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itas거울> -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해설 이야기

 

 

성염 전 교황청 대사가 들려주는 회칙 이야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정리 : 김주연

 

Q1. 교황님의 회칙이란 어떤 것이며, 이번 베네딕도 교황님의 첫 회칙은 어떤 의의를 갖고 있습니까?

A1. 회칙은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신앙과 윤리 도덕의 지침이며, 첫 회칙은 새 교황의 기조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첫 회칙을 발표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하느님의 진리veritas’사랑caritas’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황의 첫 회칙은 기조 사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첫 회칙인 인간의 구원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비를 다루었고, 이후 25년간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이에 기반을 둔 수많은 문헌들을 발표하며 인권 문제에 대해 인류의 대변자이자 교사로서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새 교황이 선출되면 앞으로 교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를 첫 회칙에서 읽게 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22년간 올바른 신앙문제를 정리해나가는 곳이라고 할 신앙교리성()의 책임자를 지낸 분으로 진리veritas’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caritas이시기때문에 사랑이 참되면 하느님이 계시다는 진리가 됩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성전을 진리의 원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성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고, ‘성전은 초세기부터의 교회 전통, 성서와 전통을 토론해 온 교부들의 가르침을 망라합니다. 전세계 주교님들의 모임인 공의회의 결정문, 역대 교황의 가르침을 담은 문헌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회칙(回勅)은 교회를 통솔하는 최고 권위자가 윤리, 도덕, 사회, 국제 정치 등 인간 사회 전반의 논란이 되는 문제에 관해 여러 의견을 수렴하여 교리적 내용을 담아 결집하여 내는 문서입니다. , 전체 교회와 지역 교회가 따르는 아주 중요한 신앙과 윤리 도덕의 지침이며, 그 중 하나가 이번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입니다.

 

Q2. 1부에서 언급된 에로스와 아가페에 관하여 말씀해주세요.

A2. 교황님은 이 회칙의 1부에서 고도로 상업화된 현대의 ()문화를 에로스라고 단죄할 것이 아니라, 이에 심취한 이들이 이를 아가페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교회가 봉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인 ()문화는 특히 20세기에 들어와 갈수록 에로스(남녀간의 본능적인 사랑)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어린 아이들도 쉽게 포르노에 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에로스가 본능과 육체에 한정된 형태로 만연되어 가면서, 에로스와 아가페(신적 사랑)는 점점 더 분리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잘못된 성문화에 빠져있는 이들은 자기의 것을 승화시키고 발전시켜 인간적으로 고귀한 차원으로 가는 것을 생각도 못하게 되고, 아가페 차원에 있다는 사람들은 에로스에 대해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에로스를 천시하고 버릴 것으로 치부합니다. 바로 이러한 면에 대해 교황님께서는 염려를 갖고 계십니다.

교황께서는 이 회칙의 1부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을 에로스적으로 표현한 호세아예언서나 아가를 인용하면서, 에로스를 끊임없이 성화시키려 노력해야지 이를 배척하고 단죄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에로스 문화가 성을 말초적인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심어주신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부단히 아가페 차원으로 승화되어 왔고 지금도 승화되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하느님의 창조의 신비를 나타내므로 원천적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에로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봉사해서 에로스를 아가페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Q3. 에로스를 아가페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요? , 왜 그러한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요?

A3. 에로스와 아가페라는 하느님이 주신 위대한 두 사랑의 긴밀한 관계를 인정하고, 평신도나 비신자들의 소명을 인정하고 격려함으로써 이분법적인 사고가 가져오는 공동체의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에로스와 아가페를 구분해서 가르치고 신자들이 이것을 이분해버리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긍지를 갖지 못하고 심지어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의 삶은 모든 모습에서 사랑으로 드러나고, 에로스적인 것과 아가페적인 것이 저희 삶 속에서 늘 함께 존재하지요. 에로스도 소중하다고 말해 주면 성애로 살아가는 스스로를 소중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러면 성사의 울타리 안에 있고 싶고, 가정과 사회가 인정하는 정식 혼인을 하고 싶고, 하느님 앞에서 항상 축복받으면서 하느님과 부부가 사랑의 삼각형을 이루고 싶다고 바라게 됩니다. 인간은 고귀하다고 느낄수록 그걸 잃지 않고 깨뜨리지 않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합니다. 교황께서 우려하시는 것은 현대의 성문화가 에로스라는 것을 아무렇게나 소비하고 내버리는 향락쯤으로 간주하여 에로스라는 사랑에 책임을 지지 않는 형태로 밀려가는 현상입니다.

