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희망 2013 제11호] , 148-167 면

 

인류는 왜 시스티나 굴뚝을 쳐다보았는가?

 

                            성 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1. “칼이냐 코란이냐?”

 

1.1. 지금부터 8년 전, 그러니까 2005419일 오후였다. 바티칸 친구가 대사관저로 전화를 해 왔다. 새 교황이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으며 한두 시간 안에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이 있으리라는 소식이었다. 운전기사를 불러 성베드로 광장으로 가면서도 제발 한 사람 이름만은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사흘 전 시스티나경당으로 콘클라베 들어가기 직전, 성베드로대성당의 장엄미사에서 그 인물은 추기경단장으로서 열변을 토했었다. 진리의 상대성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절대 진리를 외쳐야 할 성좌의 본분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문화라고 할 유럽이나 남북아메리카에서는 어쩔지 모르지만 인구 3%에 불과한 아시아 가톨릭 교세에서 그리스도교의 절대 진리를 누가 누구에게 외친다는 말인가?

더구나 70년대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들어선 남미의 군사정권하에서 각국 주교단들이 반공을 명분으로 군사독재에 동조하면서 군부의 온갖 사회악을 묵인하고 있을 적에, 복음의 진리를 고수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기초공동체운동과 해방신학을 탄압하여 빈사(瀕死)시킨 인물이 독일인 라칭거가 아니었던가? 언론에 의하면 선거전부터 그에게 대세가 기울고 있었지만 정작 대성당 발코니에서 요세푸스 라칭거라는 이름이 발표되고 20여만이 질러대는 만세소리가 바티칸 광장을 메울 적에 필자의 머릿속은 하얗게 바래졌다.

 

1.2. 우려한 대로였다. 그가 베네딕토 16세로 즉위하면서 취한 첫 행정조처가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의장 핏제랄드 대주교를 이집트 교황대사로 보내버리고 그 위원회를 문화평의회밑에다 격하시킨 일이었다. 아시아 인구 97%를 점유하는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과 토속종교들을 상대로 시도하던 아시아 주교회의의 대화를 그가 얼마나 못마땅하게 생각했던지 알만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천년 넘게 이슬람을 욕하던 바가 상대방이 칼이냐, 코란이냐?”면서 강제로 포교한다는 비난이었다. 이슬람 경전 어디에도 안 나오는 이 말마디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장 베네딕토 16세의 입에서 공식화한 것이 2006912일 독일 레겐스부르그 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였다! “모하멧이 가져온 신통한 일이 있으면 내게 보여 주시오. 악하고 비인간적인 것 외에는 발견을 못하리라. 자기가 설교하는 신앙을 칼로 전파하라는 그의 계명이 대표적이다!” 동로마황제(Manuel II Palaiologos)가 전쟁중 적 이슬람군을 욕하던 말을 기록한 옛 문서(1391)를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인용한 것이다. 뒤이어 교황청 주재 이슬람 국가 대사들의 분노와 전 세계 여론의 비난에 놀란 교황청이 종교간대화평의회를 복원하고 보수주의자 토랑 추기경을 의장으로 임명하는 형식은 취했지만, 아씨시의 평화의 기도를 비롯한 종교간 대화는 유명무실해졌다. 그 교황이 종교간 대화를 소홀히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에 주력하리라는 기대 역시 여자의 사제서품과 여자주교 서품에 반발하여 성공회를 떠나는 사제와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받아들여서 성공회 공동체결성을 허용한 것이 거의 전부처럼 보였다.

 

