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70인과의 동행](42) 조선시대 박해 광풍 이겨낸 천주교의 안식처…순교자의 길 되새기다

제천 | 최희진 기자·김정근 기자 daisy@kyunghyang.com

ㆍ종교철학자 성염과 충북 제천 배론성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100&artid=201704142135005


충북 제천 배론성지 대성당의 내부 모습이다.<br />배 모양을 닮아 배론이란 이름이 붙은 지형을 반영해 성당도 방주를 형상화했다.<br />지난 8일 배론성지를 찾은 성염 교수는 ‘70인과의 동행’ 참가자에게 “종교에 대해 오로지 내면의 평화만을 추구하고 세속의 정치에는 거리 두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이 소수자를 외면하고 정치와 무관하기란 조선시대에도 현시대에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충북 제천 배론성지 대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배 모양을 닮아 배론이란 이름이 붙은 지형을 반영해 성당도 방주를 형상화했다. 지난 8일 배론성지를 찾은 성염 교수는 ‘70인과의 동행’ 참가자에게 “종교에 대해 오로지 내면의 평화만을 추구하고 세속의 정치에는 거리 두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이 소수자를 외면하고 정치와 무관하기란 조선시대에도 현시대에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조선 권력층, 가톨릭 순교자들을 
질서 뒤엎는 혁명세력으로 몰아

‘사회적 소수자’로서 핍박 겪자 
제천으로 피신 후 ‘신앙의 터’로

“평화·통일·세월호의 억울함… 
‘천주학쟁이’라면 목소리 내야”

당시 순교 황사영·최양업 등 
분노 아닌 자비의 눈길로 봐야

가톨릭은 내세의 평안과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다. 19세기 초 조선에서 가톨릭 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된 후 이 종교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는 100년간 최대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내세의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 것일까.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나와 다른 믿음을 가진 ‘천주학쟁이(가톨릭교도를 속되게 이르는 말)’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었을까. 종교철학자인 성염 전 교황청 주재 한국 대사(72)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천주교 순교자들의 성지인 배론성지로 떠나는 ‘70인과의 동행’을 시작했다. 

■ 한국 천주교 박해사의 성지 

성 전 대사는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안대학교에서 라틴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와 서강대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3~2007년 주교황청 한국 대사로 활동했다. 

지난 8일 충북 제천 봉양읍 배론성지를 방문한 동행단 35명은 “성 전 대사를 평소 존경했다”고 참가 동기를 밝혔지만 동행단 전원이 가톨릭 신자인 것은 아니었다. 종교가 없거나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도 순교가 지금 이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다.

배론이란 명칭은 백운산과 구학산 줄기에 둘러싸인 이 지역 골짜기의 지형이 배(舟) 바닥처럼 깊고 넓다는 데서 유래했다. 지금의 배론성지는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경우 서울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본래 이곳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궁벽한 지역이었다. 조선 시대 때는 한양에서 배론까지 걸어가려면 꼬박 15일이 걸렸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사교(邪敎)’를 믿는 자를 체포해 능지처참하던 박해의 광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몸을 숨겼다.

종교철학자 성염 교수가 배론성지에서 순교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종교철학자 성염 교수가 배론성지에서 순교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근 기자

한때 피바람이 몰아쳤던 배론에도 꽃이 피었다. 성지에 도착한 동행단은 내리쬐는 봄 햇살을 맞으며 1801년 8월 황사영(1775~1801)이 숨어서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1988년 복원된 토굴의 입구는 세로 1m50㎝ 정도이기 때문에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백서 사본이 전시된 내부는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동행단은 차례로 토굴에 입장해 흰 명주천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내린 백서를 살펴봤다. 성 전 대사는 “황사영 백서는 한국 천주교회 박해사를 정리한 최초의 문서”라며 “누가 어떻게 박해를 당하고 처형됐는지를 122행, 1만3384자의 서한 형식으로 깔끔하게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이 백서는 중국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인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황사영은 백서에 1801년 1월 시작된 신유박해의 전말을 적은 뒤 프랑스의 “병선에 병기를 많이 싣고” 조선 해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여 “왕에게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백서 전달 임무를 맡은 밀사가 체포되고 곧이어 황사영도 체포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사영의 행적은 천주교 내에서도 논란거리다. 깊은 신앙심은 인정해야 하겠으나 외세를 끌어들여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는 대목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한국 천주교가 2002년 순교자 124위 시복시성을 추진하면서 그 명단을 확정할 때 황사영을 제외했던 이유다. 10년 이상이 소요된 엄격한 심사 끝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을 결정했을 때 황사영의 이름은 없었다. 

