향들의 기능을 밝혀준 셈이다. 감각 대상이 포괄적으로 파악된다 (이것이 곧 지향이 이룩하는 기적이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감관의 事實性과 감각 대상의 實在性을 보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4.4  지성이 발휘한다고 하는 지향은, 감성적 인식이든 지성적 인식이든 그것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둘다 살리는 열쇠가 된다. 즉 그럴 경우에 감관에 들어오는 表象 species, phantasia은 중간 도구 역할을 하고 인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知性 anima, ratio, mens이 하게 된다. 즉 지성이 '보는' 것은, 寫像을 통해서, 외부의 사물을 보지 寫像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경험의 실재성이 유지된다. 플라톤의 제자이면서도 創造說을 바탕으로 실재론을 신봉하는 그리스도교도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성의 지향이 사물의 실재성을 긍정하고 있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이 지각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론이지만 寫像은 감각에 의해서 직접 야기됨을 인정한다.
    아울러 감관만으로는 무엇을 지각하지 못하고 감관을 이용하여 지성이 사물을 지각한다는 설명, "형상화된 감관이 곧 식견"(sensus informatus est visio)이라고 하는 설명은 인식의 주체성[내재성과 능동성]을 살리는 논리이다. 그 매개 개념은 인식행위에서 파악되는 정신의 자기귀환 행위(reditio completa in se)이다: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육체의 감각에 의해서 물체적 사물들이 감지되고, 그 감각이 동일한 감각에 의해서 감지될 수 없으며, 내적 감각에 의해서는 물체적 사물들도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감지되고 육체의 감각 자체도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에 의해서는 물체적 사물들 전부, 이성이 무엇을 알게 된다는 사실까지 감지하며 따라서 이성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De libero arbitrio 2.4.10)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론은 "안으로 돌아가라!"(Redire intus!)라는 사상적 표어 그대로 사물들의 외계로부터, 감각의 생리적 관찰로 혼의 내부로 시선을 전향하여 감각의 전 과정을 심리적으로 반성하는 내부적 관찰을 방법으로 채택한다. 이것은 데카르트나 칸트나 훗설 같은 근대 철학자들이 다시 채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각   주

[1]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용어상으로 知覺 perceptio과 感覺 sensatio, sensus이 겸용된다. 대표적인 視覺 visio을 감각이라고 전칭하기도 한다. 감관을 통하여 직접 외계의 사물 상태를 아는, 감관의 자극에 대응하는 정신의 전체적 감성경험을 가리키며 그리스어 aisthesis (감각적 지각)를 옮긴 개념이다.
[2]  De musica VI(5.8; 8.21); De Genesi ad ltteram XII(특히 16.32-33); De Trinitate XI(1.1-2.5); De quantitate animae 등에서 주요 자료를 볼 수 있다.
[3] 아우구스티누스의 감각적 지각에 관한 연구서로 본고에 참고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Rudolf Allers, "Illumination et verites eternelles," Congres International Augustinien [1954], Augustinus Magister (Paris 1955) I, 477-490;
A.H.Armstrong ed., Later Greek and Medieval Philosophy (Cambridge 1970),ch.24 "Augustine. Sense and Imagination" pp.374-379;
Bruce Bubacz, "Saint Augustine's Theory of Perception Visio Corporis and Visio Spiritualis," The Modern Schoolman 57(1980), 313-337;
Idem, St. Augustine's Theory of Knowledge: A Contemporary Analysis (New York/Toronto 1981): Ch.5 "Perception. Visio Spiritualis" pp.93-132;
M.A.I.Gannon, "The Active Theory of Sensation in St.Sugustine", The New Scholasticism  30(1956), 154-180;
E.Gilson, Introduction a l'etude de Saint Augustin (Paris 1949): I, ch. IV "Quatrieme degre: La connaissance sensible"; pp.73-87;
Regis Jolivet, "L'homme et la connaissance", Augustinus Magister III, 169-192
Ronald Nash, The Light of the Mind (Kentucky 1967): ch.4 "Sensation" pp.39-59;
Idem, "St.Augustine on Man's Knowledge," The New Scholasticism   (1967), pp.230-231;
Pierre Lacheze-Rey, "Saint Augustin precurseur de Kant dans la theorie de la perceptio", Augustinus Magister (Paris 1955), I, 425-428;
Jean Rohmer, "L'intentionalite des sensations chez Saint Augustin," Augustinus Magister I, 490-498;
Herman Somers, "Image de Dieu et illumination divine," Augustinus Magister, 450-462;
