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31일 토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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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4박을 묵은 호텔 '썬비치'(깔끔, 경관, 공항 옆인데도 방음우수+ 교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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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아침은 언제나 든든하게! 남해 언니가 도착하며 식탁이 더 풍족해졌다. 샐러드와 야쿠르트, 빵에 크림치즈와 딸기잼, 계란, 커피우유, 그리고 여러가지 과일.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지만 배가 부르면 어딜 가든 든든하다. 모든 힘은 위장에서 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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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목요일 아침에는 추사(秋史)의 유배지와 순교자 정난주(丁蘭珠) 마리아의 묘소를 찾았다. 추사 김정희가 대정현에 유배 오기 2년 전, 한많은 여인 정난주는 대정에서 37년간 노비로 귀양살이 끝에 숨을 거둔다. 황사영의 아내로 남편 황사영이 백서(帛書)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하자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도중 두 살 난 아들과 추자도에서 생이별을 해 아들은 목숨을 잇게 하였다. 참으로강단 있는 신앙이자 대단한 모성이다. 장원에 급제한 고관의 아내가 관비(官婢)가 되어 40여년을 견디며 살아간 삶이 그 지역 주민들에게 '서울할머니'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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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조선 최고의 문필가로 족적을 남긴 추사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고결한 삶을 산 정난주도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위인으로 순교자로 숭앙을 받고 있으니 사람이 자기의 이름석자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배우게 된다. 보스코가 추사관에서도 "여균사청"이라는 현판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심경을 알 만하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대나무처럼 이렇게나 맑다니!’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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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에는 강정을 방문했다(우리 부부가 강정행사에 참석한 게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미루네도 여러 차례였고. 봉재 언니는 아예 몇 달을 눌러 사셨단다). 그곳의 평화를 지키는 가톨릭 활동가들과 예수회 신부님들의 수고도 대단하다. 미사가 끝나가는 참이어서 (가톨릭농민회장)봉재 언니와 (서강대 교수)보스코가 우리 일행을 대표하여 인사를 하고, 강정해군기지 정문 앞까지 만장을 들고 행진을 했다. (큰아들이 "우와 우리엄빠 여행중에도 데모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날 참석한 대안학교 학생들의 춤에 이어 일행 전부가 막춤을 추며 강정과 한반도의 평화를 온몸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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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기지는 지어졌고 군인 아파트까지 들어서고 강정주민들이 대부분 정부에 회유된 지경에 서도 아직도 이런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우리는 아직도 이 강정의 해군기지를 인정하지 않으며 정부의 잘못을 지속적으로 지적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바늘 하나가 커다란 얼음덩이를 조각 내지 않던가!

10년 넘게 투쟁해온 활동가들의 함바집에서 오늘 시위에 참석한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우리가 남이 아니고 식구라고 일깨워준다. 강정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패배와 굴욕의 상징 아닌 평화의 상징으로 태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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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왈종 미술관에 들렀다. 화가의 찬란한 색채에 번쩍 정신이 난다. 어린아이처럼 꿈꾸는 세계는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아직도 놓지 못하는 유년을 마음에 다시 꽃 피운다. 그의 그림과 조각 자체가 신이 난다. 마치 우리 손주들이 그릴 만한 그림 같지만 아직도 모두의 심저에 간직된 그 시절의 무구함이 멋없이 시들어버린 영혼들을 감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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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노인들이 휴식을 취하러 '치유의 숲'을 찾았지만 그곳은 예약제여서 입장을 못하고 가까운 추억의 숲에서 잠시 쉬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사람도 별로 없는 한적한 숲길에서 전날의 한라산 등반으로 지친 다리에 기운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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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 온 길에 실비아씨네 상아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살레시오 수도회 협력자로 빵고신부가 숨비소리를 시작할 무렵에도 많은 도움을 준 실비아씨 부부는 제주의 불행한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일에 헌신하는 교우다. ‘은빛 나래들은 숙소로 돌아와 처음으로 밤모임 없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어제 30일 금요일은 45일 제주여행의 마지막날. 감사미사를 올리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비자림엘 갔다. 500~800년이나 나이든 할아버지 비자나무들이 자생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삼림이란다. 천남성이나 투구꽃도 피고 피톤치드가 가슴을 탁 터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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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물짬뽕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하는 남자들이 있어, ‘짬뽕 찾아 삼만리로 제주를 헤매다 조천에 있는 '모리아 짬뽕'이라는 퓨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함덕해수욕장 근처의 '델문도라는 카페에서 커피를 들며 제주의 사파이어 물결에 잠시 취했다. 우이동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바다풍경이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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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 제주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완도로 떠났다. 바다가 물결을 살짝 일으켜 카페리를 요람마냥 흔들어주자 쌓였던 졸음이 밀려들었다. 완도에서 산청까지, 그리고 귀요미네 공장에 세워둔 우리 차로 휴천지에 도달하니 밤 10! 여행이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은 여름옷을 다락에 올리고 겨울옷으로 채우는 겨울채비로 분주했다. 닷새 집을 비운 사이에 단풍은 인가를 찾아 비녀봉에서 우리 동네 당산나무까지 내려왔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자 한 달에 두 번 뜨는 만월이라 블루문’(한 해 보름달 중 가장 크다나)으로 불리는 저 달빛 아래 부디 지친 몸으로 돌아온 나그네들이 보금자리에다 몸을 뉘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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