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희망』 23(2019 여름)  146~161


새 시대를 향한 새로운 복음화의 첫 걸음: ‘자비의 얼굴

 

[새로운 신심 및 종교현상을 통해 평신도자가 바라보는 새로운 복음화 ]

 

머리말: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화에서 시도하는 코페르니쿠스 전환’:

1. ‘새로운 복음화의 첫 걸음: ‘자비의 얼굴

2. 21세기는 평신도 시대: ‘사회복음의 사도들

3. ‘신자유주의라는 맘몬숭배와 근본주의 신앙

나가는 말: 두 가지 실천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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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화에서 시도하는 코페르니쿠스 전환 

 

베드로 사도의 제266대 후계자라는 직무에 선출되어(201.3.19) ‘프란치스코라는 거북한 이름을 채택한 베르골리오는 제12차 주교대의원총회(2011.10.7-28)최종문서를 받아들고[1]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고, 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실만한”(사도 2,47) ‘선교(宣敎)’를 궁리하다 이교도들의 복음선교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들의 복음화(福音化)’가 절실하다는 평소의 신념을 살려서, 자기 교황직의 백서에 해당하는,복음의 기쁨 Evangelii gaudium(2013.11.24)을 반포하였다. 사도적 권고가 어떤 점에서 21세기 가톨릭교회의 코페르니쿠스 전환이자 새로운 복음화의 정전이 되는가?[2]

[1]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열린, 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세속주의와 상대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입문성사들을 강화하자. 복음을 마치 종교시장에 놓인 상품처럼 새로운 판매 전략을 고안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불러주신 그러한 방법을 재발견하자.”는 폐막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러자 베네딕토16세는 폐막미사에서, 신앙인들이 먼저 하느님 신앙의 빛으로 영적 소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2] 성염의 유관 논문: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복음에 따른 제삼천년기 선교 영성’”, 새천년복음화연구소 논문집 제7[2017], 113~135; “교황청의 아시아복음화 정책과 중국교회의 현황”,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논문집 제23[2015], 357-369;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고 사랑으로 멸망한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소편 참빛이 세상에 왔다[2015], 61-87; “‘하느님 나라국가’”, 기쁨과희망사목연구소, 기쁨과 희망4[2009], 92-111;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이른 가톨릭교회의 타종교관”, 성염, 이태하, 최성수 공저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기독교와 종교적 관용[민지사 2001] 195-229;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관용에 있어서 아시아 교회의 공헌”, 신학전망 132[2001], 21-35.

통계치를 어림잡아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가 합쳐 25억에 달하는 그리스도교는,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종래의 복음 선교는 거의 완료된 상황이고, 아프리카는 이슬람과 백중세를 이루고, 불과 3%대의 가톨릭 교세를 보이는 아시아에서도 이슬람, 힌두교, 불교가 신봉되는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 개종이 사회적 고립과 때로는 죽음을 무릅쓰고 폭력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3]

[3] 2015년에 미국 Pew Research Center2010(인구 70)~2050(인구 93) 사이에 예측한 세계 주요종교 분포변화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 2130, 무슬림 1628, 힌두교 1014, 불교 55. 2014년도 바티칸 통계에 의하면, 세계 가톨릭인구는 12억으로, 아시아 1.5(인구의 3.2%: 개신교와 합쳐 9%), 남북아메리카 6(63.7%), 아프리카 1.8(19.3%), 유럽 3(40.1%), 오세아니아 0.1(26.1%).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에서 신자들의 신앙실천현황으로 미루어 로마가톨릭교회가 박물관의 미라로 위축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사목자로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톨릭교회가 20세기 중엽(1962-1965)에 인류의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1)로 삼겠다고 다짐한 이상,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로서의 사명이 호숫가의 낚시질이나 고깃배의 그물질로만 그치지 않고 갈릴래아 호수 전체를 사회복음으로 교화하는 가두리양식을 착상한 듯하다.

논자는 근래에 프란치스코 교종의 가정사목 교서 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특히 305, 각주 351)을 바티칸 고위성직자 및 신자 보수집단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교종의 사임까지 발설하는 커밍아웃이 교종의 새로운 복음화방식에 대한 근본주의 교우들과 성직자들의 반발이라는 견해를 피력코자 한다.

