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1일 목요일, 흐리다 해 조금 그리고 비

 

며칠 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며 배 밭에 떨어뜨린 배 봉지 속에 알이 굵은 배를 주워와 사흘간 자가 숙성을 시키다 오늘 껍질을 까서 맛을 보았다. 뭐랄까? 보스코는 요즘 길가에서 5천원에 열 개 주는 “꿀복숭아”(장마철이어서 전혀 꿀맛이 아니다) 수준이라 하고 나는 사탕수수 수준은 된다고 우겼다.

 

금년 2월 인도여행에서 거리 여기저기에 사탕수수를 짜서 쥬스로 만들어 파는 것을 보았다. 여행 중에 보는 모든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게 내 성미인데 보스코는 어지간히 새 음식 맛보는 걸 싫어해서 시인 “걸리버아저씨”를 따라가서 얻어먹었다. 그는 선선히 두 잔을 사서 내게 한 잔을 내밀곤 하였다. 그 맛은 어렸을 적 엄마가 우리 군것질꺼리로 심어서 잘라주셨던 사탕수수 맛이었다.

 

보스코가 아침나절 텃밭에 내려가 죽은 오이 줄기를 걷어내고  그물망과 받침대를 치우고 그 자리에 난 풀을 뽑았다. 일하러 가면서 새 속옷을 입고 나가더니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서 또 새 옷을 갈아입는다. 해가 구름 사이로 찔끔찔끔 얼굴을 내밀고는 곧 자취를 감추기에 아내는 그 잠깐사이라도 햇볕을 받으러 빨래걸이를 옮겨 다녀야 하는데, 한두 시간 안에 새 옷을 갈아입는 보스코의 셈법을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그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게다.

 

     DSC05608.JPG

 

오후에는 포트에 배추씨를 심었다. 포트의 밑구멍은 양파 망을 작게 잘라서 일일이 막고, 그 자리에 상토를 채우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어, 핀셋으로 배추씨를 한 알씩 넣은 다음, 손으로 살살 덮어, 양지바른 곳에 옮겨 놓고서,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다. 오늘이 11일 (음력으로 7월 12일이니 상현인데 상현에는 씨를 부리지 말라는 쟌카를로 신부님의 당부와는 거리가 조금 있다.)이니까 이달 말쯤에는 밭으로 옮길 수 있겠지. 처음 해 보는 배추 파종 이어서 정성을 다했으니 잘 자라주겠지....

 

   DSC02342.JPG  DSC02344.JPG

 

   DSC02345.JPG  DSC02346.JPG

 

 

오후에 오겠다던 매직 전자레인지 A/S 맨이 7시 넘어서야 도착했다. 장마 비에 천둥번개로 요즘 일이 서너 배 늘어서 밥도 못 먹고 수리를 하러 다닌단다. 마그네틱 선을 연결해주는 선 하나가 끊겨졌다면서 부품 값은 1700원인데 출장비 1만원과 수리비 4천원을 보태서 15700원을 받아갔다.

 

그래도 자칫하면 헌 것 버리고 새것 사라고 충동질하는 장사꾼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고쳐 쓰니 좋다. 이상으로 이번 장마에 단체로 태업하는 가전제품들을 모조리 병원에서 퇴원시켰다. 우리는 가구나 전자제품이 고장나더라도 기어이 수리해서 써야만 직성이 풀린다.

 

엊그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올라오다 마르타 아줌마네 집에 들어갔었다. 공소 예절에 안 보이는 일이 몇 번 있어 혹시 마음이 편치 않은 뭔가 있나 살필 겸 갔는데 아줌마는 부석부석한 얼굴로 살아가는 희망의 끈을 모조리 놓아버린 표정이었다. 내가 이미 저녁을 먹고 산보를 마친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니는 마당 끝에서 말리던 옥수수 알갱이를 키로 까불고 있었다.

 

     DSC02117.JPG

 

“저녁식사나 하셨어요?” “어데예. 밥 묵고 집이 들어앉으면 가버린 영감 생각이 더 나서 뵐 때까지는 일을 해야 제.” "... ..."

 

영감님이 경운기 사고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버리고 난 뒤, 그 헛헛한 마음을 어디 주체할 도리가 없단다. “맨 날 공만 치고 다녀서 (서강가든 위쪽에 놀이터가 있고 마을 남자들이 한가하면 그곳에 모여 논다) 지발 일쫌 하라고 그렇게나 채근을 했는데.... 그럴 쭐 알았시믄 공만 쳐도 좋으니 살아있어만 달라고 했을 낀데... 밥도 혼자 먹으니 맛이 없고 말 한마디라도 주고받을 사람이 없어 딥다 텔레비만 보느깐 그것 보기도 지겹더라구. 세상에 재미진 게 하나도 없으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닌길....”

 

눈물 바람을 하는 아주머니 등뒤로는 아저씨의 문패가 아직도 문지방에 붙어 있다. 두 분의 부부애가 극진했던 것으로 미루어 홀로 남은 여인의 허전한 마음을 누구도 헤아리지 못할 게다. 그니의 손을 한참이나 잡고 있다가 어깨를 다독거려주고 올라왔다.

 

요즘은 비가 자주 와서인지 밤이면 제법 서늘하다. 오늘도 소낙비가 지나간 후 구름 사이로 지라산 원경이 내다보이고 반달이 수줍게 구름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들락거린다. 집안의 불을 다 끄고서 테라스 흔들의자에 둘이 앉아 산구경, 구름구경, 달구경을 하고 있으니 신선경이 따로 없고 신선이 따로 없다.

 

     DSC02348.JPG

 

개구리도 달구경을 하는지 오늘 밤엔 조용하다. 두꺼비와 황소개구리 소리가 간간이 들리긴 하는데 그놈들은 영 무드를 모르는 성싶다. 감동 옆으로 흐르는 또랑물 소리가 “멋대가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좀 조용히 할 것이지.”라는 핀잔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