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9일 화요일. 우박 쏟아지고 찬바람 불고 


전날 그토록 드맑은 하늘 아래 그토록 찬란했던 단풍잎이 어제 아침에는 새벽부터 장대비로 쏟아지는 빗줄기에 갈피를 못 잡고 우수수 떨어져 흩날린다. 나무 잎새도 허망하기로는 인생사도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사라질 것에 너무 마음 두지 말고 이 가을의 찬연함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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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에 미사참례를 했다. '피아골 피정의 집'에 새로 세워진 성당에는 김연준 신부님의 능력과 정성과 신심이 곳곳에 베어 있다. 현관에 들어서면 온 성당이 터키에서 가져왔다는 따스한 돌색으로 아늑히 품어주는 느낌을 뿐더러, 입구 오른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그림도 제목이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손이 많이 가는 반찬으로 정성이 가득 담긴 밥상을 손수 차려 내오신다. 그런데 눈은 왜 감으셨을까? 화가의 메시지로는, “너의 과거는 내게 관심이 없단다. 여기 깔아 놓은 방석에 맘 편히 앉아 내가 건네주는 수저와 젓가락을 잠자코 받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시는 중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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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아골은 임진왜란 때도, 동학운동 때도, 여순항쟁 때도 인천상륙작전 이후도 왜적과 관군에 쫓겨 들어온 백성이 대학살을 당하면서 민족상쟁의 아픈 상처가 골골이 서린 곳이다.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 죽이고 죽어 잘잘못을 따지기로 한다면 모두가 폭망할 죽음의 골짜기다. 그 땅에 과거를 묻지 않는 커다란 용서와 수용의 마음만(제단 오른편의 예수 성심이 그렇게 하소연하신다) 민족의 이 깊고 큰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으리라는 신부님의 강론 말씀.


중세풍의 고전적인 제단이며, 가죽나무 제대의 나무결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빛갈을 간직했다. 더구나 감실을 이룬 목재는 목수가 나무를 켤 때에 총알이 나왔다니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어 안은 나무라는 김신부님 설명에 감격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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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은 참 정성스럽게 미사를 올렸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에 이어 '용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정말 용서받았다는 확신과 더불어 용서받아본 경험이 있어야 주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단다 (“이쁘면 다야?”라고 할 만큼) 조부모님에게, 부모님께, 형제간에, 그리고 부부간에 용서 받아본 경험에서만 저런 믿음이 가능하리라는,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건 믿는 사람도 아니라는 깨우침이 가슴을 울렸다.


아침 식탁에 각자 앞에 비타민C 두 알이 놓여 있었다. 모두를 한 가족으로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뭉클하다. 면역을 키우는데 좋다하여 나도 자주 먹지만 70평생 식탁에 놓인 비타민은 처음 대접 받았다. 문교수님은 그 피정의 집에서 며칠 더 지내겠다고 해서 우리 부부만 식사 후에 피아골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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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차로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뒤엉키던 길이 새벽부터 내리는 장대비 속에 오가는 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길 양옆에 줄지어 있는 은행나무가 비에 젖어 더 선명한 빛으로 우리를 바향한다. 가을의 인사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길 위로 내려 쌓인 낙엽을 차 바퀴로 밟고 달리면서도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는 구르몽의 싯귀는 깊은 우수를 담고 저 빗물 위로 흐른다.


구례와 주천을 지나 이백을 가노라면 변전소 삼거리에서 운봉으로 넘어가게 된다. 운봉부터는 인월로 쭉 내리막길이고, 10년 넘게 '지리산 만인보' '세월호 천일순례'를 하면서 지리산둘레길을 같이 걷던 동무들과 수없이 돌고 돌던 길들이기에 낯이 익고 정겹다. 그때 동무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그립다.


어제의 비바람으로 지리산 하봉이 올해 첫눈으로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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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내리자 먼지가 펄펄 나르던 논밭에 아무렇게나 꽂아 놓은 양파가 제법 꼿꼿이 고개를 들고 제 모습을 찾는다. 나도 우리 텃밭에 상추와 유채 시금치 씨를 뿌린 터라 밭에 내려가 기웃거리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며칠 전까지 골골에 양파 모종을 심느라 다들 바빴다. 올해는 우리가 양파를 안 심고 이웃집들을 돌며 얻어먹을 생각이다. 작년에도 그리 작심했건만, 우리 집만 양파를 안 심었다고 지청구 하면서 '친절한 잉구씨'가 양파씨 한 자루를 얻어다 주어 하는 수 없이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한 자리에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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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에 실하게 거둔 양파를 보관하다 상당한 분량이 썩어 마음도 따라 상했다그래도 할매들은 여전히 땅바닥을 기며 양파를 심는다. 타성이라기보다 끝까지 '하늘님'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의 줄을 놓을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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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큰비에 뒤이어 오늘은 우박까지 떨어지는 강추위가 왔다. 아직 밖에서 떨던 긴기아나 난초까지 어제 오후 보스코가 집안에 들여놓아 마음이 놓인다. 딸들과 작은아들이 사 보낸 포인세티아도 휴천재 실내 화단을 화려하게 빛내준다.


손주들이 배운다고 아범이 택배 주문한 책들이 쌓이는데 큰아들 빵기가 코로나로 오래 동안 입국을 못해 우선 한 박스 꾸려 오늘 EMS로 보냈다.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열과 향학열은 전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게다. 외국에서 프랑스어를 하며 자라는 두 아들한테 우리말 책들을 읽히고 글쓰기를 익히게 하느라, 요즘은 수학과 한자까지 가르치느라 우리 며느리가 열 일을 한다


80년대에 내가 로마에서 빵기와 빵고에게 하던 일을 40년 뒤 며느리가 제네바에서 시아와 시우에게 대물림 하는 중이다. 그제로 지리산휴천재일기4000꼭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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