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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염 교수 

"'빛고을 광주'의 위상: 21세기 아시아 문화를 위하여 " 

(2020년 3월 26일) 



"국립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에서 주최하는 

2020년 3월 26일자 포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가는 길: '깊은 생각' 포럼" III

행사가 코로나 사태로 녹화강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제가 행한 두번째 강연(포럼 III-2)에 관심 있는 분은...

 

유튜브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F8Dz3uyKfVk&list=PLhNWOcfEeVZXyZBuGRli_6f16t5GWwEeD&index=7 



일기장IMG_6526.JPG



[강연 본문]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가는 깊은 생각포럼

도시, 선하고도 아름다운...

 

빛고을광주의 위상, 21세기 아시아 문화를 위하여

 

성염 | 전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언 :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1)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은 출발부터 광주가 지향하는 가치는 '민주·인권·평화'”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가치는 도시의 역사와 시민들의 삶 속에서 추구되고 구현되는 것이어야 하며, 자신과 새로운 세대에게, 그리고 그 도시를 찾는 이들에게 자기의 삶과 역사를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하는 도시'야말로 문화도시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서 201911월에 열린 1차 포럼의 주제는 도시에도 영혼이 있는가였는데, 이에 대해 나는 영혼이 있다, 적어도 호남 땅 이 빛고을광주에는!”이라고 말하고 싶다.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핑계로 기득권 집단이 고려와 조선 천 년 동안 조직적으로 시행해 온 호남 차별의 역사에서, 이조 말의 농민전쟁, 해방 직후의 제주 4·3항쟁과 이어진 여순항쟁에서, 그리고 5·18민중항쟁의 참극을 겪으면서 광주 시민들의 DNA에 하나의 사명으로 각인된 기상이 있다. DNA로 각인된 유전자는 앞으로 호남에서 태어나고 광주에서 자라나는 후손들에게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로 발현되어 한반도 전역과 아시아인들의 문화로 풍겨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가 대체 어떤 곳이기에, 어떠한 기상을 간직하고 있기에 거기 사는 시민들이 이 고을을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건설하여 그곳을 찾는 아시아인들이 그곳의 문화를 체험하고 배우고 익혀서 자기 나라, 자기 도시에 구현하도록 돕겠다는 것인가?

 

2) 아시아문화중심도시는 가능한가?

5·18민중항쟁 4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광주라는 고을이 갖고 있는 예술 가치, 선하고 정의롭고 결연한 정신 가치를 온 배달겨레, 아니 46억 아시아인 전부와 공유하겠다는 야심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 나는 감히 가능하다고 답하겠다. 왜냐면 바로 광주가 빛고을이기 때문이다. 지난 1차 포럼에서 건축가 우규승 선생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설계하면서 “5·18이 곧 빛이라는 생각에 설계 콘셉트를 빛의 숲으로 잡았다"고 밝혔는데, 이는 광주가 빛고을!’이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3) '빛고을'의 재발견

빛고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1957년 초여름 광주 살레시오중학교를 다니던 나를 만나러 온 어느 한학자께서 가까운 태봉산 비탈로 불러내시더니 당부한 바가 있었다. “언젠가 광주의 본디 이름을 살려다오. 광주는 빛골’, ‘빛고을이란다.” 그러고 나서 1973년부터 3년 동안 광주에서 첫 직장생활을 할 때 천주교 광주대교구의 주보를 시험 발행하면서 제목을 빛고을이라고 지었었다. 월산동 성당의 김성용 주임신부님의 책임 하에 나는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 고 김재균 군과 함께 대건신학대학교 계간지 신학전망(神學展望)편집실에서 주보를 만들었다. 그 일은 비록 3년 만에 중단됐지만, 그후 로마에서 유학(1981-1986)을 마치고 돌아오니 광주대교구 주보의 공식 명칭은 그대로 빛고을이었고, 라디오 방송에선 오늘부터 빛고을 광주에서 열리는 전국체육대회와 같은 멘트가 예사롭게 나오고 있었다.

