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23일 목요일. 몹시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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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천에서, 성남에서 문안 인사가 쇄도한다. 지리산에 사는 내가 큰 비에 산이라도 무너져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친구들의 문안전화다. 우리집은 칠선계곡이나, 백무동에서 4~5Km 떨어져 있고, 하루 종일 잔뜩 찌푸린 하늘로 엄청난 비라도 뿌릴 무덥고 바람부는 하루였지만 저녁까지도 비는 한 방울도 안 내렸다!


마을 앞 휴천강이 범람하여 집을 덮치지는 않느냐고 묻는데, 휴천재는 해발 340m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이어서 휴천강변에 있는 군내버스 정류장에 내려 집까지 오르려면 숨이 턱까지 차는 비탈이라 강물도 숨이 차서 우리 휴천재까지는 못 오를 꺼다


올핸 능소화가 병치레 없이 잘도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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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작은아들이 온다니 오이소백이도 하고 피클도 장만하려니 장을 봐야 하는데 어제가 바로 장날. 시골에 살면 장날에 장 보러 가는 게 국민학교 운동회날처럼 가슴 설레곤 한다. 장에 가면 혼자 살아 별것 필요 없는 동네 할매들도 많이 만난다어제 장바닥에서 내 앞을 걸어가는 두 안노인들의 대화


"오늘은 뭐 묵을까? 오늘은 내가 내꼬마." "국시를 묵을까?" "그건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쉬이 배가 꺼진다고." "그라문 돼지국밥 먹제?" "그건 너무 지름져 속이 거북하데이." "비빔밥 먹제?" "맨날 먹는 노물에 그거이 그거지만." 둘이서 단골인듯한 백반집으로 들어가고 식당 앞 인도에는 종이컵에 믹스커피 들고 할매들이 쪼르라니 쪼그리고 앉아 "코로나 끝나니 커피 줘서 좋구만." 사람 귀경 하는 아짐들 귀경하는 것도 내 재미다. 저 아짐들이 군내버스를 타고 장에 나오는 주된 이유는 '사람이 고파서' 사람 구경하러 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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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도정 스.선생에게 우리집 이층 테라스 데크 구멍 두어 개만 떼워달라고 부탁했다. 주말이면 손님들이 오시는데 바닥이 꺼진 마루를 떼우기라도 해야 될 것 같다니까 오후에 오겠단다. 체칠리아는 대녀 실비아가 몸이 안 좋아 나몰라라 버려 두고 간 텃밭에 블루베리랑 고추가 낼모레 장마비에 망가질까 걱정이 크다고 그 밭에 올라가 풀 뽑고 고추 묶고 블루베리는 따서 그집 냉장고에 넣어주고 있단다. 엊그제도 몸이 성하지 않아 링거를 맞았는데 그 몸으로 남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는 모습이, 한마디로 '두 부부는 착한 사람이다 그것도 몹시!'


그래서 어제 오후에 나는 오이 소박이를 담그고 보스코는 구멍난 테라스 데크 를 뗌빵하는 스.선생을 도와 '시다'로서 작업을 했다. 보스코는 집에 있는 '보쉬' 드릴로 나사못 박는 걸 꼭 배우겠다고 나섰지만 스.선생이 별로 신통치 않게 보는 듯하다. "손에 힘을 좀 빼고 살살하세요. 날을 똑바로 세워서." 어디 그게 하루 이틀에 배워질 일인가? 차라리 내가 배우는 편이 났겠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남편을 시키지 못하고 아낙이 직접 나서서 해내게 되고, 그걸 보다 못한 김원장님 왈,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필요한 곳에 성모님이 나서서 죄다 처리하더라."며 나보고도 "제발 성모님처럼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다.


오늘 아침에도 찬장 높은 곳에 있는 새 홍삼 병을 꺼내야 그의 홍삼차를 타주는데, 손 아픈 내가 의자를 놓고 올라가 새 병을 찾아 꺼내느라 낑낑대는데 보스코는 식탁에서 멀거니 바라 보고만 있다. 자기 먹을 건데 말이다


"아아, 나는 왜 성모 마리아지?" 한탄하면서도 그가 안 하고 가만 있으니 내가 하는 건지, 내가 나서서 하니까 그가 가만히 있는 건지 단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랴, 50년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계속 이렇게 살다 죽을 숙명이다.


보스코에게는 엊그제 다녀간 김원장님이 '책상에 45분 앉아 있으면 무조건 15분은 움직이시라' 당부하셨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책상에서 지치면 소파로 직행하여 누워서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본다. 그래도 의사선생님 강력한 권고대로, 물 마시는 양은 많이 늘어 다행이다. 오전에 석 잔, 오후에 석 잔을 마시게 '관리감독'을 하는 중이다. 평소에 한 잔 물도 마시기 힘들어하는 보스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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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반창고를 풀어 놓은 손가락 끝의 철사가 오늘 아침 어디에 부딪치면서 굽혀지더니 살 속으로 쑥 들어가기에 기겁을 하여 다시 거즈를 대고 반창고를 둘렀다. 당분간 오른손을 쓰지 말라는 수술의나 김원장님의 말을 도대체 안 듣는 편이다. 오후에는 3층 다락의 화장실을 치우고 깨끗이 청소하였다. 토요일 오는 젊은이들이 수가 많아 특히 샤워하는데 쓰일 듯해서.


하늘은 하루 종일 큰비 쏟아질 듯 흐렸으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날이 저물었으므로 저녁 식사 후 로사리오 산보에 나섰다. 마을 앞 문전옥답에는 임실댁이 중신을 선 한 쌍의 허수아비와 허수 어미가 벌판을 달려온 바람에 온몸을 내맡기며 옷자락을 펄럭인다. 아마 논두럭에 콩을 심은 듯한데 허수아비로 간이 콩알만 해진 새들도 콩알 뒤져 쪼아 먹을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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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교에서 운서쪽으로 걸으면서 우리 작은 아들이 좋아하는 치커리(토끼풀)를 따기도 했다. 어둑해진 밤마실에서 제법 한 봉지를 장만했다어두운 밤에 다리를 건너는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강도 산보 다녀오듯 건너겠지... 


일기를 쓰다 자정을 맞으니 하루 종일 벼르던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치면서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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