1.3. 종교간 대화도 그리스도교 일치 노력도 거의 막히다 시피한 8년을 보내면서 낙담하던 필자에게 프란치스코 새 교황의 처음 몇몇 언행이 희망을 약간 불러일으킨다. 먼저, 아르헨티나인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베드로의 266대 후계자로 소개되던 313, 성베드로 성당의 발코니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를 한 번도 교황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로마의 주교로 호칭하였다. 주교황청 외교단과 상견례하던 자리(322)에서 프란치스코는 교황이라는 칭호가 몹시도 어색했던지 변명 비슷한 말을 했다. “로마 주교의 호칭들 가운데 하나가 교황(Pontifex)’인데 다리를(ponto-) 건설하는 사람(-fex)’, 하느님과,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다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요한바오로 2세가 일치의 가견적 표징인 베드로의 직무가 다른 교회들과 교회 공동체들에게는 곤란을 이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서 교황직이 남용된 데 대해서 우리가 책임이 있는 사안에는 나의 선임자 바오로 6세와 더불어 나는 용서를 청합니다.”(1995)라고 공언한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대다수의 교회일치 염원을 논의하는 마당에 수위권이 서로서로가 인정하는 사랑의 봉사를 구현할 수 있는 그러한 형태들을 함께 모색합시다.”는 말로, 로마 주교의 수위권 자체를 토론에 붙여 수위권을 행사하는 형태에 관해서 협상할 자세가 되어 있다던 선언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이 새 교황이 사임할 즈음에는 로마 주교에게 교황이라는 호칭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세계가 올지도 모른다(교황으로 번역되는 Pontifex maximus는 원래 로마 제국의 명의상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이교도 제관의 칭호였다). 그럴 경우 교황의 무류권(無謬權)’이라는 것도 하느님의 백성 전부가 사도단(使徒團)과 함께 누리는 성령의 선물로 인지되면서 어색한 토론을 종결지을지 모른다.

 

1.4.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로마와 전 세계에(Urbi et orbi)” 첫 축복을 내리기 전, TV 앞에 있을 전 인류와 광장의 신자들에게 몸을 깊이 숙이고 먼저 하느님께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빌던 장면은 마치 인류에게 축복을 비는 모습처럼 보였다. 새 교황의 첫 번 일반알현(316)베네딕토 16세의 사임과 콘클라베를 보도하러 로마에 집결한 언론인들에게 제공되었는데 여러분 모두에게 저의 따뜻한 축복을 전합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거나 또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이 축복을 말없이 여러분 각자에게 따뜻하게 전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강복하소서!”라면서 교황이 청중을 향해서 장중하게 십자가를 긋지도 않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신앙개조도 염송하지 않아서 가톨릭이 아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새 교황이 행할 종교간 대화에 기대를 품게 만드는 언행은 한 번 더 있었다. 외교단에게 행한 연설(322)에서 베네딕토 16세의 이름과 더불어 상대주의의 독재라는 말이 새 교황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상대주의란 또 하나의 빈곤입니다. 우리 시대의 정신적 빈곤이라는 설명이 붙자 사람들은 저 명예교황의 혼령이 되돌아왔나 하는 의구심으로 긴장했을지 모른다. 그러자 교황은 상대주의를 각자가 자기를 척도로 삼음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공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일하십시오. 그러나 진리 없이는 평화가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척도여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고 동시에 타인들의, 아니 만민의 선익을 보살피지 않는 한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풀어나갔다. 프란치스코의 말을 필자는 누구든, 가톨릭을 포함한 어느 종교집단이든 전 인류 앞에서 자기네가 절대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훼손하는 정신적 빈곤의 표출로 간주될 수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주교시노드 사무국을 위한 미사(425) 강론에서 오늘 우리는 주님께 교회 안의 선교사들, 교회 안의 사도들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려면 겸손과 봉사, 자비와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제국주의적 방식 또는 정복자의 태도로 복음화를 시도해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투에 이기면 모든 것을 다 깨끗이 쓸어버리는 병사들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의미 깊은 경종도 남겼다.

 

2. 인류는 왜 시스티나 굴뚝을 쳐다보았는가?

 

2.1. 우리 설날이자 교회에서는 세계 병자의 날이었던 2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돌연한 사임부터 베드로의 266대 후계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하던 319일까지 인류의 눈이 온통 바티칸으로 쏠렸으므로 그 두 달 동안 이 잡지의 독자들도 가톨릭교회의 일원이라는데 뿌듯한 보람을 누렸으리라. 그러면 인류사회가 왜 시스티나 지붕의 굴뚝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2.2.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비록 변방 사제(邊方司祭)’로만 사목생활을 해 왔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재야 신앙(在野信仰)’만을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다음 한 가지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국제적으로 바티칸시국(Vatican City)이라 부르고 가톨릭신자들은 교황청(敎皇廳) 혹은 성좌(聖座 Holy See)라고 부르는 단체는, 우리의 호감 여부와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사회적 제도다.

