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께.

2011년 5월 1일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복자(福者)로 시복된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파견되어  그 교황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장을 제정하고 환담을 나눈 2003년 7월 4일이 생각납니다. 

그분을 추모하여 별도의 글은 차마 쓰지 못하고 그분의 서거직후에 썼던 글을 네티즌들과 다시 한번 읽고 싶습니다.  「참 소중한 당신」이라는 가톨릭 잡지(2005년 5월호)에 "바티칸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실리던 글 한 꼭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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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4일 교황청 국가원수인 요한바오로 2세에게 한국대사 신임장을 제정하던 필자

                                                         

 

 석양에 비껴보는 인류사의 지평에서

 

 

Urbi et Orbi

 

     2005년 3월 27일 부활절 정오, 필자는 모처럼 성베드로 광장 오른편 회랑 지붕(로지아)으로 올라갔다. 교황청 주재 외교관들에게 마련된 이 자리는 성다마소 광장에서 경호실을 지나 올라가게 되어 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자정미사에 참석한 경우는 당일 미사에 참석 않는 게으름뱅이가 마음먹고 그곳을 찾아간 것은 어쩌면 현교황의 음성을 듣는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저 아래 성베드로 광장에서는 성주간을 기해 로마로 순례 온 십 수만 명 교우들이 소다노 추기경과 드리는 부활 대미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바티칸궁 3층 교황 서재 창문에는 붉은 융단이 드리워져 있었다. 성탄절과 새해, 그리고 부활절에 ‘로마와 전 세계를 향해’ 축복을 보내는 예식이 정오에 있다. 주일에는 그곳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삼종기도를 올리고 인사를 보낸다.

 

이날 병세가 깊은 모습이나마 힘들여 보여주면서 손짓으로 강복을 내렸으나 목소리는 낼 수 없어 소다노 추기경이 교황의 부활 메시지를 낭독하였다. 메시지는 불과 네 문단으로 된 극히 짧은 내용이었으나 요한 바오로 2세가 25년간 행해 온 그의 어느 강론, 어느 메시지, 어느 교서보다 웅변적이고 비장하였다. 광장 앞에서 전 세계 인류에게 남기는 유언처럼 필자의 귀에 울림을 남겼다.

 

               2005년 4월 8일에 거행된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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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엠마오의 제자들은 이 말마디로 신비로운 나그네를 초대합니다, 우두커니 석양을 바라보던 나그네를 말입니다. 저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던 안식일 바로 이튿날이었습니다. 약속대로라면 그리스도는 부활했습니다만 그 제자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허나 길에서 줄곧 들려준 그 나그네의 말씀은 서서히 그들의 마음을 달구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라며 그분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상에 둘러앉았는데 빵을 쪼개는 모습을 보고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들 앞에는 쪼개진 빵만 남았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그 말씀의 달콤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85세의 노인은 젊은 시절의 시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바도비체의 어린 시절, 연극배우와 석공으로 지내던 청춘시절, 크라코브 신학교의 연학, 그곳의 교수 시절과 주교직을 보내면서 그는 만났으리라, 엠마오의 그 낯선 나그네를. 그리고 그분에게 평생을 바쳤다. 번번이 열강에 짓밟히는 폴란드의 독립,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공산치하, 지구상에 총성이 멈추는 날이 단 하루도 없는 20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오늘 죽음에서 ‘일으켜진’ 나자렛 사람에게 “인간의 구원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친애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말씀과 성찬의 빵은 파스카의 신비이자 선물로, 세기를 두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기념으로 남았습니다. 오늘 부활의 파스카를 맞아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다시 뇌어봅니다. “우리와 함께 묵으시지요!” 시간의 여로를 걷는 인류의 충직한 벗이여, 든든한 의지여, 우리와 함께 머무시지요! 당신은 아버지의 산 말씀이시기에 자기 실존의 참 뜻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부어주십니다. 당신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시기에 진리와 자유 그리고 정의와 평화에 주린 사람들 허기를 채워주십니다.

