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복음에 따른 제삼천년기 선교 영성


성염 교수 (전 서강대 철학과)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발표 2016.10.22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제7권(2017), 113~1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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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교황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2013.11.24)그리스도 신앙의 전파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한 제13차 주교시노드(2012.10.7-28)의 제안서(58 Propositiones)에 입각한, ‘시노드 후속문서로서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발표자는 선교신학 연구자가 아니므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에 따른 제삼천년기 복음화라는 대주제를 학리적으로 다루지는 못하며 그리스도교 생활에 함의된 사회복음(社會福音)을 펴는 서적들을 읽고 번역하고 교우들과 공유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세기 교회를 향해 사도적 권고로 천명한 선교 영성(宣敎靈性)을 간추려 제시하는 일에 발표를 국한한다.

발표문의 요지는, ‘가톨릭교회가 제3천년기에 펼쳐야 할 새로운 복음화(nova evangelizatio)는 이미 입교했지만 교회생활에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사회복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가톨릭신자들이 웰빙차원에서 신앙인의 양심을 기만하는 마음의 평안만 찾지 않고, 교회와 사회에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도 있고, 전쟁과 난민생활과 기아로 허덕이는 인류사회에 전할 참다운 기쁨을 습득하고 실천하고 선포하는 과업임을 역설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종래의 구령 영성(救靈靈性)으로 양성된 가톨릭신자들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사회복음을 새삼 소화하고 선포하는 새로운 출발선교사들에게 요청되는 영성이라는 발표가 되겠다.

 

1. 현대사회에 봉착한 종래의 선교 영성

 

가톨릭교회는 마르크시즘의 등장과 산업혁명에 자극을 받아 이미 19세기 말에 사회교리에 착안하였지만 1, 2차 세계대전과 동서 냉전에 휘말리면서 80년대 말까지는 동구권 현실사회주의의 무신론과 종교박해에 시선을 빼앗겨 서방세계의 실천적 무신론과 가톨릭신자들의 교회이탈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나는 교회의 동공화(洞空化), ‘풍요한 사회에서 이미 배금(拜金)의 우상숭배를 겸하는 신앙생활에서 그래도 교회의 교도권을 추종하겠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근본주의에 빠져 지금의 국제정세를 마치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슬람을 정벌하는 종교전쟁이나 되듯이 갈채를 보내고 또 감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교도권이 설파하는 정의와 평화의 복음은 다수 신자는 물론 성직자와 선교사들에게마저 귀에 설고 심기에 불편하게 들리는 현실이다.

사회교리에 대한 교우들의 불편과 반발은 멀리는 트렌토 공의회 이후 성속이원론을 신자들에게 주입시켜온 교계의 과오에서도 기인한다.트렌토 교리서 4주의 기도해설 중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15)라는 구절에는 영혼이 이 죽을 육신 속에 있는 동안은 사방에서 육신과 세상과 사탄이 공격하느니... 우리 안에 거처하고 우리와 함께 사는 영혼의 이 원수들과 영구한 전쟁을 벌여야 하며 그것들과는 무슨 평화도, 무슨 휴전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문장으로 삼구영성(三仇靈性)이 공식화된다.

이런 영성이 문답형식으로 암기됨으로써 말씀이 이 되시어(verbum caro factum est)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고 할 만큼 영광스러운 육신에 대한 고마움도, 하느님께서는 세상(mundus)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는 구절처럼 하느님께 극진히 사랑받는 세상에 대한 사회적 생태적 책임도 지각할 여지도 주지 않았고, 스무 세기 암울한 교회사를 회고하면서도 악마란 한 번도 의심에 붙여지지 않은 진리라는 어느 지성인의 유머도 납득 못하는 우울한 근본주의 신앙을 배양해 왔다.

그런데 통계치를 어림잡아도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과 합쳐 유럽과 남북아메리카는 종래 방식의 복음 선교는 흡사 완료된 상황이라고 간주할 만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성공회에 대한 처분, 교황청 일치위원회 산하 유대교 위원회의 문서,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2016.10.31) 행사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참석 등으로 미루어 그리스도교 종파간의 개종노력은 현저하게 소극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럽과 남북아메리카마저 (주일 미사참례를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의 수가 급락하고 성직자 수도자의 고령화하고 있어 이 두 대륙을 염두에 두더라도 가톨릭교회는 새로운복음화를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는 이슬람과 백중세를 이루지만 아시아는 불과 3%대의 가톨릭 교세를 보이고 있다. 이슬람, 힌두교, 불교가 주로 신봉되는 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자칫하면 기성종교와의 충돌과 심지어 폭력유발을 초래하면서 (한국과 인도 등을 예외로 하면)종래의 복음 선교는 거의 정체되어 간다. 그간 아시아 주교단연합회가 고찰해온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에 입각해서 본다면 아시아 대륙 역시 힌두교, 불교, 이슬람에 의해서 이미 복음화된 곳으로 간주할 만하지 않는가?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셨고... 당신 몸인 교회를 구원의 보편 성사(Ecclesia ut universale salutis sacramentum)로 세우셨다[교회헌장 48])고 정위된 신앙 공동체는, 이러한 세계 종교현황에 당면하여 교회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화에 관한 사고, 곧 선교 영성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2.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