하느님이 천사 하나를 시켜 오늘 날짜로 온 인류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베푸노라!”하고 선언하셔도 될 터인데 굳이 당신 성자를 로마 제국 티베리오 황제 치하에 팔레스티나 땅 나자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여 출생케 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시게하신 역사적 안배를 믿는다면(아니면 우리는 가현설假顯說에 빠진다), 교황청이라는 유럽 역사의 종교적 산물에도 구세사적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그리고 중세에 이탈리아 중부를 차지하는 교황령의 불운한 역사가 이탈리아 통일로 종막을 고하고서 무쏠리니가 단행한 라테란 조약으로 바티칸 시국으로 잔존하게 된 것도, 영화 대부 2”에서 다뤄진, 암브로시오 은행의 파산으로 몰래 축적해서 운영하던 바티칸의 재산도 바닥나고 각국 주교단의 납입금에 상당히 의존하게 된 것도 긍정적 면이 없지 않다.

정치적으로 교황청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 왕조이고, 로마제국의 300년 박해를 이겨냈고, 제국의 국교(國敎)가 되면서 황제권 밑에 종속되어 국가종교가 될 뻔한 위기도 서로마 제국의 때 이른 멸망으로 회피하였으며, 그 뒤의 민족이동이며 신성로마제국 등과의 서임권 논쟁이며 프랑스 혁명 이후의 탈종교화(laicisation), 20세기 들어와 70년에 걸친 현실사회주의 정권들의 종교말살 정책이며를 견뎌내고서 아직도 존속하는 종교단체이자 UN 창설 후 180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다.

다만 역사적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윤리도덕과 인류의 평화 공존을 위하여 제도적이고 예연자적으로 처신하거나 인류사회의 진보를 따라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달리 아직도 교황청은 중세 절대군주제를, 교구는 제후 봉건제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그러나 현재 세계적인 자유방임적 윤리 상황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윤리도덕을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주창하는 집단은 가톨릭교회의 교황청밖에 없다. 교황청 없이도 사람들이 사회정의와 국제평화를 논하고 UN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서 행동할 수 있지만, 인류 12억의 집단을 대표하여 교황청에서 사회정의와 국제평화를 호소하고 발언할 때 인류의 노력은 더욱 효과적이 된다.

성베드로대성당이나 바티칸광장에서 거행하는 교황의 미사가 걸핏 유로비전이나 월드비젼으로 중계되곤 하는데 이탈리아 언론인들에게 까닭을 물으니까 그림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라파엘의 설계, 미켈란젤로의 두오모, 베르니니 광장 등 르네상스 최고 건축가들의 작품을 배경으로, 시스티나 합창단의 6부나 8부의 다성합창과, 추기경들의 비단홍의며 스위스 근위병의 제복, 무엇보다도 흰옷 입은 교황의 차카게 살자!”라는 연설이 나쁠 것 없지 않느냐?“라는 설명이었다.

 

2.3. 파티마의 소녀 루치아가 1917713일에 성모님께 받았다는 메시지가 서기 2000년에 세인들의 호기심을 끈 적 있다. 러시아에서 갓 혁명을 성사시킨 공산주의가 세계 절반을 위협했고,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동서대립은 한반도에서 6.25라는 참혹한 자취를 남기고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존속시키고 있다면, 그리고 1988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크레믈린이 회개하는”(?) 세계사적 경이를 목격하였다면, 그리고 그 사건에 얽힌 로마 교황의 국제정치적 역할을 인정하는 발언들이 있다면, 금년 초봄에 인류사회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굴뚝을 쳐다본 까닭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데 주역을 맡았던 인물 중의 한 사람, 소련 수상 고르바쵸프가 한 말이 있다. 최근 마지막 몇 해 동안 동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 교황(요한바오로 2)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큰 역할, 정치적 역할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그는 세계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연출할 줄 알았다.” 그 사건을 교황은 체코 프라하를 방문한 자리(1990.4.21.)에서 하느님 없는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자부심은 환상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달리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시기와 그 방법만 신비롭게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해석하였다.

 

2.4.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단일패권이 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라크로, 리비아와 시리아로 종횡무진 침략을 감행하고 있는 국제정치 판도에서 인류가 시스티나 굴뚝을 바라보던 이유가 하나 더 드러난다. 적어도 요한바오로 2세가 두 차례의 걸프전을 끝까지 반대한 사실을 국제사회는 기억하고 있다.