 

 

1. ‘새로운 복음화의 첫 걸음: ‘자비의 얼굴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종으로 선출되고서 Miserando atque eligendo라는 표어를 택했다.[4] 그가 로마에서 집전한 첫 번 성목요일 예식에서, 여자에다 죄수에다 이슬람의 발을 씻어준 다음 일어난 언론 비판에 당면하면서, 교회에 자비의 영성이 너무 빈약함을 절감하고서 교종직 초기 과업을 주님이 교회에 넘기신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드러내기로 작정한다. ‘사랑의 계명을 잊고 정화(淨化)의 영성에 젖은 성직자들과 신앙공동체로부터 폐기처분된영혼들의 슬픔과 고뇌가 전달되어 왔다.[5]

[4]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공식번역이 있지만 본인의 해명(베다 성인은...제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며 세리인... 마태오를 자비로운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저는 이를 제 문장에 넣었습니다.”: 자비의 얼굴, 8)에 따르면 가엾게 여겨서 선택하니라는 번역이 낫겠다.

[5] 프란치스코 교종은 유다스를 매고 가는 착한 목자를 묘사한 조각(프랑스 부르고뉴 베젤로 수도원 대성당 기둥꼭대기)을 좋아한다. “내 책상 뒤에는 저 기둥사진을 붙여 두었습니다. 내게 묵상할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망한 사람들을 도와야만 합니다. 참된 부끄러움의 길을 발견하도록, 유다스와 같은 종말이 오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교종 프란치스코, 우리 아버지(성염 역, 한마당 2017) 92.

교종의 첫 회칙에서 지적한, “경제사회가 폐기처분한 가난한 사람들[6]이 교회에서도 도덕적으로 가장 가난한 이들’, 교회법과 선량한 신도들에 의해서 죄인으로 폐기처분된 이들이 있음을 마음 아파하던 사목자로서 그들에게 자비의 시선을 보내며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교회적 통합을 호소하기로 나섰다.

[6] 이제 저는 역사의 이 시대에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중대한 두 문제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 문제들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믿기에... 첫째는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이고 둘째는 평화와 사회적 대화입니다.(복음의 기쁨, 185) 정통성의 핵심 기준은 가난한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원칙은 새로운 자기중심적 이교가 늘고 있는 오늘날에 하나의 표지가 있습니다. ,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입니다.”(복음의 기쁨, 195)

 

 

그는 곧 행동에 나섰다. 복음의 기쁨의 주제어인 새로운 복음화를 우선 가정 사목과 복음화로 정하고 세계주교대의원 임시총회를 열고서 가장 시급한 자비의 문제 곧 문제 가정의 사목’(이혼하고 재혼한 가톨릭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염두에 두기로 작정한다.[7] 이런 사목이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복음화를 좌우하는 시금석이자 자기의 교종직에 반대 받는 표징이 되리라는 예감도 있었다.[8] 과연 교종의 사목지침이 드러나자 앞으로 교회사에 수치스럽게 기억될 자비 논쟁이 터졌고 최근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임을 요구하는 교황이단이라는 논쟁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7] “오는 10월 바티칸에서 개최될... ‘가정 사목과 복음화를 주제로 논의하고자 소집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임시 총회입니다. 내년에도 마찬가지로 가정을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 총회... 2015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세계가정대회.... 이런 행사들을 통하여 교회가 참다운 식별의 여정을 시작하고, 복음에서 나오는 빛과 힘으로 가정들이 현재 당면한 도전을 잘 이겨 낼 수 있게 돕는 데에 필요한 사목적 방법을 채택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단절과 고독과 슬픔을 극복하게 해 주는 메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십니다. 제가 진리와 사랑으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저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교종 프란치스코, ‘가정들에 보내는 서한’: 2014.2.2)

[8] ‘아버지의 자비이신 분의 등장이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고 자비라는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짐(마태 21,44)을 예수님도 실감하셨다.

 

이 논쟁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의중을 간파한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론[9] 신앙교리성 장관을 비롯한 추기경 5인과 유수신학자 4인이 공저를 발간해서 자비가 계명을 이길 수 없습니다!”[10]라고 선언한데서 불붙여진다.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애매함이 없이 이혼을 금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혼에 뒤따른 사회혼인은 일종의 간통이며, 윤리적으로 영성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교회가 발명한 규율이 아니고 신법을 구성하며 교회가 바꿀 수 없다. 카스퍼 추기경이 주장하는, 이혼에 대한 자비로운해결방안을 언급하는 일은 성경에 어긋난다. (이혼과 영성체 묵인은) 남용이 없게 보장하기보다 뒤따를만한 모범으로 간주될 것이다.”[11]

[9] 카스퍼 추기경(Walter Kasper)자비. 복음의 기본개념[2012](최용호역, 가톨릭출판사 2015) 가정에 관한 복음(2014)(이진수 역, 바오로딸 2016) 참조.

[10] 정확하게는, “자비가 계명으로부터의 면제가 아닙니다 misericordia non è dispensa dai comandamenti”: in Robert Dodaro ed., Remaining in the Truth of Christ: Marriage and Communion in the Catholic Church (2014).

