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화해의 영성

(영성생활 57호 [2019.] ‘남북평화길내기 II’), 42~50


 


   70년 냉전을 극복하면서 남북화해를 꿈꾸던 대한민국 국민 거의 전부, 아니 한반도 북핵사태를 지켜보며 마음 졸이던 인류 전체에게 깊은 장탄식을 자아내게 만든 하노이의 228! 그 동안 정신대’, ‘세월호’, ‘강정과 밀양’, ‘용산과 성주’, ‘쌍용과 콜텍그리고 2016년 겨울의 촛불시위에 기도와 참여로 함께하던 수도자들과 신자들이라면, 요즘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심경으로 기도하고 있으리라. 


 “주님, 당신 백성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에게 영원히 분노하지 마십시오. 저희를 내리누르신 그 날수만큼, 저희가 불행을 겪었던 그 햇수만큼 저희를 기쁘게 하소서.”(시편 89,15)


  프란치스코 교종의 첫 교서 복음의 기쁨사랑’, ‘대자대비’, ‘’, ‘살람(평화)’을 외치는 세계의 도덕적인 대종교들이 어떻게 방방곡곡에서 증오와 전쟁과 거짓을 선동하고 감행하는 비도덕적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길러내는지 그 근거를 파헤친다. 그 문서에서 하느님과 함께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원인이라고, 그 우상숭배가 21세기 지구상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살인 경제로 드러나고 있다며, 그 탐욕으로 야금야금 제3차 세계대전이 이미 시작됐다는 불길한 경고까지 내놓는다. 최근까지 열 번쯤 되풀이하신 교종의 이 발언이 처음 나온 것은 하필 2014818, 서울을 떠난 비행기에서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100주년을 맞은 3.1절 기념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다.”


  가슴 아픈 이 상흔은 교회 인사들의 입에서도 간간이 나온다. 남한 사회에서 진보단체와 진보정권의 신자들, 심지어 교회의 사회교리를 실천에 옮기는 성직자 수도자들마저도 동료들에게서 빨갱이에 가까운 욕설을 들어왔다. 예를 들어, 근로자의 결사, 집회, 파업은 교회 교도권이 옹호하는 노동3권이건만 정작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면 “6.25를 방불케 했던 악몽 같은 나날, 우매한 인간들에게 쏟은 사랑의 허탈감, 아껴준 마음들로부터의 배신을 탄식하는 발언이 나온다(1988년 병원의 파업을 겪은 어느 수도자의 소감). 전교조라는 노동조합도 가톨릭교회에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어서 2006노무현 정부가 사학재단이사회에 외부이사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을 시도하자 이렇게 사립학교를 옥죄는 조처는 공산주의다. 전교조 같은 단체가 존재하는 한 우리로서는 저런 개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언한 성직자들이 있었다.


  2019년에 와서도 보수야당 국회의원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모욕하고 있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노태우씨를 1996년에 사법에 넘기자 성직자 한 분의 인터뷰가 월간조선에 실렸다. “광주사건은 민란이었다. 남북대치 상황에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겠는가?” “정의를 구실로 민중이 분노하고 있고 역사적으로 사람의 분노를 정치에 이용하는 것이 계급투쟁이고 공산주의 아닌가?” “7000, 4000억 부정축재를 따지는데, 죄인 아닌 사람 없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가?”

 

용서의 영성

  1945년의 얄타회담에서 미소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한 뒤 150여명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천주교신자라는 이유만으로북한에서 학살당했고, 북한의 교구들은 폐쇄되고 성당건물들이 몰수당했다. 북한정권의 종교박해를 피해서 월남한 교우들과 성직자들에게는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잔존하여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도 극복하기 힘들었음이 방금 예거한 발언에서 드러난다.


  6.25 전쟁의 상처와 공산정권의 체험에서 생긴 상처는 성좌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필자가 주교황청 한국대사로 부임하여 신임장을 제정하던 날(2003.7.4), 지금은 성인으로 시성되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섭리의 도우심이 있어 나는 귀하가 대표하는 나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습니다. 그 기회에 나는 단일 민족이 사는 반도가 강제로 쓰라린 분할을 겪고 있음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시대의 고통이 보다 나은 시대를 내다보는 자신감을 감소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에 대한 존중, 정의와 평화의 항구한 추구라는 굳건한 바탕에서 한국의 현시대와 미래를 정위시켜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베드로의 후계자로 로마의 주교가 된 베르골리오는 13억 가톨릭신자(많게는 20억 그리스도 신자)가 세계평화와 정의구현에 별다른 이바지를 못하고 있다는 당신의 평소 신념에 이유를 캐묻다 신앙인들에게 자비의 시선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교종직 표어마저 가엾어서 택한다라고 정했다. 가톨릭신자를 자처하면서 군사독재를 앞세운 남미 기득권자들의 횡포와 잔학,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아랍세계 전체에 전폭기를 띄워 폐허로 만들어가면서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는 정의의 십자군을 자처하는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어떻게 새로운 복음화를 펼칠지 구상하셔야 했다.