십자군전쟁(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클레르몽 선동으로 발발)부터 레판토 해전(1571년 교황 비오 5세의 주동으로 서방세계의 해군이 집결하였다)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에 대한 극단의 공포 속에 지냈던 서구사회는 20세기에도 이라크를 침공하는 두 차례의 페르샤만 전쟁을 앞두고 로마 교황이 이슬람 세계를 견제하는 군사행동에서 서방세계를 격려하고 선동하는 대변인으로 나서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19908월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이듬해 유엔의 최후통첩과 미국의 폭격기가 출동하던 시점에 요한 바오로 홀로 서구 전체를 상대로 전쟁에 반대하며 맞섰다. 전쟁에 대한 교황의 입장은 세계 대전의 가공할 결과는 오늘날 그것이 핵전쟁이든 재래 전쟁이든 전쟁이라면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남습니다. 국가 간의 분쟁과 충돌을 종식시키는 수단으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쟁은 과거의 비극에, 역사에 속해야 합니다. 미래에는 인간의 기획에 전쟁이 자리를 차지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라며 핵전쟁만 아니라 재래식 전쟁도 모두 단죄하는 것이었다(1982.5.30).

9.11 뉴욕 사태 후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는 유엔의 결의가 나왔더라도 요한바오로 2세는 서구 국가 대다수 주교단의 의견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라크에 대한 군사파견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서구 세계와 등을 졌다. 그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320일 밤에 미국의 공습이 시작되자 국제법이 허용하는 평화의 수단이 다했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양심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중대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라는 경고를 부시에게 보냈다. 부시의 이라크 공격 직전 아랍 국가들이 사절파견과 전화로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한 사실도 언론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을 저지하려는 교황의 노력이 무위로 그쳤지만 뜻있는 지성인들은, 세계를 쥐고 흔드는 단일패권국가 미국에 맞서서 발언할 용기가 있어 자기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유일한 정신지도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2.5. 필자가 주교황청 대사로 있던 4년 반 동안 북한 핵실험이 한반도 주변의 첨예한 국제문제로 떠올랐고 한국의 대북포용정책이 시험대에 올랐다. 외교관으로서 필자가 할 만한 유일한 일은 교황청이 한반도 사태에 관심을 갖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뒤이은 노무현 대통령의 포용정책이 교황의 지지 발언을 통해서 전 세계에 천명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느 국가 대통령의 전권특명대사가 바티칸시국의 국가원수인 교황에게 대통령의 신임장을 제출하면서 신임장 제정사(提呈辭)를 행하면 교황은 신임대사의 제정사에 대한 답사형식을 빌어 그 나라 정부와 국민 전체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관례가 있다. 그럴 경우 교황의 메시지는 교황청 일간지 (L’Osservatore Romano)에 전문이 실리고 바티칸 라디오들은 7, 8개 국어로 그 내용을 방송하며 이탈리아 국영방송을 비롯해서 전 세계 주요 언론이 그 발언을 간추려 보도하는 홍보효과를 낸다. 교황이 교황청 주재 대사들과 갖는 신년하례식은 국제정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과 도덕적 권유를 공표하는 자리이고, 성탄절과 부활절의 교황 메시지는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인간들에게건네는 종교지도자의 호소를 담는다.

