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가톨릭신문 2007.11.29]

 

 

죽은 이들과 화해하는 계절에

 

11월은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

 

지난 가을 서울대교구장님이 어느 성당을 방문하는 길에 주민들이 추기경 차량에 달걀을 던지고 길을 막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 성당 지하에 납골당이라는 “혐오시설이 들어와서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병원이나 심지어 교회건물에마저 4층은 F자로 표시되는 등, 죽음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가 우리에게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서양에서 묘지가 꼭 동구 밖이나 성당 뒤뜰에 자리 잡고 있어 가족이 매일 성묘를 가고 밤이면 무덤마다 촛불이 켜져 밤새 묘지가 화안하게 밝혀져 있는 경우와 사뭇 다른 문화다.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여서 부활의 희망으로 죽음에 대한 혐오를 이겨내서 그런 것일까?

 

우리 신앙인들은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당해 숨이 끊어져 있는 모습을 새긴 십자고상(十字苦像)을 벽에 걸거나 가슴에 차고 다닌다. 또 그분이 인품이나 설교나 기적보다도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였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자기의 죽음이 일평생 겪어보지 못한 밝은 빛 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처지가 되어 하느님과 역사 앞에서 진지하게 자기 생을 결단하는 순간이 되리라고 예상한다. 다시 말해서 임종이야말로 주님을 가장 철저하게 닮는 순간, 아마도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을 제일 많이 사랑하는 순간이 되리라고 추정한다.

 

죽음 저편에서 오신 분, 죽음이 무엇이고 당신의 죽음이 무슨 보람을 가져올지 아시는 분마저 겟세마니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어 흐를 만큼 공포를 느끼셨다. 그래도 그분이 앞으로 나아가셨으므로 신앙인들도 죽음의 단말마 저편에 하느님의 든든한 팔이 받아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눈을 딱 감고 보이지 않는 심연을 향해서 뛰어내린다. 하지만 인도의 시인 타골은 이승을 하느님의 자궁으로 형용하고서 “아기는 어머니의 태를 떠나야 어머니 얼굴을 보게 된다.”(열매따기 9)고 하였다. 또 임종의 순간을 하느님이 아기에게 젖을 바꿔 물리는 순간에 비유하였다. “어머니가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 놓으면 아기는 소리쳐 웁니다만 바로 다음 순간에 왼쪽 젖을 찾아 물며 안심합니다.”(기탄잘리 95)

 

죽은 이들과 죽인 이들의 화해

 

그래서 교회는 이 달을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로 정한다. 파리하게 야위어 지독한 통증에 몸부림치다 우리 손을 움켜잡고 숨져가던 이들! 우리 기억에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그들의 생전의 얼굴과 미소, 음성과 소원을 떠올려 보라고 권한다. 저녁이면 로사리오 한 단 쯤 바치면서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조용히 그들에게 다시 건네 보라고 거든다.

 

그리고 혹시 나의 실수나 무성의가 그 죽음에 끼어 있었다면 사과하라고, 또 “지워 주세요!”라던 내 한 마디로 나의 자궁 속에서 의사의 손에 죽임당한 생명이 있다면, 지금 영원을 살고 있을 그 생명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라고 타이른다. 세상 빛이라곤 한번도 못 보았지만 그 어린 생명도 피살의 순간에 더없이 밝은 광명 속에서 갑자기 성숙한 어른답게 하느님과 역사 앞에 자기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었을 테고, 그 참에 주님의 너그러우신 시선을 배워 어머니를 이미 용서했을지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 아기가 받아들인 죽음 덕분에 비정한 어버이와 다른 가족이 구원받는지 누가 아는가? 무죄한 모든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닮아 구세적일 테니까 말이다.

 

지난 10월 27일 필자는 지리산 백무동에서 치러지던 위령제를 지켜보았다. 그곳에서 마주 싸웠던 빨치산과 토벌대가 서로 손을 잡고 화해하였고 그 골짜기에서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함께 올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제사는 거기서 죽은 이들과 죽인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식이기도 했다.

 

한국 전쟁 전후해서 지리산 발치 곳곳에서 학살당한 그 많은 아녀자들과 무죄한 농사꾼들의 죽음을 헤아린다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러하였듯이, 바로 그 억울한 죽음들이 한반도에서 저질러진 죄악을 하느님 앞에서 속죄하여 블랙홀처럼 자기 몸에 빨아들여 없애버린 덕택에 한겨레의 역사가 한 발자국이라도 바른 데로 나아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죽은 이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죽인 이들을 구원하고 그 사회를 구제하리라는 신비를 생각할수록, 이 땅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죽은 이들과 죽인 이들의 화해가 절실해진다, 적어도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이 11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