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9일 목요일. 흐림


새벽 한 시에 일어나 절인 배추를 뒤집는다. 아래 배추는 위의 것들에 눌려 숨죽이고 몸을 낮추는데 위에 놓인 배추는 제가 잘나서 윗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닌데 속없이 펄펄 살아 고개를 바짝 들고 있어 저 밑으로 묻어버린다. 평소에 그런 인간들에게 유감이 있었나? 한밤인데도 쨍하는 추위는 없었으나 잠옷에 소금물까지 젖어 꽁꽁 언 몸으로 돌아오니 잠결의 보스코가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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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만 해도 두껍고 큰 비닐봉지에다 열 포기씩 단체로 넣고 뒤집고 엎고 치대며 배추를 절였는데, 올핸 이미 체력이 딸려 열 포기씩과 씨름할 팔 힘이 없다. 오른손의 엄지도 휘어나가 무엇을 꼭 붙잡을 기력이 없으니 가능한 대로 몸에 무리가 안 가게, 내 몸과 흥정하고 달래가며 써먹어야 한다. 그래도 이만큼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무채는 간밤에 보스코가 썰어줬고 무에 물 좀 들라고 고춧가루를 우선 버무려 놓았는데 거기다 양념을 다 넣고 비비는 일은 덜컥 겁이 난다. 어제 10시에 온다던 강레아와 남편 유경호 선생이 다행히 9시 반에 왔고(강원도 설악산에서 도착하는 길), 뒤이어 희정씨가 함양에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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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인복이란 말인가! 희정씨는 들어서자마자 상황파악을 하고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끼고는 양념 그릇 앞에 포진한다. 그미는 내가 넣어 주는 양념들을 치대고 문질러 멋진 배추소를 만들어냈다. 보스코가 아침 일찍 식당채 테이블에 펴놓은 휴천재 김치공장은 세 명의 노동자와 감독 하나로 잘 돌아간다. 내가 바로 감독이다. 감 박스 다섯 개를 채웠던 절인 배추는 김치통 열 개를 채웠다. ‘저만하면 됐다!’ 소도 배추에 분량이 딱 맞았다. 주부 경력 50년의 노하우가 빛나는 순간! 어제 낮 12시 정각에 김장은 끝났고 희정씨의 지휘 감독 아래 뒷정리도 깨끗이 마무리됐다. 김장 날 점심은 밥과 새 김치 소고기 된장국, 돼지고기면 모두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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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보스코는 일찌감치 내 시선에서 떠나 멀리 텃밭에서 배나무 가지치기를 마저 하고 있었다. 올봄 가지치기는 5월이 다 돼서야 끝났는데, 유투브에서 겨울 가지치기가 나무들에 충격을 덜 준다는 말을 듣고는 따라하는 길이다. 올봄에 소독도 게을렀고 시비도 안 했는데 흑성병, 적성병을 이겨내고 제법 배를 맺은 나무가 고마웠던지 어디 내년에는 정식으로 한번 해보겠다’는 그의 각오가 대단하다


실은 배밭에 걸려 펄럭이던 내 붉은 원피스들이 일등공신이었는데... 승질 더러운 주인마님이 종일 배밭에 나와 치마를 흔드나 겁을 낸 물까치떼가 몸을 사린 덕분에 우리가 배맛을 보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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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가 좀 넘어 모두 헤어져 레아는 서울로 배달할 김치들을 싣고서 떠났다. (자정까지 서울 집집이 김치를 배달하고 그 길로 밤도와 청송으로 떠났다나!) 나도 오후에 김치통을 싣고 드물댁과 함께 배달의 기수를 나갔다. 방곡 사는 한기씨네 집에 들렀다가 하양마을 미루네로 갔다


미루는 하루 종일 효소 담을 고구마 선별로 손끝이 갈라지고 새까매져 있었다. 우리 귀요미는 물 위에 뜬 백조! 우아하게 수면을 떠다니기 위해 물속에서 두 발은 얼마나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하나! 어쩌면 지쳐 쓰러질 시골 생활을 성심껏 살아가는 모습이 참 고맙고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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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간 드물댁이 두 집을 돌며 손님 대접을 받고 간식도 들고 선물도 받자 아주 기분이 좋았던지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남편 살아 생전 이야기를 들려준다. "애기가 설 때 시엄씨가 대구에 가고나자 남편이 '뭐가 먹고 잡냐?' 묻더라고. '도야지 고기'라 했더니 겨우 반 근을 사와 홀딱 먹어버렸어. '더 먹고 잡냐?' 물어 '간에 기별도 안 갔어.' 했단다. 그러니 마천에 나가 한 근을 더 끊어 오더라고. 그거마저 정신없이 먹고 나니 '어쩌면 한 점 먹어 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고렇게 홀라당 혼자 다 먹냐?'고 핀잔을 하더라고."  


내가 물었다. '왜 하필 시엄씨 없을 때 먹었노?' '시엄씨 그 꼴 봤음 우리 둘 다 맞아 죽었을 끼구만.' 까마득한 기억으로 남겨진 그미의 남편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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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군가 꼭 먹고 싶다 해서 백김치를 담갔다. 밤채, 생강, 마늘채를 다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그래도 내가 할 일이다. 부엌 창에서 나를 들여다보던 보스코가 그렇게 음식 하는데 열중하는 건 놀랍더란다. 열중 안 하다간 손가락을 채 썰 판인데? 그것도 50년 동안 익힌 삶이다. , 김장 끝났으니 아낙의 겨울 채비는 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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