 

복음의 기쁨2012년 주교시노드(새로운 복음화)의 후속문서임을 전제한다면, 주교대의원들의 제안서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첨가하는 선교 영성, 전통적인 선교 방식과 병행하여, 주님의 기쁜 소식이 끼치는 참된 행복의 영성이다. 그 행복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아니 우선적으로) 전달되는 까닭에 자비의 선교이고, 가난해서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므로 정의의 선교이고, “평화는 정의의 열매(opus iustitiae pax)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원리에 따르므로 평화의 선교이다.

우선, 예수께서 설파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였고, 하느님 나라의 내용은 참된 행복하느님의 의로움이므로 복음의 기쁨을 펴는 선교에는 필히 이 근간이 담겨야 한다. 예수님은 구령(救靈)보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설교 주제로 삼으셨으므로 그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하는 사회복음은 일반 교리의 보충이나 부록이기보다는 복음의 본질이다. 또 나자렛 사람은 당신의 메시아 사명을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는 뜻으로 이해하였고, 그 사명을 공표하는 첫 마디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말씀이었음을 복음서는 입증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에도 복음(福音)이 과연 누구에게 기쁜 소식인가?’를 묻는다. 종교의 근간을 하느님과 내 영혼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만 두는 영성을 타파하고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를 좌우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칫 종교가 선량하고 경건한 크리스천 개인과 사회적으로 악랄한 배금주의자를 한 인간 안에 공존시키는 위험성을 폭로한다.

교회가 그리스도교 복음을 사회복음으로 전환함으로써 사회 변두리로 나가서 실생활 문제를 두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약자들을 편듦으로써 신빙성 있는입장을 취하고, 전 지구적 빈부격차와 정치적 불의와 환경 위기를 해결하자고 호소하는 그 매력을 갖고서 사람들을 신앙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선교정책은 우리가 자비와 정의로 복음화되어 세계를 자비와 정의로 대하면 세상은 저절로 복음화하리라는 신념을 깔고 있다.

선교 영성사회적 차원은 일찌감치 성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의 중심(重心) 혹은 본질을 사랑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다만 사사로운 사랑아닌 사회적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그런데 이 사회적 사랑을 구체적으로 정치라고 규정한 것은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첫 번 교황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Deus caritas est에서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정치적 사랑을 다시 강조하여 투표나 여론형성이나 NGO 혹은 정당 활동을 통해서 공동선 구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정치활동을 현교황은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라고 명명하였다.

복음의 기쁨이라는 사회교도권문서에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교회 전체에 촉구하는 시선의 확장은 이렇게 간추려진다. 복음의 기쁨은 입교한 신앙인들을 위한 구원복음(救援福音)내지 왜곡된 구령복음(救靈福音)에서 인류에게 건네지는 사회복음(社會福音)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미치는 생태복음(生態福音)또는 창조복음(創造福音)’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충직한 종교인에서 세상에 충직한 세계시민으로, 지구를 돌보는 인류로 처신해야 하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발전과 풍요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과 민족들에게 응급적으로 가난한 이를 돕는 자비에서 가난한 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자비로, 그리고 가난한 겨레들과 멸종하는 생물종들이 없이 하나뿐인 지구를 공동주택으로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비로 사랑의 폭을 확대하여야 한다.

 

3. 프란치스코 교황이 일깨우는, ‘사회복음케리그마

 

복음의 기쁨은 지난 백여 년간의 사회교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21세기 그리스도교의 존재의의를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먼저, 교회내 토론과 오해의 여지를 불식시켜 선교영성을 뚜렷하게 제시함으로써 교황의 사회교도권을 확실하게 정립하는 문서이다.

