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신학" [1999.12월호]

 

아들을 위한 일곱 편의 습작

                      ---호주제 폐지를 위한 제언

                                                          전순란 (여신학자협의회 실행위원)

 

칠공주네의 분풀이

 

“아줌마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어디 아프셔요?”

“기운이 죽어라 없어예. 아침 꼴베로 나가는데 낫들 힘도 없구마.”

“그럼, 아저씨께 말씀드리지요. 오늘만이라도 소꼴 좀 베다 달라구요.”

“어데 예, 남자루 태어난 게 유센데, 그게 되남유. 지 맘 멕히면 나가구 안 멕히면 소는 굶겨야 하는데 어쩝니꺼.... 그것도 그렇고, 맴 걱정이 커서... 그대루 가슴 열어 보여줄 수도 없구...”

그날 저녁 양파 한 자루를 이고 우리 집 정자로 찾아온 아주머니는 자기의 “맘 걱정”에 관해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집 아저씨가 강 건너에서 비닐하우스를 하는데 가까이에 칠공주네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칠공주네는 작년에 간암으로 남편을 여읜 부인네다. 아저씨는 그 과부가 안쓰러웠던지 어쩌다 은근슬쩍 아줌마의 손을 잡았단다. 아줌마는 당장 표범처럼 사나워졌고 아저씨는 예상 밖의 반응에 “앗 뜨거라!” 집으로 줄행랑 놓았다, 그 뒤로 손에 낫을 쥔 여자가 쫓아오고....

 

아저씨의 사과도, 부인의 사과도 부족했던가 그 뒤로 칠공주네는 걸핏하면 비닐하우스에서 낫을 들고 이웃 비닐하우스로 아줌마를 찾아와서 따져드는가 하면 오밤중에도 불쑥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선단다. “우리 아자씨가 연애하잡디꺼? 아니문 와 이리 날 괴롭히노?” “흥, 붙어 사니께 똑같제. 그 일로 가슴이 뛰고 잠도 안 오니께 병원비에 위자료 내놓이소.” 이렇게 일 년 가까이 시비는 이어지고 있어 그 아줌마는 벙어리 냉가슴이란다.

 

8년 전이라던가? 이웃 아줌마가 칠공주네한테 농을 걸어, “당신 집 딸만 일곱이니 호주라도 남기려면 남편한테 각시 하나 얻어주라.”고 했다가 이태를 두고 쫓아다니며 악담하는 통에 손이 발 되도록 빌었다나... 또 윗마을 구장아저씨가 술자리에서 그 남편한테 색시 하나 얻어 상주를 보라고 했다는 농지거리를 남편에게서 전해들은 공주네, 이번엔 구장 아저씨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화풀이를 해 주었단다.

 

네 딸 중 막내로 태어나서 친가에서도 시가에서도 구박과 천대는 다 받으면서 살아왔다는 여자. 하지만 잡초만큼 성정이 악착같아 누구에게 져본 일이 없단다.

시집이라고 와서 딸만 하나, 둘, 셋, 넷... 일곱을 낳았는데 하늘에 사무쳐서 딸이라도 남의 아들 열 부럽지 않게 키운다며 정과 성을 다하고 있는데 “서방한테 색시 하나 얻어줘서 아들 보라”니 농담으로 넘길만했겠는가? 아들 선호사상이 세계 제일이라는 대한민국, 거기서도 여아비천사상이 가장 만연된 경상도 땅에서 말이다. 전라도에서는 딸자식 시집보내면 영영 “딸을 여의는” 섭섭한 마음이지만 경상도에서는 “딸을 치운다.”

 

그러나 여덟째! 칠공주네집에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단다. 그날부터 “역시 아들은 낳고 봐야 하는기라!”를 입에 달고 다니는 그니는 지금까지 공들이던 딸들을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로 삼은 듯 옷도, 음식도, 학교도 애오라지 아들 몫이라, 일곱 명의 딸들은 막내아들 하나 낳기 위한 습작이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게 이 아줌마의 탄식이다.

 

엄마와 할머니를 거느리는 세 살짜리 주인

 

창립이후 “여성연합”은 남녀 양성의 평등을 위해 법률적 제도, 사회인의 의식 개선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그런데 법률개선에 의해서 제도상으로는 변화가 있었지만 사회 각처에 뿌리 깊은 가부장적제도와 의식은 남녀평등의 실질적 구현을 여러 모로 가로막고 있다. 새로운 3천 년대를 내다보며 99년대의 어둠을 떨쳐버리려는 여성연합은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의식과 관행을 유발시키는 상징적 제도인 호주 제도를 폐지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89년 가족법 개정이후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호주제(戶主制)는 국가공문서에서 호주를 가족의 근간으로 편제함으로써 아들을 낳아야만 가계를 이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서, 남아선호와 가부장의식을 전반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성감별로 낙태되는 여아가 해마다 3만명을 넘고 그에 뒤따라,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실에서 보듯이, 엄청난 성비불균형을 초래하는 반여성적인 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에 여성연합은 호주제폐지를 99년도 주요사업으로 설정하고서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현행호주승계 순위는 아들→ 딸 → 배우자 → 어머니 순으로 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시하자면 세 살짜리 아들이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시집 안간 누나들의 호주가 되는 세상이므로, 칠공주네처럼 딸이 일곱이나 되는데도 꼴찌로 아들 하나가 태어나면 당장 집안에서 왕좌를 차지한다. 혼인으로 부부가 새 호적을 이룰 적에도 남편이 호주가 되고 여성은 그 집에 입적되며, 이혼할 경우에 여자는 이미 부친의 호적에서 제적된 처지에 이번에는 남편의 호적에서마저 제적되는 굴욕을 겪는다. 비록 호적을 창립하더라도 자기가 부양중인 어린 자녀까지도 모친에게 입적할 수 없다. 남성우월-여성비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제도이다.

 

여성연합은 호주제폐지에 대한 대안으로는 부부공동대표제(가나다순으로), 부모의 성(姓) 함께 쓰기 운동, 1인 1적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출생시부터 여성이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받으며 종속관계를 갖지 않는 장점이 있겠지만, 한 호적법으로 묶여서 가족의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려는 국민정서를 손상시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현행 호적법을 고치려면 이러한 정서적 반발은 일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교회도 사회의 연장이기 때문인지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고가 교회 안에서도 만연되어 있음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다. 사회가 바뀌어야만 교회가 마지못해 그 뒤를 따라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온 사람들은 호주제 폐지에 교회가 앞장서기를 기대하면서도 주저함이 많을 것이다. 사회의 온갖 모순과 반인간적 현상을 고발하고 타파하면서 앞서가는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