[11] Corriere della Sera 2014.9.17일자 기사 “’No alla comunione ai divorziati’. Cinque cardinali contro le aperture”, di M. Antonietta Calabrò에서 재인용.

그런 반발이 세계주교대의원 임시총회의 최종보고서(2014.10.18)에도 반영되자, 교종은 교서 자비의 얼굴 Misericordiae vultus(2015.4.11)자비의 특별희년’ (2015.12.8~2016.11.20)까지 선포하여 성직자들과 신자들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라!”고 호소하여 자비의 영성을 심어주고자 노력하였다.[12] 그동안 온유한 재판관이신 주 예수님(2015.8.15)라는 교서를 반포하여 혼인 무효 선언 소송 사건들에 관한 교회법전 규범들의 개정을 강행하여 이혼자들의 양심적 짐을 덜어 주고자 했다.

[12] 하느님의 본성, 온갖 반대를 물리치시고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본능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얼굴, 9]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도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20]

 

이듬 해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 가정의 소명과 사명이라는 주제로 다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4차 정기총회가 소집되고, ‘자비의 특별희년을 맞은 대의원 주교들이 프란치스코 교종의 의중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감돌자 시노드 개막일(2015.10.5)“11명 시노드 추기경 공개서한이라는 문건이 공개되었다.[13] 정기 시노드의 의사절차가 시노드의 전통적 정신과 목적에 부적합하게도, 심각한 사목적 문제를 대면하고 혼인과 가정의 품위를 강화하려고 기획된 시노드가 이혼하고 사회적으로 재혼한 사람들을 위한 영성체에 관한 신학적 교의적 문제에 의해서 좌우될 우려가 있다.는 요지였다.[14]

[13] 서명 추기경 명단: 재무원장 G. Pell, 신앙교리성장관 G. Müller, 경신성장관 R. Sarah, 토론토의 Th. Collins; 볼로냐의 C. Caffarra. 뉴욕의 T. Dolan, 우트렉트의 W. Eijk, 더반의 W. Napier, 카라카스의 J. Savino(11명 중 밀라노의 A. Scola, 파리의 A. Vingt-Trois는 서명을 철회했다).

[14] 교종은 총회 개막식에서 자기한테 직접 전달된 이 서한에 이튿날(2015.10.6) 산타마르타 아침미사 강론에서 답변했다: 시노드 의사절차는 준비위원회가 확정한 대로입니다. 혼인에 관한 가톨릭 교리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시노드의 유일한 문제가 이혼자의 영성체의 문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으며 교부들이 시노드의 향방을 이것으로 축소하지 않기 바랍니다.”

 

여하튼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총회는 최종보고서’[2015.10.24]를 채택했고 교종은 후속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 Amoris laetitia[2016.3.19]을 발표하였다. 세계교회가 흥미를 기울이던 자비의 문제를 교종은 문서 말미에 이렇게 간추렸다.

이혼하고 새로운 결합을 맺은 이들이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다고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파문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파문당한 것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언제나 교회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주의 깊은 식별이 필요하고, 깊은 존중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차별을 느끼도록 하는 언행을 삼가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 243)

이러한 이유로 목자는 도덕률을, 마치 사람들의 삶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나 되는 듯이, ‘비정상적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단순히 적용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모세의 의자에 앉아 때로는 거만하고 피상적으로 어려운 문제들과 상처 입은 가정들을 단죄하려고 교회의 가르침 뒤에 숨는 것이 익숙한 이의 닫힌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황이나 정상을 참작하여, 주관적으로 죄가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죄가 아닌 차원의 죄의 객관적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15]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고 사랑하며 은총과 사랑의 삶 안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305)

[15] 동문서 각주 351’: “어떠한 경우에, 이는 성사의 도움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제들에게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성찬례는 완전한 이들을 위한 보상이 아니라 나약한 이들을 위한 영약이며 양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비의 특별희년을 폐막하는 문서[2016.11.20] 자비와 비참 Misericordia et misera으로 교종은 다시 한 번 교회 사목자들에게 호소하였다. “자비는 교회 생활에 단순히 삽입된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삶입니다.[1] 우리 공동체가 새 복음화를 위한 활동에서 힘과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우리가 실천하여야 하는 사목 쇄신이 자비의 새롭게 하는 힘을 날마다 나타내야 합니다.[5] [신자들의] 화해 요청과 하느님의 용서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저는 사제 직무의 효력으로 낙태의 죄를 사면해 주는 권한을 앞으로도 모든 사제에게 부여합니다.[12] 가정의 위기를 포함한 많은 위기... 자주 고통과 배신과 고독으로 중단됩니다. 모든 이가 어떠한 상황에서 살아가든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자기를 실제로 환대하셨다고 느껴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14]”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근본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일부 성직자 및 평신도 학자들 명의로 프란치스코 교종의 이단사상 전파를 자녀로서 바로잡기(Correctio Filialis de haeresibus propagatis)”라는 문서까지 발표되었다(2017.9.24).[16] 교황의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에 담긴 7가지 이단사상을 지적하겠다... 교회가 간통을 착실한 가톨릭신자가 되는 일과 공존한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주의’(하느님이 교회에 결정적 진리를 위탁하셨음을 부인하는)와 마르틴 루터에게 경도되어 있다!”[17]는 취지였다.