에로스와 아가페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 교회 사회봉사기관에서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지 예를 들고 싶습니다. 일부 신부님, 수녀님들이 자기들은 독신의 소명을 받았으니까 자신들이 하는 것은 봉사이고 아가페이지만, 결혼생활을 하는 평신도들이 월급 받고 대가를 받으면서 일하는 것은 아가페가 아니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그런데 성직, 수도자들도 어릴 때에는 모두가 가정의 분위기, 우리 자식, 우리 자식하는 에로스의 분위기에서 자랐고 보호 받았습니다. 다만 신앙이 에로스의 범위를 넓혀주었던 것이지요. 어린이 시설에서 수녀님들이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예뻐하고 가엽게 여길 때는 에로스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바로 하느님이 축복하신 에로스적인 차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가페 차원인지 에로스 차원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 하느님께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이해하신다면 사회봉사기관에서 근무하는 평신도들의 동기도 아가페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직, 수도자들과 달리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 속에서 먹고 살려고 일하는 것을 천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가장 진지한 봉사일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봉사할 계기가 생기는 것이고,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야 말로 진정한 성소입니다.

또한 신자가 아닌 이들의 근무도 봉사Diakonia하는 것, 부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자치단체가 위임한 시설에서 종사하는 공무원들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식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긍정적 평가를 못 받으면 잘 해봐야 헛수고라는 패배주의에 빠지면서 더욱 복지부동의 자세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직하고 헌신적으로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격려해드리면 그들도 더욱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서 평가받는 만큼 자신과 자기 일을 존중하는 법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특히, 기관의 책임을 맡은 이들은 교황닙의 이 회칙에서 이러한 태도를 배울 것입니다.

 

 

Q4. 최근에 일어나는 가족의 해체나 증가하는 이혼과 조손가정, 결혼과 출산의 감소 등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네요?

A4. 에로스는 하느님의 사랑의 일부이며, 개인과 개인, 가족 등 모든 관계 속에 에로스와 아가페가 조화롭게 함께 할 때에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남녀의 사랑, 그리고 그들이 이룩한 가정에는 에로스와 아가페는 늘 함께 있습니다. 처음 남녀가 사귈 때에는 서로를 친절하게 대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에로스적으로 서로를 탐닉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그 어려운 직장 생활과 가사노동을 희생적으로 해냅니다. 아가페가 에로스를 낳고 에로스가 아가페를 낳는 것이지요. 인간 안에 아가페, 에로스, 카리타스가 총체적으로 들어 있는데 현대의 성문화는 그것을 에로스적인 차원으로만, 그것도 물리적 현상으로만 익숙해지도록 만듭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식 결혼한 가톨릭 신자들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혼한 이들에 대한 사목적인 배려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혼 자체를 공식으로 인정해버리면 인류사회에서 결혼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마저 무너지는 것이고, 결국 사랑의 통합적인 형태, 총체적인 형태를 가톨릭교회마저 가르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람들더러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고, 성과 속을 분리해서 에 해당하는 부분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교황님은 에로스는 이 아니며, 아주 존귀한 것이고, 그것에 대해 책임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에로스도 그 하느님의 사랑 안에 들어있는 일부라고 하십니다.

 

 

Q5. 그럼 이제 2부로 옮겨가서 가톨릭 사회 복지 분야에서 회칙이 갖는 의미와 가톨릭 사회 복지 시설 종사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A5. 사랑의 봉사는 말씀의 선포와 성사 거행과 마찬가지로 교회 신앙의 본질적인 일부이자 의무입니다. 사회복지 사업은 사랑의 봉사라는 신앙의 명분에 사회적 사랑이 결합된 것입니다.

회칙 제2부의 앞부분에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에 교황님께서 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주창하는 사회구조의 혁명에 못지않게 교회와 신앙인들의 자선사업 즉 사랑의 봉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교황님은 평신도, 아니 그리스도인 전부에게 하느님 말씀의 선포(kerygmamartyria), 성사 거행(leitourgia)과 똑같은 비중으로 디아코니아(diakonia), 즉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이 교회의 전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황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랑의 봉사가 교회 신앙의 본질적인 일부이자 의무이므로,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이를 포기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2부의 27, 28, 29항에서는 정의 사회 구현을 굉장히 강조하셨는데, 이는 정의 사회가 결국은 우리가 사랑의 봉사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에서 구현하는 틀이기 때문입니다. 28항에서는 신앙인들이 정의에 투신하는 일과 화급한 사랑의 봉사를 완벽하게 조합하는 방법이 나오고, 29항에서는 이런 경지를 사회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부분은 이 회칙에서 아주 크게 평가받는 부분으로, 이런 의미에서 정의를 구현하려는 교회와 신자들의 활동은 사회적 사랑이 됩니다.

