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일 일요일. 맑음


이모는 언니(울 엄마) 따라 유무상통 미리내 실버타운엘 들어갔고(2002), 언니가 홀연 떠나자 혼자 남아 지내기가 외로웠던지 서둘러 언니를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용인시가 운영하는 '평온의 숲'이라는 장례식장이나 화장장 소각로를 뒤따라 거치고, 실버타운에 계시던 분들의 유골을 모시는 하늘문까지 나란히 입성하셨다. 두 분이 그곳에 계시니 외롭지 않을 테고 오늘 쯤은 먼저 도착한 울 엄마가 큰동생 손을 잡고 천국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줄 것 같다.


000-IMG_3906_1.jpg


000-IMG_4116.jpg


[크기변환]20211031_141037.jpg

금요일에 문상 가는 길이 많이 막혀 늦은 오후에 용인 '평온의 숲'에 도착했다. 코로나로 인해 온 나라가 간소한 장례문화로 바뀌는 중이라 장례식장은 한가했지만 둘째 영옥이이모("야들아, 내 나이 90을 넘었는데 아직도 '영옥이', '영옥이'냐?"), 작은 외삼촌 호원이삼촌, 막내 화옥이이모 부부가 다녀가고 나자 문상객이 더 뜸해진 빈소에서 사촌들과 긴 시간 추억을 되새기고 속이야기를 나누며 실속 있는 시간을 보냈다.


[크기변환]20211029_175352.jpg


[크기변환]1635674090480-4.jpg


[크기변환]20211030_091757.jpg


상주인 유진이는 재담가로 합리적인 생각과 속 깊은 말로  뼈를 때린다. "누나, 큰이모(울 엄마)가 우리집 오실 때마다 스페어민트 껌을 색깔대로 다섯 개를 사다 주셨어요. 그때는 '큰이모니까 더 비싸고 더 좋은 걸 많이 사다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했거든. 그런데 철이 들고 나서야 우린 부자고 애가 셋 뿐인데 이모는 교장 선생님의 박봉으로 애들 다섯을 키우며 공부까지 시키느라 고생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둘째이모부는 서울세관장으로 집안에는 모든 게 풍성했다. 울 아버지는 그 집에 다녀오시면 당시 귀했던 커다란 케이크 먹다 남은 것과 케잌에서 걷어낸 크림을 상자째 들고 와서 우리 다섯에게 나눠 먹이셨다. 그러고 나면 매일 푸성귀만 먹던 위장이 크림에 놀라 우리 다섯은 화장실로 번갈아 내달리기도 했다.


서울 티가 화려한 사촌들의 옷에 비해 늘 꼬질꼬질하고 낡은 우리 다섯의 의복은 여름방학에 서울 외갓집 나들이 갈 적마다 나를 주눅들게 했다. 집에 돌아와선 엄마에게 우리 집의 가난을 두고 투털거리면 엄마는 조용한 웃음으로 나를 타일렀다. "얘야, 우린 한 달에 쌀을 한 가마씩 먹는단다. 그래도 가을이면 쌀 열네 가마를 사 놓고, 장작을 광으로 가득 준비해둔다. 커가는 너희들 배를 곯지 않고 겨울을 따숩게 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혠 줄 아느냐?" 그 말씀에 난 할 말을 잃었고 며칠 지나면 서울에서 묻어온 망상은 자연과 책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지곤 했다


엄마는 요령을 모르는 시골 교장의 사모님으로서 손아래 세 자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지만, 늘 부지런하고 당당했고 실버타운 20년도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당신의 품위를 잃지 않으셨다. 그곳의 모든 종사자들이 울 엄마 '조장로님'처럼 말씀이 적고 매사에 감사하며 늘 미소로 답하시는 어르신이 없다면서 존경했다. 엄마의 침묵은 가톨릭 인사인 당신 사위(보스코)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겠다는 배려에서 온 것이기도 했다.