 

4) ‘영원한 청춘의 도시에 쏟아져 내리는 햇빛, 햇볕 그리고 햇살

광주와 그 시민들은 빛고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햇빛을 밝게 비추어 허위와 불의에 맞서 진실과 정의를 드러내고, 햇볕을 따스히 비추어 동서남북으로 갈린 겨레에게 화해와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며, 햇살을 널리 뻗쳐서 아직도 인권과 민주주의, 경제적 번영을 누리지 못하는 아시아 민족들에게 평화와 혁명을 달성할 결의를 본보기로 보여 줄 만큼 가진 것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월 광주를 대표하는 시인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광주가 꿈꾸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는 과업을 시인의 노래를 통해 설명하려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이 시는 19805월 피비린내 나는 광주의 비극을 목도하면서 극도의 흥분 속에 거의 탈혼(脫魂), 즉 신들린 상태에서 써 내려간 것으로, 여기에는 광주 시민들의 민족사적·인류사적 사명을 건네받은 신탁이 들어 있다. 지난 백여 년간 동학농민전쟁에서, 제주 오름의 동굴 속에서, 여수와 순천에서 도망 나와 지리산 피아골에서 관군의 총칼에, 국군의 총칼에 쓰러져 간 사람들이 그리던 꿈이 새겨져 있다. 일신의 안녕을, 가족의 평안을 포기하고 이웃을 위해, 겨레를 위해, 후손을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희구하며, 쓰러져서도 결코 감기지 못하던 눈동자들이 가 닿던 역사의 지평선이 이 시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40년 전 사방으로 포위되어 국군 최강의 공수특전단을 상대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무기를 들었던 광주의 시민군, 자기들에게 닥쳐올 최후를 충분히 예견하면서도 피 맺힌 눈동자를 부릅뜬 그 영웅들이 내다보던 민족정신의 화려한 탱화(幁畵), 인류사의 거창한 모자이크가 이 시의 밑그림을 이루고 있다.

 

5) 위대한 일을 감행하다가 그들은 쓰러졌으니

광주를 찾는 아시아인들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들어서는 모든 동포들이 거기서 읽게 될 비명(碑銘), “위대한 일을 감행하다가 그들은 쓰러졌으니에서 그들은 감지하리라. 호남이 없었더라면 임진왜란 때 영영 망해 버렸을 한반도, 호남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영구 식민지로 편입되고 말았을 한민족, 호남이 없었더라면 친일친미 군부독재가 영원히 존속되었을지 모를 남한, 호남이 없었더라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같은 지도자가 결코 나오지 못했을 한국 정치사를 되새기면서 비로소 깨달으리라. 이곳은 배달겨레 민족정기의 본산, 한국 문화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나라가 위태로우면 의병으로 일어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결연히 항쟁을 일으키는 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호남을 학살의 놀이터로 삼아 온 집단을 무장해제시켜 역사의 뒤안길로 추방해 버린 주역들을 이곳에서 만나면서 그들 스스로 정신 무장을 하고 돌아가는 학교가 되리라. 자유와 민주, 정의와 평등 같은 운명은 자원하는 사람을 요구" 할 뿐 아니라 역사의 탄두라는 운명은 자원하는 자는 데려가고 마지못해 하는 자는 끌고 간다"는 교훈을 체득하게 되리라. 그렇게 돌아가야 하리라.

 

 

I. '빛고을 광주'의 정신

 

1) 광주는 '빛고을'이다

광주는 천 년의 수난과 수탈, 차별 속에서도 그 이름 그대로 늘 해를 받는 생명의 고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일 년 내내 무등산 서석대로 솟아오르는 해를 맞으며 이 땅에서 벌어지는 거짓과 불의를 환히 밝혀 진실과 정의의 빛살을 누리에, 역사에 두루 비춰 주는 고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빛은 진실을, 진리를 드러낸다. 따라서 빛고을에 사는 사람들의 첫째가는 본분이 여기 있다.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중략)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2) 진실이 얼마나 쉬이 감추어지는가!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5·18에 관한 조선일보의 보도를 기억하는가? 조선일보1980526악몽을 씻고 일어서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적었다1980823인간 전두환이란 특집기사를 실으며 육사의 혼이 키워 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사에 앞서 공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 해”,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운동이면 못하는 것 없고 생도 시절엔 축구부 주장따위의 부제를 달았다. 그러고 불과 4일 뒤 전두환은 단독 후보로 나서 11대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돈으로 매수한 사기극으로 폄하했던 기득권 보수언론들이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쏟아 내는 터무니없는 보도는 세계보건기구(WHO)나 외신들의 평가와는 너무나 상치되어 외신기자들마저 깊이 탄식하게 만들고 있다.