일찍이 서유럽 사회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받아들여 복지 국가를 제도화 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더 이상 복지나 의료 등을 교회 기관이나 개인들의 선의에 맡겨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비판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바탕에는 그리스도교의 이웃사랑이 있습니다. 사회의 틀을 바꾸는 것은 정치 사회이지만, 인간 개인을 바꾸는 것은 종교입니다. 개인들의 이기심을 바꾸려는 그리스도교와 사회 제도를 바꾸려는 마르크스주의가 손잡고 일했더라면 20세기는 모습이 달랐으리라고 한 한스 큉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이 하고 있는 사회복지 사업, 사회복지 활동의 명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타종교에 비해서 그리스도교가 신자들에게 사랑의 봉사를 위한 교리적인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이제는 가톨릭 사회복지 활동이라는 것은 사랑의 봉사라는 신앙의 명분에다가 교황께서 명시한 사회적 사랑의 구현이 결합된 형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나는 여기, 이 직장을 선택하면서 사회적 사랑을 구현하는 데에 몸 바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훌륭한 자기 암시 내지 생활 명분이 됩니다.

 

 

Q6. 교황님께서 사랑의 의무라고 말씀해주신 것은 반가운 것이지만, 아직도 나눔을 실천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신자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A6.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신앙으로 확대되어 사회적 사랑으로 이어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도성에 속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사회복지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절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중학교 1학년 때에 고아 처지가 되었던 저와 세 동생들이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의 가장 큰 혜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형제를 살레시오 신부님들이 먹이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시켜주셨고, 지금 저와 형제들이 그런대로 사회 속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여러분이 사회복지 활동을 하면 고아를 데려다가 교수나 대사를 만들 수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이지요.(웃음)

신자들도 나눔을 어렵게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랑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사람의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있습니다만, 신앙이 성숙하면 할수록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차츰 팔이 넓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뜻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양팔이 쇠못으로 십자가에 박힌 상태에서는 팔을 안으로 굽힐래야 굽힐 수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자기 주저인신국론에서 하느님의 도성과 그 반대편에 지상의 도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기가 어느 도성에 소속하는 판별하는 기준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사로운 사랑사회적 사랑이 그 기준입니다. 사람이 팔을 밖으로 벌릴 때, 즉 그 사랑이 사회적 차원을 띌 때, 그 사람은 하느님의 도성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외형상 아무리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 형태라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각에서는, 그는 지상의 도성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성숙해갈 수록 우리의 팔이 넓어지고, 십자가에 못질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가깝게 사랑하는 방법이 생깁니다. 그것이 사회복지caritas로 가는 상징으로 보셔도 좋겠습니다.

이 카리타스를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평신도입니다. 우선 성직자, 수도자, 심지어 교구도 평신도들로부터 돈을 모금하거나 그렇게 모인 국가 기관의 돈을 받아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지 사업의 뿌리는 평신도에게 있는 것이고 그들의 신앙과 노력과 돈과 희생 위에 서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 교구는 평신도들의 관대한 헌금을 모아서 복지사업의 틀과 채널을 만들고, 체계적이며 항구하게 시설을 이끌어갑니다.

요즘 국가나 공공기관, 지방 자치 단체가 가톨릭 기관들에게 복지 기관을 맡기려 하는 이유는 (신앙에서 우러난) 헌신적인 봉사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회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그만큼 헌신적이었다는 것이고, 성직, 수도자들이 그만큼 이해관계를 떠나서 수혜자들의 복지를 성의껏 도모했고, 그런 활동을 전교의 빌미로 삼지 않았다는 잠입니다.

 

 

Q7. 그러나 실제로 교구와 성직자, 수도자조차, 나눔 활동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북한이나 해외의 이웃을 돕는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A7. 신앙인들은 인간과 관계된 모든 일들에 관심을 갖고, 어려움을 처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실천해야 하며, 사목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신자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사목자들에게 종교적 이기심이 생겨나면 성서 이원론을 주입시킵니다. 몇 해 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의 참상을 보고 교황님께서는 희생자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가슴 아파 하셨는데, 정작 이러한 세계적 재앙이 신자들의 기도나 미사 강론에 거론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회 정치적 현안문제도 성당에서 거론되지 않으면 신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신앙이나 교회와 상관없고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니다. 교황님이 말씀하신 아가페와 에로스의 경우에 있어서도 아가페는 종교인이 가르치고 에로스는 평신도들이 알아서 하는 문제라면, 교회가 간여할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신자들은 갈수록 매사를 자기가 알아서 처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실천적 상대주의입니다. 많은 이들이 가톨릭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는 이야기들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주일미사 참여하고 헌금하면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나머지의 삶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교회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소위 중산층의 교회가 되어간다면서, 우리 가톨릭교회가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라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비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Q8. 가톨릭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의 열악한 처우와 끝없는 사회 문제들로 소진현상(Burn-out)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른 사회 복지 활동과 차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떠할까요?