[4] 2고린 4,16 "비록 우리의 외적 인간은 썩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와집니다." 이원론적 색채를 피하려면 '내적 인간'interior homo을 '인간 내부'로 '외적 인간' exterior homo을 '인간 외부'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라틴어의 특유한 표현법으로 summus mons가 '제일 높은 산'이 아니라 '산꼭대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5]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체를 가진 이성적 혼이다" anima rationalis habens corpus(In Ioannis Evangelium 19.5.15). "신체를 사용하는, 이성적 혼" anima rationalis... utens corpore (De moribus ecclesiae 1.27.52). "혼이라는 것은 이성을 갖추고, 신체를 지배하도록 정향된 실체이다." esse substantia quaedam rationis particeps, regendo corpori accomodata (De quantitate animae 13.22). 그는 창세기 2장 7절 (factus est homo in animam vivam)을 "사람이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
[6] "신체를 가진 혼은 두 인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인간을 이룬다." quid est homo? anima rationalis habens corpus... anima habens corpus non facit duas personas sed unum hominem (In Ioannis Evangelium 19.5.15) "혼과 신체 비록 둘이기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다른 하나가 있지 않으면 사람이라 불리울 수 없다. 말하자면 혼이 없다면 신체가 인간은 아니고, 신체가 혼에 의해서 생명을 얻지 못하는 한 혼이 곧 인간은 아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 사람으로 여겨지고 사람이라 불리울 수 있다."  (De moribus Ecclesiae1.4.6)
[7]  tota anima in quaque parte corporis....corpus ab anima animari et integrum conservari (De immortalitate animae 16.25). "혼은 지상적이고 사멸할 신체를 자기의 현존으로 살리고, [신체의 부분들을] 하나로 통일하고 하나로 보전하며, 분해되고 변질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혼이 감관들 안에서 얼마나 힘있게 작용할 수 있는가 보라. 거기서야말로 생명이 보다 확연하고 분명하게 감지되는 것이다." (De quantitate animae 33.70-71)
[8]  anima corpore melior et potentior....Corpus enim nullum fit, nisi accipiendo per animam speciem (De imm.animae 16.25). 이 문장에서 corpus nullum FIT이라는 동사를 유의하기 바람. 감관이 사물의 형상에 의해서 형상화됨으로써 그 사물이 '된다.'(intellectus fit omnia라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
스 명제를 상기시킨다.) "정신 안에 발생한, 물체의 寫像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물체 그 자체보다 탁월하다."  (De Genesi ad litteram 12.16.32)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두 가지 정의가 공존함을 기억하기 바란다: "혼은 유기적인 자연적 신체의 제일 현실태 entelecheia이다." (Aristoteles, De anima 2.1 412b)
"혼은,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살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능동원리]다." (De anima 2.2 414a)
[9]  Non corpus sentit sed anima per corpus (De Genesi ad litteram 12.24.51) "신체를 혼은  전령[심부름꾼]처럼 사용하여, 밖으로부터 혼에게 알려진 바를 형상화한다."(ibid.) "혼 없이는 아무 감각도 발생하지 않으며, 또한 허위도 발생하지 않는다. 혼은 단독으로 작용하거나 허위에 공조하거나 한다." (Soliloquia 2.3.3)
[10] "영혼은 자기 신체라는 물량 전체에 존재할 뿐더러, 신체의 개개 부분에 '동시에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신체의 각부분의 수용을 영혼 전체로서 느끼나, 신체 전체로서[그 수용을] 느끼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혼이 신체의 그 부분에 현전하지 않고는 느낌이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전체 영혼이 발의 특정 부분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지하고, 그것이 일어나는 데서만 느낀다. 그러므로 전체 영혼이 동시에 모든 부분 하나하나에 존재하고 (또 그것은 각 부분에서)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De imm.animae16.25 [김영국]) "혼은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하나의 전체로서 임재한다....혼이 신체 전체에서 [동시에 모든 것을] 감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감각이 발생하든] 혼 전체로서 감각한다. 산 몸의 어느 작은 지점에 촉각이 발생할 때에, 혼 전체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되는 그것은 신체의 모든 부분들에 두루 뻗치지는 않고 촉각이 발생하는 그 지점에서만 감각된다."(Epistula 156.2.4)
[11]  cum vigilantes, neque mente a sensibus corporis alienato, in visio ne corporali sumus, discernimus ab ea [visio corporalis] visionem  spiritualem... ab his omnibus ita discernimus illa corporalia quae videmus, et in quibus praesentibus sunt sensus imagines corporum!
