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일 맑음. 대한


집도 치우지 않고 음식도 준비 안 됐는데, 아무리 반가운 손님도 약속시간보다 너무 빨리 오면 반갑기는 하면서도 난감해요.” 어제 12시부터 온다던 눈이 9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하자 라디오 아나운서가 붙인 멘트. 공직 시절 보스코는 시간 약속에 너무 철저해 다른 나라 대사관저에 초대받으면 10분전쯤 근처에 도착해 있다가 소리와 함께 그 집 문을 두드리곤 했지만. 아무튼 ‘12시부터 눈이 온다했으면 대충이라도 시간을 지켜야지 구름이 너무 무거워선지 9시도 안 돼 쏟아져 내렸다.


[크기변환]20190104_145508.jpg


대설주의보방송에 그래도 서둘러 9시쯤 서울 집을 나섰는데, (나를 포함하여) 대한민국 운전자들이 모두 T맵 애용자들인지 의정IC 구리방면으로 차들이 눈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눈은 쏟아져 앞은 안 보이지요, 차도는 안 움직이지요, 18년 나이만큼 늙은 소나타의 뻑뻑한 브레이크를 마냥 밟았다 놓았다 쉽지가 않지요... 동서울까지 한시간 반이 걸렸다. 다행히 경기도를 벗어나며 눈발은 멈췄고 충청도를 지나자 찻길도 하늘도 훤하게 뚫렸다.


눈이 쏟아지자 내가 오늘 함양으로 내려간다는 걸 아는 친구들이 '눈길 운전 조심하라'는 안부 전화들을 해왔다. 호천이의 전화는, 혼자서 밥을 먹고 있다며('혼밥'?)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동안 시어머니 돌봐 드리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완전 해방을 선언해 주었노라는 자랑. “어딜 가서 누구랑 함께 있든 자유! 늦게 들어오거나 밥을 하거나 말거나 자유!”란다


[크기변환]20190104_143518.jpg


남동생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실상 나를 놀리는 말이었다하루 세 끼(아니 간식 포함 다섯 끼꼬박 챙겨야 하고오나 가나 꼭 남편을 데리고 다니며만사에 매부한테 베이비시터로 매어 사는 여자더러 '왜 그렇게 살어?' 하는 말투였다옆에서 졸고 있던 보스코에게 그런 소감을 전하니, "나는 이게 좋은데."란다. "... ..." 아아도무지 구원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가망 없다는 게 그에겐지 아니면 나에겐지 불투명하지만).


눈발 속에 호천이와 나눈 추억 한 토막. 100세에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 3(요양병원에서)은 거의 감정 표현이 없으셨는데 유일하게 반가운 얼굴 표정을 보이시는 게 우리가 용돈을 드릴 때였다. "아유좋아라우리 딸이 용돈을 두둑히 주네!" 그렇게 받으신 지폐는 얼른 베게 밑이나 서랍장 위 작은 무쇠솥에 넣어 두시고는 금방 잊어버리셨다호천이는 그 돈을 엄마 몰래 꺼내 몇 번이고 다시 드리곤 했고 그때마다 반짝 밝아지시던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와 낄낄거리곤 했다엄마의 그 솥은 지금 우리 부엌에서 돈 아닌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4478043-9.jpg


[크기변환]1642144478043-1.jpg


함양에 도착하니 먼 산은 흰 눈을 이고 앞 산은 순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천재에 들어선 게 오후 3. 열흘 가까이 집을 비운 사이 조카사위 곽서방이 처고모가 겨울마다 창문에 뽁뽁이와 문풍지를 붙이느라 고생한다고 창문을 싹 갈았다. 30여년 된 창틀들을 모조리 뜯어내고 새로 맞춰온 창호로 대체하였다.


그제는 청소업체가 와서 공사를 매듭짓는 대청소를 했다는데, 아래층 진이엄마의 평처럼, '함양에선 이렇게 합니다'라는 식이었다나? 아무튼 짐을 풀자마자 3시부터 자정을 넘기며 꼬박 (우리 몫으로 남겨진) 대청소를 해야 했다. 방방이 커튼과 침대 커버도 모조리 거두어 세탁하고 마루 바닥은 다섯 번 쯤 물걸레질을 하고 나니까 시계는 밤 1시반! 다행인 것은 집안에 들인 화분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


[크기변환]20220120_180105.jpg


창틀 공사 첫날은 실리콘 냄새에 위아랫층에서 눈도 뜰 수 없었다는데 그간에 냄새도 사라지고 오늘도 새벽부터 간밤에 세탁한 커튼(겹커튼 8)을 달고 가구 밑까지 골고루 걸레질을 하고 나니 극성 주부인 내 눈에도 깔끔한 평상의 휴천재로 돌아왔다


곽서방 말마따나, 10년 탈 차를 마련하기 위해 큰 돈을 아끼지 않듯, 앞으로 많은 사람의 수십 년 겨울을 위해 공사비 아깝다는 생각은 싹 지워야겠다오늘이 대한인데도 실내에서는 한기를 못 느꼈다. 바깥은 바람 끝이 매섭지만, 지난 수십년 겨울마다 창틈으로 파고들던 한기가 사라졌으니 오늘 밤엔 대한이랑 따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크기변환]20220120_08362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