통상도 영사업무도 없는 대사로서 필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지도자인 교황의 입을 빌어,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남북화해정책의 기조와 한국 정부 및 국제사회의 대북식량원조가 지속되도록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에 치중하였다. 사랑과 정의, 화해와 대화를 근간으로 삼는 교황청으로서는 이런 요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해방 후 한국이 단독정부로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는데 앞장 선 국가가 바티칸 시국이었으며, 당시 주유엔 교황청 대사였던 몬티니 대주교(후일 바오로 6)가 유럽 및 남미 국가들의 한국승인에 일조한 사실도 있거니와,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언제든지 성원할 세계지도자가 교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요한바오로 2세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장을 제출하던 제정사(2003.7.4)에 대해 교황은 한반도의 번영을 위하여 남북한 사이에 간극과 긴장을 완화하십시오.”라는 제목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섭리의 도우심이 있어 나는 귀하가 대표하는 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습니다. 그 기회에 나는 단일 민족이 사는 반도가 강제로 쓰라린 분할을 겪고 있음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북한 사이에) 갓 시작된 결속을 보더라도 갈등을 해소하여 평화로운 화해를 도모하려는 신실한 의지가 있고 그것이 상호 존중과 신뢰 깊은 명분들을 갖추면 얼마나 훌륭한 결실을 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남습니다. 그것은 단지 두 나라의 화합만이 아니라 한반도가 위치한 주변지역 전체의 공고한 안정을 갖다 줍니다. 지나간 시대의 고통이 보다 나은 시대를 내다보는 자신감을 감소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에 대한 존중, 정의와 평화의 항구한 추구라는 굳건한 바탕에서 한국의 현시대와 미래를 정위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를 달성하려면 산적한 현안 문제들 외에도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가 점진적으로, 평등하게, 또 결연하게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를 담보하는 최고법은 현안문제가 논의될 적에는 동등한 군사력을 과시하는 데서가 아니라 오로지 상호신뢰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법은 이 법 밑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필자가 라틴어로 신임장 제정사를 했으므로 교황도 라틴어로 답한 이벤트 때문에(교황청에서 300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도되었다) 언론의 각별한 흥미를 끈 교황의 메시지에서 핵무기가 점진적으로, 평등하게, 또 결연하게 폐기되어야 한다.”는 교황의 발언은 국제 언론의 주의를 끌었다. 미국의 핵우산 밑에 있는 남한과 대치하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한 발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도 성탄절 메시지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대화가 지속되기 바란다.”는 발언을 하였다. “한반도에서 진행하고 있는 평화를 위한 대화가 항구히 지속되어, 의견 차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을 상호 우호적인 마음가짐으로 극복하기를 기도하며, 그 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한 사정에서 국민들이 진정으로 기대하고 있는 좋은 결과를 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다 주교황청 일본대사가 새로 부임하여 신임장을 제정하였는데(206.11.13),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북식량원조를 일체 중단하고 제일 강경한 입장을 취하던 일본 국민에게 교황은 의외의 메시지를 보냈다. “본인은 극동지역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 쌍방 혹은 다자간의 협상을 격려하는 바이며,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평화로운 방법을 통해서, 모든 당사자들에 대한 존중 가운데 해결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전망에서 저는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국제사회가 가장 취약한 백성들에게, 특히 북한에 있는 백성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추구하고 강화할 것을 요청합니다. 갑작스런 중단이 시민들에게 참으로 심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호혜정책(互惠政策)이라는 미명하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도태복수법에 익숙했던 일본대사는 교황 메시지의 영문을 몰라 아시아그룹 딘이던 필자를 찾아와 당황하던 기억이 난다.

2007년도 교황청 주재 외교단 초청 신년하례식 연설(2007.1.8)에서도 베네딕토 16세는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평화적 해결과 대북지원의 지속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반도에는 위험스러운 불씨가 잠재해 있습니다. 한민족을 화해시키고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노력은 주변지역 전체에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이 같은 목표는 어디까지나 협상의 틀 안에서 추구되어야 합니다. 대화를 무산시킬 수 있는 태도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에 못지않게 (대화가 북한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 돌아갈 인도적 지원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교황청 방문(2007.2.14)은 교황청의 각별한 환대 속에 이루어졌다. 양국 국가원수들의 연설문 교환을 위해서는 국빈방문이어야 하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세 번째 교황 예방이어야 국빈방문으로 격상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국무원장(총리) 베르토네 추기경의 개입으로 양국 원수 연설문이 교환되었다. “50년을 두고 한국 국민은 분단의 결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이산되고 친지들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제가 정신적으로 그분들의 고통에 가까이 있다고 알려주십시오. 그 지역에서 일고 있는 핵무기 경쟁의 위기가 우려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성좌는 전적으로 그 우려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당사자들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현금의 긴장을 해소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촉구하며, 협상을 위태롭게 할 만한 일체의 행동거지와 시도를 삼가도록 당부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북한의 가장 취약한 백성이 인도적 원조에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2007.10.2-4)을 앞두고서도 교황은 카스텔간돌포 여름별장에서 삼종기도를 바치면서(2007.9.30) 그곳에 운집한 신자들과 국제사회에 그 회담을 상기시키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한반도를 위해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곳에서는 두 한국 사이에 중요한 대화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진전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화해의 노력이 한국 국민의 이익을 공고히 하고 주변지역 전체의 안정과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새 교황 프란치스코도 금년 부활 메시지(2013.3.31.)에서, 북한이 남한에 대해 전쟁 상태를 선포하고 남한은 미군과 키졸브 훈련을 강행하던 긴장상황을 우려하여 한반도에 의견 불일치가 극복되고 새로운 화해의 분위기가 이뤄지기를기도했다.