 

3) ‘빛고을은 호남의 존재 의의를 드러낸다

국방 : 이순신 장군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1593716일자 편지에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방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湖南國家之堡障 若無湖南 無是國家)”이라고 했다.

한반도의 곡창 : 호남평야, 나주평야가 한반도 백성을 먹여 살렸다. 역사적으로 곡창지대는 늘 패권 세력의 침략과 수탈의 대상이 됐는데, 로마 시대의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이 그러했고, 폴란드는 근대에도 프러시아와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침략 받고 수탈당했다. 식민지 시대 일제의 곡물 정책과 군산항 및 장항선의 역할을 기억하자.

예향(藝鄕) : 오랜 고난으로 쌓인 깊은 슬픔을 밑바닥에 깔고도 이곳 백성들은 기쁨과 흥겨움을 잃지 않았고, 그것이 건축·회화·음악·문학·연예·음식으로 발현했는데, 오늘날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선사하는 배달겨레의 예술적 감동은 호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확실히 호남인들은 놀 줄 안다. 중국인들이 일찍이 우리를 동이(東夷)라 하여 노래 부르며 춤추고 노는민족으로 칭했는데, 그 민족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이 바로 호남이다.

 

4) ‘빛고을은 평화가 오직 정의의 열매임을 알린다

정의란 이 세상에서 통하는 이치에 따르면, 정의인지 아닌지는 상호 간의 세력이 백중할 때에 결정되는 것이며,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강자는 원하는 것을 할 것이고, 약자는 겪어야만 할 것을 겪어야 할 뿐이라는 자조적인 논리에 굴하지 않는 것이 호남인들이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이지 군홧발에 짓밟혀 입 다무는 침묵이 아님을 호남인들은 역사적으로 입증해 왔다.정의의 열매가 평화가 되리라. 소리 없는 사람들의 정의를 존중하고 영원한 안녕이 오리라. 그러면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거처에, 믿고 사는 처소에, 안전한 장소에서 살게 되리라.”는 구절을 호남인들은 너무도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5) ‘빛고을은 한반도에서 자행된 민중 학살의 주체를 드러낸다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유의하라! 기득권을 위해서라면 당나라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얼마든지 외세를 끌어들이는 집단이고, 백성을 적으로, 학살 대상으로, 사냥감으로 여기는 집단이다. 동학농민전쟁에 왜병을 끌어들인 집단, 제주 4·3항쟁 때 미군정을 등에 업은 집단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114일자 명령서에서 4·3항쟁과 관련하여 남녀 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고, 이는 집권 기간 동안 100만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조사로 밝혀진 바 있다.

제주4·3 학살 배후, 미국 책임 분명히 물어야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직무대행 오임종)6일 오후 2시 제주시 아스타호텔 3층에서 '제주4·3, 미국의 책임을 묻는다'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20세기 냉전체제와 미국' 기조강연을 통해 제주4·3에 있어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강 주교는 제주4·3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묻는 작업은 제주 도민들에게는 꼭 이뤄야 할 숙명적인 과제라면서 4.3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는지 시야와 시대의 폭을 넓혀 생각해야 미국이 저지른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이해를 하고, 앞으로 (사과를 받기 위한) 미국과의 접촉에 밑바닥을 깔 수 있다고 운을 뗐다. () "정말 진정 어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긴 시간 우리가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6) ‘빛고을은 비폭력의 승리를 보여 준다

작년 111차 포럼에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뉴욕 타임스서울 주재 기자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5·18광주항쟁이 아시아의 타 지역에서 발생한 여느 봉기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 광주는 달랐다. 탄압을 뚫고 진상 규명을 이뤄냈으며, 그 불길이 아직도 타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현대사에 민중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독재 정권에 항거한 사건은 광주 한 군데뿐이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나라에서도 광주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이어서 안병욱 원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와 같은 사례는 40여 년 후 촛불혁명으로 확산되었다.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연인원 천만 명이 넘게 참여했지만, 놀랍게도 어떠한 물리적 폭력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단일하고 동질적인 공동체로 결합하여 시위했다. 이러한 특성은 지난 19805월 광주항쟁과 19876월항쟁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꼭 백 년 전 한반도 전역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다. 촛불시위를 통한 민주주의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강정해군기지에 대한 제주민의 항쟁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40년대 미국의 일본 경제봉쇄가 진주만 기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어졌던 것을 돌이켜 보자. 제주도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특성과 중국을 상대로 한 미국의 전략 구상(2의 오키나와기지 건설)을 감안하면 과거 4·3항쟁을 겪으며 전체 주민 14만 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 희생되었던 도민들의 두려움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대중무역봉쇄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을 때 제일 먼저 미사일이 날아올 곳이 어디겠는가?

