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7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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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나중씨라고 공개적으로 놀렸더니 그가 분발했나 보다. 어제는 내가 텃밭에서 자르다 배나무 밑에 남겨둔 신선초와 참나물 등을 예초기로 벴다. 그의 귀에 대고  "이 달 말 서울 갔다 오면 한 길은 되겠다"는 걱정으로 땅이 꺼지는 한숨소리를 몇 번이나 들려 주었더니 그가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서재 뒷문의 철문도 여닫을 적마다 무척 날카로운 '끼익!' 소리를 내는데 보스코가 기름칠을 하고 망치질을 하여 소음을 없앴고 손잡이가 걸리는 방충망도 쇠톱으로 적당히 잘라 다듬었다. '당분간은 놀리지 말아야지(그래도 하는 것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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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새벽 다섯 시에 잠을 깬 그가 인기척을 안 내기에 '어디 아프냐?' 물으니 530분 되기를 기다린단다. 배 밭을 소독하기로 한 날. 5시 좀 넘으면 밖이 훤한데 그래도 5시 30분을 정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은 틀림없는 철학교수. 내가 일어나 왜바지로 갈아입고 나서며 "밭에 가서 물 주고 있을 테니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요."했더니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내려왔다.


일산 사는 정바울씨가 준 '충전식 분무기 덕분에 배밭 소독에 보스코의 어깨가 한결 가볍다. 전에 쓰던 수동분무기는 질통이 무거워 20 리터 들이 통을 짊어지고서 왼손으로는 핸들을 움직여 압력을 불어넣고 오른손으로 노즐대를 들어 올려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 보니 질통 한 통으로 배밭 전부를 소독하고서 끝내기도 했는데, 충전식으로 일이 쉬워지자 세 통을 뿌린다. 말하자면 지난 십 년 넘게 시늉으로만 소독을 한 셈이다. 먼지처럼 가늘게 분무가 되어 나뭇잎과 가지에 골고루 뿌려지고 호스 길이도 무려 50m나 되니 한 곳에 세워 놓고 물과 약을 채워가며 기다란 장대로 골고루 약을 쳐주자 배나무도 자두나무도 아직까지 바이러스를 앓는 기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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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낙과가 많아 봉지 쌀 배가 없어 일거리가 적다'며 좋아하던 것에 비해 올해는 배 솎는 일이 일이겠다. 어차피 배를 팔아서 양식을 사 먹는 처지도 아니고 배를 따더라도 우리 먹는 양은 한 상자로 족하고 나머지는 나눠 먹을 테니 "싸묵싸묵 하시쇼 이잉~" 격려하는 수밖에


오후에는 겨울을 나고 바깥으로 내다 놓은 화분들 가운데 긴기아난(Kingianum) 화분들을 분갈이 했다. 큰딸네가 바크(나무껍질)를 부대로 주문해 보내줘서 일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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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봄가믐이 심해서 부추도 어지간히 가늘고 안 큰다. 부추 이랑이 배나무 밑에 있어 그가 배나무를 소독할 적마다 내가 부추를 미리 뜯거나 비닐로 부추 이랑을 덮는다아침 산보 나왔던 드물댁이 부추 뜯어온 것을 보고는 우물가에 방석을 당겨 앉더니 뜯어온 부추 봉지를 풀어 잎을 고른다. "소풀(그미는 부추를 소풀이라 불렀다)은 해가 좋고 물이 있어야 잘 크고 보드라운데 영 파이다. 서울 갈 때 원기댁 꼬사리 밭에서 머우나 한 짐 뜯어다 동무들도 나눠 주소!" 내가 서울 갈 때면 뭔가 가져갈 푸성귀를 챙겨주지 못해 나보다 더 성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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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금주 운세에 '오행 중 물을 조심하라!'는 점괘라도 나왔나 보다. 2층 싱크대 앞에 수도꼭지에서 오래 전부터 똑똑 물이 새며 파란 이끼가 낀다. 오늘에야 그걸 본 보스코가 고쳐준다고 몽키스파나, 펜치, 드라이버 등 온갖 연장을 갖고 싱크대 위로 올라 가는데 몸이 얼마나 굼뜬지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 싱크대나 수도꼭지 중 하나는 망가뜨릴 것 같았다.


수도 파이프 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려야 잠기고 왼쪽으로 돌리면 풀린다는 사실을 우리 철학 교수님은 실수를 거듭한 끝에야 알아냈다. 흰 테이프도 나사 잠기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 감아야 하고... 그의 인생 80대이지만 살면서 배워야 할 게 아직도 엄청 많다, 실생활에 관한 한...


그런데 내가 잠긴 물탱크를 열러 3층에 올라갔다 오니 마루가 한강이다. 수도 꼭지 밑 수량 조절 나사를 다 열어 놓은 채 보스코가 수압 모터 스위치를 틀어 수압에 나사가 튀어나가면서 마루에는 물결이 일고 소방 호스처럼 터져 나오는 물은 보스코가 자기 배로 막고 있었다. 볼륨 있는 그의 배가 이럴 때는 꽤 쓸모가 있었다. 그야말로 놓치기 아쉬운 한 폭의 명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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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후 보스코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서재로 올라갔는데 부엌 바닥이 흥건하다. 직감적으로 '아! 하수구가 또 막혔구나!' 부엌 하수구가 굳기름으로 막히면 물이 역류하여 세탁기 배수구로 올라온다. 나 혼자 특전사 요원처럼 돌격했다. 바깥 하수구는 스프링 기구로 쑤셔대고 집안은 걸레로 닦아내고 뜨거운 물을 연달아 개수대에 부어 파이프에 낀 기름 덩어리를 녹여내는 삼중작전!


4시간 맹공 끝에 사태를 진압했다. 부엌 하수구를 외부 하수구에 연결한 일꾼이 물 빠지는 부분을 U자 관으로 해서 이 난리를 치르는데 이걸 고쳐 준다던 잉구씨는 시간 날 때 온다 더니 몇 해를 넘겼다


하수구 뚫는데 내가 이력이 났으니 이대로 그냥 살까, 내가 나서서 오함마로 시멘트를 깨고 하수관을 다시 묻을까 고민하는데, 이층에서 내려온 우리집 양반은 현장을 쓰윽 둘러보고서 "커피 끓여 놓았는데 간식이나 할까?" 참 팔자 하나 기막힌 남정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