"정상의 상태에서는 지성이 감관으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정상의 상태에서 물체적 지각을 할 때에는, 물체적 지각으로부터 심령적 지각을 구별해낸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물체들과 그 물체들의 寫像들 다시 말해서 그 물체들이 현존함으로써 우리 감관이 곧 물체들의 사상이 되는 그것을 확연하게
구분한다."(De Gen. ad litt. 12.12.25)
[12]  habens de rebus quas mente atque ratione comprehendit...tamen cert issimam scientiam creditque sensibus in rei cuiusque evidentia quibus per corpus animus utitur. "인간은 지성과 이성으로 파악하는 사물들에 관해서 확실한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 사물에 관해서든 자명하게 알려주는 감관에 대해서도 신용을 둔다. 그 감관들은 정신이 신체를 통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De civitate Dei 19.18) omnes corporis sensus cordi intro nunti ent quid senserint foris (In Ioannis Evangelium 18.10)
* Quinque sensus, qui nec sine corpore, nec sine anima esse possunt..Certe homo sentire non potest, nisi vivat, vivit autem in carne... Quomodo igitur anima quae sunt extra carnem suam sentit, quae nonnisi in carne sua vivit? Quomodo anima sentiat ubi non vivit, aut quomodo vivat ubi non
est? (Epistula 137.2.5-6)
"오관은 신체 없이도, 혼 없이도 존재할 수 없다. 정말 사람이란 살아있지 않으면 감각할 수 없고, 사람이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체 속에서다. 그렇다면 혼이 육체 속에서만 사는 법인데, 어떻게 해서 자기 신체 밖에 있는 것들을 감각할 수 있을까?  혼이 살지 않는 곳[외부]에서 어떻게 감각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혼은] 자기가 있지도 않는 곳[외부]에서 사는 것일까?"
[13] Chrysippus [Arnim II, 54]: " 寫像 phantasia을 감지하는 능력은 빛 phos이라고도 불린다. 빛으로서 그것은 객체[대상]들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 감각은 자기 인상들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자기가 빛임을 드러낸다."; idem, [Arnim II.866, 864]: "식견시각이 발생하는 것은, 눈과 대상물 사이에서 매개적 역할을 하는 空氣의 지향에 의해서다. 우리 눈은 불의 광선 다발 [광선]을 발사한다. 그 광선 다발이 공기를 照射하여 공기에 光錐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Gellius (Noctes Atticae 5.16.2): "스토아학자들은, 눈에 나오는 광선들이, 보여지고자 하는 사물들에로 발사되는 데서, 그리고 동시에 공기에 의한 지향에 곧 시각의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14] "감각하는 생명은 곧 빛이다. 감각하고, 또한 신체를 통해서 혼의 판단에 회부되는 것들을 분별할 줄 아는 생명 말이다.... 이 빛은 눈을 통해서 무엇을 지각하도록 작용한다.... 이 빛은, 비록 신체를 통해서 지각하는 바를 파악하는 데에 쓰이지만 혼 안에 있다."(De Genesi ad litteram liber imperfectus 5.24).