 

3.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제

 

3.1. 아르헨티나인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교황으로 당선되면서 가톨릭교회의 향방에 대해 혁신적인 조처를 기대하는 여론들이 높아지고 있다. 가톨릭신문이 최근 한국 가톨릭신학자 100인의 여론을 조사했다면서 새 교황이 교회 내에서 단행해야 할 우선적 개혁적 과제들을 꼽기도 했다(2013.4.14일자). 세계 여러 교회매체들도 비슷한 여론을 보도하고 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50년이 되어 가는데도 그 결의와 정신이 구현되지 않아 또 한 차례의 공의회가 필요치 않느냐는 여망, 교황청의 경직된 관료조직 때문에 지역교회들이 마땅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 성직자의 미성년자 성추행이 대서특필되면서 적어도 새 교황은 사제독신제도를 여유 있게 해결하고 여성 사제직 문제에 장기적인 해결책을 착상하고 환경문제와 사회교리 강화 등에 더 적극적이리라는 기대감이 높아지는 중이다.

 

3.2. 먼저,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과감한 구현, 심지어 제3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교회 헌장에 실렸던 하느님 백성교의는 탁상공론이 되었고 성직자 평균 연령이 70세에 육박하는 유럽에서마저 교회는 여전히 성직자 본위의 피라밋 구조를 가진 구원의 방주로 드러나고 있으며, 교황청 문서들은 여전히 교회를 신비체로 그려내고 있다. 평신도들은 여전히 3P(pray, pay, preach)로 만족하고 교회에서 어른 대접을 못 받으며, 교황과 주교단의 공동성(collegialitas)을 그림자라도 볼 수 있는 주교시노드는 갈수록 교황의 절대군주제하에 자문하는 역할로 그친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인구가 3%인 아시아에서 주교단이 타종교들과 시도하는 모든 대화와 이해 노력을 바티칸 신앙교리성이 주님이신 예수라는 문서 하나로 묵살하다시피 하는 일이 흔했다. 마태오 리치 때 제사문제로 교황청이 앞장서서 파탄 내버린 중국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이제 와서 교황청이 그토록 고수하는 주교서임권마저 타협의 여지를 보이면서도 중국의 외교적 종교정책에 휘둘릴 따름 해결점에 이르지 못하고 세월만 기다리는 듯하다.

 

3.3. 필자가 2003년 교황청에 부임하여 신임장 제정사를 교황청에 사전에 제출한 바 있는데(교황의 답서 준비를 위한 명분이었다) 로마교회와 한국교회를 자매 교회라고 표현한 필자의 문구를 놓고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적당히 얼버무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세계 각국의 교회들과 자매간(姉妹間)이 아니고 모녀간(母女間) 내지 군신간(君臣間)이라는 의식을 교황청 국무성이 노출한 셈이었다. 그러니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원칙하에 주교임명권 내지 교구장 해임권을 절대적으로 장악한 마당에, 비록 교구장에게 봉건제후의 통치권을 보장하지만,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부여하는 일은 아주 힘들어 보인다. 한국어도 모르는 바티칸 인사들이 한국어 미사경본과 한국어번역 성서와 모든 전례서를 인가(認可)해야 하는 마당에 무슨 자율성이 가능하겠는가?

교황청이 얼마나 경직된 관료주의 사회인지는, 외교관으로서 에이스 코스를 거치고 주교황청 대사라는 명예직을 끝으로 퇴임하는 동료대사들이 도대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이, 한 관료가 20년을 한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인맥으로만 처리한다.”고 탄식하던 말에서도 드러났다. 예를 들어 한두 문구 때문에 한국어 미사경본이 아직도 교황청의 인가를 못 받는다든가, 한국과 일본에 분포하는 어느 수녀회의 분리 문제를 두고 소관부서의 차관보 수녀가 교구장 대주교를 대하는 품이 한국의 중앙 부서 국과장이 지방자치단체장을 하시하고 푸대접하는 바와 차이가 없었다.

그나마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424)에 교황청 근무자들과 함께 드린 미사에서 조직이라는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면 사랑은 뒤로 밀리고 교회는 불쌍하게도 NGO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옳은 길이 아닙니다.”라고 한 언질은 그를 교황으로 뽑은 추기경들의 교황청 혁신 소망을 어느 정도 현실성 있게 만드는 듯하다. 암브로시오 은행의 파산과 그에 따른 숱한 살인들로 인해서 마르친쿠스(Paul Marcinkus)라는 이름과 더불어 교황청의 스캔들로 떠오른 IOR(Istituto per le Opere di Religione: 일명 바티칸 은행”)의 개혁은 바티칸 새 주인의 최급선무라는 지적을 언론들로부터 받는 중이다.

