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일 일요일. 맑음


김치와 채소들 그리고 빵고신부에게 책 보내주는 택배로 올 한해 택배 발송은 마감하려 한다. 시골에 살아도 별 불편함 없이 지내는 건 오로지 싼 임금으로 희생적인 봉사를 해주는 택배기사들의 노고이기에 늘 감사한다. 옷이나 생필품, 해산물, 과일 등 무엇이나 필요하면 '금방 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싼값에 하루나 이틀 만에 문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처럼 급한 성격에 서비스가 세계 제일간다지만, 이렇게 풍요롭고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지 가끔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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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점심에 윤희씨가 운봉에 있는 자기네 농막에 오는 길에 함양에 온다고 얼굴 좀 보고 점심이라도 하자고 해서 읍내에 나갔다. 보스코도 머리를 깎을 겸 함께 나가 식사를 했다. 윤희씨가 보스코가 맘에 들어 자기 딸 주례를 맡아달라고 일찌감치 찜해 놓았는데 정작 딸은 연애할 생각이 없으니 딸의 신랑 선택과 엄마의 주례 선택이 뒤바뀌어 애타는 사람은 엄마뿐인 듯하다. 언제나 상큼하고 아름다운 윤희씨는 미루네 팔보효소 절식과 보식40일간이나 하고나서, 피부가 해맑고 투명해지고 날렵한 몸놀림에 미루네 효소 절식이 긍지를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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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열흘 가까이 김장에 매달리느라 참 오랜만에 점심 후 송전 길을 걸었다. 우리가 안 간 열흘 사이에 휴천강변으로 널따란 집터가 다섯 개나 생겼고, 지난번 집터를 닦던 곳은 어디서 흙을 받는지 끝없는 트럭으로 흙을 실어다 봉분을 만들고 있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 뚝딱 하면 산이 들이 되고 고개 한 번 돌리고 보면 평지가 골짜기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자연에 역행하는 개간을 하여 개간한 곳이 폭우 한 번에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엄천강 물길을 잡는다고 일 년여 토목공사로 강변을 뒤집어 놓았는데 큰비 한번 쓸고가니 먼저 그대로의 모습이 되는 것도 보았다. 그 갈대 숲에 갈 적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자연의 위대함이 한눈에 보인다.


빵기가 류시화의 마음 챙김의 시를 사 보냈다. 내게 꼭 필요한 시라서 밤늦게까지 읽었다.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너무 크다.’ ‘내가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고 하지 않고 남겨두는 일이 문제다.’ ‘해질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내가 안 한 일이리라.’ 그러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지체하지 말고 해야 할 나이에 내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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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림정에 미사를 드리러 갔다. 신자가 워낙 적어 새벽 공소예절에 갔지만 11시에 다시 미루네랑 미사에 갔다. 미사후 점심을 신부님댁에서 들었다. 먼 옛날의 교우가 보내온 대구로 끓인 지리, 미루 막내동생 내외가 목포에서 갖고온 싱싱한 생굴로 푸짐한 점심이었다.


언니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마음이 조금 놓인다. 동생 신부가 누나를 돕는다고 자꾸 냉장고를 열거나, 자기로선 아끼던 것이나 미쳐 못 버린 것을 두고 잔소리를 하면 속이 상한다는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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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야 그럴 일도 없고, 버려도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처리하는 재주가 있어 다행이지만, 만약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낭패이리라 싶어 오늘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너 시간 걸려 식당채 냉장고를 싹 비웠다. 일년에 두어 차례 하는 행사이지만 오래된 음식을 싹 다 버리고 그릇을 씻고 보니 글라스록 뚜껑만도 수십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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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정 미사와 점심 후 진주에서 사진전을 하는 환경운동가 최세현씨를 찾아갔다. 오랫동안 진주한경연합 대표직을 맡아온 활동가다. 수십 년을 지리산과 주변의 숲을 사람들과 특히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며 동행한 사진은 따뜻한 그의 심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보스코가 우리 마을앞 강가에 공장 짓는 일을 반대할 때도 달려와 함께 행동으로 막아준 사람이다. 내 주변을 보면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환경의 위기가 심각하다고 사방에서 경종을 울리는데, 그런 활동가들이 많아지면 그래도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주님이 다시 오심을 엄숙히 준비하는 대림(待臨)의 신비를 주보(마산교구보)에서는 비움의 신비, 가난의 신비, 한계의 신비라고 간추려 놓았다. 오늘 냉장고를 비우면서 옷장과 창고와 방방이 너무 많은 물건으로 채워져 있음을 절감하며 억지로라도 비움을 배워야 할 나이 같다. 보스코나 내 나이에, 산골생활에서, 잊혀지고 거절당하고 인정 못 받는 한계의 신비도 비움에 속함을 어림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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