[16]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도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근 저서들: M. Colonna, The Dictator Pope: The Inside Story of the Francis Papacy(독재 교황: 2018) ; Ph. Lawler, Lost Shepherd: How Pope Francis is Misleading His Flock (길 잃은 목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기 양떼를 어떻게 오도하고 있는가?: 2018); R. Douthat, To Change the Church: Pope Francis and the Future of Catholicism (교회를 바꾸다: 2018); K. Keating, The Francis Feud: Why and How Conservative Catholics Squabble about Pope Francis (프란치스코 분쟁: 2018); G. Neumayr, The Political Pope: How Pope Francis Is Delighting the Liberal Left and Abandoning Conservatives (정치교황: 2017); R. Cardinal Sarah, The Power of Silence: Against the Dictatorship of Noise (침묵의 권력: 2017); Idem, God or Nothing: A Conversation on Faith (하느님 아니면 무: 2015); R. Cardinal Burke, Hope for the World: To Unite All Things in Christ (세상을 위한 희망: 2016); W. Aymans (Editor), Eleven Cardinals Speak on Marriage and the Family (열한 명 추기경이 혼인과 가정에 관해서 말하다: 2015); R. Dodaro ed., Remaining in the Truth of Christ: Marriage and Communion in the Catholic Church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머물기: 가톨릭교회 안에서 혼인과 영성체: 2014).

[17] “최고좌는 아무한테서도 재판받지 아니한다.”(교회법전 제1404)에는 성벨라르미노의 논지까지 동원되었다: 이단자로 드러나는 교종은 자동적으로 교종이기를 중단하고 통치하는 역할을 중단한다. 그리스도신자요 교회의 구성원임도 중단한다. 교회로부터 재판받고 처벌당할 수 있다. 이단자로 드러나면 모든 재치권을 즉각 상실한다는 것이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프란치스코가 이단자이므로 더 이상 교종이 아니라고, ‘그러면 누가 교회의 통치자냐?’에는 베네딕토16라는 대답마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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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1세기는 평신도 시대: ‘사회복음의 사도들

 

21세기는 평신도 시대.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한 laicisation(고중세 정치 실험이 실패하였으므로 귀족 및 성직 계급이 사회를 영도할 것이 아니라 평민[평신도]들이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을 주도하겠다는 주창)의 물결은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 실험, 서구 국가들의 사회당 집권, 남미와 동남아시아의 민주화투쟁을 거치면서 지구적 차원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중이며, 교육, 의료, 복지 등을 정부가 책임짐으로써, 서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제도교회와 수도회들이 감당하던 분야들이 정부의 국민사도직으로 전환되었다. 더구나 사제와 수도자의 성소급감은 평신도들을 사회복음으로 성숙시켜 저 국민사도직을 어떤 정신으로 수행할 것인지[18] 계도하는, 이전에 없던 복음화를 시급하게 요청하는 중이다.

[18] cuius spiritus estis?: 옛불가타판 성경(루카 9,52-56)에는, 사마리아인 마을이 예수님 일행에 숙박을 허용하지 않아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를 너희는 알지 못하고 있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나온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기조어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을 최초로 실천 영역에 적용한, 세계주교대의원총회(1971)[19]세계정의(De iustitia in mundo)라는 문서로 정의구현이 곧 복음선포다!”는 등식을 확립하였다. “정의를 위한 행동과 세계 개혁 활동에의 참여는 복음 선포의 본질적 구성요소임이 명백하고(세계정의, 6) 신자들은 현대 세계 안에서 정의를 수호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성취한다.”(50)

[19] 실제로는 제2차 총회. 1차 세계주교대의원총회(1967)는 후속문서 없이 교회법 개정과 가톨릭신학위원회 결성을 결정하는 일로 그쳤다.

그리고 교회가 부여받은 정의구현이라는 복음선포는 일차적으로 평신도에게 위임된다.[20]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서 이 임무는 목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로 확대된다. “확실히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목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183)

[20]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일할 직접적인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경제, 사회, 입법, 행정, 문화 등 수없이 많은 여러 분야에서 조직적으로 제도적으로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참여 의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베네딕토 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9).

