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5일 목요일, 맑음


겨울이 가까이 온 것을 해님이 먼저 안다. 서재 남쪽 창문으로 살포시 들어온 햇살이 7미터 마루 건너편 북쪽 뒷문 손잡이까지 만지작거린다. 문만 열면 뒷문으로 곧장 나가 구장집 노랗게 익은 벼이삭 잔디밭으로 달려가 놀겠다는 기세다. 그러나 이삭은 해님과 생각이 달라 고개를 숙이고 이미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보스코의 이름(稔: 벼 익을 '염'])을 파자하면 벼()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음을 형상한다. 떠날 날을 셈하면 남은 날이 적다는 생각도 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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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달된 '가톨릭신문'에 보스코의 '한국가톨릭학술상' 수상기사가 전면으로 실렸다. 수상작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도 소개하고 있다. 2004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출간했을 적에 '서우철학상'을 수상한 기억이 난다. 어쩌다 보스코의 생업이 '번역'이 되었는데 교회 안팎에서 이렇게 격려해 주니 고맙다. 상금을 받던 내 표정이 너무 밝아서 말남씨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하며 나를 놀리던 생각이 난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신국론은 책 두께가 벽돌 석 장이요 삼위일체론은 벽돌 한 장이라는 데에 있으나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7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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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동네 한길가 공장터 마당에서 인규씨가 나락을 널고 있더니만 이튿날 휴천재에 햅쌀 한 부대가 들여와 있었다. 그 새 나락이 정미소를 다녀오고 자루에 담겨져 그만 우리 식당채까지 제발로 들어오다니! 올해 처음 먹는 햅쌀이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볍씨라 맛은 좋은데 소출이 적어 농민들이 골탕먹는다는 그 쌀이다. 어제 오늘 그 쌀로 점심을 했는데 명성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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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층 서재에서 아침기도를 하는데 마당에서 인규씨가 부른다. 몇 해 전 그가 다리를 다쳐 입원해 있을 적에 미루가 고맙구로찾아와 주었다고 쌀 한 푸대를 전해 달란다. "농사를 지었으면 쌀을 팔아 돈을 사야지 이렇게 퍼내기만 하면 어찌 먹고살려느냐?" 지청구를 하니까 대답이 "꺽쩡 마소. 마을 앞마당에 아직도 나락이 한가득하다요." 동네 앞 문전옥답의 누런 벼가 다 자기것인양 마음이 넉넉하다. 먼 시선으로도 송문교에도, 공장터에도, 원터마을 공터에도 부직포 위로 동네사람들이 나락을 널어 보기에도 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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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규씨의 죽마고우 강주사 말로는 "윗말에서도 혼자 사는 할매들 모두한테 한 푸대씩 갖다줬다꼬."라며 그집 모자간이 '주고자픈 병'에 단단히 걸렸다고 탄식한다. 밥이야 나눠먹는 거라지만 '내 코가 석자'라 할만큼 어려운 처지임에도 타작을 하자마자 집집이 나누고, 특히 농토 없이 혼자 사는 안노인한테마다 저렇게 쌀을 배달하고 있으니 그의 다정불심(多情佛心)이 어디서 나오는지....


햅쌀이니 서둘러 밥해 먹으라고 오늘 미루한테 실어다 주었다. '우리 귀요미'는 새벽부터 효소의 발효상태를 체크하느라 지하실에서 데이트 중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에 가정학습에 자가격리에 하루 세끼 밥을 해대느라 주부들이 '집콕-확찐' 몸이 맘에 안 들어 미루네 '팔보효소'를 제법 많이 찾는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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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텃밭에 채소들이 그새 가을 가뭄을 타서 잎을 늘어뜨리고 있다. 비가 안 내린지 3주나 됐으니 저 여린 것들이 얼마나 목이 마를까 싶어 보스코더러 텃밭에 물을 주라고 했다. '배추 한 포기에 성모송 한번 만큼' 물을 주었더니 두 시간이나 걸리더란다. 배추와 무가 '성모신심'이 깊어서 물주는 보스코에게 로사리오를 시켰나 보다. 파밭 두럭과 마늘 두럭에도 물을 주었다


드물댁이 심은 고랑에도 물을 주라고 전화했더니 드물댁은 "가을 지심에 물을 주면 노랑닢병 걸린다카데."하며 자긴 물 안 주겠단다. 그미의 핑계가 미심쩍어 동호댁에게 물어보니까 "지까지께 뭘 알아!"하면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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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텃밭에서 물을 주던 시간에 나는 부엌에서 스콘을 구웠다. 담 주 20일 친정아버지 기일(35주기)에 가져가려고 많이도 구웠다. 집안에 과자 냄새가 머리가 아프도록 진동을 한다. 일이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이번 서울 나들이(17일 보스코가 네이버에서 '열린 연단'이라는 강연을 한다)에서 돌아오면 들판의 황금잔디밭이 모조리 사라질 것 같아 오늘 점심 후 문상마을 위로 산봇길을 걸으며 지리산 자락의 찬란한 가을을 카메라에 담았다. 단풍이 산에서 내려오듯, 벼도 산비탈 다랭이에서부터 강가의 '문전옥답'으로 내려가며 추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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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동네는 주로 영이할아버지가 콤바인을 돌려주고, 마을 앞은 한남 부부가 콤바인을 돌린다. 영이할머니는 낫으로 콤바인이 못 미치는 두럭가장 나락을 낫으로 베어 콤바인에 올린다. 한남 부부가 백연마을 논에서 콤바인을 돌리는데 기계는 남정이 운전하고 탈곡된 쌀 푸대는 그집 여인네가 들어 나른다. 그 동안 무슨 고생을 했는지 그 젊은 아낙은 지친 얼굴에다 몸피마저 빼빼 말라 버렸다! 몽골이나 네팔에서도 척박한 밭일은 여인들 몫이어서 같은 여성으로 그 고생이 뼈아프게 느껴져왔다


오늘 저녁에는 바싹 마른 꽃밭에도 물을 흠뻑 주었다. 목마른 청개구리도 송충이도 물소리에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린다. 눈썹보다 가느다란 그믐달이 감나무에 걸리고 초저녁 별이 소슬바람에 몸을 옹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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