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26일 목요일. 맑음


비가 내려 특별히 할 일은 없어도 새벽이면 습관적으로 눈을 뜬다. ‘오늘은 뭘 할까?’ 궁리를 해 보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없다. 그래도 하느님이 하루 새에 텃밭 이랑의 무싹을 얼마나 키우셨는지보고 싶어 못 참고 밭으로 내려가 본다. 내 발소리를 듣고 무순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맞는다. 기특하고 예쁜 것들이 어제보다 1센티는 더 자랐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품이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는 기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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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뜸해지자 나비들이 형형색색 텃밭을 맴돈다. 노랑나비 흰나비 검정호랑나비. 손톱 만한 보라색 나비도 있는데 외래종에다 독이 있어 함부로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단다. 아랫층 한빈이가 두고 간 매미채를 들고서 내가 나비를 쫓는다친환경농업을 한다는 사람 중 나비나 해충 포획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팔랑팔랑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나비를 잡아 죽이다니!”하면서 낭만도 모르고 야만적이라고 욕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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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밭농사를 짓다 보면 검정호랑나비는 콩줄기에 엄지손가락 굵기에 털이 부숭부숭난 검정벌레를, 노랑나비나 파랑나비는 배추나 무 잎에서 꼬물거리는 배추벌레를 낳아놓는다. 보라벌레는 외래종이라 꽃잎 뒤나 줄기에 붙어서 잎줄기나 꽃봉오리를 똑똑 따서 떨어뜨린다. 밤색에 노랑이 어우러진, 제법 치장에 솜씨가 있어 보이는 나비가 낳은 애벌레는 붉은 고추 속으로 파고 들어가 씨앗부터 우적우적 먹어 제낀다. 그래서 저 예쁜 나비들의 저 식욕왕성한 애벌레들 땜에 농사를 짓다 보면 나비의 하늘하늘 맵시와 날개짓에 탄복만을 보내기는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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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본가방문이라는 휴가를 온 빵고신부랑 산보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컴퓨터와 핸폰에 관련된) 숙원사업도 해내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어머니!'하고 들어섰다 '차 막히기 전에 저 가요.'하고 휘리릭 떠나버리니 너무 허망하다. 아들을 바라본 일이 꿈을 꾼듯 현실감이 안 난다. (오늘 점심에는 피자를 해 주었다. 나는 아직 단식 후의 보식 중이지만 부자가 마주 앉아 맛있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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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간 자리를 채울 일을 찾아내야 딴 생각이 안 난다. 그래도 어제는 미루 누님이 초대하여 저녁도 사주고 살갑게 해주니 참 고마웠다. 그의 누님들이 나만 아니라 빵고신부까지 챙기는 데는 할 말을 잊는다. “우리처럼 주변에서 사랑과 보살핌을 많이 받아온 사람이 또 있을까?” 헤아린다. 하느님의 섭리는 늘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내린다는 것이 50여년 우리 가족의 몸에 배인 신앙체험이다. 타인과의 인연은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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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빵고신부와 얘기하다 광주신안동 박병달 신부님(93)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분이 어젯밤 쓰러져 응급실로 가셨다는 소식을 오늘 받았다노인문제는 사회나 수도원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도 수도원에서 나이든 분들이 수도자로서 성당 감실 앞에서 주님과 만나는 장면은 평화롭고 아름다워 그분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자기가 살아온 삶을 한번 살피며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박신부님은 보스코를 동생처럼 아끼셨고 빵고신부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분이어서 보스코 기분이 오늘은 깊이 가라앉은 듯하다하지만 어쩌랴, 인생은 늙으면 병들고 그러면 영이별하는 것인데? 우리가 온 곳을 알고 가는 곳을 아는 신앙인이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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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598006

지리산 주변에서 환경활동을 해오던 분들이 발간해온 계간지 지리산 마지막 호가 왔다. 십시일반으로 어렵사리 간행해오고 보스코가 간간이 칼럼을 쓰던 곳인데 '인터넷신문'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터였다. 핸폰과 인터넷 시대를 만나 책도 잡지도 신문도 갈수록 독자를 만나기 힘들어진다.


농협에서 키워 농민들에게 파는 배추 모종이 왔다는 이장의 방송에 모종 두 판을 가져왔다. 128개가 한판이니 256. 대부분이 살아나면 200포기는 되겠지. ‘키워놓으면 누군가는 먹을 테니까저걸 다 뭐하나 걱정은 안 한다. 한판에 8000(시장에서는 12000). 드물댁이 올라와 해진 뒤 어스름까지 함께 심었는데 가로등이 가까이 있어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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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논의 벼도 밤이면 자야 한다고가로등을 세우면 벼가 잠을 못 자 안 여문다고 구장이 가로등 설치를 방해했는데 유영감님이 당신 땅을 내놓아 설치된 가로등이어서 저 등을 보니 영감님 생각이 새롭다오늘이 벌써 그분이 떠난지 49일 되는 날이다저 논두럭을 파러 괭이를 들고 가끔은 천사들 몰래 밤나들이라도 오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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