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383

20221025일 화요일. 맑음


우리집 남자를 이해하는 데는 50년도 짧다. 쌍문동 뒷산 마지막 골목엔 몇 채 안 남은 단독 주택들이 있는데, 울타리 안에는 대부분 감나무 대추나무 꽃사과나무 한두 그루가 전부다. 그러나 터가 제법 되는 우리 집엔 큰 나무만도 열 그루는 자라고 있다


[크기변환]DSC08008.JPG


[크기변환]IMG_1656.jpg


나무들은 매해 무럭무럭 커서 잘라내지 않으면 밀림이 된다단감나무가 가지를 엄청 뻗어 주목도 덮고 으아리 덩쿨도 완전히 덮었다. 작년의 해거리(열 개도 안 열렸다)와 달리 금년에는 주렁주렁 많이도 열려 여러 사람이 나눠 먹고도 지리산에 실어갈 만큼 남았다.


모처럼 집에 온 빵기더러 단감나무 가지치기를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보스코가 잠시 사라졌다가 들어와서는 자기가 가지치기를 다 했다고, 아들더러 너는 할 게 없다고 한다. 마당 일에 그다지 열성이 없던 남자라서 아무래도 수상해 내가 나가보니 집안을 드나들며 사람 머리까지 닿는 잔가지 두어 개를 잘라 마당 구석에 던져 놓은 게 전부였다


열을 받은 내가 톱을 들고 나가 굵은 가지 여닐곱 개를 잘라버렸다. 그리고 아들더러 처리하랬더니, 그 많은 가지를 하나로 꽁꽁 묶어서 나뭇단에 쏙 들어가 얼굴도 상체도 안 보이게 '나무사람'이 되어 내 앞에서 사라졌다. 50년 함께 산 남자의 속도 모르겠지만, 49년 알고 지낸 아들의 모습도 기상천외하다.


[크기변환]20221025_122238.jpg


어제 서울집을 정리하고 새 차 아반테(큰딸이 우리집 '애마'라고 이름 붙였다)에 무언가 가득 싣고(서울 오갈 때마다 승용차를 '1톤 트럭'으로 둔갑시킨다는 게 보스코의 불평이다. 그래서 그의 눈칠 보느라 무거운 짐을 싣는 일도 거의 주부인 내가 혼자 한다.) 3시경 평택에 사는 막내 서방님 집으로 떠났다. 올해는 추석에도 서로 못 보았고, 나도 무릎이 아파 중간에 하룻밤 자고 가면 지리산행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막내동서는 언제나 하듯 정성껏 저녁상을 준비하고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막내 동서 얘기로는, 둘째 시숙(준이서방님)이 3년 전 세상 떠나고 이번에 큰 시숙이 큰 수술을 받자 맏형에 대한 자기 남편의 정이 한결 더 지극해지더 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기댈 곳 하나 없을 때 네 형제가 더 끈끈하게 이어졌고 맏형의 역할이 컸기에 나이 들어서도 보스코 형제들은 특별히 서로를 챙긴다.


[크기변환]20221024_182027.jpg


나도 막내동서가 고맙고 이쁜 건 마찬가지다. 소심하고 지나치게 남을 챙기느라 자기 몫을 제대로 못 챙기는 서방님에 비해 동서는 너무 당당하고 씩씩하여 어미 닭이 새끼 병아리 돌보듯 서방님을 보살핀다. 그미도 나 못지 않은 '잔소리 왕'이지만 속 터지는 성씨 남자들과 살아본 여자들만 그 속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자기 남편이 잠시 아파 병원에 하루를 입퇴원하자 '살아서 숨쉬는 것만으로 고맙다. 다시는 잔소리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데, 그 결심이 딱 사흘 가더란다. 보스코처럼 훈이 서방님도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화도 안 내고 무슨 음악 소리 듣듯 빙긋이 웃기만 한다


[크기변환]20221025_075330.jpg


'남편이 끊임없이 사고를 쳐서(초등학교 선생님이 사고를 치면 무슨 사고를 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늘 해결사로 살아야 하는 숙명'이라고 푸념하는 동서. 키가 커서(훈이 서방님보다 머리 하나가 크다) 늘 아픈 허리를 주체 못하면서도 자신만의 비법으로 요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동서 아니면 어떻게 오늘의 '성훈 교장선생님'(은퇴)이 있었겠는가! 인생은 오묘한 신비다.


보스코의, 젊은 엄마들과 함께 드리는 로사리오(영광의 신비 1)

[크기변환]20221025_065530.jpg


오늘 아침 동서네 12층 아파트에서 내다보는 송탄벌의 해 뜨는 광경은 단독주택으로 땅에 붙어만 살아온 내게는 색다른 풍경이었다.  '서울집이 재개발되면 이럴 텐데...' 하면서도 아파트는 내게 영 익숙해질 수 없을 듯하다.