 

7) 그렇지만, 그렇지만 극단의 경우 호남인은 무력으로 봉기한다

구한말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의병이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라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대대로 항중·항몽·항청·항일의 투쟁 속에서 무력으로 스스로를 지켜냈고, 이 때문에 어느 침략자에게도 정복당하거나 굴복해 동화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은 동학농민전쟁,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그리고 5·18민중항쟁에까지 계승되었다. 평화의 종교라는 가톨릭마저도 무력에 의한 의존은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국가의 공동선을 극도로 해치는, 명백한 폭군적 압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처방으로 여겨진다라는 교리로 불가피한 경우 무력을 사용한 저항권을 인정한다. 국군 최정예부대라는 공수특전단에 항복하지 않고 끝내 유혈 진압된 5·18시민군의 기상은 오늘날까지도 빛을 발하는 광주의 얼이다.

 

 

II. 광주의 '햇볕'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고을. 노령산맥 위아래로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을 받아 키운 곡식으로 배달겨레를 먹여 살리고, 그 풍요에서 우러나오는 인심으로 선량한 이웃에게나 모진 사람들에게나 늘 다정하며, 여유가 빚어낸 가락과 그림, 글과 건축으로 한반도를 비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시아인들의 삶을 풍족하고 훈훈하게 가꿔 주는 볕고을이 바로 광주다.

 

1) 광주의 '햇볕'은 집단 이기심을 뛰어넘는다

14대 대통령 선거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한마디로 결판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정주영 후보가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선거일을 일주일 앞둔 19921211일 부산의 한 음식점에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을 필두로 지역의 공관장들이 대거 모여서 지역감정을 선거에 활용할 방안을 논의했는데, 이를 다른 후보 측에서 몰래 도청해 폭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불법 도청에만 초점을 맞춘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로 문제의 본질은 덮인 채 결국 지역감정을 자극해 지지를 호소한 김영삼이 당선됐다. 반면에 2002년 대선에선 호남 출신 후보 대신 부산 사람 노무현을 선택한 광주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열세였던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2017년 대선에서도 호남은 문재인 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 출신 지역과 관계없이 추구하는 가치를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2) 광주의 '햇볕'은 호남인이 정으로 살게 만든다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월호 문제와 관련해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호남은 긴 세월 동안 고난을 겪어 왔기에 다른 지역,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쉽게 공감한다. 호남인들은 너무 섬세한 정인(情人)이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다정불심(多情佛心)을 지닌 사람들이다.

 

3) 오늘의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는 광주 시민들의 품행

전염병 하나로 전 세계가 마비되고 고립된 지금의 상황을 보라. 하늘길이 끊기고 국경은 폐쇄됐으며, 도시가 봉쇄되고 학교, 극장, 병원, 가게가 모조리 문을 닫았다. 내가 사는 지리산에도 할머니 집으로 피난 오는 손주들이 부쩍 늘었지만, 외국에서 귀국하겠다는 자식에게 그럼 우리 두 늙은이는 어쩌라고?” 하며 역정을 낸 부모도 있었다는 얘기가 들린다. 함양은 아직까지 코로나 청정 지역인데, 이웃 거창에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함양의 목욕탕을 찾는 거창 사람들에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하며 출입을 막기도 했다고 한다. 앞으로 매년 이런 전염병이 돈다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이 와중에 광주, 전주, 남원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대구, 경북의 환자들에게 치료 시설을 제공하고 의료진을 파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달구벌(가해자)에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빛고을(피해자)의 온정이 드러난 사례로, 증오와 아픔을 용서와 다정으로 풀어가고 극복해 가는 광주의 얼이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리라.