  

  교종은 누구보다 자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동조해줄 집단으로 봉헌생활자들을 꼽으셨다. 먼저 봉헌생활의 해를 정하여 마음 준비를 시키셨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을 깨우기를 기대합니다. 봉헌 생활의 특징적인 요소가 바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속해 살아가는 역사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해석하는 능력을 하느님에게서 받습니다. 예언자는 밤을 지새우며 여명이 밝아오는 때를 아는 파수꾼과 같습니다.”(2014년 봉헌생활의 해 교서, 2)


  이어서 교서 자비의 얼굴로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져라!”고 호소하는 자비의 특별희년’(2015~2016)까지 선포하여 자비의 영성을 심어주고자 노력하셨다. 자비의 딴 이름은 용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며 프란치스코 교종이 최초의 방문국으로 대한민국을 찾아오셨다가 명동대성당에서 거행하신 고별미사가 남북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였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미래 곧 화해, 일치, 평화라는 하느님의 은혜들은 회심의 은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심이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의 삶과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이 최초로 핵실험을 한 2006, 교황청 국무원장 베르토네 추기경이 북한의 핵실험을 바티칸은 어떻게 제재할 생각이냐?”는 질문을 세계 유수 통신사 기자들에게서 받았다. 추기경의 답변은 간결했다. “성좌는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가 아니라 문제를 해소하는 방도를 찾는데 역점을 둔다!” 필자의 외교관 재임기간 중에만도 베네딕토 16세는 국제사회에 세 번이나 인도적 대북식량원조를 요청하셨다. “저는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국제사회가 가장 취약한 백성들에게, 특히 북한에 있는 백성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추구하고 강화할 것을 요청합니다”(2006.11.13일 부임하는 일본대사에게). “한민족을 화해시키고 한반도를 비핵화하려는 노력은 주변지역 전체에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가장 취약한 계층에 돌아갈 인도적 지원을 좌우하는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2007.1.8일 교황청 주재 외교단에게). “저는 당사자들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현금의 긴장을 해소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촉구하며 북한의 가장 취약한 백성이 인도적 원조에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2007.2.14일 교황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 걸음 먼저 내딛기

  ‘남북평화 길내기를 선도하는 이 잡지의 독자가 봉헌생활을 함께 하는 동료들을 설복시키고 신자들에게 용서의 영성을 가르쳐 남북평화 길잡이가 되고 싶다면 우선 다음 두 가지 의문은 풀어야 하리라 본다.

 

  첫째, '북한은 왜 핵무기를 개발하였을까?'란 의문이다. 요한바오로 교종은 9.11테러 후 미군의 아프간 침공을 준비하던 부시에게 범인 확인은 필히 입증되어야 하고 형사책임은 반드시 개인적이어야 하고 그 책임을 테러리스트가 속한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 종교로 확대할 수 없다.”고 직언하고서 미국의 두 번째 이라크 침략을 막고자 온갖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런데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는 증거도 없이 부시가 이라크전을 개시하던 2002325일 새벽, BBC 화면에 나타나 다음 차례는 북한이라던 토니 블레어 영국수상의 위협을 전 세계가 시청하였다. 따라서 세계 지성인들은, 이란과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미국에 충성을 다했던 이라크 후세인의 최후를 보고 미국에 한사코 맞서던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의 운명을 목격한 북한 지도자들이 핵무기 외에 무슨 방비수단을 찾았겠으며, 핵무기 없이 싱가포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그런 예우를 받았겠느냐고 묻는다.


