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8일 화요일. 맑음


입동이 어제였는데 날씨는 여전히 따뜻하다. '바깥 인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분은 하느님뿐. 요즘은 아침 햇살이 방안 북쪽 끝까지 깊숙이 들어온다. 휘발유와 경유는 세금을 내려 싸졌다지만 여전히 비싸고, 도시 가스도 안 들어오는 가난한 동네나 시골은 등유를 써야 하는데 취약계층의 삶에는 정부의 보살핌도 없어 가난한 사람들은 몸으로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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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을 돌리면 '!' 하는 소리가 돈 다발 타는 소리로 들려, 추워도 전기 담요 한 장으로 버틴다는 이웃 아짐들이 많다우리도 점심 때만 쓰는 식당채는 아예 난방을 끄고 해가 나면 덧문을 다 열어 햇볕이 나눠주는 열기를 받아 데우고 산다. 그래도 지난 정월에 휴천재 창문을 이건창호로 바꾸고서는 뽁뽁이 붙이고 문풍지 붙이는 수고도 덜고 실내열기를 빼앗기는 손실도 덜해 그만큼 금년 추위도 덜하리라 본다.


입동이 지나자 보스코가 서리가 내릴지 모른다면서 텃밭에 아직도 싱싱한 고추가 아깝다고 서리를 시작했다. 어제는 붉은 고추를 (벌레먹은 것까지) 따오더니, 오늘은 파란 고추도 따다 두면 먹을 수 있느냐 묻는다. "여린 것은 소금물에 삭여 고추 장아찌를 담고, 매운 건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음식에 썰어 넣는다." 했더니 오늘 아침에는 아예 고추를 뽑아 파란 고추를 소쿠리 하나 가득 따 왔다. 그의 건강이 많이 회복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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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채에 붙은 차고 지붕을 잉구씨가 끝마쳤는데 빗물받이 홈통이 빠져 마저 해달라 했다. 어제 홈통을 설치하는데 잉구씨가 안 오고 주열씨가 왔다. 홈통 다는 방법을 잉구씨에게 일러주다 하두 몬 알아들어 속이 터져서 내가 와 뿌렀소.” 친구 사이엔 네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네 일이다. 산속에 살다 보면 타인의 필요가 도회보다 더 절실하다.


나도 주열씨한테 부탁해서, 거제 친구 율리아노씨(고인)가 심어준 금목서를 살리기 위해 그 곁의 비자나무와 탱자나무를 베고 그 언덕에 금목서가 기대서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인데 고맙게도 선선히 톱질 해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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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후에는 문상마을 위로 산봇길을 잡아 잔닥재를 넘어 진이네 농장으로 내려갔다. 가을이 깊어 낙엽이 인적 없는 길을 수북하게 덮고 산비탈 나무들은 우리가 보던 처음보다 세 배는 컸다. 진이네가 30년 전 마악 귀농했을 때를 생각하니 우리도 그 부부와 '먼 길을 함께 달려왔구나' 싶었다


여름 겨울 방학 때면 보스코는 어김없이 휴천재로 내려와 방학내 집필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 진이네가 어디 다니러 가 집을 비우면 우리가 날마다 그 농장으로 올라가 개장에 있는 개들에게 사료와 물을 주고, '유황 오리'에게는 유황 섞인 모이와 물을 주고, 낮이면 밖으로 나가지만 밤이면 돌아오는 흑염소 떼에는 짚과 소금을 주곤 했다. 진이네가 귀농해서 얼마나 다채로운 고생을 했는지 보여주는 산비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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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밤도 줍고 꽃도 꺾고 자연과 가까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온 세월. 염소막 옆에는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너무 추운 곳이었건만 푸코의 작은 형제회 신관 수사님은 염소들과 함께 그곳에서 혼자 지내며 피정을 하곤 했다. "가난이 나를 구원했다"는 '사하라 사막의 성인'이 창설한 수도회에서 워낙 가난한 삶을 선택하셨기에 수사님은 서울에서도 미화원으로 취직하여 노동하셨다(수련장 시절). 같은 회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도 병원 청소부, 난지도 쓰레기 줍기 같은 노동만 골라 하면서 제일 가난한 이들과 섞여 산다. 그 수도회를 창립한 샤를르 푸코는 지난 여름 성인으로 시성되셨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62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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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만 해도 지팡이 없이도 훨훨 날던 우리 부부가 오늘은 그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며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도 다리가 후들거려 조심조심 걸었다. 세월이 많이 갔다. 이번주 '마산주보'에는 위령성월을 맞아 세상을 떠난 마산교구 성직자 30명을 추모했는데 보스코와 가까웠던 지인이 절반을 넘었다. 휴천강변을 걸어 로사리오로 그 성직자들을 기억하면서, 또 겨울철이라 찾아와 휴천강에 뜬 철새 원앙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도 긴 날개짓으로 먼 길을 떠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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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워낙 천문을 좋아해서 오늘 밤엔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다 갉아먹는 개기월식을 테라스에서 함께 지켜보았다, 덜덜 떨면서. "다시 저 월식을 볼 때까지 보스코도 나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나누다가, 막내딸 '꼬맹이'가 올린 카톡을 보니, 오늘밤 같은 천문현상을 한국에서 다시 보려면 앞으로 200년 뒤라야 한다는 소식을 읽고서는 그런 욕심은 접기로 했다


더구나 교황도 걱정하고("이전 세대로부터 정원을 물려받은 우리가 후세에 사막을 넘겨줘선 안 된다"), U.N. 사무총장도 경고하는("인류,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가속 페달 밟고 있다") 말처럼 기후변화로 파멸을 향해 치닫는 인류의 운명도 5년여 밖에 안 남았다는 환경학자들의 계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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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보통 카메라로 찍은 레드문은 선명하게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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