[크기변환]20211030_094248.jpg


[크기변환]IMG_8370.JPG


[크기변환]20211030_103530.jpg


[크기변환]20211030_103800.jpg


빈소에서 밤샘을 금지한 탓에 밤늦게 빈소를 나와 평택에 사는 훈이서방님 집에 가서 묵고서 토요일 아침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이모의 출상, 화장 그리고 이모가 20년을 보낸 '유무상통'의 납골당 '하늘문'으로 모셔가 유골을 봉안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모의 바로 옆자리는 문정주섐 아버님이 먼저 와 자리 잡고 계셨다


우리가 약속 시간보다 반 시간 먼저 도착했기에, 하관식에 해당하는 유골함 봉안 예식을 거행키로 한 실버타운 원장님이 성지에서 주교님과 드리는 공동미사를 미처 못 끝내서 보스코가 위령기도와 봉안식을 주관하였다. 큰이모는 스콜라스티카라는 이름으로 입교하셨고 며느리는 크리스티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친정은 모두 기독교신자 집안이지만 외갓집은 그 동안 큰외숙모와 외삼촌, 그리고 큰이모가 가톨릭으로 입교하여 돌아가셨고, 막내이모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신자다.) 


장례예식장에서 화장터가 1분 거리, 화장터에서 유무상통의 '하늘의 문'까지 자동차로 10분 거리다 보니 오전 중에 장례가 다 끝났다. 사촌들만 남아 점심을 먹고 헤어지고 우리는 갈수록 낯설고 답답한 수도권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휴천재로 돌아오던 길. 대전에 다 와서 보스코의 핸드폰에 부고가 떴다


[크기변환]크기변환_20181225_165412.jpg

3년전 병상에서도 어제의 빈소에서도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시던 종수씨 어머님

[크기변환]20211030_193502.jpg


초딩(광주 서석초등학교때부터 친구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닌데다 보스코의 대자로 가톨릭에 입교한 종수씨 모친의 부고였다. 더구나 그 어머님이 3년 전 뇌경색으로 입원하셨을 적에 보스코가 찾아가 글라라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드린 터(2018.12.25)라서 우린 신탄진에서 차를 돌려 일산 복음병원으로 향했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32215


교통난이 하도 심해서 150킬로의 거리가 무려 다섯 시간 넘게 걸렸다. 빈소에서 우리 둘이 나복례(글라라) 여사의 안식을 비는 연도를 바치고 좀 머물다 우이동 집에 돌아오니 밤 11!


[크기변환]IMG_8387.JPG


내 다리에 쥐가 나고 온몸이 뒤틀리던 전날의 교통난을 벗어나려고, 또 온통 설악 단풍을 구경하러 떠나는 서울 사람들 차량을 피하려고 오늘 일요일에는 새벽 5시 반에 우이동을 나섰다천안부터 덕유산까지 한 시간 넘는 길을 짙은 안개 속을 달렸다. 두 노인과 영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이어선지 우리의 삶이 저 안개 속을 거쳐서 영원으로 밝아져 가는 고비를 거친다는 암시 같았다. 보스코가 간혹 "안개 낀 거리에서 거리로템즈강 부두에서 부두로..."라고 흥얼거리는 유행가처럼 '안개 낀 거리에서 거리로' 헤매는 시간만은 제발  짧았으면 한다. 


[크기변환]1635666522932-0.jpg


함양에 도착하니 미루네가 두 차례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우리에게 '시월의 마지막 날'을 위로해주러 기다리고 있었다! 미루네와 산청 석대리에 가서 임신부님의 11시 미사에 참례하고, 가을이 한 아름 꽃으로 단풍으로, 맑은 하늘로 안겨오는 동의보감촌에 가서 점심을 먹고, 그곳에 새로 생긴 출렁다리를 거닐며 서울의 가슴 답답하고 오염된 공기를 다 털어냈다.


[크기변환]20211031_124329.jpg


[크기변환]1635682697518-1.jpg


[크기변환]14025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