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일 화요일, 맑음


낙엽이 우수수 쏟아지는 송전길을 걸었다. 먼저 떨어진 낙엽은 이리저리 바람에 불려서 몰려 다닌다. 이승을 떠나는 혼백들의 달음질을 떠올리는 광경이다. 산위로부터 마을로 내려오던 가을이 산 중턱에 머물러서 조금은 망설이는 요즘이다.


[크기변환]IMG_1614.JPG


[크기변환]20221031_165703.jpg


어제 텃밭 무와 배추에 물을 주다가 당겨진 호스에 걸려 무가 댓 개 뽑혀 나왔다. 배추를 찬찬히 살펴보니 백 포기 넘는 배추 중 두어 포기에 진딧물이 잔뜩 끼어 있다. 배추를 들여다 보던 드물댁이 화들짝 놀라는데 마치 초등학교에서 반장이 자기 반을 잘 관리 못해 담임선생님 앞에 쭈삣거리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다 배추를 뽑아들었다. 유영감네 논까지 멀찌감치 가서 두런거리면서 진딧물 낀 배추의 껍질을 벗기며 배추한테 야단을 친다. “으짜 너희들은 요래 쪼잔하냐? 다들 멀쩡한디 어쩌라고 병을 갖고 왔다냐?”


[크기변환]20221030_082607.jpg


배추야 발이 없어 어디 마실 나가서 병을 옮겨올 처지도 아니니 그 배추가 심겨진 자리 밑에는 개미집이 있었을 게 틀림없다. 굳이 그 자리에 심어 달라고도 안 했을 배추가 성가신 진딧물에 시달리면서도 속을 채워 온 게 기특해서 집으로 들고 올라와 겉잎은 삶아 배추국을 끓이고, 속은 겉절이를 했다. 참 달고 맛나다. 무로는 채 김치를 했다. 휴천재 무 농사는 우리 딸들에게도 소문이 났다. 


서리를 비켜간 축대 사이에 기특한 호박 줄기가 호박을 숨겨놓고 잎으로 추위를 가리며 키워 내고 있었다. 내가 숨겨진 호박 두 개를 찾아냈는데 드물댁은 네 개나 찾아내 자랑스럽게 내민다. '둬 개 더 있는디 그건 쬐깐하니 며칠 후 따요.'


[크기변환]20221030_163604.jpg

나락을 말리고 당그레질하고 가마니에 담고 실어가는 일은 아짐들의 몫

[크기변환]20221030_163632.jpg


동네 아짐들이 해마다 기운이 꺾여 가는 게 눈에 보여 안타깝다. 백 세 손윗 동서의 치매를 거두면서도 용케 그 많은 들일을 해내던 화산댁이 올해는 만날 때마다 어딘가에 주저앉아 있다. 고맙게도 힘 깨나 쓰는 드물댁(이 동네에서 논밭이 없는 유일한 아낙)이 그 아줌마 일을 거든다. 먼 친척이 되긴 해도 내 몸 아까운 나이에 남을 돕는 건 그만큼 드물댁 심성이 고와서다


화산댁이 참 고마워한다. “작년에만도 참나무지사는 서울댁네로 내빼서 내 차지는 오지도 않드만 올해는 서울댁이 병원에 입원해서 내 차지가 됐고마. 이쁘고 고마워 죽겠어라.” (서울댁은 이 동네 출신으로 오래 서울 살다 내려와 한길가 꼭대기에 집을 짓고서 서울댁이라는 택호를 얻었다.) 나와 헷갈릴까 봐 나더러는 교숫댁이라 부른다.


[크기변환]IMG_1585.JPG


서울댁네는 집도 넓고 멋지게 지었는데, 아짐이 병원에 갔으니 저 집도 다른 집처럼 빈 집으로 버려질까 염려된다. 그걸 눈치챈 서울댁이 자식들더러 "제발 요양원 보내지 말고 집으로 데려다 도!" 라고 사정사정한다는 드물댁 전언. 안주인이 마지막으로 떠나면 자식들이 들어와 살지도 않고 팔지도 않아 마을에 빈집이 자꾸 늘어난다. 이러다간 십여 년 후면, 우리 휴천재를 포함, 온 마을이 인적 없는 동네가 되겠다.


[크기변환]20221031_171847.jpg


송전길을 걷다 보면 걸음을 못 걸어 전동차로 밭에 출근해서, 땅에 몸 전체를 엉덩이로 밀고 다니며 서리거지 고추를 따거나 양파를 심는 할매들을 본다. 저렇게 땅바닥을 기면서라도 (대처 아들네로 안 가고 요양원에도 안 가고) 집에 머물러 살다 죽기가 소원들이다. 흙에서 자라서 흙을 만지며 살아온 어매들의 유일한 소원. 용산댁도 자주 넘어지고 밥 해 먹는 걸 잊어버리자 아들들이 가까운 요양원에 모셨다. 이장 마누래 제동댁이 그 요양원 부엌일을 하는데 어쩌다 그미를 보면 용산댁이 손을 꼭 잡고 "나 우리집 좀 데려다 줘. 응?" 애걸한단다.


[크기변환]1666968821364-0.jpg


빵기가 로마에 있는 세계식량기구(FAO) 회의에 갔다가 초딩 시절 친구들을 만난 사진을 보냈다. 40여 년 세월이 걔들 얼굴에도 어김없이 자리를 잡아 내가 그곳에 살던 때의 내 얼굴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 80년대까지 함께 지내던 카르멜라, 세레나, 쟌니... 내 친구들 얼굴이 이젠 가물가물하다.


[크기변환]1667302900603.jpg


제네바 작은손주가 몇 해 전부터 조르던 강아지를 샀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우리 집안에는 호랑이가 세 마리(, 아범, 큰손주 시아)나 있어 개가 안된다.'고 포기해 왔는데 과연 강아지를 잘 키워낼까 모르겠다. 작은손주와 강아지의 눈을 보니 누가 더강아지다운지 모르겠다.


11월 1일. 오늘로 보스코가 수술한 지 두 달. 몸도 많이 좋아지고 정상에 가까워져 내가 '가사노동 8주 유예'를 준 기간이 끝나 설거지와 청소로 복귀시켰다. 아침식사 후 자진해서 싱크대로 가 설거지를 시작했으니 이젠 내 팔자 필 일만 남았다.


[크기변환]20221101_102652.jpg


오늘도 해거름에 송전길을 걸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쉽게 말해서 성인성녀로 뽑히지 못한 채 천당간 사람들 전부를 기리는 축일인데, 수호성인이 따로 없는 모든 신자들의 '영명축일'인 셈이다. 


보스코의, 젊은 엄마들과 함께 드리는 로사리오(영광의 신비 4)

'천안함'(2010 이명박), '세월호'(2014 박근혜)에 이어 '이태원'(2022 윤석렬). 보수정권마다 맞는 재난은 사건 진상마저 밝혀지지 않은 채 희생 당한 젊은이들의 목숨만 안타까워 그 영혼들을 위해 로사리오를 바치며 걸었다. 따라 걷는 나나 보스코의 걸음이나 눈에 띄게 느려진다.


[크기변환]20221101_16565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