 

복음화의 정치적 차원에 관한 논지는 매우 단순하다. “인간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이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간다." 또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말은[21] 사랑이 일개 덕목이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실체임을 명시한다.[22] 이 착안은 인간은 사랑으로 구원받고 사랑으로 멸망한다는 명제로 발전하며, 이 명제를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으로 멸망하고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으로 구원 받는다고 정립하였다.[23]

[21] 전자도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성염 역주 경세원 2016] 13.9.10), 후자도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13.20.26)의 말이다.

[22] 사랑은 실체성을 갖는다. 형제애가 하느님으로부터 옴은 물론이려니와 바로 하느님이기도 하다.”(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성염 역주, 분도 2016] 6,8,12.)

[23]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순수하고 하나는 불순하다. 하나는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 복속하고 하나는 하느님께 반역한다. 하나는 자기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도 바라지만 하나는 남을 자기에게 복종시키기 바란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Augustinus, De Genesi ad litteram 11.15.20).

 

나아가서 인간과 인류를 구원하는 이 사회적 사랑이란 다름 아닌 정치(政治)’라고 규정한 인물은 교종 베네딕토 16세였다. “교회의 고유한 사랑 실천을 국가 활동과 혼동하여서는 안 되지만, 평신도들의 삶 전체와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의 정치 활동이 언제나 사랑에 젖어 들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다, 29) 프란치스코 교종은 정치적 사랑을 다시 강조하여[24]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사랑의 가장 고결한 형태입니다.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복음의 기쁨, 205)라고 명시하였다.

[24] 그리스도교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주일마다 역사적으로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본티오 빌라도 통치하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음을 신앙고백으로 염송하듯이, 정치는 인간을 구원하는 사회적 사랑이 실천되는 거의 유일한 기회, 유일한 제도이다.

 

④ 「복음의 기쁨의 새로움은 제4장의 제목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176-183)에 있다.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저의 관심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차원을 올바로 다루지 않으면 복음화 사명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계속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176)[25] 그리고 복음의 사회적 차원은 곧 구원의 사회적 차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상황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파고들어가려 하십니다. 복음의 핵심에서 우리는 복음화와 인간증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178)

[25]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중에 한국주교단에도 재래식 선교의 한계를 두고 이렇게 조언하였다(2014.8.14.): “순수한 영적 단체가 되겠다는 교회는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이 회칙이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1891) 이래로 지난 100년의 사회교리를 총정리하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여 21세기 그리스도교의 존재의의를 규정한 교도권 문서인 까닭이 다음 선언에 나온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사회적 국가적 삶에 영향을 끼치지 말고, 국가 제도의 안녕에 관심을 갖지 말며,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83)

 

특히 영육이원론자들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는 구절을 정교분리의 보도처럼 악용하면서, 종교의 정치문제 비판을 저지해왔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사랑의 실천이 평신도의 주요 임무라는 이론을 내세워, 교계와 성직자의 정치적 발언과 활동을 봉쇄하려는 시도를 프란치스코 교종은 단호하게 분쇄하였다. 성직자의 정치적 비판을 저지하려는 모든 노력을 교종은 무참한 불의의 상황과 그 불의를 지속시키는 정치 체제와 관련한 공모( 194)라고 지적하면서, 그간 교회 안팎으로 논쟁 많던 성직자의 사회참여에 관해서 결정적인 교도권을 행사하였다.

교회의 목자는 여러 학문의 기여를 고려하여,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에 대한 의사를 표명할 권리가 있습니다. 복음화 사명은 모든 인간의 온전한 진보를 포함하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만 종교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특히 사회 질서와 공동선 추구와 관련된삶의 모든 다양한 분야와 측면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182)

 

 

3. ‘신자유주의라는 맘몬숭배와 근본주의 신앙

 

왜 스무 세기를 두고 그리스도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는가? 왜 최근 전 세계 유수언론이 유독 가톨릭성직자를 대상으로 소아성애혹은 성적 이탈을 대대적으로 폭로하며 보도하는가? 다수 가톨릭신자들이 제단에서 울려나오는 사회복음에 어째서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반발하는가? 어쩌다 주미교황대사를 지낸 비가노 대주교가 프란치스코 교종의 사임을 주장하면서 보수 가톨릭매체들의 동조를 선동하는가?

