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6일 목요일. 겨울비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산중에 눈이 내리고 또 내려 모든 길이 사라지고 오가는 이 없이 적막 속에 갇혀버리면 좋겠다. 멀리 지리산 하봉에나 휴천재 앞 와불산 꼭대기로 내린 눈만 올려다볼 게 아니라 이 골짜기로 펑펑 내리는 눈을 일없이 내다보며 눈발 새로 점점이 날아오르는 까마귀떼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1994년 우리가 처음 지리산에 들어왔을 때는 해마다 눈이 많이도 내렸다. 읍내버스도 발이 묶여 오가지 않는 신작로는 하얀 비단을 깔아 놓아 신부 입장!’의 팡파레가 울려 퍼지면 금방이라도 눈의 여왕이 흰 드레스를 길게 끌고 곱게 입장할 것 같았다.


어느 핸가 이 근방에서는 눈이 오면 가장 오르기가 힘든 오도재를 목포에서 놀러온 내 친구 노쿵둑이랑 올라갔다 웬 횡재! 오도재는 그야말로 얼음왕국이었다.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크리스탈 샨데리아가 되어 있었고 조그만 바람에도 부딛치는 얼음의 짤랑거리는 선률은 천상의 음악이었다. 그런 행운은 일생에 한번도 과한 선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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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 다가오는데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며 놓고 성탄 카드를 발송하고도 올해는 잔치를 벌이거나 과자를 굽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코로나 방역이 강화된다는 말에 세상이 더 각박해지고 숨 막힐듯해서 과자라도 굽자! 그럼 세상이 좀 달달해지지 않으려나?” 싶어 크리스마스 과자 칸툭치니를 구웠다. 크리스마스는 축제의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보스코가 쿠키 굽는 걸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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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일주일 전에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행적을 그림처럼 구술한다. 92세의 아버지가 당신이 돌아가시면 88세의 엄마가 어떻게 살아가실지 대책마련에 그토록 걱정이 많으셨단다.  연금승계 어찌 하는지 서류를 출력해 놓고, 승계하는 방법을 소상하게 적어 놓으시고, 그동안 분리수거를 안 했던 엄마를 걱정하고, 침대 밑과 가구의 먼지는 누가 닦을지, 은행에서 돈 찾는 일을 할 수나 있을지, 가계부 정리는 어찌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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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미의 아버지는 엄마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그런 일은 보통 여자들의 몫인데, 그 어머니는 그게 당신 복이었다는 생각이나 하실까? 아내를 아무것도 스스로 못하는 바보를 만들어 놓고 먼저 가버렸다고 원망은 안 하실까?


나야말로 남편 보스코를 실생활에 관한 한 절대 무능자로 만들어 왔으니, 만약 내가 먼저 간다면 바로 저런 걱정에 눈을 못 감을 일이다. 지난 주일 공소 예절 하러 내려가는 보스코와의 대화: “여보, 주일헌금 갖고 가?” (보스코가 자기 지갑을 열어보면서) “, 있을 거야. , 있구먼.” “그 돈 누가 당신 지갑에 넣어줬지?” “?” (아내의 물음을 못 알아듣는 기색.) “내가 넣어준 거야. 내 돈이야! 알았어?” “? 알았어.” (뭘 알았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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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보스코랑 송전길을 걸으며 로사리오를 하는데 찬바람에 한길 위로 무섭게 달음질치는 낙엽들이 죽음을 향해 몰려가는 가여운 인간들의 넋 같았다보스코는 내년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알프스에 가서 한 달 쯤 있다 오고 싶다는데, 이제 나는 움직이기가 싫어진다.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든 곳일러라."는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친구들이 떠나버린 땅은 낯설 것 같다. 요 몇 년에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영원한 나라로 떠나버려 그곳에 간다 해도 무덤에 꽃을 놓아주고 기도를 하고 눈물만 찔끔거릴 일만 남았다


제네바의 시아네 아파트 마당에는 눈이 제법 많이내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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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카르멜라네가 있긴 하지만 늘 우리가 머물 곳을 준비해주던 돈쟌카를로는 트렌토 가족묘지에 누워있어 로마에는 머물고 싶은 곳이 없다. 알프스엘 간다 해도 늘 우리와 산길을 동행하고 점심을 하던 마리오는 코로나로 희생되어 더는 알프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베니스 폰타나 부부도, 돈파스콸레도, 미켈레도, 코라도도, 돈브라키도 떠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떠난 세상에 홀로 남아서 그들을 그리워만 해야 한다면 그 삶은 너무도 잔인하리라. 그래서도 오늘 밤 올린 끝기도가 간절하다. “낮 동안 우리를 활기 있게 하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지켜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영원히 편히 쉬는 일을 위해 우리는 매일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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