 

3.4. 지금은 평신도 시대다. 유럽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율이 3%라는 말이 있고 유럽 수도자와 사제들의 평균연령이 70대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꼽는 말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국민의 교육과 의료, 자선과 복지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담해가는 중이다. 중세와 근세에 교회와 수도회들이 맡아오던 일들을 지금은 국가사회에서 평신도들(국민)이 수행하고 있다. 전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세금을 거두어) 고아원과 갱생시설, 기초생활수급자,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의 생계를 책임지고, 몇몇 부자의 자선에 의존 않고 능력이 닿는 집집이 의료비를 한데 거두어(= 직장 및 지역 의료보험) 자기 가족 전부와 돈 없는 사람들까지 골고루 치료를 받고 중풍환자와 치매노인도 돌본다. 교구나 수도원이 기초교육을 담당하던 때가 지나가는 중이며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의무로 교육을 시키고 유치원과 어린이집 탁아를 정부가 책임진다. 돈을 버는 국민이면 제도적으로 애덕활동에 모두 가입한 셈이다. 이런 국민 사도직을 신앙인은 더 적극 수행할 만하고 따라서 평신도들이 성속이원론을 극복하도록 교회가 사회복음을 교육시키는 일은 가장 절박한 우선과제다.

새 교황이 기회 있을 적마다 교회 밖으로 나가자. 걸어 나가자. 행동하자. 인간과 창조계의 보호자로 처신하자.”고 독려하는 발언들은 이런 면에서 고무적이다. 만일 사회복음을 펴는 교황의 회칙들이 선의의 인간들에게 먹혀들어가고 12억 신도들이 사회교리로 무장될 경우에 교황청의 존재는 국제정치와 하나뿐인 지구의 보전에도 상당한 역할을 기대할 만하다.

신자들이 정치사회문제에 진보와 보수로 나뉠 수 있고 영성운동 역시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영성과 개인성화를 본위로 하는 영성으로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정립된 사회교리를 펼치는 교회 최고지도자라면, 개개인이 청교도적 생활을 표방하면서 사회적 영역에서는 독재와 군사쿠데타를 지원하고 독점자본의 발흥을 고수하면서 교도권의 사회교리 보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영성운동과 그 주도 단체들을 식별하고 계도하는 지혜와 용기도 보여야 할 것이다.

 

3.5. 수도자와 사제의 독신생활을 빙자하여 그리스도교에 만연된 여성혐오증(gynephobia)은 중세의 마녀사냥, 근세의 플랑드르 지방의 베긴들에 대한 박해, 오늘도 성직을 여성에게 개방 않는 제도적 장치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필자가 로마에 있으면서 고위성직자들에게 여성 사제직이라는 터부를 거론하면서, “교회의 가장 고귀한 직분인 사제직을 여성에게 개방 않으면서 어떻게 여성의 존엄성을 입에 올리느냐?”고 힐문할라치면 아마도 기혼남성을 서품하는 일은 있어도 여성을 서품하는 일은 한참이나 기다려야 하리라고 예상된다.”는 어중간한 대답을 듣곤 하였다. 현재 여려 대륙에서 기혼종신부제직의 등장과 활용이나 성공회 기혼사제의 영입으로 미루어, 기혼남성의 서품은 실현성 있어 보이지만 사제독신제 자체에 대한 토론은 상당 기간 교회 내에서 여전히 터부시 될지도 모른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내리셨지만 교회는 어느 새 청교도 윤리”(예를 들어 수녀의 처녀성, 사제의 독신, 6.9계명을 어기면 다 대죄처럼 보는 관점에서 드러난다)를 확립해냈다는 비판도 고려할 만하다.

여성사제직이 허용되기 전에는 가톨릭교회가 여성의 존엄성을 추켜세우는 모든 문건이 말잔치라는 주장이 많지만, 지난 성 목요일 로마의 소년형무소를 찾아가 세족례를 하면서 새 교황이 여자의 발을 씻주었다고(범죄자에다 여자에다 이슬람이었다!) 보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서 열을 올린 사실로 미루어, 만에 하나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성에게 사제직의 문호를 개방하는 가능성 여부를 사전 연구할 만한 당위성을 검토하는 준비 위원회라도 만들 경우, 교회내 보수 세력은 세말을 맞은 듯이 파티마의 제3비밀을 빙자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대배교(大背敎)”라고 떠들면서 여신도는 아직도 칸막이 뒤에서 미사드리는 교회를 찾아 몰려갈지 모르겠다.