 

최근의 여러 현상에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음에 대한 맘몬의 저항과 반발이 자리잡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현대세계에 준 첫 번 충격(Francis’ Impact), 그의 교종직 기조문서 복음의 기쁨에서 21세기의 인류와 가톨릭교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도전을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지적하였고, 세계 경제를 이미 거의 다 장악한 그 체제를 살인경제(殺人經濟)’라고 단정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이처럼 국가 권력을 제압한 자본의 독재에 순응하면서 금융투기와 소비주의에 앞장서는 그리스도신자들을 가리켜 돈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라고 부르기를 주저 않는 대담함이다.[26]

[26] 20148월 교종의 방한을 앞두고 특히 교회언론이 프란치스코의 이미지보다 그의 가르침을 홍보할 것을 교황청이 요구해왔지만 복음의 기쁨의 이 핵심을 직접 다룬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유일한 예외: http://www.ktv.go.kr/content/view?content_id=488605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분명한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제는 사람을 죽일 뿐입니다.[27] 나이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 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인간을 사용하다가 그냥 버리는 소모품[폐기품]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리는문화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배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배척된 이들은 더 이상 사회의 최하층이나 주변인이나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착취된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폐기품]입니다.” (53) 또한 신앙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온갖 침해는 하느님의 응징을 초래하는 것이며, 그 개인의 창조주에 대한 범죄입니다.” (213)

[27] “복음의 기쁨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사람을 죽이는 경제라는 표현이었습니다.”라는 질문에 프란치스코 교종의 답변: 나는 현재의 상황을 표현하고 싶었고, 유일하게 인용한 경제개념은 자유로운 시장의 자발성에 근거한 경제성장의 낙수효과인데, 이것은 경제 스스로 균형과 사회적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 전제는 컵의 물이 가득 차면 아래로 떨어지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이 가득차면 마술처럼 컵이 커집니다. 그게 반복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인용한 유일한 이론입니다.”(A.TornielliG.Galeazzi, 이놈의 경제가 사람잡네최우혁 역, 갈라파고스 2016, 245).

 

그리고 살인하는 이 우상숭배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침묵의 공모라고 단언하면서 과감하게 배격한다.[28] 바로 이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교회메시지의 내적 일관성과 관련되므로,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전적으로 솔직하고자 합니다.”[29](214) ‘사회복음을 설교하는 성직자들과 이를 실천하는 교우들에 대한 일부 교계인사들과 근본주의 신자들의 공격을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차없이 환상에 빠진 교회’, 불순한 형태의 그리스도교,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 영적 세속성’, ‘속물근성의 영성이라고 부른다.[30]

[28] “‘네가 날마다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느냐?’ 아무 일도 없는 척하지 맙시다. 생각보다 더 많은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는 모든 이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네 도시에는 이 악명 높은 범죄 망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자신의 편의로 침묵의 공모를 하여 이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 211)

[29] “어떠한 교회 공동체든, 가난한 이들이 품위 있게 살고 아무도 배척당하지 않도록, 창의적인 노력이나 실질적인 협력을 하지 않고 안주할 때, 아무리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공동체 와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 공동체는, 종교 실천이나 무익한 모임이나 공허한 말로 위장한 영적 세속성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207)

[30] 복음의 기쁨96-98항 참조: “이러한 불순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다운 복음화의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94] 음험한 세속성, 영적 세속성... 강생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호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95] 끝없는 환상에 빠져 우리 백성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96] 그들의 형제자매의 예언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계속 들추어내며 겉치레에 집착합니다. 껍데기뿐인 영성과 사목으로 치장한 세속적인 교회[97] 권력과 특권과 쾌락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며 이에 방해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투는[98], 실제로 마녀 사냥처럼 보이는 탄압마저 용인하는 것을 볼 때에 저는 언제나 가슴이 미어집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복음화하겠다는 것입니까?”[100]

 

당연히 교회 안팎으로 반발이 예상되었다. 미국의 보수언론인(Rush Limbaugh) 같은 인물은 복음의 기쁨교종의 입에서 나온 순 마르크시즘으로 매도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미 중 미국 가톨릭보수인사들도 교종을 거짓 예언자라고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인류사회와 가톨릭신자들에게 생태영성으로 하나뿐인 지구와 가난한 민족들을 보호하자는 회칙 찬미받으소서 Laudato si’을 반포하자마자(2015.5.24) 교종은 폭스뉴스로부터 지구상의 가장 위험한 인물로 지적되었다.

