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 1995.9월호]

 

70세 이상의 노인들이나마 고향방문을!

---한국 NGO 여성실행위 종교분과위원회

남북여성 만남의 광장 참관 보고서

 

전순란(우리밀살리기운동 공동대표)

 

     북한산 골짜기마다 눈이 쌓여 능선만 아득하던 황혼녘, 일흔을 바라보는 초라한 노인 한 분이 우리집 마루 끝에 걸린 거울 속에서 늙은 남자 하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짓습니다.

 

“사모님! 저도 이젠 완전히 할아범이네요. 뭐 이렇다 한 것도 없이 지지리도 힘들게 살아왔네요. 이제는 저도 다 된 것 같네요....”

 

호강 한 번도 못하고, 그렇다고 멋진 이념을 펼쳐 혁명가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온 소박한 뜻 하나를 꺾지 못해 그 뜻을 따라 살아온 순교자 !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내 나이 스물셋이었지요. 아내의 손에는 큰딸 화심이가, 등에는 갓 태어난 둘째딸 정심이가 사정도 모르고 칭얼대고 있었지요. 어머님은 커다란 엽서 뭉치를 쥐어 주시면서 ”가거든 소식이나 자주 전해라!“ 하시면서 눈물을 삼키셨지요... 애틋한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아내는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아기를 어르는 시늉만 했지요.... 그게 벌써 45년전이에요...”

 

그분의 등뒤에서 심장이 저리는 아픔을 함께 느끼며 내가 드릴 위로의 말씀은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선생님, 이제 곧 북한으로 돌아가셔서 두 따님을 만나보실 거에요. 그때까지만 건강을 잘 돌보시고 꿋꿋이 버티세요...”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던 아내, 엽서 한 장 받아보지 못하신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가 고인이 되어 버린 김인서 노인의 고향... 그러나 그분의 꿈은 오직 하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을 지켜본 나에게 이번 북경 NGO에서 마련한 <남북여성 만남의 광장>은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 자리에는 북에서 온 우리 자매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갈라진 겨레의 아픔을 지긋이 곱씹으면서 임자 없는 선물꾸러미가 놓인 푸짐한 잔치상은 제사상처럼 보였습니다. 다만 북한 자매들이 우리 모임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만남을 기어코 이뤄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50명 가량 들어가는 자리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참하였는데 재미 재일 한국인, 미국인, 일본인, 네델란드인, 홍콩과 대만의 자매들이 왔습니다만 분단의 아픔을 이미 극복한 독일인 자매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여성교회” 정숙자 목사는 95년 희년을 맞아 “통일교회 여성협의회”가 남북한 여성의 만남을 준비해온 과정을 이야기하였고, 여성신학자협의회 공동대표이자 “새세상을 여는 천주교 여성공동체” 윤순녀 회장은 여성들의 통일운동과 재야의 통일운동을 연대하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여신학자협의회” 유춘자 총무는 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통일을 더 열망하는가를 이야기하면서, 1000만명 이산 가족과 그 속에 담긴 여성들의 고통을 강조하고, 방만한 국방비로 인해서 여성 노동자들의 복지 정책이 외면되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 기독교의 가부장적 교권과 결탁되는 상황을 질타하였습니다. 행사의 통역은 재미 작가 김태실씨가 맡아서 능숙하게 처리해 주었습니다.

 

“아세아 여성신학교육원” 한국염 원장은 자기가 어렸을 적 어머니의 등에 업혀 월남하다가 아버지가 국군에게 사살 당한 비극을 회상하면서, 증오해야 할 대상이 과연 누구인지 일평생 분간할 수 없었다는 심경을 털어놓으면서, 무기 장사로 배불리는 강대국에 의존해서는 통일은 허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나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준 것은 NGO 총무 이상덕씨가 현재 여든이 넘으신 시아버지가 갈수록 북에 있는 아들을 애타게 부르신다면서 “일흔이 넘은 분들은 사상가 전력에 관계 없이 남북 왕래를 허락하는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한 사실입니다. 이어서 최옥실씨가 나의 여든 여덟의 친정아버지가 죽기 전에 북에 두고 온 아들을 꼭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면서 ”일흔이 안 된다면 여든 넘은 분들이라도 보내 달라“는 호소를 해오자 장애는 온통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평강 땅을 그리시던 친정 아버지가 생각나서 나도 엉엉 울었습니다.

 

우리가 못내 안쓰러웠든지 독일 자매는 자기들이 겪은 분단의 현실을 들려주면서 분단을 극복함에 있어서는 절대로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민간인들, 특히 여성들이 끈질긴 힘으로 만남들을 이루어 가라고 조언하는 것이었습니다.

 

NGO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이산가족들의 남북한 상봉이 국내외 많은 이들의 관심사요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가장 급한 과제임을 절감하였습니다. 추상적으로 내세우는 그 어떤 통일운동보다도 70세이상, 아니면 80세이상 노인들의 고향방문을 주선하며, 특별법을 청원해서라도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통일운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가족과 인연을 맺은 비전향 장기수 김인서 선생의 가족 상봉도 꿈만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