 

4) 광주의 '햇볕'은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나는 20009월 김인서(남한 이름 김국홍) 선생을 비롯한 여러 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으로 귀환하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바 있다. 그런데 호남에서 올라온 이들은 광주 무진교회 등이 마련해 준 살림살이가 각자 트럭 한 대 분량에 달했던 반면, 영남에 살다 온 이들은 단출하게 가방 하나씩만 들고 있어 대조적이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인들은 윤보선보다 박정희를 더 많이 지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과거 박정희의 좌익 활동으로 인해 그의 형이 총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아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III. 아시아를 두루 비출 광주의 '햇살'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1)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시인은 광주를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자 이며 십자가라고 외쳤다. 십자가는 형구(刑具)이다. 자기의 고난과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구하는 상징,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한민족에게, 세계인들에게 구원을 가리켜 보이는 상징이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서 광주가 그 문화적 기상을 한반도 전체로,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데 필요한 콘셉트를 나는 시인이 말한 십자가에서 찾고자 한다.

 

2) 광주가 겪어 온 고난의 구세적(救世的) 의미

19805월에 광주가 치른 희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 문화, 아니 인류사가 인생고(人生苦)를 풀이하는 두 가지 패러다임이 있다. 하나는 열반에 든 부처님의 미소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님의 고상(苦像)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자처한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며 숨을 거뒀다. 그런데 그가 말한 ?’라는 낱말의 원어(pros ti? ad quid?)를 보면 뭘 잘못했다고?’라는 원망의 의미가 아니라 내 죽음으로 뭘 얻자고?’라는 물음의 뜻이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핏빛 하늘에 울려퍼진 광주의 비명 또한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나!’라는 억울함의 호소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 민족사에서 무엇을 얻자고 우리 피붙이를 이처럼 떼죽음 당하게 내버려두시나이까?’라는 의문의 외침으로 들린다.

5·18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1984년에 한국을 찾아온 현자가 있었다. 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무릎 꿇고 바닥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들의 피로 거룩해진 땅이라고 말했다. 항쟁이 진압된 후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던 지사들이 반란군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고, 미국의 위세에 눌린 전 세계가 이 학살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 전두환 정권의 결사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방문한 교황이 53일 광주공설운동장에서 했던 설교에는 시민들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그들이 겪은 고난으로 인해 앞으로 이 도시가 아시아의 빛이 되리라는 전망이 담겨 있었다. 내 귀에는 그것이 광주의 역사적 운명 내지는 아시아적 사명을 전하는 신탁처럼 들렸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이 지역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으로 아직도 시달리는 이들에게 각별한 중요성을 갖습니다. () 우리 모두 분열과 증오의 한가운데서도 화해와 평화의 도구가 됩시다. 그러면 불안과 환멸로 가득 찬 가슴들, 상처 입은 가슴들의 아픔을 우리가 덜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 대신 억압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로서,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다운 해방의 도구가 되고 참된 자유의 상징이 된 사람들로서 우리가 희망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빛고을은 호남인이 받아온 증오의 명분을 드러낸다

광주 사람들은 영악한 기득권자들과 같지 않다. 천 년의 푸대접과 백 년의 학살을 겪으면서 얼이 반쯤 나가 호남인들은 바보가 다 되었지만, 바로 그 바보의 기개가 이 나라를 밀고 가는 힘이다. 2019518일 광주의 제삿날에 몰려온 태극기부대가 충장로에서 난동을 부리며 광주 시민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릴 때 그들이 보여 준 인내심은 참 바보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고 우직했다. 그런 그들이 2002년에는 자기들을 닮은 바보 노무현을 지지해 이 나라 역사의 흐름을 바꿨고, 다시 바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선택해 2017년 한반도 위기와 지금의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했다.

누구는 수레 위에 올라타 거들먹거리며 오른쪽! 왼쪽! 더 힘껏!’이라고 소리 지르고, 또 누구는 마소한테 하듯이 거침없이 채찍을 휘두르는데, 그렇게 마소마냥 진창에 온몸이 빠진 채 그 수레를 끌고 가는 것이 바로 광주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진창 속으로 소리 소문 없이 가라앉거나 뼈다귀도 못 추리고흔적 없이 사라져 간 이들이 광주 사람들이다. 여기에 빛고을의 도덕적 우월성, 정신적 탁월성, 문화적 출중성이 있다.

 

 

부록 광주 사람으로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교가 광주의 고난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19805월 광주 시민들의 곁을 지킨 가톨릭 성직자들-조철현 신부, 김성용 신부, 윤공희 대주교,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용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1973년 가톨릭 세계주교시노드는 정의 구현이 곧 복음 선포라고 규정하였고, 한국을 두 번 다녀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를 재정의하길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그 깊은 경탄을 일컬어 복음, () 그리스도교라고도 일컫는다라고 했다.