 

 

나가는 말: 두 가지 실천적 고찰 


교회가 지녀야 할 자비의 얼굴율법의 철가면을 씌우는 시류에는 세 가지 허점이 보인다. 첫째, 교종은 새로운 복음화의 열쇠로 너희는 하느님을 섬기면서 또 맘몬을 섬길 수는 없다”(non potestis Deo servire et mammonae :루카 16,13)는 말씀을 내세워(공관복음서의 하느님 나라설교 자리에 요한복음서는 성전 정화를 배치한다), 교회 기관에서도, 신자들의 삶에서도 하느님과 맘몬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감행하려는데 오늘도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줄 수 있소?”(요한2,18)라고 시비하면서 하느님과 맘몬을 두 필의 말로 부리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이치를 너무 일찍 터득했고 그 편리함이 너무 몸에 배어 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더러 자비와 경제정의라는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여 복음의 기쁨을 되찾자는 목자의 호소를 비웃으면서 저들은 정결례를 범하는 교우들을 폐기물로 간주하는 엘리트 영성을 견지하겠다고 우기고 있다. 셋째, 교도권의 사목적배려(동성애자 포용, 낙태죄 사죄, 이혼 및 재혼자의 영성체 허용)에 저들은 교리상의 진리라면서 최고 사목자에게까지 이단자라는 낙인을 서슴없이 친다.[31] 계명 준수가 아니라 이미 회복할 수 없게 계명을 깨뜨린 사람들을 절망하지 않게 교회 안에 포옹하는 아버지의 자비가 감히 시비에 붙여지다니.

[31] 교황청은 922일 중국과 주교 임명에 관한 잠정 협정에 서명하고 교황청 미인가 중국주교들을 공식으로 임명했다. 파롤린 국무원장은 이 조처는 13억 중국인들에게 복음선포의 기회를 찾는 사목적인 목적을 가진 협정이며 가톨릭교회를 팔아넘기는 것이라는 비판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피상적으로라도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한두 가지 지적하여 평범한 평신도들에게 자비 논쟁과 전 세계 언론에 비치는 성직자 성추행을 올바로 해석하게 도우려면, 교회가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식탁(食卓)을 성사화(聖事化)하지 못해서, 신자 부부의 침상(寢牀)을 성사화하지 못했음을 숙지할 만하다.

 

성찬은 사회적 사랑의 학교’: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주님의] 계약의 피”(마태 26,28)를 두고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1코린 11,27)는 사도의 경고가 있다. 그리고 그 경고가 가리키는 모령성체(冒領聖體),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하는(1코린 11,21) 행태, 사회적 사랑의 위반을 가리킨다. 이렇게 위대한 사회적 사랑의 학교를 외면하면, 영성체 전 신자들의 양심성찰이 미사참례를 궐한 죄‘6.9 계명을 범한 죄만을 떠올리는 성체신심이 재혼자들의 영성체 반발을 초래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1코린 11,29: 공동번역)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경고에 따르면,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성경’)는 주님 말씀을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로 번역한 공동번역’(1971년부터 2005년까지 35년간 가톨릭 미사통상문으로 쓰였다)은 미사참례와 양심가책 없는 영성체로 그리스도를 따름(sequela Christi)을 완료했다는 안도감을 제공해왔다. 공관복음 세 편에 다 나오는 건립성체 요한복음이 왜 삭제해 버렸는지, 더구나 빵의 기적 후 생명의 빵을 말씀하신 장편의 설교(요한 6,22-59)에 맞춘다면 우리의 성체신심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데 사도는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사랑의 계명으로 대체했는지 숙고해야만 성찬을 두고 사물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 Graham Green)을 짚을 수 있다.

말씀이 살이 되신육화(肉化)의 신비가 인간 존엄성의 바탕이 되었음을 깨닫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화를 한층 더 깊이 낮추셔서 빵과 포도주로 물화(物化)하심으로써 물질의 심장’(The Heart of the Matter)까지 들어가신 신비로 알아듣는다면 성찬의 성사는 우리를 프란치스코 교종의 생태 영성에까지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로스)의 기쁨만이 아가페와 카리타스로 우리를 인도한다: 21세기는 pan-sexism 사회다. 우리 주변의 모든 그림과 조각, 사진과 광고, 포르노와 몰카, ‘미투운동을 유발한 사고들에서 사실상 드러나는 것은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부르짖었다, 아담의 감격과 환성이다. 이렇게 남녀간 매력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풀지 못하고 하느님이 가장 정성들여 창조하신 제도이므로 그 모든 매력과 포옹과 섹스가 성사(聖事)로 성화되어야 마땅하다.

살아있는 육체가 인간(gloria dei homo vivens)임에도 일찍이 교회에 침투한 영육이원론은 피조계, 세상, 육신, 음식, 성애를 부정한 어둠의 영역으로 천시하는 바람에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제외한) 평신도들은 성을 하느님 아닌 맘몬이 제공한 선물처럼 간주하여 죄되는 것으로 몰래 향락하는 버릇이 들었다.[32] 금욕주의와 청교도주의, 여성혐오 내지 여성공포가 교회 제도와 영성에 깊숙하게 뿌리내렸고, 성애를 노래한 유일한 성경 아가 Canticum canticorum: ‘노래 중의 노래마저 하느님과 영혼의 영적 사랑이라는 해석을 힘입어서만 성서 정전으로 살아남을 정도였다. 가톨릭신자 99.99%에게는 성사화된 에로스만이 아가페로, 카리타스로 승화할 유일무이한 발판이라는 사실은 베네딕토 16세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005) 회칙이 가르쳤다.