[15] "우리 눈에서부터 나가는 빛살의 발사는 일종의 빛의 발사와 같다. 우리 눈에 가장 가까이 있는 공기[허공]를 우리가 직시할 때에는 그 발사가 소멸될 수 있다. 그리고 똑바른 직선 방향으로 해서, 멀리에 위치한 사물들을 주시할 때에는 그 발사가 [계속해서] 출력될 수가 있다." (De Genesi ad litteram1.16.31) "그 빛은 먼저 눈을 통해서만 발산되며 눈의 광선으로 주시하는 가시적 대상물들을 향하여 발사된다. 그 다음 [빛은] 순수한 공기(또 사원소)와 혼합되어서 오관을 발생시킨다." (ibidem, 12.16.32))
[16]  quemadmodum si verga te tangerem, ego utique tangerem, idque sentirem.(De quant. animae 23.43; cf. De Trin.9.3.3)  "우리 눈의 광선으로 우리는 우리가 감지하는 모든 것을 만진다. 그대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대 눈의 광선으로 만지는 것이다." (Sermones 277.10.10)
[17] "보는 사람의 감관에 있는 빛은 아주 미약해서, 외부로터 오는 빛에 의하여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감관 내면에 있는 빛은 외부로부터 오는] 빛과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대낮에 이루어지는 빛의 발산도, 흑야에 이루어지는 빛의 소멸도 식별하기가 매우 어려움과 비슷하다."(De Genesi ad litteram 1.16.31)
[18]  [sensus] ipsi pro natura cui coporis affecti non aliud quam suas affectiones praesidenti animo nuntiant (De vera religione 36.67)
[19]  sensum puto esse, non latere anima quod patitur corpus (De quant. animae 23.41); sensus est passio corporis per seipsam non latens animam (ibid. 25.48). 이 정의에서 감각을 가리키는(플로티노스 용어 pathos)를 passio ('수동적 상태': modification이라고 번역된다)라는 용어와 non latet 라는 소극적 표현은 존재론상으로 외계 사물에 일차적 비중을 두는 느낌을 준다. 외계의 자극 없이는 감각 없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한 시각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체의 형상들이] 현존할 때에 우리 신체의 감각이 존재한다."in quibus praesentibus sunt sensus corporis nostri (De Genesi ad litteram 12.20.42). "무엇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그것을 수용한다는 뜻이다....만일 우리들이 보는 모든 것을 느끼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수용한다고 하면 우리들은 보는 모든 것을 느끼는 셈이다....무엇이든지 보고 있는 사람은 봄으로써 느끼는 까닭에  보는 모든 것을 그는 필연적으로 본다."  quid videns patitur ipsum visum, igitur si omne quod videmus, sentimus et omne quod sentimus, patimur, patimur omne quod videmus.... quidquid autem videns, videndo sentit, id etiam videat necesse est. (De quant.animae 23.41)
[20] intellegere...duobis modis fieri: aut ipsa per se mente atque ratio ne intrinsecus, ut aut admonitione a sensibus, (ibid.,Ep.13.4)
"인식한다는 것은 두 가지 양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지성과 이성에 의하여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무엇이 나에 의해서 인식되었음을 인식하는 일 cum intellegimus  esse ipsum intellectum 이 그 하나요, 감관에 의한 유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물체적 사물이 존재함을 의식하는 경우 cum intellegimus esse corpus가 다른 하나다." (Epistula 13.4) "어떤 물체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감관이 무엇인가 그 물체에 관하여 알려주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없다." nemo de illo corpore utrum sit intelligere potest, nisi cui sensus quidam de illo nuntiarit. (Ep. 13.4)

[21] "물체적 형상의 자리를 기억이 차지하고서 그 형상을, 즉 혼이 신체 감관을 통해서 흡수해들인 형상을 견지한다. 감관이 감각될 수 있는 물체에 의해서 형상화되는 단계에서는, 밖앝에 자리잡고 있던 시각의 자리를 이제는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시각이 차지한다. 그때에는 지성의 눈이, (기억이 그 사물이 눈앞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여전히 견지하고서 눈앞에 부재하는 사물을 파악하고 있는) 그것에 의해서 형상화되는 셈이다." (De Trin. 11.3.6) "그러니까 시각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보이는] 사물의 형상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 물체에 적응되여야 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감관이 [보이는] 물체에 의해서 형상화되어야만 [시각이 발생한다]." (ibid. 11.5.9)
[22]  sentiat se non eas[similitudines] corpore sed spiritu videre
 "인간은 이 類似像들을 신체[= 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 지성]으로 본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다."  (De Gene. ad litt. 12.20.42)