아침상도 동서가 걸게 차려냈다. 우리집도 엥겔지수가 높고 더구나 아침상은 하루에 제일 걸게 차려 먹긴 하지만 동서네 아침상은 그보다 훨씬 푸짐하다. 9시에 평택을 떠나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덕유산을 지났다. , , ,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크기변환]20221025_075253.jpg


쉬엄쉬엄 구경하며 지리산에 도착하니 두 시가 넘었다. 보스코는 아내에게서 하사받은 '8주 유예'(수술 후 8주간은 집안일은 아무것도 안 시키겠다며 10월말까지는 집안청소와 설거지를 안 시키는, 아내로부터의 특전)를 만끽하는지 '화초서방님'('화초마님' 비슷한 말?)처럼 서재로 올라가 책상에 앉고 나는 아픈 다리를 끌면서, 아주 불쌍한 얼굴을 해가면서, 혼자서 '1톤 트럭 아반테'에 싣고 온 짐을 정리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니 두 주 만에 돌아온 휴천재의 하루가 저물었다.


 

문서 첨부 제한 : 0Byte/ 8.00MB
파일 제한 크기 : 8.00MB (허용 확장자 : *.*)
번호
제목
글쓴이
4383 "너만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를 너보다 더 사랑한다.”라는 그분의 말씀 [2024.4.18] imagefile
관리자
309   2024-04-18
2024년 4월 18일 목요일 그제 밤 11시부터 도진 보스코의 야간통증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허리 수술지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좌골로 내려가, 허벅다리를 타고 무릎까지 전달되는 통증은 일시도 멈추지 않아 견디기 힘들다고 몸부림친...  
4382 내 일기장에서 묘사되는 보스코의 생활패턴: "아내에게서 “끌려가고 걸리고 먹이고 입히고...” 2024.4.16 imagefile
관리자
387   2024-04-16
2024년 4월 16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깨어나니 온 몸이 어긋난 듯하다. 집에서 가져온 어린이용 베게와 얇은 무릎 담요로는 타일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못 막는다. 가족이 아니면 간병인을 두어...  
4381 “당신 나 이렇게 고생시키고 안 미안해?” “왜 미안해, 엄만데?” [2024.4.14] imagefile
관리자
307   2024-04-14
2024년 4월 14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남원의료원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휴천재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또 다르다. 마치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만날 때 표정을 달리하듯 낯설지만 신선하고도 경이롭다. 우리 산은 가까이에서...  
4380 "할아버지 허리가 부러졌데!" [2024.4.11] 2
관리자
603   2024-04-12
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총선날, 수요일 아침 일찍 아래층 진이와 아들 한빈이가 이층으로 인사왔다. 한빈 아빠는 선거일을 맞아 휴가를 내고 주말까지 처가집 불루베리 농사를 도우러 남호리 농장으로 갔다. 한빈이가 초등학...  
4379 "그리 거둘 남편이라도 있는 걸 고마워 하라구요!" [2024.4.9] imagefile
관리자
285   2024-04-10
2024년 4월 9일 화요일. 맑다 흐리다 월요일 새벽 왕산 오른쪽으로 해가 떠오른다. 춘분이 지나면 해는 왕산의 오른쪽으로 자꾸 움직이다 하지면 이억년 묘가 있는 휴천재 왼편 솔밭으로 옮긴다. 거기서 다시 해뜰녘이 남쪽으...  
4378 "4월에는 4.1.9!" [2024.4.7] imagefile
관리자
279   2024-04-08
2024년 4월 7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식목일. 오전 일찍 집안에 들여놓았던 화분 나머지를 모두 밖으로 내놓았다. 화분걸이는 3층으로, 화분받침은 우물가로 옮겨졌다. 겨우내 집안에서 꽃을 보여준 보시로 화분받침 등 내년에 ...  
4377 꿀벌 소리가 한결 줄어든 지리산의 봄 [2024.4.4] imagefile
관리자
273   2024-04-05
2024년 4월 4일 목요일. 흐림 어제는 날씨가 덥고 해가 모처럼 나오니 일하러 나온 벌 가족이 활짝 핀 벚나무 꽃 속에서 꿀맛을 실컷 보고 꿀자루도, 꽃가루도 채워날랐다. 요즘은 어째서 저 아름다운 꽃에 벌 한 마리 얼씬...  
4376 휴천재 하지감자 놓기 [2024.4.2] imagefile
관리자
287   2024-04-02
2024년 4월 2일 화요일. 흐림 전년에는 3월 20일 전후하여 감자를 심었다. 석달쯤 지나 하지 무렵에 감자를 캐니 ‘하지감자’라고도 불러 가을에 거두는 ‘단감자’(고구마)와 구분한다. 초가을에 잉구씨가 휴천재 텃밭을 기계로...  
4375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깝고 경건한 성삼일들일까? [2024.3.31] imagefile
관리자
302   2024-04-01