문서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 설교의 핵심에 따라서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 아버지의 나라를 여는 것이었고, 따라서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한다. 따라서 2012년 주교시노드의 제안서를 검토 수정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이복음의 기쁨에서 설파하는 새로운 복음화는 곧 하느님의 나라를 현존케 하는 사회복음의 전파를 가리키고, 그것을 문서 제4,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하였다. 그 문서에 담긴 교황의 사회교도권핵심은 176-183(‘I. 케리그마의 공동체적 사회적 반향’)에 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일차적으로는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동화하는 일이 요원하다는 노파심에서인지,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설교하는 케리그마의 요체를 새삼 설명할 필요를 느낀 듯하다. 문서 198항에서 구약과 신약 혹은 구세사의 첫 선포’, 곧 성부의 사랑, 성자의 육화, 성령의 성화, 곧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회적 구원을 가리킨다고, 복음의 핵심에서 복음화와 인간 증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인간에게 무한한 존엄을 부여하셨음을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마음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을 고귀하게 드높이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온갖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들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에 맞갖은 무한한 창의력을 지니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사의 매듭, 심지어 가장 복잡하고 가장 풀기 힘든 매듭을 푸는 법을 아십니다. 복음화는 또한 이러한 해방을 가져다주시는 성령의 활동에 협력하고자 노력합니다. [복음의 기쁨 178]

 

케리그마의 이런 이해로부터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선교 영성이 우러난다. 새삼 마태 25,40(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179]을 절정으로 하는 계시의 가르침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이자, 은총에 응답하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을 식별하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자,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며 교회의 본질 자체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표현[179]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케리그마에서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적이고, 이 본성에서 이웃을 향한 실질적인 사랑이 솟아나므로[179] 우리를 부르는 하느님 나라 세상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이므로,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선포와 삶은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180], 복음과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구체적인 인간 생활의 지속적 상호 작용을 고려하지 않는 복음화는 완전할 수 없다[181]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복음이 전파할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차원에 미치고...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omnes homines, totus homo]를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모든 피조물에게(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보편성을 띤다. 종말론적 나라를 찾는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희망이 언제나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신념에서다.[181]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피조계 전체에 확대시켜 생태적 회심생태적 영성을 진작시키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도 삼위일체와 피조물들의 상호 관계[238-240]를 규명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은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지구상의 생태계에서도 하나의 관계망임을 밝혀[240] 선교영성의 지평을 넓히고 있음을 유념할 만하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의 궁극적 원천이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는 분, 아드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이 땅과 결합시키셨고, 성령께서는 세계의 중심 깊이 현존하시면서 새로운 길에 영감과 힘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세상은 삼위께서 창조하셨습니다.”[238]

 

4. ‘프랜시스 충격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현대세계에 준 첫 번 충격(Francis’ Impact)은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해에 열린 세계주교시노드의 제안서에 따른 후속문서로 새로운 복음화(nova evangelizatio)를 주창하면서(사도적 권고 제2장과 제4장에서) 신앙인과 선교사들이 봉착한 오늘날 세상의 도전가운데 가장 큰 문제를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지적하였고, 이미 세계 경제를 장악한 그 체제를 사람 죽이는 경제라고 단정한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이처럼 국가 권력을 제압한 자본의 독재에 순응하면서 금융투기와 소비주의에 앞장서는 그리스도신자들을 가리켜 돈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라고 부르기를 주저 않는 대담함이다. 특기할만한 점은 신자유주의 경제인들이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낙수효과’(‘파이의 비유 혹은 물잔의 비유) 이론에 물이 가득차면 컵이 커집니다. 그게 반복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게 되는대기업과 다국적기업들의 마술을 지적하였다.

당연히 교회 안팎으로 반발이 표출되었다. 미국의 보수언론인(Rush Limbaugh) 같은 인물은 이 문서를 교황의 입에서 나온 순 마르크시즘으로 매도하고, ‘폭스뉴스같은 극우매체는 이 문서를 이라는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중 미국 가톨릭보수인사들도 교황을 거짓 예언자라고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류사회와 가톨릭신자들에게 생태영성으류 지구와 가난한 민족들을 보호하자는 회칙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을 반포하자마자(2015.5.24) 폭스뉴스로부터 지구상의 가장 위험한 인물(2015.6.18)로 지적되었다.

한국교회에서도 1980년대 이래로 강론대에서 사회복음에 입각한 강론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신자들의 귀에 거슬린다며 반발을 사는 것은 성속이원론에 바탕한 구령 영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의 사회적 차원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닦달하던 바리사이들의 도발(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요한 10,24)을 사목생활에서 체험하면서 사목자들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나고(루카 2,35), 여러 지역에서 실제로 사회복음이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는(루카 2,34) 현상을 경험하는 중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반격도 신랄하다. 사회복음을 설교하는 성직자들에게 반발하는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이 품어온 교회상을 교황은 불순한 형태의 그리스도교’, ‘껍데기뿐인 영성’, ‘속물근성의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 ‘환상에 빠진 교회로 명명한다.