[23] * quod in ea re quae videtur, quamdiu videtur sensum detinet oculorum, id est animi intentio (De Trinitate 11.2.2);  Itemque illa animi intentio, quae in ea re quam videmus sensum tenet, atque utrumque[= rem et sensum] coniungit, (De Trin. 11.2.2.);  et voluntas animi quae rei sensibili sensum admovet, in eoque ipsam visionem tenet (De Trin. 11.2.5);
tantam vim copulandi haec duo... et sensum formandum admoveat ei rei quae cernitur, et in ea formatum teneat.(De Trin. 11.2.5)
[24] ab anima hoc corpus animari non puto nisi intentione facientis  nec ab isto quidnam illam pati arbitror, sed facere de illo et in illo tamquam subiecto divinitus dominationi suae. Corporalia ergo quaecumque huic corpori ingeruntur aut obiciuntur extrinsecus, non in anima, sed in ipso corpore aliquid faciunt, quod operi eius [animae] aut adversetur, aut congruat.(De musica 6.5.9)
[25]  [anima agit] luminosum aliquid in oculis aerem serenissimum et...agit haec anima cum quiete....[elementi] alteritate corpus afficiunt, exserit attentiores actiones....(De musica 6.5.10)
[26]  anima fit attentio ex difficultate in actionem.  quae difficultas propter attentionem, cum eam non latet, sentire dicitur.. .. Et ista eius actio... attentius agitur, non latet..., attente operatur, non latet.(De musica 6.5.9)
[27]  De musica 6.5.10-15; 6.8.21; De quant.animae 33.70-72.
[28]  만약 지성이 그 행위를 의식함과 아울러 반성을 하여 快苦의 판단을 하거나 [기분좋은 상태], 영원한 진리들(ordo, unitas, aequilibrium)에 근거하여 의미를 이해할 때["참 아름답구나!"] 그것은 '판단 운동' motus iudiciales이라고 한다. "아하, 내가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있구나!"라는 인식 단계는
이미 인식이다.
[29]  fit attentior ex difficultate in actionem  (De musica 6.5.9)
[30] ad corporalia vim suae intentionis dirigere, spiritu corporalium similitudines agit, aut intuetur obiectas.(De Gen. ad lit. 12.20.42) 스토아의 synkatathesis [= adsensio], katalepsis [= apprehensio]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었다.
[31] ut ratio sit quidam mentis aspectus, ratiocinatio autem rationis inquisitio, id est, aspectus illius, per ea quae aspicienda sunt, motio. Quare ista opus est ad quaerendum, illa ad videndum. Itaque cum ille mentis aspectus, quem rationem vocamus, coniectus in rem aliquam, videt illam, scientia nominatur: cum autem non videt mens, quamvis intendat aspectum, inscitia vel ignorantia dicitur.(De quant. animae 27.53) [김영국 역본]
[32] "그러므로 주시하는 것 다르고 보는 것 다르다는 것이 나의 의견입니다."Ex quo liquet, ut opinor, aliud esse aspectum, aliud visionem. (De quant.animae 27.53)
[33]  "혼이 다른 사물에로 계속해서 지향을 기울이고 있을 경우에, 지향의 노력으로 기억[일단 지각된 寫像 phantasia을 가리킴]을 감각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의지는 감관을 물체에 결합시키듯이, 기억을 감관에, 사유의 시야를 기억에 결합시킨다." nutu voluntatis memoriam a sensu voluntas
avertit (cum in aliud intenta non ei sinit). Voluntas porro sicut adiungit sensum corpori, sic memoriam sensui, sic cogitantis aciem memoriae.(De Trin. 11.8.15)

[34] nemo de illo corpore utrum sit intelligere nisi cui sensus cuidam de illo nuntiarit.
[35] visionis igitur illius, id est formae quae fit in sensu cernentis, quasi parens est forma corporis ex qua fit.  그러나 곧 이어서 [intentio] magis pertinet ad sensum formatum, quam ad illud corpus unde formatur라는 문장이 나온다. 두 구절을 합하면, "시각 즉 지각하는 자의 감관에 발생한 形相에 대해서, 그 형상을 발생시키는 물체의 형상은 마치 [그것을 생성하는] 모체와 같다....(그러나 전적으로 그 사물에서만 유래하지 않음을 논하고서) 그러나 지향은, 감관을 형상화시키는 사물에 속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형상화된 감관에 속한다고 하겠다."는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