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8일 토요일, 맑음

 

장마도 소문만 요란했다. 장마구름이 제주에서 만들어져선지 그 섬을 떠나지 못하고 비를 뿌리고는 아래 바다로 돌아가곤 하기를 몇 날 며칠째 인지... 잔디도 누렇게 비비꼬이도록 말랐고 채소는 질겨 먹기 힘들 정도로 날이 가물다. 엊그제 보스코더러 텃밭에 물을 좀 주라고했더니만 가물어야 잘 되는 땅콩에는 물을 주고 정작 축 늘어진 열무는 그에게서 물 한 방울 못 얻어먹어 가련하다.

 

새벽에 후두둑 매실나무 잎새에 빗방울 지는 소리가 나서 과연 밤새 비가 왔나 내려가 보았다. 다섯 시경이었다. 거의 열흘간 밭일을 했으니 오늘 새벽에는 쉬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텃밭을 보니 할 일이 지천이다. 어제 다 뽑았다 여겼는데 간밤에 누가 키워낸 것 같은 잡초가 사방에 수두룩하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치즈마을 뒤 김경일 선생 집터의 700년 묵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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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궁둥이방석을 깔고 풀도 뽑고, 새벽 이슬에 기어 나온 벌레도 잡고, 어디선가 날라온 곤충들도 잡고 그러다 아침기도에 늦겠다고 집으로 올라가는데 길가에 붙은 화단에 꽃들이 너무 커버린 매화나무와 벚나무의 그늘에서 기를 못 펴고 있어서 톱질을 하고... 역시 하느님은 “그날 치 일용할 양식”과 더불어 “그날 치 일감”도 동시에 주신다.

 

두어 시간 넘게 새벽 노동을 하고 올라오니 허기가 지기도 했다. 집에 들어와서 벚나무 가지가 찢겨져 있던 것을 내가 톱으로 베어버렸다고 하자 보스코가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그럴 땐 내게 얘기해. 내가 가서 할 테니까.”란다. 그의 대자가 잘 한다는 “립 서비스”(말로만)인 셈이다.

 

은근히 빈정이 상해 “당신은 샴푸 병에 쓰인 글씨도 못 읽고 늘 ‘이게 뭐야?’라면서 묻지요? 문맹이에요? 텃밭으로 오르내리면서 일주일 가까이 늘어져 있던 가지를 못 보았어요? 그럼 장님이네? 그걸 내가 굳이 말로 해야 하다니....”

 

얼마전 송총각이 들려준 얘긴데 자기 친구 하나가 갓 결혼하고서 큰맘 먹고 신부에게 “자기, 오늘 내가 설거지 해 줄게.”라고 했더니만, 새색시가 “설거지 해 나한테 줄 필요 없어, 설거지해서 너 가져.”라고 하더란다. 

 

9시경 문정주 선생이 전화를 했다. 삼천포에 부부로 와 있다는 반가운 소리여서 지리산 우리 집으로 올라오라고,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고 했더니만 되레 우리더러 임실 치즈마을로 오란다. 그곳에 자기네 “시골집”을 다 지었고 초가도 손질하고 있는 중이니 와서 한번 보라는 초대였다.

 

12시에 휴천재를 출발했는데 그곳에 도착하니 2시 가까웠다. “치즈 마을”에, “치즈 벨리”에, “치즈가 있는 마을” 등 짝퉁 치즈 마을들이 “네비”를 헷갈리게 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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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과 김경일 선생(시흥에서 제정구 선생의 뜻을 이어 “연합병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이다.)이 우리를 그 동네 유일한 식당으로 초대하여 치즈 얹은 돼지고기(치즈 만들고 남은 물을 돼지들에게 먹인다나) 삼겹살을 먹고 치즈 된장찌개에 치즈비빔밥까지 먹었다.

 

벨기에 선교사 지신부님이 수십 년 전 시작한 치즈사업, 그리고 그 동네사람들에게 가르쳐 치즈생산을 직접 하게 만든 곳이고 농촌 체험 마을까지 생겨 넉넉한 살림들을 하고 있음이 집모양새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가난한 슬레트 시골집들이 모조리 반듯반듯한 양옥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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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김선생은 20여 년전 사두었던 낡은 시골집을 옛 모양으로 원상복구하느라 크게 일판을 벌여놓았다. 돈들고 불편한 공사인데 다행히 문선생과 뜻 맞는 사람을 만나 일이 잘 진척되고 있었다. 80세에 이른 아버님도 놀이 삼아 공사 감독을 하고 계셨고, 동갑의 어머니는 응접실에 커다란 재봉실을 마련해 두고 소일하고 계셨다. 두 노인의 아름다운 노후생활이 보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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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집은 “에너지 제로”를 시도했고 부근 돼지축사에 에워싸여 있는데도 전혀 냄새가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 공기청정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의 감탄을 자아냈다. 설계도 참 우아한 미학적 건물이었다.

 

문정주-김경일 선생 부부와 시부모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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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 부부가 삼천포에서 사온 싱싱한 생선을 한 상자 선물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임실성당에 잠시 들렀고 그곳 올리베타노회("부산분도회"라고 부른다) 세르바 수녀님이 보스코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어 얘기를 나누다 수녀님에게 저녁에 구워잡수시라고 생선을 좀 나눠드렸다.

 

집에 와서는 생선을 요리하여 아랫집도 동네 가까운 분들도 골고루 나누어 삼천포 생선을 맛보았다. 문정주 선생이 문정리 마을의 사람들에게 크게 적선한 셈이다.

 

임실성당에 들렀다 세르바 수녀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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