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초록숨소리 103호 (2012.10) "국시모가만난사람"에 실린 글입니다.

 

                  가난한 이웃의 편에서, 자연의 편에서

                                                                                  글. 지성희

 

돌아보면 언제나 흔들리는 삶이었다. 욕망이라는 공허한, 그렇지만 때로는 달콤한 감정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걸어온 시간이었다. 작년과 별반 차이가 없는 여전한 오늘이지만 올해는 보다 나은 세상으로 다가가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나를 추스르고 싶다. 좀 더 고요해지고, 깊어져서 쉬이 무너지지 않도록 말이다. 빈 가지 사이로 냉기가 가득한 겨울이다. 춥다. 그렇지만 견뎌야만 한다. 곧 봄이 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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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생애 전부를 걸고 눈물 나게 힘겨웠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던 삶, 그런 깊은 삶의 여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함께 보는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도저도 아닌... 작은 바람에도 위태로운..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 있는 이층 양옥집. 이곳에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와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전순란 선생이 살고 있다. 집 앞에 흐르는 시냇물도 잠시 쉬었다 간다는 그 집 건너에는 지리산의 웅장한 숲과 산맥이 시대의 욕망에 굴하지 않고 살아온 그들의 특별한 사랑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성염 전 대사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 광주가톨릭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1986년 교황청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라틴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시 전 세계 13억 카톨릭 신자를 거느린 바티칸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임명되어 4년 동안의 대사 생활을 하였다.

 

그는 1979년 유신정권 말기에 구띠에레스의‘해방신학’을 번역한 이유로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민중교육론)’를 번역한 동생 성찬성과 함께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무서운 고문을 당했다. ‘해방신학’은 교회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교리가 담긴 책으로 유신독재 시절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 쪽 귀가 안 들린다고 한다. 그의 아내인 전순란 선생은 당시 감옥에 있는 성염 대사에게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과는 살 수 있지만, 신념에 장애가 있는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남편의 신념을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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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웃과 자연을 향한 사랑은 신앙의 힘

 

내가 이들의 이름을 들은 것은 국시모 집행위원인 김말남 선생으로 부터였다. 김말남 선생은 내 의중과는 상관없이 만날 때 마다 입버릇처럼 자신이 투사가 된 것은 순전히 성염 대사와 전순란 선생 그리고 윤주옥 처장 때문이라고 했다. 평소 사람의 변화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데 이들의 인연과 변화가 참 놀랍다. 옛날 민자당 시절, 이 당으로부터 밥 얻어먹은 얘기를 하는 김말남 선생에게 화가난 전순란 선생이 고발을 하면서 이들은 철전지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참 신기한 일이다. 다시는 안 봐야 할 그들이 지금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서로를 걱정하고 미안해한다. 같은 동네에 이웃으로 살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다 정이 들었다 해야 하나? 특히 김말남 선생은 성염 대사에 대해 남편 말은 안 믿어도 성염 대사의 말은 믿을 정도로 두터운 존경심과 신뢰가 생겼다.

 

이들의 인연과 변화는, 특히 같은 동네인 우이동에 살면서 북한산국립공원과 지역의 환경문제에 대해 단순 관심을 넘어 적극 행동하고 결국 변화를 이끌어 냈다. 우이령 도로개통 반대, 방학동 은행나무 지키기, 선덕학교 자리 고층아파는 건축 저지, 우이동 솔밭 지키기, 할렐루야 기도원의 북한산국립공원 탐방로 폐쇄 문제 등에 참여하여 결과가 나올 때 까지 끝까지 싸웠다. 그냥 대충 조용히 살면 되는데 죽이겠다는 협박도 당하고 이웃과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성염 대사와 전순란 선생은 자신들이 끊임없이 공부 한 것이 이유라고 했다. 카톨릭신학대와 한신대를 나온 이들 부부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가 지켜서 후손들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의 편에서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뼛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앙의 힘이었던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성속이월론이라는 종교세계와 인간세계를 구분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어요. 카톨릭은 그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정치사회문제, 환경문제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 문제는 알아서 하고, 교회에서는 내 마음만 편하게 해줘라 이렇게 생각하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가 교회 믿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은 모두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종교사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왔죠. 도법스님이 한 순례라든가 성직자들이 하는 삼보일배라든가, 천일순례나 우리가 배운 신앙은 이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카톨릭 안에 이런 가르침이 보편화되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4대강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일부는 ‘무슨 소리냐 이런 것은 신앙과 관련이 없다’하고 반대하죠. ‘그건 대통령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라고 대변인도 되어주고... 기득권 편에 들어 있으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온갖 논리를 성서와 종교에서 끄집어내죠. 어디를 향해서 서 있는가가 중요해요.":

 

왜 많은 종교인들이 기득권의 편에서 자신들의 안위만을 쫒는지, 그리고 신앙의 힘이라는 것에 다소 불신이 있던 내게 참으로 명쾌한 얘기다. 사회, 경제, 정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힘이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카톨릭이라는 종교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교회라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가 사회를 인간답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그의 종교적 신념은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 사회, 환경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염 대사를 존경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아가고, 그가 하는 일이라면 다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특별한 사랑

 

성염 대사는 키는 작지만 다부져 보이고 초롱초롱 선한 눈에 다소 장난 끼도 보이는 귀엽고 소박한 스타일로 보인다. 반면 그의 아내 전순란 선생은 쌍커풀이 없는 매력적인 눈에 한 치의 삐뚤어짐도 없이 그린 눈썹(^^), 그리고 아주 섹시한 입술로 불같은 열정의 스타일로 보인다.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같이 한 곳을 바라보고, 한 마음이라 이야기한다.