 

정교분리 문제의 근본 해소

 

아는 바와 같이 중세부터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논쟁(敍任權論爭)’을 계기로 정치와 종교 관계를 논하는 정치철학적으로 논거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최종 목적론(最終目的論)에 힘입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전권이론(全權理論 plenitudo potestatis)’, 단테 알레기에리의 두 개의 궁극목적론, 그리고 지난 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정교분리(政敎分離)하에서 교회 측의 윤리적 도덕적 비판적 조언을 주장하는 결론을 내렸다.

복음의 기쁨이 매우 실효적인 사목문서임은 100여년에 걸쳐 나온 사회교리에도 불구하고 정교분리를 빙자하여 교계 안팎에서 첫 선포의 사회적 차원을 묵살하거나 심지어 훼방을 서슴지 않는 경향, ‘성직자의 사회 참여문제에 목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는 결정적이고 불가역적인 지침을 발표한데서 드러난다. 교황은 182항 내용을 183항에서 반복해야 할 만큼 교계와 기득권사회가 사회복음에 보일 반발을 실감하고 있었다.

교회의 목자는 여러 학문의 기여를 고려하여,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의 온전한 진보를 포함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182]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사회적 국가적 삶에 영향을 끼치지 말고, 국가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며,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콜카타의 데레사 복자의 메시지가 들리지 않도록 성당 안에 가두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183]

가톨릭신자들에게 깊이 각인된, 성속, 영육, 선악 이원론의 해소를 위해서는 이 두 항목을 두고 먼저 모든 주교와 사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거듭 호소한다. 이 메시지는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아주 단순 명료하여, 교회는 이를 상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토록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듭니까? 왜 그토록 분명한 것을 구름으로 가립니까? 정통 교리의 옹호자들은 가끔 수동적이라거나 특권층이라는 지탄을 받으며,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 공모자라는 비난을 받습니다.”[194]

신자들에게도 호소한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게 해 주신 이 아름다운 행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가는 인류 가족을 사랑합니다. 지구는 우리 공동의 집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183]

 

결론

 

이처럼 첫 회칙에서부터 신자유주의경제를 명시적으로 문제 삼는 그의 사회교도권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음과, 삼위일체의 신비에 담긴 사회교리를 수긍해야만 새로운 시대에 당면한 선교 영성을 함양해야 한다.

21세기는 평신도 시대이다. 적어도 복지국가가 개진하는 교육, 의료, 복지 사업은 전통적으로 교회기관이나 수도단체들이 운영하던 애덕 사업이었다. 정말 새 시대의 선교는 평신도 신앙인들이 저런 국민사도직을 수행하는 영성에서 복음의 기쁨이 우러나는 매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교황의 호소는 순진한 낭만주의가 아니다. 베르골리오 교황의 평생 사목경험에서,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아니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사회적 차원에서 그 매력이 주변사회와 (각자가 신봉하는 종교와 상관없이) 전 인류에게 발산되므로 교황은 누구보다도 평신도들에게 모든 공동체 안에서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적 친교의 빛나는 매력적인 증인이 되기를 당부한다.”[99]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문서를 마치면서 영으로 충만한 복음화란 성령께서 이끄시는 복음화입니다. 성령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영혼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화의 새 장에서 적절한 격려의 말을, 열정, 기쁨, 관대함, 담대한 용기, 한없는 사랑과 매력이 넘치는 삶과 같은 열의를 북돋우는 알맞은 말들을 찾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61]라는 호소를 남긴다.

 

근본주의 그리스도교들이 선동하고 수행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반격하고 있는 현금의 아랍전쟁을 가리켜 이미 야금야금 시작한 제3차 세계대전(la terza guerra mondiale a pezzi)” (2014.8.18)이라고 단정한 교황은 어떻게 하면 복음의 기쁨으로 인류사회와 제 민족을 화해시키고 치유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제안도 선교 영성에 담았다. 그 전쟁의 배후를 이루는 신자유주의 경제, 이미 세계를 장악한 경제 독재 하에서 가난한 사람이라 불리는 약자들이 하늘나라에 앞장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는 아예 폐기품으로 처리되고 교회 내에서마저 떨거지로 전락하는 파국을 막고자 교황은 그 배제와 차별에 대응하여 분배와 소통으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구체적 사목지침을 숙독하고 공감하여 21세기의 인류에게도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고 싶은 선교사라면,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특별한 자리[197-201]를 다시 음미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의 따뜻한 시선을 따라갈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