 

4. “추한 노파를 버리듯이

 

4.1. 2010624, 브루셀 메켈렌 대성당에서 벨지움 주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 벨지움 경찰이 급습하여 주교단을 9시간 동안 연금시키고 대주교관을 샅샅이 뒤져 성직자의 미성년자 성추행에 관련된 문서들을 압수해 갔다. 가톨릭교회가 겪은 사상 초유의 수모다. 미국에서는 성직자의 미성년자 성추행애 대한 엄청난 배상금 지급으로 파산선고를 하는 교구들이 생기고 있다. 교황 개인집무실의 문서들이 새어나가 책으로 출판된 소위 바티리크스는 교황청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4월 초순에는 로마에서 교회병원을 운영하던 책임자(De Caminada 신부)100억대의 공금을 횡령하고 병원을 파산에 이르게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성당과 교회를 겨냥한 폭탄테러가 이어지고 있다.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로 이어지는 서방세계의 공격이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tum)의 침공이라는 분개심이 깔린 행위다. 새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다.

4.2. 프란치스코가 자기를 로마의 주교로 뽑은 114명의 추기경들과 시스티나 경당에서 거행한 첫 번 미사(2013.3.14.), 교황으로서의 첫 번 강론에서 우리가 고백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천명하던 말은 새삼스럽게 들린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사리가 잘 못 됩니다. 우리가 사회사업의 NGO가 되기는 하겠지만 교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없이 다른 방도로 당신을 따르렵니다.’는 말씀을 드리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속인입니다. 우리가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교황이기는 하겠지만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유일무이한 영광으로 고백하는 일, 그래야 교회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교황이 하느님의 논리 곧 십자가의 논리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밖으로 나아가는 것”(un uscire da se stessi)이라고 정의한 점이다(319일 취임미사 강론). 그가 보기에 교회를 살리고 교회를 쇄신하는 길은 밖으로 나가는길이다. 교회의 교조와 교황직이라는 교도권과 베드로의 유산(patrimonium petrinum)을 수호하는 일보다, 그의 취임사에 나오는 대로, “아흔아홉 마리와 더불어 우리 안에 머무는 것보다, 세상의 성사(sacramentum mundi)가 되어 멀리 떨어진 한 마리를 찾아(현재 교세나 서구의 냉담율로 미루어 여든 마리, 아흔 마리를 찾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다. 따라서 그가 요한바오로 1세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언행으로 미루어 우리는 지금도 교회는 살아 있다. 교회는 아직 젊다.”는 믿음을 가질 만하다.

 

4.3. 물론 2000년 묵은 고목에서 단기간에 활기찬 새 도장지(徒長枝)가 뻗어나오리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12세기의 성인 말라키 주교가 열거한 111명의 교황들 중에 로마인 베드로라는 별명이 붙은 마지막 인물에게 덧붙였다는 구절, 로마 교회에 대한 마지막 박해 중에 로마인 베드로가 교회를 다스리고 많은 환난 속에 양들을 치리라. 그 때가 지나면 일곱 언덕 위의 도성은 파괴되고 두려운 심판자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아멘.”이라는 글귀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데는 까닭이 있다. 교황청이 파티마의 제3비밀이 요한바오로 2세의 피격사건을 가리킨 것이라고 발표하고 넘어갔지만, 라칭거 추기경을 비롯해서 문서를 직접 보고 들었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 비밀은 묵시록적 사건을 언급했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베드로의 266번째 후계자로 취임하던 미사에서(319) 창조계와 인류를 보존하는 일”(custodire la creazione e l'umanità)을 교회의 사명이자 로마 주교의 임무로 천명한 점은 유념할 만하다. 교회 수장과 하느님의 백성이 역사의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기회, 교회의 쇄신과 정화, 인류와 환경을 보존할 본분을 간과한다면, 15세기부터 교회에 나도는 더 음울한 글귀, “인간이 달에 오를 무렵이면 거창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고 사람들이 추한 노파를 버리듯이 로마는 버림을 받으리라. 콜로세움에는 오염된 돌무더기 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경고마저도 종말을 위협하는 어느 광신도의 수작으로만 무시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