성 전 대사는 동행단에 황사영 순교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치적 죽음이 순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순교(殉敎)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의 교리를 따라서 죽는다는 것이다. 성 전 대사는 “사실 예수의 죽음만큼 정치적인 게 없다”면서 현대적 비유를 들어 “당시 로마의 ‘당정회의’에서 예수를 사형하기로 결정하자 로마의 검찰과 경찰이 필요한 절차를 밟아 예수를 체포하고 사형했다”고 말했다. 

그는 황사영도 당시 가톨릭 선교활동이 내포하고 있었던 정치적 함의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고 평가했다. 성 전 대사는 “당시 권력자들은 황사영을 비롯한 천주교 순교자들을 구질서를 뒤엎고 새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혁명세력으로 봤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사회적 소수자였던 황사영의 순교는 우리 시대 종교와 신앙인들에게도 뜻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는 종교에 대해 오로지 내면의 평화만을 추구하고 세속의 정치에는 거리 두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 사태, 세월호 참사 등에 관해 종교인들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정치적인’ 성직자를 비난하고 ‘종교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날선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성 전 대사는 동행단을 향해 “모든 박해는 정치적 박해”라고 단언하며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이 소수자를 외면하고 정치와 무관하기란 조선 시대에도 현시대에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과 대성당을 잇는 다리.  김정근 기자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과 대성당을 잇는 다리. 김정근 기자

■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않고…” 

토굴과 황사영 동상을 둘러본 동행단은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으로 이동했다. 물소리를 들으며 개울 위 돌다리를 건너 고요한 성당 내부로 입장했다.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은 지명인 배론을 조형화해 배 모양으로 설계·시공됐다. 천장이 유리로 돼 있어 조명을 켜지 않아도 실내가 밝았다. 일반적인 성당과 달리 예수가 매달려 있는 대형 십자가는 없었다. 그 대신 제단 오른편에 예수의 사형 장면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와 사형수 2명을 형상화한 금속 조형물이 서 있었다.

1821년 태어나 1861년 사망한 최양업 신부는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 서품을 받은 인물로, ‘땀의 순교자’라고 불린다. 전국을 걸어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1836년 한국에 입국한 프랑스인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발탁돼 후일 한국인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성직자 수업을 받았다.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국내 입국에 성공한 뒤 본격적인 선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1850년부터 1861년 6월 사망하기 전까지 하루에 30~40㎞를 걸으며 전국의 천주교 신자를 만났다. 감시의 눈길을 피해 밤에 모여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밝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수면을 제대로 취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사나흘 정도였다. 그는 결국 식중독과 과로, 장티푸스로 경상도 문경에서 쓰러져 보름 만에 숨을 거뒀다. 

현재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최양업 신부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교회 차원의 기적 심사는 완료했고 로마 교황청 시성성에서 열리는 본 심사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최양업 신부가 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황사영이 백서를 써내려갔던 힘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동행단을 마중한 최종복 배론성지 주임신부는 성 전 대사와 인사를 나눈 뒤 동행단을 향해 “조선 시대의 천주교인들이 죽어서 천당에 가기 위해 순교한 게 아니라는 것을 저도 여기에 와서 느꼈다”고 운을 뗐다. 

최 신부는 “당시 순교자들은 종말론적 희망이 아니라 현세적 희망을 품고 살았다”며 “하루를 살아도 희망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현실의 문제를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배론성지는 시대에 끌려가지 않고 시대를 끌고 가고자 했던 신앙 선조들의 땀과 피가 서려 있는 곳”이라며 “오늘 오신 동행단 모두 이곳이 지닌 기쁨을 찾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배론성지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도 복원돼 있다. 프랑스인 매스트르 신부가 1855년 배론에 살던 장주기(1803~1866)의 집에서 신학교를 열고 8명의 신학생을 가르쳤다. 언제 어디서 포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문을 활짝 열 수 없었고, 목소리 한 번 시원하게 높일 수 없었다. 환기도 되지 않는 비좁은 실내에서 교리를 가르치고 배웠다. 그러나 결국 1866년 병인박해 때 두 명의 외국인 신부와 장주기, 신학생 3명이 순교하면서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성 전 대사는 이날의 동행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은 ‘내가 19세기 초를 살았던 우리 선조라면 천주교인들을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장담은 하지 마시라”며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주변의 ‘천주학쟁이’를 돌아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천주학쟁이’는 “우리 주변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 남북통일, 노동자의 권리, 세월호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성 전 대사는 “신앙인들은 성지를 순례하고 의로운 순교자를 위해 기도한다”며 “하지만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 뒤 자기 주변의 예언자와 순교자, ‘좌빨’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 주류 언론이 공격하는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배론성지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최양업 신부의 생전 어록을 기록해 놓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가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고 하느님 자비의 아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동행단은 내 주변의 순교자와 소수자를 분노가 아닌 자비와 관용의 눈길로 바라봐야 한다는 성 전 대사와 최양업 신부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다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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