  북핵 문제에 관한 성좌의 입장은, 필자의 신임장을 제정 받으시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언하셨다. “산적한 현안 문제들 외에도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가 점진적으로, 평등하게(equilibrata), 또 결연하게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평화를 담보하는 최고법은 현안문제가 논의될 적에는 동등한 군사력을 과시하는 데서가 아니라 오로지 상호신뢰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현재 5000기의 핵탄두를 실전에 배치해 놓았다고 자랑하고 남한이 미국의 핵우산을 쓰고서 북한의 핵무장 포기만 요구할 수 없지 않느냐는 말씀처럼 들렸다.

 


  둘째, '북한에 교회가 있을까?'이다. 남북화해와 북한선교를 희구하는 신앙인이라면 모든 대화와 협상의 첫째 조건은 상대방에게 믿음을 보이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역사의 이 시대에 인류의 미래를 결정할 중대한 두 문제로 평화와 사회적 대화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을 꼽으셨고(복음의 기쁨185) 이 두 사명을 수행하는 수도자들은 친교의 전문가들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친교의 영성이 현실화되고, 여러분이 앞장서서 이 새 천년기에 우리가 당면한 큰 과제를 맡아주기를 바랍니다.”(봉헌생활의 해 교서, 3) 친교의 영성을 교종은 당신이 애용하는 스페인어 단어 primerear(첫걸음을 먼저 내딛다)로 언표하신다.


  봉헌생활자들마저 '북한의 종교는 완전히 말살되었다!' '조선기독교연맹이니 조선천주교인협회니 하는 것은 공산당의 기만적인 정치극이다!' '장충성당이니 봉수교회니 하는 것은 다 선전용 셋트다!'라는 의혹을 품은 채로는 남북화해의 첫걸음을 먼저 내디딜 수가 없다. 지난 번 문대통령의 바티칸 방문에서 전달한 김정은 위원장의 교종의 북한 초청도 실제 방문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북한교회가 1950년 이후 목자 없는 평신도로 이어져온 신앙의 공동체로서 지난 19886월 이후 조선천주교인협회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실에 유의한다"고 선언한 북한선교위원회이동호 아빠스의 1989년 메시지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중국의 지하교회와 애국회의 갈등을 우리가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성좌는 2007, 중국교회에 보낸 베네딕토 16세의 서간에서 우선 지하교회애국회를 구분 않고 중국의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중국의 가톨릭교회는 본질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편 교회의 일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전면에 내세웠다(서문). 심지어 애국회실무자들을 힘든 시기와 상황에 대처하려고 교회적 관점에서 언제나 동참할 수는 없는 지위를 떠맡은 형제들로 이해하는 입장을 보였다(13).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는 완전히 해독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어서, 누구도 읽을 수 없다.... 아시아인들이 받아야 했던 박해 앞에서 하느님께서 침묵하신 것에 대한 아시아 교회의 절망은... 사건들 안에 보이는 하느님의 탁월한 안배를 드러낸다’”(3)고 피력하였으니, 북한 침묵의 교회가 겪어온 고난을 배달겨레의 하느님이 이끌어 오신 신비로운 섭리로 파악하는 신앙인다운 사관으로 바꿀 시점에 우리가 와 있다는 성좌의 가르침이다. 북한의 70년 역사를 붉은 악마가 지배한 악의 역사로 매도하는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도들의 이데올로기적 사관에 우리까지 휩쓸릴 필요는 없다.

 

루치펠은 얼음에 박혀 있었다.

  동구권에 70년간 현실사회주의 정권들이 온갖 제재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이전의 신앙공동체들이 고스란히 소생하고 있음을 미루어, 북한 장충동성당에 모여 공소예절을 바치는 교우들의 정체를 의심하는 교우들에게는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도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던 세례자의 말을 상기시키실지 모른다.


  예수님 입에서도 지옥은 불구덩이로 묘사되고 파우스티나 성녀를 비롯해 환시 중에 지옥을 본 신비가들도 모두 그곳을 꺼지지 않는 용광로처럼 그려낸다. 그런데 세계문학의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단테의 신곡神曲에서는,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만난 루치펠, “시름 나라의 황제가 얼음 밖으로 반만큼 가슴을 내놓고 있는”(단테 신곡지옥편 34,28-29) 모습으로 그려져 그리스도교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사랑이 완전히 메마른 곳은 꺼지지 않는 불이라기보다 얼음구덩이였다


  ‘하느님의 사람들곧 예언자들만 사람들 사이에, 겨레 사이에 여전히 증오와 분열을 씨 뿌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박힌 얼음을 용서의 영성’, ‘친교의 영성으로 녹여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