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9일 목요일. 맑음


며칠 전 인월을 지나다 보니 모내기가 벌써 끝났고 땅맛을 들인 모들이 고딩들 턱수염처럼 거뭇거뭇하다.  휴천재 옆논들은 천수답이어서 아직 물이 채워지지 않았고, 구장이 논갈이를 준비하는 참에 한남마을 용환이가 트랙터를 몰고 오기 전 먼저 트랙터 커다란 바퀴가 닿지 않는 논가 귀퉁이진 곳을 소형 관리기로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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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떼는 걸음걸음 마다 '내가 무슨 뻘짓을 하고 있노?' 하는 표정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다. 건강이 쇄약해져서겠지만 평생을 농사로 살아온 얼굴에 기쁨이나 슬픔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일하다가 쉴 때는 우리 매실나무 그늘에 풀을 깔고 앉아 두 홉 들이 소주 한 병이 그의 새참이다. 저렇게 소주라도 안 마시면 무슨 힘으로,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지을까


"올핸 비가 너무 안 내려 전기로 물을 퍼야 하는디 전기세 내고 나믄 고생한 게 제일 큰 값이고밥이라야 한 달에 10킬로도 못 먹는데도 놀 줄 몰라 농사 짓는기라." 땅이 꺼지는 그의 한숨이다. '고생한 게 제일 큰 값!' 노동 자체에 제일 큰 보람을 느낀다는 표현이다. '놀 줄 몰라 농사짓는다'는 체념도 같은 신념에서 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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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감이 살아 계실 때도 같은 탄식이었다. "놀라케도 놀 친구가 엄서. 이우제, 백연에 한 개 남았던 친구마저 북망산천에 내다버려 뿔고, 사람 구경이라도 하려면 화계라도 나가야 하는디 아는 얼굴이 한 개도 엄서. 사는 재미가 한 개도 엄서." 그래선지 그분은 전동차를 몰고 서둘러 저승길로 오르셨다. 그곳에 먼저 가 기다리던 마나님 만나 깨가 쏟아지려나? 갔다 온 사람이 없으니 궁금할 뿐이다.


작년에 저승으로 가시기 직전 우리 텃밭에 심은 밤색 해바라기 모가지에 사정 없이 낫질을 해서 몹시 나무랐던 기억이 안 좋아 어제는 그 해바라기 씨를 유영감님 꽃밭에도 심어 드렸다. 하도 가물어 씨가 나오기는 할지 기약이 없다. 그걸 미리 알아 남의 무덤가 조화들을 모조리 뽑아다 당신 집터에 꽂았을까? 아직도 집옆에 매달린 빛바랜 플라스틱 꽃들이 더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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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그 집 현관을 두른 넝쿨장미는 사정 없이 곱게 피어 보는 사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든다. 며칠 피었다 시드는 꽃도 꽃잎이 떨어진다 서러워하나 이듬해에는 또다시 피어나지 않던가? 하기야 그래서 한번 뿐인 인간 생명이 더 귀하게 여겨지겠지.


수요일 저녁 수원 사는 '천상의 모후 프란체스코 수녀회' 수녀님들이 엠마오 소풍으로 산청 미루네를 찾았다. 미루 혼자 (남편은 산티아고 순례 가고 없는 요즘에미친 여자 널 뛰듯 사업 운영에 손님 대접에 너무 고생하고 있어 위로 차 나도 보스코랑 그 집을 찾아가 수녀님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밝고 즐거운 삶 속에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분들의 삶이기에 행복이 얼굴에 흘러넘쳐 우리까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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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목요일 오전 11시에 실상사 '지리산종교연대' 모임에도 수녀님 일행이 함께 했다. 주지 승묵스님이 절도 구경시키고 얘기도 함께 나누며 점심 공양까지 대접하여 수녀님네 엠마오 소풍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졌다. 누가 찾아와도 환대하는 불교의 태도에서 깔끔덩어리 가톨릭이 배울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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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울 가기 전 텃밭 단속을 했다. 겨울이면 별일 없이 다녀올 서울 나들이도 텃밭과 화단에 딸린 식구가 많은 여름이면 한번 다녀오기도 번잡스럽다. 그러나 산골에서 그것도 안 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 드물댁이 서울 가져가 나누라고 우엉을 잔뜩 꺾어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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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산청 도서관에서 "토종씨앗 할머니 임봉재"라는 주제로 봉재 언니의 허스토리 대담이 있었다. 미루가 대담을 맡았는데, 언니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우리에게 각인되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 커 보였다. '함께 평화'에서 농민여성으로 평생을 살아온 언니에게 물었다. "평화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언니의 대답이 오랫동안 내 귀를 울린다 "'평화'하면 맨 먼저 얼굴은 미소를 짓게 돼요. 그런데 평화의 소녀상을 보면 가슴은 왜 이리도 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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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날 봉재언니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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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5.18 아침 일찍 김성용 신부님이 망월동묘지를 방문하신 사진을 바라보는 내 심경 그대로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집단의 재집권으로 자꾸만 가라앉기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을 잊고 싶다는 유혹에서 내 심기를 일으켜 세우며 5.18의 영령들이 이 나라를 붙들어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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