 

양을 치는 목자라는 신분으로 나름대로 분발하며 60여년을 보낸 ‘달콤한 평생’을 간직하고 당신은 가지만, 석양에 비낀 인류 역사의 지평을 바라볼 적에 이 인류를 누구에게 과연 맡긴다는 말인가? 그래서 “주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가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주십시오(Mane nobiscum Domine)”라는 구절을 그 짧은 메시지에서 무려 여덟 번이나 되풀이할 만큼 노교황은 절박하였다. 나머지 모든 문장도 주님께 드리는 명령문이었다!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던 교황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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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아버지의 산 말씀이시여! 그래서 우리한테 평화의 언행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 피로 축성된 지상에 제발 평화를 주십시오! 여전히 많고 많은 피가 흐르는 저 중동과 아프리카 나라들에 평화를 주십시오! 골육상잔의 전쟁 위험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온 인류에게 평화를 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영원한 생명의 빵이시여! 밥상에 함께 앉은 사람들에게 쪼개지고 나뉜 빵이시여! 오늘도 비참과 굶주림으로 시달리다 죽어가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에 몰살당하고 엄청난 자연재해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연대감을 간직할 힘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당신 부활의 능력으로 그들도 새로운 생명에 참여케 해 주십시오!

 

노인의 가슴에는 파띠마의 세 번째 비밀이 납덩이처럼 얹혀 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요즘 흉흉하게 떠도는 해묵은 예언도 찜찜하였을 것이다(“그 때가 지나면 일곱 언덕 위의 도성은 파괴되고... 사람들이 추한 노파를 버리듯이 로마는 버림을 받으리라. 콜로세움에는 오염된 돌무더기 밖에 남지 않으리라“).

 

               교황 장례식에 정부대표로 이해찬 총리 일행이 국가조문단으로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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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의 큰딸이라 불리는 나라들이 아프리카 수천만 흑인들을 사냥하여 북아메리카등지에 팔아먹고도 여전히 번영하는 세상, 북아메리카 수천만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서도 세계 최고의 번영과 부강을 누리는 미국, 남아메리카 수천만 원주민들이 몰살당하였는데도 그리스도교화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자위하는 역사 앞에서 “평화는 정의에서만 오는 열매”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20세기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증오는 6백만의 희생자를 내고서도 수그러들지 않고, ‘붉은 용’에 대한 증오가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나 된 듯이 한국, 인도차이나, 남미에서 끊임없는 내전과 민간인학살과 군사독재정권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용인되거나 적극 저질러졌다.

 

재갈이 풀린 초강대국의 횡포 앞에서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다음으로는 시리아와 이란으로 이어질, 아랍 땅에 끊이지 않는 침략전쟁은 무슬림들을 그리스도교도들과 영원히 원수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언젠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날, 가장 먼저 터뜨릴 곳이 어디겠는가?

목소리를 잃어버린 교황의 외침에는 이 모든 광경들이 스쳐가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나신 주님, 3천년대를 맞이한 우리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세상 끝까지도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백성들의 물질적 발전이 자기네 문명의 혼백이라 할 영적 가치를 흐리게 하는 일이 결코 없게 해 주십시오. 비오니 우리 앞길에 우리를 붙들어 주십시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께 희망을 겁니다. 당신 홀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간직하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우리와 함께 묵으십시오, 주님! 알렐루야!

 

강대국들의 거부권으로 갈수록 무력해지는 유엔은 세계를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어 가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철면피한 근본주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증오의 문명’을 행사하면서 저 모든 전쟁과 기아를 두고서 “그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지겠습니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고 있다.

 

하나뿐인 지구의 오염이 온갖 이상기후를 초래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구상의 식량 대부분이 가축 사료로 쓰이고 매일 같이 수만 명이 굶어죽는 지구에서, 인도양의 수나미가 지중해로 대서양으로 태평양으로 번질 기세에서 인류를 하나뿐인 지구상에서 존속시킬만한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류는 필요로 한다.

 

이 노인이 과연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서둘러 교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빗장을 지르고 하였을까? 그의 눈에 인류는 지금 엠마오 길을 거닐고 있고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함께 계셔주십시오!”하는 절망의 외침이 역사요 이 외침에 어쩌면 구원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엠마오 식탁에서처럼 자기 먹을 빵을 쪼개는 동작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짜 제자를 인류는 알아볼 테고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이 퍼뜨리는 증오의 문명 대신에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인류는 예수를 주님을 믿게 되고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는 호소를 담고 있었다.                                성염-교황.jpg  

                             유학시절이던 1982년 요한바오로 2세는 서재로 우리 가족을 맞아주었다

                              그때 아내의 팔에 안겨 있던 빵고는 올해 1월 살레시오회 사제로 서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