200374일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부임한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장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교황은 산적한 현안들 외에도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가 점진적으로 공평하게, 또 결연히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를 담보하는 최고법은 현안이 논의될 때 동등한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호 신뢰로 풀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나로서는 이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4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을 택하였고, 와서는 그해 4월 일어난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방한 기간 내내 추모의 노란 리본을 옷에 달고 다닌 그에게 누군가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어떻겠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는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2017년 한반도가 전쟁 위기에 휩싸였을 때 교황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가 2년 전부터 야금야금 (발발 가능성이 커져 가는) 세계대전에 관해 이야기해 왔는데 () 벌써 1년이 넘도록 한반도의 미사일 문제가 언급되고 있어요. 헌데 이제는 사태가 너무 과열되고 (일정한 지점으로) 집중됐어요. 나는 늘 외교적 방도로 문제를 풀 것을 상기시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요. 오늘날은 한 번의 전쟁이 인류 절반이 아닌 대다수를 몰살시킬 것입니다. 가공할 파탄이 닥칠 것입니다.”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은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기억하며 메시지를 보내 왔는데, 세계적인 지도자로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 이 행사를 통해 모든 남녀가 형제적 연대와 항구한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세상을 건설하는 데 새로운 각오로 투신하기를 기대한다며,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희망을 굳게 간직하도록 늘 기도로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부록 5·18민주화운동에 어느 가톨릭 신자가 드리는 사죄의 글

 

필자가 40년쯤 살아온 서울 쌍문동 골목에서 일어난 80년대의 기억 한 토막. 우리말이 어눌하고 행색이 초라한 60대 남자가 주말이면 골목에 나타났고, 그때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고장 난 장난감을 들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는 가위와 접착제, 펜치와 드라이버로 아이들 장난감을 고쳐 주고 있었다. 그 사람 곁에 앉아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우리 일본이 한국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제가 해드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1년에 절반은 한국에 와서 골목을 찾아다닙니다. 애들하고 놀아주고, 고장 난 장난감을 고쳐줍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며, 비도덕적 사회에서 온 도덕적 인간의 순박했던 언행을 필자도 흉내 내고 싶어졌다.

5·18민주화운동이 며칠 후 37주기를 맞는다. 아직도 5·18은 시민의 궐기가 아니라 북한군의 선동이었다고, 무고한 시민 학살을 가리켜 난세를 치세로 바꾸는 용단이었다고, 군사 반란의 주모자요 발포 명령자인 전두환이 자기는 광주 사태 치유 씻김굿의 희생자라고 우기는 뻔뻔하고 비도덕적인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한 명의 신자로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 한국 가톨릭 교계가 광주 시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늦게나마 사죄하고 싶다. 광주 금남로의 교구청 6층에서 공수특전단의 만행과 학살을 직접 목격한 윤공희 대주교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앞장서다가 옥고를 치른 김성용 신부님과 조철현 신부님을 비롯한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모범이 여태껏 필자의 양심에 촉구하는 본분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가톨릭주교단을 대신하여 광주 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 처절한 광주의 참상을 직접 겪은 윤공희 대주교님이 소집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 내놓은 1980523일자 성명서가 광주 시민들에게 안겨 주었을 모욕감과 분노를 두고 필자가 대신해 용서를 빈다. 한국군 최정예 공수특전단이 총칼로 비무장 시민들을 사살 도륙하는 판을 주교단은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분쟁이라고 규정하였다. 비무장 양민을 헬기의 기총사격으로 학살하며 화려한 휴가를 즐기던 군인들과 광주시를 초토화하겠다는 계엄사령관의 협박이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터에 처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던 시민들더러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하라는 양비론적 훈유를 내리다니!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질에 죽은 불교 신자 박정희를 위해 1979112일 한국가톨릭주교단이 명동대성당에서 추도미사를 공동 집전하였다.(그의 장례식에서 목사의 기도와 스님의 목탁과 신부의 성수 분향이 행해지는 장면은 고인의 생전 신앙에 따라 장례를 거행하는 외교사절들의 눈에는 희극에 가까웠으리라.) ‘광주 사태‘5·18민주화운동으로 복권된 뒤에도 희생자들을 위한 주교단의 추도미사는 거론조차 되고 있지 않지만, 그분들에게도 사회교리 영성이 깊어지고 있으니 언젠가 가련한 광주의 넋들(그리고 세월호에 탔던 넋들)을 하느님 앞에서 위로하는 미사가 공동 집전되리라 믿는다.

