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5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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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부터 이 동네 고양이 세계를 꽉 잡고 있는 수쾡이가 있다. 덩치가 좋은 회색 고양이로 걷는 것도 느릿느릿 근엄하다. 먹이 있는 곳(예컨대 휴천재 부엌 뒤꼍)에 먼저 진을 치고 버티고 있으면 다른 고양이들은 감히 근처에도 못 갔다. 암컷이 새끼를 낳아도 흰색에 회색, 얼룩에 회색이어서 그 수컷의 새끼들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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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드물댁 마당을 지나다 보니 식사 후 뭔가 남은 음식을 주어왔는지 대여섯 마리 고양이가 토방에 모여 있다. 물론 그 회색 고양이도 있었는데 예전 같은 위용은 사라졌고 털의 윤기도 없이 드문드문 빠져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볼품없던 검정고양이가 요새는 머리를 세우고 고양이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제1인자 위치를 일깨워주는 중이다. 척 봐도 한눈에 보인다. 드물댁 셋째딸이 생선가시를 내주자 그 검정고양이가 좌중을 한번 훑어보고는 먹이에 다가간다. '내가 먹는데 이의 없지?' 하는 태도다.


나를 돌아보던 회색의 수쾡이는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드물댁 맞은편 외양간 뒤로 사라졌다. 어느 새 한눈까지 멀어 있고, 걸음걸이도 느려졌고 내가 쫓아도 달리지를 못한다. 오늘 오후 내내 다시마와 멸치로 다싯물을 내린 터라 남은 것을 뒤꼍에 내놓았더니 그녀석이 먹는데 멸치 아닌 무를 먹고 있었다! 보는 마음이 언짢았다. 요즘 오후마다 나가는 산보길에 갈수록 느려지는 보스코 발걸음이 오버랩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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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에 사는 길냥이들이어서 근친간에 새끼를 낳다 보니 그럴듯한 외모의 고양이는 저 회색 수쾡이가 마지막일 듯하다. 이 마을 아짐들도 '제동댁, 내동댁, 본동댁, 중동댁, 한동댁, 가동댁, 우동댁, 상동댁, 외동댁'으로 이어지는 택호로 보아 한 동네서 앞집, 옆집, 뒷집으로 시집을 가다 보니 모두가 혈연으로 이어진 친척이다. 그래선지 아니면 농사일로 고생해선지 얼굴이 모두 어슷비슷하다


하지만 대처로 나간 자식들이 데리고 들어오는 각시나 손주들은 모두 예쁘고 귀엽다. 옛날엔 ‘100리 밖에서는 사돈을 안 삼는다했다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모두 외지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국제결혼도 흔하니 인종개량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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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느티나무독서회에서 읽는 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동네 책방」이다. 출판사 '사계절' 사장님 눈에는 동네 책방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동네 작은 책방에서 책을 파는 일 외에 마을의 소통과 문화의 중심이 된 책방 주인장들의 인상 깊은 이야기들로 선선이 깊어가는 가을을 덮혀주었다


피와 살을 가진 체온이 통하는 사회, 동네사람들의 일과를 이야기나누고 그 책의 메시지가 삶으로 확장되어 책방이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는 삶의 질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으려니 한다. 어찌 보면 책방 순례기이기도 하고 책방 주인의 자기 삶의 일상을 내어 보이는 에세이들로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대로 내보여주기에 신선했다.


보스코 책장의 아우구스티누스 번역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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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해서는 절대로 돈은 못 번다. 그러나 그곳에 진정한 열정을 쏟아부은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보스코처럼 평생을 책을 쓰고 번역하는 일로 보내는 남편이나 100여권의 번역출판으로 생업을 삼은 둘째서방님(성찬성)을 가까이서 보니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가치관이기도 하다.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 마늘 너댓 접은 깠다적당히 깔려고 꾀를 부렸는데 드물댁이 "그냥 확 다 까버려야 나중에 먹든 김장을 하든 무슨 수가 난다"고 선동해서 싫은 척 넘어갔다손 밑이 어럴하고 아프지만 올해는 내가 농사지은 마늘로 김장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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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군보건소에서 치매검사를 하러 마을회관에 나온다는 마을방송이 아침에 있었다. 나야 작년에도 보스코랑 치매 검사를 받았지만(보스코의 '장롱면허증' 갱신 땜에) 글을 모르는 아짐들은 성가셔하므로 내가 드물댁과 함께 가주었다. 몇몇 아짐들은 재검에 걸려 금요일 오후에 보건소에 나와 더 정밀한 검사를 하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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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는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가서 11시까지 농구를 했습니다"라는 문장을 한번 읽어주고 기억해 내라는 질문인데, 벽시계 볼 줄도 모르고, '농구'가 뭔지도 모르는 할매들에게, 그 문장을 외워보라니 너무 어려운 문제다. 자식들이 알면 놀랄까 걱정하기에 내가 금요일 그미를 보건소에 데려가기로 하고 자식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가 걱정이던 세월이 바뀌어, 더구나 장수의 시대가 오니 이제는 부모가 탈날까 자식들의 걱정이 크다. 어느덧 치매는 자식들의 가장 무거운 근심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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