A8. 인간의 이기심으로 생겨나는 고통 받는 이웃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므로, 신앙의 힘으로 이들을 돕는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고, 서로의 소진을 예방하기 위해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우리 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 개인의 이기심과 집단적인 이기심이 발동되면 그 희생자들은 언제나 나오기 때문입니다. 국내총생산(GNP)이 올라가고 경제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구원받아야 할 인간 내면의 참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빈곤과 비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종사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고통이 감정이입 되는 힘든 생활을 반복하고 박봉에 시달리다보면 차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냉정해지고, 사무적이 됩니다. 다행이 우린 신앙이 있으니까 주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사랑의 봉사를 하고 있다는, 그런 봉사를 하겠다는 종교적인 동기를 얻을 수 있어 행복한 편입니다. 개인적인 고통을 당했을 때에도 우리는 기도하고 매달릴 데가 있어 정신적인 위안을 받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전반적 사회 복지는 불과 지난 10년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관에 종사하는 이들은 당연히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도 있고 복지 사회로 갈수록 더 좋은 처우가 주어질 것입니다만, 당장은 종사자들이 서로 도울 일이 무언가를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자인 직원들은 비신자 직원들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복지 분야를 선택한 용기를 존경하고 곁에서 격려해주고, 우리가 받는 종교적인 영감이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됨을 넌지시 알려주면, 현재의 일자리에서도, 언젠가 그들이 떠나서도 가톨릭교회와 그 복지기관 종사자들, 특히 책임자들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오래 동안 근무하는 신자라도 상관들과 동료들로부터 인정과 보살핌을 못 받을 때에는 무신론자 못지않은 절망에 빠질 수 있기에 신자 직원들에 대해서도 영적인 나눔이 필요할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성당 종지기나 사무장이나 식복사는 저절로 무신론자가 된다는 속담이 있어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 큽니다.

 

 

Q9. 급변하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앞으로 가톨릭사회복지 활동에 조언이나 나아갈 방향을 말씀해주십시오.

A9. 교회 사회복지는 언제가 가장 소외받는 이들을 찾아가야 하며, 신앙의 힘으로 기다리고, 시도하고, 노력하며 여러분의 큰 사랑을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80년대 유럽의 복지사회가 의료 분야를 책임지면서 교회는 가톨릭 의료 사업이 1차 보건을 담당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국가가 담당할 수 있으면 교회는 그 분야를 놔두고, 국가의 손길, 제도가 미치지 않는 곳을 담당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복지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의료나 학교나 복지시설이 공공단체의 시설들과 질적으로 경쟁해야 한다는 생각은 재고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가장 소외받는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회복지 분야의 일터는 열악한 곳이고, 아픈 이들의 고통을 나눠져야 하기에 스트레스가 많은 세계입니다. 여기서 일하는 이들이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으로부터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어느 사회나 인간은 있고, 그리스도를 닮은 고난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헌신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을만합니다.

적절한 보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마는 많이 기다리고, 시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내를 갖고 인류 역사를 지켜보시며 인간 한 사람이 변하는 것도 기다리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우리를 믿고 자유 의지에 맡기시며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기다리십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여러분들의 많은 선배들이 이름 없이 일했고 하느님으로부터만 상급을 받았지, 가족으로부터도 보상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삶은 봉사했던 대상자들의 삶 속에 녹아 있지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교황님의 회칙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톨릭 사회복지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격려를 받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복지위원회의 최재선 전 사무국장님처럼 수십 년을 말없이, 꾸준하게, 한없는 인내로 일을 해 오셨는데, 얼마나 큰 인내가 필요했던가, 또 얼마나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기에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들어보실 만합니다.

하도 이기적이어서 사람들이 자기 가족마저도 돌보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남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많이 사랑하는이들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을 이곳에 불러다 놓으신 것은 당신이 여러분을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또 여러분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벗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내놓으신 당신 아드님과 매우 닮았다고 여기셨거나 그분과 닮게 만드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여러분이 길던 짧던 이곳의 생활을 여태까지 편한 마음으로 해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여러분의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