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산책

(2017.2.17)
블랙리스트와 세월호, 그리고 코키토스
  • 성 염

   누구는 ‘서양 고대사의 기적’이라지만 로마사가 실은 시민끼리, 동맹민족들과, 또 주변의 모든 국가와 끊임없이 벌이는 전쟁사였다. 제국 시대로 들어와 유난히 역사의 웃음거리로 꼽히는 두 황제가 칼리굴라와 네로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재위: A.D. 37-41년)의 별명 ‘칼리굴라’는 어려서 부친의 병영을 따라다닐 적에 병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애기 군화’라는 뜻.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대로, 칼리굴라가 통치권을 쥔 3년 10개월(우연하게도 박근혜 대통령 직무기간과 일치한다)에 저지른 독재와 만용, 그리고 시민들을 죽이다죽이다 지쳐 “로마 국민이 모가지 하나였으면 참 좋겠다!”던 호언장담은 기록으로 남겨져 갖가지 소설과 연극과 영화로 조롱을 받아왔다.
 
“우리의 모델은 구체(球體)가 아니라 다면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재판이 진행되면서 국회 소추위의 기소는 사실상 박근혜, 김기춘, 조윤선을 가닥으로 한 ‘블랙리스트’로 집중되고 있다. 선거공약에서는 ‘국민대통합’을 내세웠지만 대권을 쥐자 “종북세력까지는 아니다. 빨갱이까지 한다는 건 절대 아니니까”라면서 자기 심기와 이권을 거스르면 리스트에 올려 문화인, 교육자, 공무원들을 감시하고 쫓아내고 배제해왔음이 드러난 까닭이다. 이런 엄청난 헌법유린의 범죄를 ‘반공이념의 구현을 위한 통치행위’로 내세운 피의자의 발언으로 미루어 기득권집단에 방해되는 국민을 모조리 칼리굴라식으로 처치하고 싶었을까? ‘애기 군화’가 대한민국 헌법을 ‘혁명공약’ 정도로 얕본 게 아닐까, 그 아비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쥐고서 내걸었던?
 
   2014년 8월에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공항에서 맞이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남북분단과 이념갈등이 비장의 보도처럼 악용되는 정치판을 점잖게 타일렀다. “사목 활동에서도 정치 활동에서도 우리의 모델은 구체(球體)가 아닙니다. 구체는 모든 점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으며 그 점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모델은 다면체(多面體)입니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각 부분은 그 고유성을 간직합니다. 가난한 이들도 비난받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 저마다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36항) ‘율리아나’라는 세례명으로 교황의 명동성당 고별미사에 참석했으니 저 말에서 ‘이석기 의원 사건’을 떠올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양의 중세문화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뒤따라 지옥을 탐사한 단테가 불가마인 지옥의 맨 밑바닥 ‘코키토스’에서 발견한 루치퍼(악마 두목)는, 불꽃 아닌,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시름 나라의 황제가 얼음 밖으로
반만큼 가슴을 내놓고 있는데…
일체의 통곡이 그로부터 나와야 했느니라
그 눈물로 코키토스가 말짱 얼어버리는 것이더라
                                                   (신곡 지옥편 34곡)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선박 한 척의 침몰은 대한민국 역사의 갈림길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나타난 무능·무책임한 정부의 행태, 진실을 어떻게든 은폐하려던 언론들, 세월호 유가족들을 공격하던 우익 집단들의 행패는 이 사회 기득권자들의 가면을 벗겨 민낯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서울을 떠나며 “타인의 고통에 중립은 없습니다.”라는 훈유를 남겼는데 지난 3년여 한국 주류언론이 국민 눈에서 세월호를 가리고 지우려던 수작은 참 추잡했다.
 
세월호 침몰은 박근혜 정권의 침몰이었다!
 
   필자는 함양에 살면서 가까운 산청의 한센인 마을을 가끔 방문한다. 알다시피 한센병은 피부의 통각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손발가락이 떨어지고 눈이 멀고 입술이 손상돼도 미리 감지를 못한다. 팽목항을 찾아가 카메라 앞에서 눈물까지 보였으면서도 정작 청와대를 찾아와 진상조사를 호소하려는 세월호 유가족을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은 대통령, 유가족의 농성과 시위를 폭거로 취급한 경찰과 언론사들, 유가족을 찾아와 희롱하고 겁박한 관변단체들이 국민에게는 동포의 고통에 대한 동정의 통각을 잃어버린 ‘문디’들로 보였을 게다.
 
   하지만, 이념적 나균으로 눈멀고 귀 문드러진 사람들을 뺀 나머지 국민은 세월호에 갇혀 죽은 젊은 죽음들을 애도했고 유가족의 울부짖음에 공감했으며 ‘진실 규명’을 위한 행보에 지지를 보내왔다. 전국곳곳에 노란 리본이 물결치면서 이 겨레가 얼마나 인정 많고 이웃과 동고동락하는 민족인지 드러냈다.
 
   드디어 탄핵 정국에 들어서면서 세월호 침몰 처음 7시간 대통령의 행적이 탄핵의 핵심 사안이 되었다. 지난해 4월 초만 해도 국회 200석 개헌선을 장담하던, 견고한 정권과 여당을 무너뜨린 것은 세월호였다! 우리 겨레에게서 동정심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동포애를 얼어붙게 하려던 지옥의 ‘코키토스’, 이 땅의 기득권집단이 70년간 얼려온 얼음판이 세월호라는 바늘 하나에 ‘쩍!’ 소리를 내며 금가버렸다.


다산연구소 
<실학산책> (2017.2.17)
http://www.edasan.org/html2/board/index.html?ptype=view&bid=b32&idx=6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