 

성염 대사는 젊은 시절 신부가 되려고 했었다. 그런데 카톨릭 대표로 참석한 종교제라는 행사에서 개신교 대표로 참석했던 지금의 아내 전순란 선생을 만나면서 신부의 길을 포기했다. 얼마나 강렬한 사랑이었기에 신념과도 같은 신부의 길을 포기했을까? 매우 강렬한 의문이 들었다. 순간 볼수록 매력적인 전순란 선생의 눈이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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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랑 하냐, 후회 안하냐” 묻는 내게 “지금도 눈 뜨면 서로 옆에 있고,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는 것에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공공연히 사랑은 식는 게 정상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더 나이 들면 더 미워질까 걱정하는 내게 그들의 깊어지는 사랑이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심으로 묻고 또 물었다.

 

남편은 카톨릭, 아내는 개신교인 상황이면 흔히 갈등도 하고, 한 쪽이 한쪽을 따라가기를 강요받곤 하는데 이들은 오랜 시간 각자의 종교를 존중하며 살았다. 그러다 작년에 둘째 아들이 신부가 되면서 전순란 선생은 카톨릭에 입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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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어머니가 아직 개신교도여서 애가 얼마나 상처가 크겠냐” 말에 혹시나 싶어 아들에게 물었더니 “신부님이 우리 가정에 대해 몰라서 그래요. 나는 엄마가 불교도라도 괜찮아요. 엄마가 엄마로서 성실하게 아름답게 사는데 그게 꼭 카톨릭 신자여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바티칸에 한국대사로 갔을 때 전순란 선생은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 걱정했는데 정작 성염 대사는 “만약 당신이 개신교 신자라서 문제가 생기면 내가 안 갈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특별한 사랑이다. 도종환 시인이 그랬다. 특별한 사랑은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을 만나 그를 특별히 사랑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들의 강건하고 올곧은 삶과 신앙이 그들 서로를 특별히 사랑하게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공원, 그리고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성염 대사는 국립공원과 인연이 깊다. 북한산국립공원 근처에 오랫동안 살면서 북한산과 주변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냈다. 지금은 지리산국립공원 근처에 살고 있다. 그에게 국립공원은 자연스런 삶의 공간이었고 따라서 삶의 공간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었다. 특히 국립공원은 보전해야 하는 최후의 보루로 환경을 걱정하는 사람은 당연히 국립공원의 취지에 동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주옥 처장의 유순하고, 부드럽고, 카리스마도 있고, 아이디어도 좋고 게다가 남을 상처 주지 않는 것에 완전 매료(?)되어 있는 그는 국시모에 칭찬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제일 중요한 것이 아이들을 통해서 국민을 일깨우는 거예요. 결국은 그 국민들이 여러분이 하는 활동에 동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야 정책 결정하는 사람들도 눈치를 보게 되요. 국민들이 아무런 의식이 없으면 정책결정자들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을 해 버리죠. 습지를 간다거나 개구리나 올챙이, 맹꽁이를 보러가는 작은 일이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놀라요. 케이블카문제와 같은 그런 큰일을 다루면서도 이렇게 작은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언론에 얘기하고 강조하는 게 참 중요하죠. 국시모가 이런 작은 역할을 잘하니까... 여러분들이 국립공원관리공단 사람들과 비판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서로 돕고 조언을 해주고.. 그 사람들도 윤처장을 대하는 태도 보면 아주 부드럽고 존경하는 모습을 내가 봤어요. 공무원들도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들겠죠. 위축되지 마시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능력껏 주변에서 여러분들이 활동하는 것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힘을 내세요. 역사가 다 기록할 테니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마음을 가진 두 사람

 

대사 생활을 마치고 2009년에 돌아온 그는 요즘 번역하고 글 쓰고, 한 달에 3~4번 정도 강연도 하며 지낸다. 지리산에서 한 달 정도 살면 서울에 2~3일 정도 있다 오곤 하는데 올라가면 빨리 내려오고 싶어 한다. 물론 여전히 동네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환경 문제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말이다.

 

성염 대사와 전순란 선생을 만나고 이렇게 글을 쓰면서 그들의 진지한 삶과 사랑 앞에 오래 부끄러웠다. 조용히 그러나 때로는 열정적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곱씹어 본다.

 

갈등관계에 놓이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 그래서 사람들은 대충 살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도,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신앙의 힘이라 했다.

나는 감히 말한다.

그들의 그런 마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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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희 님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활동국장입니다.

사진 제공_ 성염 대사와 전순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