2024년 3월 31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저녁. 바람이 불고 비도 내려 날씨도 험한데 드물댁이 집에 없다. 마을회관엘 들여다보니 드물댁이 회관에 안 나온지 오래됐단다. 이런 날 ‘건강하려면 걸어야 한다’고 하도 채근을 해...  
4374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한없이 부끄러워진 기도문 [2024.3.28] imagefile
관리자
315   2024-03-29
2024년 3월 28일 목요일. 하루 종일 비 장미 순이 곰살스럽게 고개를 든다. 장미에는 늘 흰가루병과 진딧물 깍지병으로 중요한 순간에 꽃을 놓치므로 올해는 정성껏 소독을 해준다. 더구나 거름발이 좋아야 빛갈과 송이가 실...  
4373 마을 입구 현수막 [2024.3.26] imagefile
관리자
369   2024-03-27
224년 3월 26일 화요일. 비온 후 갬 한 주간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거센 바람이 정자에 놓아둔 의자들을 모조리 날려보내 화단에 뒹굴고 있다. 정자를 에워싼 난간을 넘어서 날아갔으니 봄바람치고 그 세기를 알만하다. 마당...  
4372 '엄마처럼 포근한 친구'를 꼽으라면... [2024.3.24] imagefile
관리자
330   2024-03-25
2024년 3월 24일 일요일. 흐리다 비옴 내 친구 영심이는 참 따듯한 친구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미에게 부탁하면 싫다거나 힘들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다 받아준다. 내가 처음 그미를 만난 30년전쯤. 앞앞집에 사는 ...  
4371 "'죽을 뻔' 갖고는 사람이 안 변해" [2024.3.21] imagefile
관리자
327   2024-03-22
2024년 3월 21일 목요일. 맑음 20일 수요일. 한신 아우동문들과 만나는 날. 11시에 덕수궁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물과 간식 등을 챙겼는데, 오다 보니 물은 신발장 위에 놓고 왔다. 언제부턴가 늘 뭔가를 빠...  
4370 그래도 '약값은 하는 노인' [2024.3.19] imagefile
관리자
380   2024-03-19
2024년 3월 19일 화요일. 흐리다 맑다 찬바람 서울의 거리를 자가용으로 달릴 때 드는 시간은 제멋대로여서 아무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아침 8시에 우이동에서 나가나, 9시10분에 우이동에서 나가나 ‘서울대 입구’에 도착하는 ...  
4369 막내동생의 큰아들이 장가가는 날 [2024.3.16] imagefile
관리자
334   2024-03-17
2024년 3월 17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새벽. 며칠 걸려 휴천재의 봄을 채집한 나물들을 차에 실었다. 논두룩에서는 쑥, 달래, 민들레, 텃밭에서는 양배추, 브로콜리, 쪽파를 뽑아 왔으니 감자를 심으려면 배추밭에 묻어 놓은 무...  
4368 "여보, 나 언제까지 머리 염색해야 해?" "내가 당신 누군지 못 알아볼 때까지" [2024.3.14] imagefile
관리자
327   2024-03-14
2024년 3월 14일 목요일. 맑음 수요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니 1센티쯤 되는 흰머리가 오른쪽 귀로부터 이마, 이마에서 왼쪽 귀까지 흰띠를 두른 듯 자라 올라있다. 염색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는 2주쯤 검정색으로 으젓하다 3...  
4367 휴천재 봄을 챙기는 한나절 [2024.3.12] 2 imagefile
관리자
386   2024-03-12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흐림 보스코가 무릎 수술을 받고 한 주간이 지나자 다리를 움직이는 게 어느 정도 자유롭다. 상처 때문에 거의 열흘 목욕을 못 했으니 찝찝하련만 내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머리만 닦아주는 것으로 ...  
4366 허리 굽은 아짐들이 밭머리에서 굼벵이처럼 구물거리는 봄 풍경 [2024.3.10] imagefile
관리자
385   2024-03-11
2024년 3월 10일 일요일. 맑고 포근한 날씨 며칠 온화하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테라스 처마에 걸어 놓은 풍경소리가 집안에서도 들리니 바람결이 세다는 신호다. 화려한 매화에도 벌이 날아오지 못할 만큼 날씨가 차다. 사...  
4365 '도둑 들기에 참 부적절한 시간대' [2024.3.7] imagefile
관리자
392   2024-03-08
2024년 3월 7일 목요일. 흐림 '큰딸' 엘리는 '아부이'를 내가 보살피고 있는 터에, 내가 망가지면 대책이 없으니까 나더러 제발 일 좀 그만 하고 일 좀 벌리지 말라고 경고음을 방방 낸다. 반면, 보스코가 '데꼬 들어온 딸...  
4364 '화초부인(花草婦人)'은 들어봤지만 '화초부인(花草夫人)'도 있는지... [2024.3.5] imagefile
관리자
485   2024-03-06
2024년 3월 5일 화요일. 흐리고 봄비 ‘해남 땅끝’에서 다친 보스코의 다리가 많이 아프고 불편한 것 같았다. 워낙 엄살이 심해서 얼마만큼 받아줘야 하나 계산하던 사흘간이었는데, 연휴 3일간의 통증을 내가 상비약으로 가져...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