[32] 인간이 성욕을 통해서 태어나고 성욕의 악 때문에 인간이 원죄에 물든다(Augustinus, De nuptiis et concupiscentia 1,1). 부부행위는 자녀 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 쾌락 자체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혼인 때문에 비록 용서받을만한 죄이기는 하지만(Augustinus, Contra Iualianum 4,3,33).

 

가톨릭교회의 사회복음신자유주의 경제’,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맘몬을 살인자라고 공격하자 맘몬 숭배자들(하느님이 맡기신 재화의 청지기로 자처한다)은 자기들이 섬겨온 우상의 정체가 폭로되는데 당연히 반발하고 반격을 도모한다.[33] 그들은 인간들이 가장 은밀하게 만끽하는 성애,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장 취약점인 독신생활의 금욕이 제도교회의 아킬레스건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던 맘몬의 하수인들이 10여년전부터 교회의 이 상처를 공격하는데 총동원되기 시작하였고[34] 앞으로도 개인 단위, 교구 단위, 국가 단위의 대대적인 뉴스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35] 주미교황대사직을 지낸 비가노 대주교의 성명서가 바티칸을 동성애자들의 소굴로 고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교종의 사임까지 요구할 때에 누구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33] 프란치스코 교종의 격한 발언은 매우 성서적이다. 요한 8,44-45 참조: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34] 벨기에 주교단 연금사건은 그 효시였다. 벨기에 주교단이 메켈렌-브뤼셀 대교구 교구청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던 중. 벨기에 경찰이의 급습하여 2010.6.24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교들을 연금시키고 교구청을 수색하여 500여건의 문서를 압수하고 대성당 지하묘지의 묘소를 파괴하였다. 벨기에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 조사명목이었다.

[35] 최근 독일에서 1946년부터 2014년까지 약 70여 년간 성범죄를 저지른 성직자 숫자가 1,670(전체 성직자의 4.4%)에 달하며 3,677명의 아동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뉴스, 미국 여러 교구에서 약 70년 동안 300여명 성직자들(3.7%)1000여명 아동을 성학대한 뉴스 약 300명의 사제가 1000건을 저질렀다는 뉴스, 네덜란드 교회도 주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자체조사를 통해서 70년간 네덜란드 가톨릭교회에서 발생한 성범죄를 20여명 추기경 및 주교들이 은폐했다는 뉴스, 호주와 아일랜드에서도 사정당국의 거국적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 추기경들이 입건되고 교황대사들이 성직을 면직당하고 교구장들이 사임 하는 사태, 한국 교구인사에 수시로 나타나는 정직면직공고를 꾸준히 대면해야 처지다.

그래도 교종은 근본주의자들의 자비논쟁을 감수하며, 하느님의 적을 정확하게 맘몬으로 지적하면서 전투를 계속할 것이다. 서구세계의 난민 배척, 빈곤국을 상대로 한 부강국 고리대금, 아랍세계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그리스도교가 증오와 전쟁의 종교로 추락하는 현상을 비난하는 프란치스코의 예언직을 잠재우려고 내부에서는 자비논쟁’, 외부에서는 성직자 성추행 폭로[36]가 도전해오는 전략이 간파된다. 맘몬의 가혹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가톨릭교회는 유일하게 인간적인 경제를 설득하고 있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에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주창하는 곳이어서 인도주의에 공감하는 세계 지성인들은 여전히 바티칸으로 희망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36] 피해자들이 고발하고 실제로 저질러진 성범죄에는, 비록 용의자들 대부분이 사망했거나 국법상의 공소시효가 지났더라도 교회로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집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의 집에 너무 집중한 것 같다”(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교구의 뤽 라벨(Luc Ravel) 대주교)는 심경으로 정직하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교회가 정화됨으로써 이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한다

2000년 교회는 성녀이자 창녀의 두 얼굴을 보여주었고, 인류구원의 거룩한 은총을 담은 그릇(depositum sacramenti)은 그릇을 만지는 사람들의 죄과로 그 거죽에 오물이 덕지덕지하지만, 우리 얼굴에서 비쳐나오는 복음의 기쁨만이 우리가 절하는 대상이 저 그릇이 아니고 그릇에 담긴 성수임을 보여준다고 교종은 설파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