광주가 계엄군에 포위되어 있던 시점에 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호주 기자가 앞서 대구의 고위 성직자로부터 광주는 본래 좌익들이 많아요. 이번 사태도 그들이 일으켰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필자의 견해를 묻던 기억이 나 그 성직자의 이름으로도 광주 시민들에게 사죄한다.

그해 가을 명동 전진상교육관의 모임에서 어째서 5·18에 침묵하셨나요?”라는 청년의 질문에 우리마저 월남처럼 될 수는 없었소. 미군 장성으로부터 삼팔선의 상황을 보고받은 바 있소라고 답변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름으로 광주 시민들께 이해를 구한다. 최근 공개된 미 대사관의 문서에서 확인하듯 그 당시 휴전선 부근에서 북한군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는 보고로 미루어 특전단의 이동을 승인한 미군의 술수였을 듯한데, 차후에 희생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셨으면서도 학살을 당장 규탄하시진 않았던 그의 침묵에 일반 국민들은 의아했기 때문이다. 15년이 지난 19951220일 관훈클럽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잘못된 과거를 단죄하고, 권력과 금력에 의한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하신 추기경님의 발언에 감사드리는 한편, 그 몇 달 전까지만 해도 “5·18은 역사에 맡기자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동조하셨던 것에 대해서는 고인을 대신하여 사과드리는 바이다.

군사반란의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가 재판을 받던 무렵 월간조선19962월호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합니까?”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던 김남수 주교님을 대신하여 광주 시민들 앞에 무릎 꿇고 깊이 사죄한다. 스스로 가톨릭 보수파의 수장을 자처하신 그 회견에서 주교님은 광주 사건이 민란이었다고 단정하셨고, 진상을 밝히자는 거국적 요구에는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셨다. “정의를 구실로 민중이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는 비이성적이다. 역사적으로 사람의 분노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계급투쟁이고 공산주의 아닌가? 진실은 후세에 가서야 밝혀진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

전두환의 7000, 노태우의 4000억 부정 축재에 대해서는 그 시대 정치인으로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허물이라고 감싸시고, 비무장 시민 학살에 대해서는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지 우리가 판관이 아니라며 변호하셨다. 5·18민중항쟁과 관련한 주교님의 이런 평가에 감격한 이동욱 기자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보는 가장 아름다운 성직자, 저는 수원에서 그런 분을 뵌 것 같습니다라는 찬사로 인터뷰를 마쳤다.

기자로부터 장 발장을 감화시킨 미리엘 주교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은 김남수 주교님의 진의는 그보다 7년 앞서 문규현 신부님이 북한을 방문한 임수경 양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올 무렵에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세계청년학생축전 참석차 평양에 간 명수대성당의 신자를 데리고 돌아오는 사제의 구속 여부를 두고 사법 당국이 가톨릭교회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자 1989727일 주교님은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우리 사회는 좀 더 법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 말대로 두 사람이 휴전선을 넘자마자 구속됨으로써 남북 화해를 도모한 사제와 신자를 주교가 스스로 검찰의 손에 넘긴 모양새가 되었다.

필자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존경받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김남수 주교님을 직접 거명하면서까지 대신 사죄하는 데에는 세 가지 명분이 있다. 첫째, 하느님과 사람 앞에 죄가 되는 생각과 말, 행함을 고백하면서 의무를 소홀히 한 죄까지도 용서를 구하는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교회라는 명제 아래 신앙인은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역사적 행적과 진로를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때문이다. 셋째, 1979년 추석날 밤 필자가 아우와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 6국에 끌려가 한 달 넘게 취조 받을 적에 이 형제는 교회에서 번역 활동을 하는 신자일 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주교님들의 탄원서에 두 분 또한 서명해 주신 은인이므로 40여 년이 흐른 지금에라도 그분들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아량과 이해를 대신 구하고 싶었다. 그해 1026일 새벽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우리 형제를 남산에서 내보냈고, 바로 그날 저녁 궁정동에서 유신정권을 끝장냈다.


부록 ③ 김준태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히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을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 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원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전부를 빼앗아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나는 아이를 벤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허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을 죽고도

몇 백 번을 부활한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 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