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3일 화요일, 맑음


어젯밤에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잤나 보다. 물론 지리산에 살며 집이나 차나 잠그는 일은 없지만 최소한 잠잘 적에 방문은 닫는다. 간혹 문을 열어 놓으면 모기망 밑으로 들쥐가 들어오고 들쥐를 잡으러 고양이도 따라 들어왔다가 자기가 망문 밑으로 기어들어 왔다는 사실을 잊은 고양이가 집밖으로 나가려고 방이나 부엌을 온통 뒤집어놓는다. 쥐가 부엌 한 귀퉁이에 주부 몰래 딴살림을 차리는 경우도 있어 저녁이면 문을 잠그진 않아도 닫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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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아침엔 열린 식당문 안으로 생쥐가 아니라 갓 도정한 쌀 20킬로 부대가 덜렁 들어와 있었다! 범인은 딱 하나! 윗마을 태우큰아빠다! 차를 바꿨기에 기름 한 번 넣으라 선심 썼더니... 그는 결코 공짜로 넘어가는 사람이 못된다.


이 동네 살면서 꼬리표가 안 달린 선물이 식당채 현관에서 자주 나를 기다리곤 한다. 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미루어 짐작해야 한다마른 토란대가 한 묶음 와 있으면 엊그제 마을 앞을 지나다가 내가 "토란대가 실하네요. 저렇게 많이 말려 누가 다 먹는대요?"라고 말을 건넨 임실댁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아들 왔으니 나물 무쳐먹으라"며 삶은 고춧잎을 가져 온 것은 드물댁. "고춧잎을 깨끗이도 가렸네요. 말려서 무말랭이에 넣으셔야지." 했는데 그게 어느새 우리 식탁에까지 남몰래 들어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덕촌댁'이 간간이 옆산을 넘으려 휴천재 앞을 지난다. "어디 갔다 오세요?" "우리 산에 밤 주으러." 이런 인사만 주고받아도 모르는 새에 우리 정자에 알밤 한 봉지가 놓인다. 모두들 마음씨가 휴천강에 흐르는 물결을 닮아 부드럽고도 넉넉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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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젠 부산으로 가던 스.선생 부부가 급한 전활 했다. 한길에서 도정으로 올라가는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왔는데 갓 택배온 황금팽이버섯 두 상자를 차 안에 두고왔다며 오래 집을 비우는 터라, 또 갓 딴 버섯이라 그 동안 상할 테니 우리더러 가져다 먹으라는 '부탁' 말씀! '웬 떡이냐?' 얼씨구 그 집 차에서 두 상자를 꺼내다 한 상자는 가까운 이웃들과 나누어 먹고 한 상자는 빵고신부가 '본가방문을 다녀온 선물'로 수도원에 들고 갔다.


마룻방 흔들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먼 산을 바라보던 보스코가 자꾸 안경을 닦는 것은 창문이 더러운 탓이다. 올 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아 닦자마자 먼지가 앉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웠는데, 이젠 '가을맞이 대청소'를 할 만 하다. 휴천재는 사방으로 커다란 창이 어지간히 많다. 이층만도 열한 군데가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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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에 시작한 창닦이가 한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그것도 창턱은 보스코가 도와준 덕분이다. 중고등학교 때 방학이면 커다란 학교 교실마다 돌면서 교실과 복도 나무바닥에 왁스를 칠해서 닦고, 창문과 창틀을 물로 닦으며 익힌 실력이란다. (방학이 되어도 갈 집이 없는 아이들 몇이 기숙사에 남으면 방학내내 커다란 학교 전부를 온통 청소하곤 했단다. 또 오늘 보스코가 자진하여 아내의 일손을 도운 속내는 마냥 끼니를 기다리다간 점심이 요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 창닦이 작업을 전해들은 우리 둘째 '순둥이'가 대사님한테 일 시켰다고 "휴천재 창문을 모조리 쎄면 블록으로 막아버리겠다" 협박이. 내가 밭일을 너무 많이 하여 손가락이 망가졌다며 "휴천재 텃밭에 레미콘 불러다 꽁끄리를 해야 한다"느니, 내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나빠졌다고 한탄하면 "휴천재 책이란 책은 싹 압수해버리겠다"는 대책을 내놓는다. '순둥이'의 이런 과격성은 아무래도 내게서 물려받은 유전자임에 틀림없다.


찬바람이 일자 호박이 제법 많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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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딸'은 오늘이 시할아버지 제삿날인데 '살아 있는 조상' 새 손주 수발에 정신이 없어 제사음식 장만을 '번갯불에 콩볶듯이' 해치워 맘에 찔린다고 하소연한다. "본래자손이 바쁘면 조상님도 덩달아 바빠지시는 세상이야. 요즘 세상에 제삿상 얻어 드시는 것만으로도 황공해 하실 껄"이라고 다독여주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우리 '순동이'는 한수 더 뜬다. "알아요, 요즘 세상엔 조상귀신들이 저승 노인정에 모이면 제삿상 받은 것만도 자랑들 한다는 거?" 할머니들 손주자랑도 옛말이 되고 이승의 시대 변천이 저승에도 그대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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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 산보는 강 건너 과수원을 보러 갔다. 십여년 전 사과나무가 심기고 올봄에 사과밭에 대대적으로 지주를 세우고 방조망을 치는 걸 휴천재에서 망원경으로 건너다보았지만 정작 사과 열린 건 도무지 안 보여 보스코의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우리는 서울 우이동에 살면서부터 '지구를 지키는 불사신'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어서 궁금한 건 도무지 못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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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그렇게 이뻐요?': 일기에 사진 올리는 보스코를 누군가 놀리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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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연수원 자리를 사들인 사람이 몇 해 전 그 과수원도 샀다는데 먼저 과수원 주인에겐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산비탈로 올라가는 도로를 확보하지 못해 아랫터 주인에게 사정도 하고 길 낼 땅이라도 구입해서 새로 길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아랫터 주인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떠났다는 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작년만해도 한여름이면 팬션 손님으로 시끌하고 네온조명이 벅적하던 연수원터마저 풀만 우거져 사람 사는 흔적이 안 보이고('코로나 사태'로 임시 휴업한 걸까?) 과수원도 거창하게 지은 방조망 속에 시커멓게 병든 사과 서너 개만 매달려 있었다. 저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세상에, 사람 다니는 길 막아 잘 되는 일 없다!'고 수군거리는 것일까? 


올라가는 길가엔 쑥부쟁이 보라빛만 만발하고 언덕받이 한 켠에 편안하게 누워계신 부면장님(보스코와 갑장이었고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보스코에게 대세를 받았다) 산소에서 그분을 위해, 우리와 안면을 트고 이 동네에서 살다가신 노인들을 위해서 주모경을 바쳤다. 다음 달이면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 위령성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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